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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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국가별 역사
3. 주요 인물
3.1. 중국사
3.2. 한국사
4. 대장군 캐릭터


1. 개요


'''大將軍'''
'''Grand General'''
전근대 동아시아의 최고위 무관 직급. 시대와 국가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2. 국가별 역사



2.1. 중국


병마의 대권을 관장한 최고의 무관직으로 오늘날의 '국방위원장+합동참모의장' 즉 총사령관 정도 되었다. 초한쟁탈기 유방한신을 장군보다 높은 직급인 대장으로 삼았다는 기록[1]이 있는데, 이 시기만 해도 대장군이라는 상설 관직은 없었고 대장이라는 임시직 정도만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한무제 때 처음으로 설치되어 삼공보다 아래에 두게 했으며 순제에 이르러 삼공과 대등한 위치가 되었다가 때는 일군단의 사령관, 송나라 때부터 한직이 되어 통수권자의 포지션은 상장군[2]으로 넘어가는 등 다른 관직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명청 이래 대장군은 무관의 품계로 남다가 정벌군 사령관의 임시직을 맡게 된다.
흔히 비교되는것이 대사마와의 우열 논쟁이다. 원래 대사마는 태위라 불리는 삼공이라는 세 가지 최고 관직의 하나로 꼽혔는데 기원전 189년에 주발이 처음으로 태위로 임명되었으며, 기원전 139년에 태위 전분(田蚡)이 면관된 뒤에는 태위가 임명되지 않아 사실상 폐지되었다가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나란히 대사마가 내려져 장군호의 앞에 붙게 되면서 탄생한 관직이다. 이후 선제 시기 최고 권신이었던 대사마 대장군 곽광이 죽으면서 아들 곽현이 뒤를 이으면서 곽씨 일가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선제의 노력으로 앞에 대장군을 분리해 수여해 병권을 빼았으면서 이때부터 대사마는 군정 업무만 수행할 뿐 병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다시 사마태위로 바뀌면서, 삼공 직위의 권력 축소와 함께 명예직으로 간주되었지만 후한 말, 유우가 대사마에 임명되면서 태위와 별도로 존재하게 되고 이각이 잠시나마 대사마에 임명되며 승상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추게 된다. 이후 후한이 몰락하고 조위시기 조인, 조휴, 조진 등 당대 최고 재상들이 대장군을 거쳐 대사마에 임명되면서 대사마는 군정을 관리하는 동시에 대장군처럼 병력을 통솔하며 전쟁을 치를 권한도 갖는 등 최고 통수권자로서 대장군의 상위에 존재했고, 촉한의 상국 제갈량이 죽고 뒤를 이은 최고 재상 장완의 최종 관직이 대사마였다.
따라서 대사마>대장군>태위 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서 정확히는 누가 어떤 앉느냐에 따라 관직의 권한과 영향력도 달라졌다. 가령 위의 중신이자 위의 군주 조조-조비-조예 3대를 섬긴 고명대신 사마의는 역대 최강의 태위였고, 대장군에서 태위로 승격한 사례다. 당시 실권자인 대장군 조상 역시 사마의를 견제하여 태위에서 삼사의 하나로 지위로 따지면 삼공보다 높지만 실권은 전무한 태부로 승격시키는 꼼수를 부렸다. 이후 사마의가 일으킨 고평릉 사변으로 조방 일가는 물론 조씨 황실 역시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사마씨가 정권을 잡아 위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건국한다.
이후 삼국시대 이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대에 이르러 총사령관이던 대장군이 일군의 군사령관으로 격하되었고 대사마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져 태위만 남게 되면서 다시 명예직으로 격하된다.

