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화
1. 개요
한국의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200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8년에 편친된 '조선미인보감'에 따르면, 본명은 김순이(金順伊)다. 1897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18세에 이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 수원 권번(기생조합)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조선미인보감'에 따르면 그녀는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를 더하고, 맵시 동동한 중등 키에, 성품은 순하고 귀염성이 있으며, 검무, 승무,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등 각종 기예에 능했다. 또한 탁음이 섞인 듯한 애원성(哀怨聲)의 목청은 사람의 마음을 구슬프게 한다고.
1919년, 당시 22세의 김향화는 수원지역 요릿집에서 가장 즐겨찾는 일등 예기(藝妓)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의 수원기생조합 취체역을 맡고 있었으며, 수원 유지 및 지식인들과 두루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3월 29일, 김향화 등 기생 33명은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당시 자혜의원으로 사용되던 화성행궁의 봉수당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동료들을 설득해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일본 경찰은 김향화를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했고, 그녀는 2개월 간 고문을 받다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넘겨져 공판에 회부된 뒤 그해 5월 27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다고 한다.29일에 이르러 기생 약 30명이 자혜의원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밤에는 상인, 노동자 및 무뢰한 등이 시내 각소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내지인(일본인) 상점에 투석하고 창문을 파괴하는 등 폭행이 심해져 수원 경찰서원과 보병 및 소방 조원이 협력하여 경계 중이다.
1919년 3월 '조선소요사건' 경기 수원지역 보고서
이후 1919년 10월 27일에 가출옥되어 수원으로 돌아왔으며, 서울로 옮겨 살다가 1950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매장된 장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후손 역시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수원시는 이동근 학예사가 연구해 발굴한 수원기생의 만세운동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국가보훈처에 김향화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고, 정부는 2009년 김향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