김취려

 



'''고려국 중서문하성 문하시중
고려국 태사
고려국 상장군
고려국 상서성 판상서이부사'''
'''김취려'''
'''시호'''
'''위열공(威烈公)'''
'''본관'''
언양 김씨(彦陽 金氏)
'''본명'''
'''고려사 열전'''
취려(就礪)
'''본인 묘지명'''
취려(就呂)
'''출생'''
1172년 고려 경상도 언양현
'''사망'''
1234년 음력 2월 21일
'''묘지'''
고려국 진강현(鎭江縣) 대곡동(大谷洞)
서쪽 언덕(西麓)
1. 개요
2. 가족관계
3. 일대기
3.1. 초기
3.3. 전쟁 이후
4. 평가


1. 개요


고려의 무관이자 문관. 혼란스러웠던 고려 중반기 거란 등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 인물이다.
고려사 김취려 열전에 따르면, 김취려는 키가 190cm 대에[1] 배꼽까지 오는 긴 수염을 가졌다고 한다. 때문에 그가 관복을 입으려 할 시 시종들이 그의 수염을 들고 있어야 입을 수 있었다고. 이런 인상적인 외모와 강직한 품성 때문인지 고려인들과 몽고 장수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사후에도 존경받아 시호를 받고 고종 안효왕배향공신이 되었다.

2. 가족관계



김취려는 언양 김씨의 중시조이다.[2] 김취려의 가문인 언양 김씨는 고려 초기에 태조의 딸과 결혼하고 사성을 받은 귀족가문이었으나, 이렇다 할 족적은 남기지 못하다가 김취려 덕분에 크게 번성하게 된다.
본인 묘지명의 기록으론 할아버지는 김언량(金彥良)으로, 금오위(金吾衛) 섭낭장(攝郎將) 직을 맡은 무관이었다. 아버지는 김부(金富)로 금오위(金吾衛) 대장군(大將軍) 직을 맡은 무관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주지명(朱此明)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이었다. 어머니는 대부인(大夫人) 주씨(朱氏)이다.
아내는 부인 조씨(趙氏)로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름 미상이며 전사했다. 아들 김전(金佺)을 두었고 차남인지 3남인지 알수 없다. 김취려의 증손녀가 충렬왕비인 숙창원비이다.

3. 일대기



3.1. 초기


묘지명 기록엔 김취려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고 마음이 넓었다고 한다. 대장군인 아버지 덕에 음서제로 관직을 얻어 태자의 호위대가 되었다. 태자부 소속 대정(隊正)에서 시작해 임금의 호위대인 견룡군(牽龍軍) 행수(行首)가 되었고, 견룡군 지유(指諭)로 승진했다.
국왕 친위대에 있다가 처음으로 정규군을 맡게 되는데, 정4품 장군(將軍) 직을 맡아 동계로 나간다. 동계에서 인심을 끌어모았고, 마침내 종3품 대장군(大將軍)이 된다. 강종 대에 서북면 지병마사(西北面 知兵馬事)가 되어 변방을 순찰하니 백성들은 엄격한 일처리에 취려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다고 한다.

3.2. 거란의 침입


김취려가 활동할 당시 국제 정세는 북조 금나라가 휘청거리고 유목국인 몽고가 흥하던 무렵이었다. 그러자 당시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 잔당은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워 독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몽고의 공격에 밀려나 고려 북방에 오게 된다.
다급해진 거란은 고려를 공격해 영토와 식량을 얻고자 했다. 결국 1216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반드시 승리해야하는 거란은 거세고 빠르게 진격했고, 고려는 다급하게 부대를 조성해 파견한다.[3]
이 전쟁에서 김취려는 상당한 승리를 거뒀지만, 중요한 전투 하나를 패배하면서 거란은 서경, 황주, 개경 개성부 북쪽까지 침공한다. 이에 김취려는 금오위(金吾衛)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5군을 조성, 다시 진격하니 거란은 서경 북쪽 지역까지 밀려난다.
이때 몽고동하(동진)가 고려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다소 뜬금없게 참전하니, 몽고의 사령관 카치운을 만나기 위해 몽고 막사에 간 김취려는 그와 의형제를 맺게 된다. 그렇게 몽고, 동진, 고려 연합군은 거란을 패퇴시키고 거란 요수국왕의 시체를 확인한다. 나이상 의동생이 된[4] 카치운은 김취려에게 고려인 포로와 거란인 포로를 보냈고, 김취려는 이들을 데리고 귀환한다.

김취려는 신장이 6척 5촌으로 컸으며 수염은 배 아래까지 내려와 매번 복장을 갖출때는 반드시 두 명의 여종에게 수염을 나누어 들게 한 뒤 띠를 묶었다. 카진은 그 우람하고 뛰어난 모습을 보고 그 말씨를 듣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는 인도하여 나란히 앉아 나이가 몇인가를 물었다. 김취려가 말하기를 "근 예순이오." 라고 하자 카진은 "나는 아직 쉰이 못 되었지만 이미 한 집안이 되었으니 그대는 형이 되어 나를 동생으로 삼겠습니까?" 라고 하며 김취려로 하여금 동향하여 앉게 하였다. (...) 며칠 뒤 조충이 다시 오자 카진이 묻기를 "원수의 나이는 형과 비교하여 누가 많소?" 라고 하자 김취려는 말하기를, "나보다 나이가 많소." 라고 하니 이내 조충을 인도하여 상좌에 앉도록 하고 (...) 좌정한 후 술자리를 베풀고는 즐거워하였다.

<<고려사>> <김취려 열전>

거란과의 전쟁은 정말 길고 치열했다. 김취려는 장남을 잃고 병에 시달리면서 전투에 임했고, 이후 많은 사람의 존경을 얻게 된다.

3.3. 전쟁 이후


전쟁 이후엔 김취려는 반란을 제압하고, 추밀원부사에서 추밀원사(樞密院使)가 되었다. 묘지명엔 여기서 승진해 금자광록대부(紫光祿大夫) - 참지정사(叅知政事) - 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고, 또 승진해 수태위(守太尉) -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 판병부사(判兵部事)가 되었다.
판병부사에서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했고, 수태위에서 수태보(守太保)로 승진했다. 또 승진해 생전 최종 관작이 수태부(守太傅)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특진(特進) -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 주국(柱國)이 되었다. 여기서 고려사엔 김취려가 문하시중까지 되었다고 하는데, 본인 묘지명엔 보이지 않는다.
사후 추증된 마지막 관작은 '''수태사(守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 상장군(上將軍) - 판이부사(判吏部事) - 위열공(威烈公)'''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1234년 2월 2일부터 조금씩 몸이 안좋아진 김취려는 결국 1234년 2월 21일에 만63살의 나이로 서거했고, 천자(天子)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4. 평가


고려사나 본인 묘지명이나 한결같이 김취려는 철저히 군법을 지키고 남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아 휘하 군인들도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재상이 되고도 재물을 탐내지 않아 사람들이 칭찬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 개판이던 고려를 지켜내고 대들보가 되준 몇 안되는 고려 후기 위인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그의 자손들도 재상지종에 들어갈 정도로 꽤 번성했다. 현재도 대중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만, 김취려를 '이달의 인물'로 선정하는 등 명장, 호국 위인으로 기리고 있다.
[1] 원문엔 6척 5촌이라 했다.[2] 언양 김문의 시조는 경순왕의 7남 김선이다.[3] 다만 당시 실권자였던 최충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정예 사병들은 출정시키지 않았다.[4] 다만 김취려가 뻥을 쳐 실제 나이는 카치운이 더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