2.2. 한국


신라의 경우 삼국 간의 전쟁이 가장 격렬할 때인 7세기에 새로이 개편된 신라의 군제인 6정을 지휘했던 최고사령관이었다.[3] 고구려는 사서엔 등장하지 않지만 연남생 묘지명에서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이란 보직이 등장한다.
고려 초, 중앙군과 호족 사병이 양립해 군사권이 분산되어 있을 때, 태조 왕건은 중앙군의 장수와 호족군 장수들에게 군단 이름을 주고 대장군 직위를 주었다. 이때의 대장군이라는 계급은 삼국시대의 대장군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후 군사권이 단일화되어 국왕에게 독점되었을 때, 성종 왕치는 고려 군대 편제인 2군 6위에 대장군을 1명씩 두어 총 8명의 대장군을 두었다.[4] 대장군은 각 군, 각 위의 사령관인 상장군(上將軍)의 아래이며 장군 위에 있는 종3품 벼슬로 신라 때의 지위에 비하면 크게 하락했다.[5] 대장군 밑엔 섭대장군(攝大將軍)을 사이에 두어 대장군과 장군직의 격차를 늘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상장군이 대장, 대장군이 중장, 섭대장군이 소장, 장군이 준장 정도의 느낌이라고 하면 비슷하다.
문종이 제정한 태자부의 관료 중엔 태자 시위를 담당한 시위상장군과 부관 '시위대장군'이 있었다. 이는 2군 6위의 상장군 → 대장군 직렬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대부터 대호군(大護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다.[6] 조선 대까지 대호군으로 유지되다가, 임진왜란 이후 군제가 문란해지면서 오위는 자연스레 명예직[7]으로 전락하여 실질적인 군권은 오군영으로 넘어갔다.

2.3. 일본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던 쇼군의 공식 직함인 정이대장군의 준말. 일반적으로는 '대'자를 뺀 '쇼군'이라는 명칭이 더 빈번하게 쓰인다.
고대에는 이쿠사노카미라 불렀으며, 중세 일본의 관위와 역직 율령제 하에서 3개 군에 대장군 1인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실제로는 북방의 에조 원정, 남서의 하야토 정벌, 덴노의 호위, 외국 사절 응대 등 네 가지 사안에 대하여 임명되는 마치 중국 한나라 때같이 임시직이었다.
중세에 쇼군이 덴노의 조정을 제치고 무사정권인 막부의 지휘자가 되면서 쇼군은 영외직의 임시 무관직에서 사실상 일본의 총사령관이자 최고 권력자로 거듭나게 된다.

2.4. 베트남


무관의 최고직으로 문관의 최고직인 대신과 함께 나란히 권부에 들었다.

3. 주요 인물


일본의 대장군편의상 제외했습니다.
'''볼드체'''는 커리어 상 최고의 관직인 경우.

3.1. 중국사



3.2. 한국사



4. 대장군 캐릭터



[1]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 열전.[2] 그전까지는 세력 내 최고 장수라는 의미의 관용어에 가까웠다.[3] 대표적으로 김유신이 대장군 직을 위임한 적 있다.[4] 8명의 대장군 중 2군인 응양군, 용호군 소속 대장군이 가장 대우받았다. 특히 응양군 소속 대장군은 모든 대장군들의 리더 격이었다.[5] 무신정권의 정중부, 이의민 등이 대장군을 거쳐 상장군을 했다.[6] 상장군은 상호군, 장군은 호군으로 바뀌었다. 즉, '''장''' 대신에 '''호'''를 넣은 것.[7] 퇴직 관료들에게 일종의 퇴직연금처럼 녹봉을 지급하기 위한 명예직 또는 공신들에게 주는 명예직이었다. 문관들에게 명예직으로 무관직을 주는 사례는 동아시아에서 한대 이후로 꽤 흔한 일이었다.[8] 변신음이 대 대 대 대 대장군!인데 여기서 대가 일본어 발음으로 다이인데, 주인공인 카즈라바 코우타의 주요 록시드오렌지 즉, 귤인 것에서 따와 귤장군으로도 불린다. 귤을 뜻하는 한자 귤 등이 다이라고 발음된다.[9] 2차 대확장 전쟁 시에는 북부군의 장군직을 맏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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