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에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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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1-63대 내각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
佐藤栄作 | Satō Eisaku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01년 3월 27일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타부세정
'''사망'''
1975년 6월 3일 (74세)
도쿄도 미나토구
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부속병원[1]
'''재임기간'''
제61대 내각총리대신
1964년 11월 9일 ~ 1967년 2월 17일
제62대 내각총리대신
1967년 2월 17일 ~ 1970년 1월 14일
제63대 내각총리대신
1970년 1월 14일 ~ 1972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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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부친 사토 슈스케
'''형제'''
큰형 사토 이치로
작은형 기시 노부스케
'''배우자'''
사토 히로코
'''자녀'''
차남 사토 신지
'''친인척'''
외조카 아베 신타로
외종손 '''아베 신조'''
종손 기시 노부오[25]
'''신체'''
172cm
'''학력'''
제5고등학교[26]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 / 학사)
'''정당'''

'''지역구'''
야마구치 2구
'''의원 선수'''
'''10''' (중)
'''의원 대수'''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철도성 관료
제4대 내각관방장관
중의원 의원
제3대 민주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초대 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제2·5대 자유당 간사장
제3대 전기통신대신
제3대 우정대신
제4·21-22대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제7대 건설대신
제3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64대 대장대신
제22대 통상산업대신
제12·13대 과학기술청 장관
제5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61-63대 내각총리대신
'''칭호'''
종1위
대훈위 국화장경식
도쿄제국대학 법학사

1. 개요
2. 생애
2.1. 총리로서의 활동
3. 한국계 도래인 후손 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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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정치인, 제61~63대 총리. 7년 8개월을 재임하며 훗날 아베 신조 이전까지 전후 최장 재임 총리였다. 8년에 육박하는 사토의 장기 집권 기간 동안 자유민주당최전성기라고 평가받았고 또한 당시 일본은 미국, 소련 다음 가는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동생이며[2]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밑에서 일했던 마츠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은 그의 백부뻘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부인은 외사촌지간이다.[3] 또한 일본 역사상 최장수 총리인 아베 신조의 외종조부이기도 하다.
영향력과 존재감에 있어서 형인 기시 노부스케, 역대 최장수 참의원 의장인 시게무네 유조(重宗 雄三)와[4] 더불어 조슈고산케(長州御三家)라고 불리었다.[5]
별명은 인사의 사토(人事の佐藤), 귀 밝은 에이사쿠(早耳の栄作)다. 별명이 아예 쇼와의 요괴였던 형 기시 노부스케가 그랬듯이 이 사람도 주도면밀한 정치가였다. 그 외에 잘생기고 위엄있는 얼굴덕에 정계의 단주로(政界の団十郎)라는 별명 또한 유명했다.
비핵 3원칙[6]을 내세운 공로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일본인으로서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

