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종로 종주'''
장안문

종로/'''화성행궁'''

팔달문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478호'''
'''수원 화성행궁'''
水原 華城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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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면적'''
81,351㎡
'''지정연도'''
2007년 6월 8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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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인 신풍루와 뒤로 바라보이는 화성 행궁.
1. 개요
2. 용도
3. 역사
4. 훼손 및 복원
4.1. 복원 논란
5. 기타
6. 바깥고리
7. 사적 제478호
8. 같이보기
9. 둘러보기


1. 개요


水原 華城行宮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남창동)에 위치해 있는 행궁으로,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 내부에 건립된 행궁으로, 건립 당시는 21개의 건물 576칸 규모로 지어졌다.

2. 용도


주로 조선의 국왕이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 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평소에는 수원 부사 또는 유수가 집무하던 관아로서도 활용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 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수원 화성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및 사회 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 조사 및 복원 정비 사업을 통해 조선 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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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 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주로 수원화성을 건설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던 정조 시기에 많이 증축되었다. 이 때문에 각 건물마다 지어진 시기가 다른데, 그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잘 기록되어 있다.
정조 사망 직후인 순조 1년(1801년)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행궁의 건물들은 무참히 헐려나갔으며[1], 그 부지에는 신풍초등학교를 비롯한 많은 근대 건물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1997년에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후로는 수원시에서 1999년부터 복원 사업을 펼쳤고, 꾸준하게 화성 행궁지의 건물들을 매입하여 철거한 뒤 행궁 건물들을 복원해 나갔다. 이미 1차적으로 복원이 완료되어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관람료는 1,500원 정도다. 2007년 6월 8일에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4. 훼손 및 복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엄청난 훼손을 당했지만 지금은 복원 사업을 통해 옛 모습을 상당 부분 되찾았다. 현재도 복원이 진행 중이며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수원시나 해당 지역구 국회 의원의 복원 지원도 적극적인 편이라 조만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4.1. 복원 논란


수원시와 수원교육지원청은 행궁 복원 2단계 사업을 2014년까지 완료하려고 계획을 잡았다. 이를 위해 신풍초등학교를 2013년까지 광교신도시로 이전하겠다고 한 것.[2] 그러나 신풍초등학교 역시 2014년 기준 117년이나 이어진 학교인데다 사실상 학교 이전이라기보다는 폐교나 다름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 관계자 및 동문들은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3]
그러다가 2012년 12월 28일 수원시와 신풍초등학교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 수원교육지원청에서 171억원 가량의 신풍 초등학교 분할 납부 방식의 토지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올 5월까지 계약금과 매매 대금 86억 7,200만원을 지급하면서 늦게나마 2차 복원을 잡았고, 2013년 3월부로 신풍초등학교는 광교신도시로 이전, 기존 교사(校舍)는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고 임시로 분교장 형식으로 운영하다가 폐지되었다. # 기사참조
한편 화성 행궁 2단계 복원 사업은 2020년 12월 우화관 복원과 함께 끝난다.

5. 기타


무예24기 보존회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며 대장금 등의 사극 촬영지로서 자주 쓰이고 있다.
화령전의 정문은 닫아놓은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닫혀있더라도 화성 행궁을 통해 화령전까지 갈 수 있다.
화성 행궁에 큰 행사[4]가 있어 종로의 도로가 통제되면 심각한 교통 체증이 생긴다.[5] 장안동 정류장에서 팔달문 정류장까지 30분 가까이 걸릴 수도 있다.
멀리 산 위에는 거대한 불상이 보이는데 대승원이라는 절이다. 하지만 절은 의외로 작다.
여담이지만 오산시에서 진행하는 오산 시티투어의 코스 중 융건릉과 함께 둘 뿐인 오산시외 탐방코스다. 대부분의 시티투어 코스가 시내 구간을 도는 것을 감안할 때 특이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장면 일부가 화성행궁에서 촬영됐다.

6. 바깥고리



7. 사적 제478호


1789년(정조13) 수원읍을 화성시 안녕면 일대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잠시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이나 북한산성 행궁, 온양 온천 행궁 등 여러 곳에 있었지만, 전국의 행궁 가운데 화성행궁은 규모에서나 격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이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옛 수원부 읍치자리로 옮기고,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모두 13차례 현륭원을 방문하였는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특히 1795년(정조19) 어머니인 헤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르면서 이름도 고치고 건물도 새롭게 지었다.

화성행궁은 1909년부터 수원 주민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면서 건물이 철거되어 낙남헌만 남아 있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화성행궁 → 수원 화성행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8. 같이보기



9. 둘러보기






[1] 다만 낙남헌은 헐리지 않고 일제강점기 동안 계속 수원군청으로 쓰였다.[2] 일제강점기 때에 관아지, 객사지, 향교지를 학교로 전용하거나 면사무소를 올려버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유지인데다가 대다수의 관아, 객사, 향교는 마을의 중심지에 소재했기 때문이다.[3] 물론 이전 명분에는 도심 공동화로 인해 이 학교 및 주변 학교들이 텅텅 비어간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실제로 행궁동, 장안동 일대의 학령 인구가 줄어들고 있기도 하다.[4] 제야 타종행사, 화성문화제[5] 주로 수원KT위즈파크~팔달문 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