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시중
1. 개요
門下侍中아 ~ 문'''하'''시'''중''' 그까짓 거? 우리 아버지 바로 문'''상'''시'''대'''(門上侍大)인데...
- 하회별신굿탈놀이 중.
고려왕조의 정부기관인 3성 6부제 중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상좌평, 신라의 상대등, 발해의 대내상, 태봉의 시중#s-2,[1] 조선의 영의정과 비슷한 최고위 재상직이다.
2. 역사
고려에서는 성종 1년에 처음 도입하고,[2] 문종 때 정원을 정하고 품계를 종1품으로 정했다.[3]
충렬왕은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의부가 될 때 이 관직을 '첨의중찬'으로 고치고 첨의좌중찬, 첨의우중찬으로 나누었다. 두 관직은 첨의좌·우시중 혹은 도첨의시중로 바뀌었다. 충렬왕이 첨의부를 도첨의사사로 바꾸었기 때문. 또 충혜왕이 이를 첨의좌·우정승으로 바꾸었다. 첨의부가 문하부로 바뀌고 공민왕은 좌·우 정승을 문하시중과 수문하시중으로 고친다.
고려 말 문하부 체제에서는 시중 위에 명목상 최고위직인 영문하부사가 생겨나 영의정부사로 이어졌고 시중 2인은 좌·우의정으로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도 정종 때 의정부가 설치되기 전까지 문하성의 문하좌, 우시중(좌시중, 우시중 2인)이란 이름의 정1품 벼슬로 남아 있다가 사라진다.
3. 상세
고려의 최고 관직은 중서령과 상서령이 이나 명예직에 가까웠고 문하시중이 실제 수상의 역할을 하였다.
고려는 초기에 신라 13부와 18관등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했던 태봉의 체제[4] 를 계승했다가 성종(고려) 대 당나라의 3성6부제를 수입해 대체했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신라가 아닌 당의 시중이 고려 문하시중의 유래에 해당하지만, 그 실질적인 기능은 태봉이 차용했던 신라의 시중과 유사했다.[5] 신라는 당대 가장 선진적이었던 당의 관료제를 일부 도입했는데 명칭상 같은 직책이라고 해도 신라에 원래 있던 직책을 당풍으로 개명했거나 신라가 처한 환경에 맞춰서 도입한 경우가 많아 기원부터가 아예 다르거나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차이의 대표적 사례가 병부(兵部)이다. 3성과 6부의 관계와 달리 신라의 13부는 위계의 차등은 있으나 각각 별개의 기구였으며 병부 역시 3성6부제에서의 상서성 병부와 달리 한 기구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된 기구였다. 게다가 신라의 병부는 상서성 병부보다 설치 시기부터가 더 이르다. 당의 문하시중과 신라의 집사시중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당의 3성6부제에서는 시중이 꼭 수상(首相)이 아닐 때도 있고 애초에 재상의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6] 하지만 고려의 중서문하성에서는 수상의 명칭으로 일관되게 문하시중을 사용하며 문하시중에 임명된 사람이 없을 경우 서열상으로는 밀리지만 동급(종1품)인 중서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문하시중의 바로 밑인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가 수상이 되었다.[7]
이러한 환경 차이는 중국보다 귀족합좌제적 성격이 강했던 한국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는데 고구려에서는 대대로, 백제에서는 상좌평, 발해에서는 대내상이라는 신라의 상대등/시중과 유사한 수상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삼국은 수없이 반복된 경쟁과 협력을 통해 종국에는 서로 비슷한 문화와 제도로 수렴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고려는 이런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여 완성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문하시중의 종1품 관등과 대응하는 품계는 종1품의 최고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이다. 즉 개부의동삼사 품계를 지니고 문하시중을 받아야 제대로 된 종1품 관료인 것이다. 하지만 늘 관료의 품계와 관등을 똑같이 맞출 수는 없었고, 이에 행수법이란 제도를 통해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관등의 직위를 받는 경우, 직위 앞에 수(守) 자를 붙혀 관직의 관등이 자신의 품계보다 높다는 것을 명시했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 문하시중과 수문하시중은 관등상으로는 같으며 단지 받은 관료의 품계가 종1품 개부의동삼사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공민왕 대에 문하시중이란 관직을 두 개로 찢으면서 문하시중 - 수문하시중의 두 직위로 정한다. 즉 공민왕대에는 문하시중 > 수문하시중으로 수문하시중이 한 단계 낮다.
4. 주요 역임자
※ 고려 후기 수문하시중도 포함.
- 최승로- 초대 문하시중.
- 최숙
- 한언공
- 강감찬
- 서눌
- 경복흥
- 김준
- 두경승
- 심덕부
- 윤관
- 이의민
- 이인임
- 이제현
- 임견미
- 서릉
- 정몽주
- 정중부
- 서원경
- 척준경
- 최영
- 최종준
- 최충
- 최충헌
- 안향
- 유청신
- 김부식
- 이성계
- 심덕부 - 최후의 문하시중.
[1] 고려 태조 왕건이 바로 즉위 전 궁예에 의해 파진찬 겸 시중에 올랐다. 태봉에서는 광치내(匡治奈)라고 불렀으며, 국가 최고의결기관인 광평성(廣評省)의 수장이었다.[2] 성종 8년 최승로가 죽기 직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3] 고려에서는 현직 관료로서 실무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종1품이었다. 정1품은 불교의 대사#s-5가 임명되는 국사(國師)와 같이 지위에 가까운 명예직이 받는 품계였다. 정1품 관직은 삼사#s-2.2.1와 삼공#s-1.2.1, 중서령과 상서령 같은 명예직뿐이다.[4] 다만 태봉에서는 광평성(廣評省) 등 신라에서는 없었던 기구 또한 나타난다. 관등제 또한 약간 다른 16관등제였다.[5] 다만 고대 국가로 출발했던 삼국과는 달리 이미 형성된 인프라를 이용해 호족합좌제의 중세 국가로 출발한 고려는 삼국의 제도와는 또 다른 고유성이 아주 강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직책으로도 대광, 원윤, 호장 등의 특이한 향직이 존재했으며 중앙관제로도 문산계, 무산계의 구분이 생긴다.[6] 이는 귀족합좌제적 성격이 강했던 삼국과 전제군주적 성격이 강했던 중국의 환경 차이에서 기인했던 것일 가능성이 있다.[7] 문하시중과 중서령이 정1품이 아닌 종1품인 이유는 명예직으로 정1품 상서령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