2. 생애


야마구치현 다부세(田布施) 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주로 철도국이나 운수통신성 등 교통 부문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이때 훗날 자민당 부총재가 되는 니시무라 에이이치를 알게 된다. 머리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것을 봐도 그렇고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승진이 늦었다. 업무능력이 뛰어나 고속승진을 할때도 있었지만 육군의 고위인사나 도큐의 총수 고토 게이타(五島慶太)등과 마찰을 빚고 좌천당할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마쓰오카까지 나서서 승진을 청탁(…)했다가 사토에게 욕먹은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승진에 관심없는 듯한 행동은 나중에 꽤 현명한 것으로 치부받게 되는데, 만약 동기들처럼 철도국 중앙이나 운수통신성 중앙에서 일을 했었다면 패전 후 연합군의 눈밖에 나 형처럼 공직 추방을 당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인 기시 노부스케만주국에서도 근무한 경력이 있고, 도조 내각에 입각한 경력으로 인해 몇 년 간 공직 추방을 당해야 했다. 그렇게 본다면 상당히 '''운이 좋았거나 아니면 머리가 비상한 사람.'''
전후 최초 선거에서 친우들이 많았던 사회당으로 출마하려고 했다가 형의 일갈에 일본 자유당으로 출마했다고. 전후 공직 추방 없이 중의원에 무난하게 당선되었고, 이후 요시다의 눈에 들어 관방장관을 맡으면서 인생의 전성기가 열렸다. 자유당 간사장 임기 중 비리 스캔들로 잠시 태클이 걸린 것 빼고는 꽤 무난한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 형인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 해먹을 적엔 대장상을 맡았고, 라이벌이케다 하야토 휘하에서도 통상산업대신을 맡았다.
사실 사토의 집권엔 사법적인 운도 따랐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지휘권 파동'으로 살아남은 주인공이다. 당시 조선업 진흥을 위해서 조성한 기금의 정치자금 유용을 놓고서 수사를 진행하던 도쿄지검 특수부는 사토를 체포하려 했으나 요시다의 압력을 받은 이누카이 다케루[7] 법무대신이 검사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해서 사토에 대한 체포를 저지했다. 그리고 지휘권을 발동한 이누카이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해 버렸다… 이로 인해 여론의 반발이 일었고 이어진 선거에서 여당이 좋지 못한 성적표를 받으면서 6년 간 집권했던 요시다 내각은 붕괴했다. 이후 일본에서 법무대신의 수사지휘권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한편 이때 호되게 당한 일본 검찰은 이 일을 교훈 삼아 후일의 록히드 사건 수사에서는 철저히 비밀유지를 해가며 다나카를 죄어 들어가 기습적으로 체포에 성공했다.
사토가 총리 자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이케다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일기에서도 날이 갈수록 이케다에 대한 표현이 냉소적으로 변하는 걸로 보아선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던 듯 싶다. 그러다가 이케다 하야토가 암 투병으로 결국 물러나자, 자파(自派) 소속 의원들과 함께 자민당 내에 있던 이케다 계파를 보라는 듯이 아작내고 자민당 총재 자리에 올랐다. '''자동적으로 총리 자리 획득.'''[8]
총리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행. 가서 논란거리가 남아있었던 오키나와를 돌려받기 위해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회담했지만 신통치 않자 오키나와로 달려갔다. 거기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일본은 당신네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서 다시 밀사를 통해 미국과 재협상 돌입. 그런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자 지친 리처드 닉슨 美 대통령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게 돌려줬다. 이때 핵무기도 빼고 군대만 남기기로 합의한 일명 비핵 3원칙을 대대적으로 선언했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9]
오랜 기간 집권했기에 후계자를 정할 때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는데, 사토는 원래 후계자로 후쿠다 다케오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 실세로 급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를 막지 못했고 각복전쟁이 일어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어느새 커버린 계파원 다나카 가쿠에이의 힘을 보고 질려버린 사토는 총리 자리를 내던지듯이 사임하였다.
다만 형인 기시가 대놓고 다나카 혐오를 보인 탓에 겉으로만 다나카를 견제했을 뿐, 뒤로는 다나카를 은근히 지원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실제로 사토는 다나카가 10회 참의원 선거의 패배[10]와 정치자금 문제로 후쿠다와 미키 다케오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을때 다나카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자민당 원로회의에서 다나카를 씹어대는 형 기시와 말싸움까지 벌일 정도였다고. 이 무렵 다나카는 사토를 방문한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하며, 사토는 퇴임 후 가진 인터뷰에서 "후쿠다는 형 기시의 직계라고 보는게 정확하고, 나의 직계는 다나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고 1974년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뒤 1975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11]. 최후가 약간 어이없는데 5월 19일 요정 신기라쿠[12]에서 열린 야마구치현 출신 정,재계 실력자들의 모임인 장영회에 참석하였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깨어나지 못하고 약 3주 뒤 사망하였다.

2.1. 총리로서의 활동


[image]
61대 총리 취임 후
[image]
각료 인선 후 기념 촬영을 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의 모습
1964년 11월부터 1972년 7월까지 '''7년 8개월(2798일)'''동안 집권했다. 이는 총 재임 기간으로는 아베 신조, 가쓰라 다로에 이은 3번째 기록이며, 연속 재임 기간으로는 2020년 8월 24일에 아베 신조에게 경신당하기 전까지 최장 기록이었다.#[13] 이케다 하야토와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동창이자,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14]. 그러나 총리 자리를 두고 동기나 친구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사토가 총리 자리에 올라가는 시절은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의 난투극으로 얼룩졌다.(...)
전후 일본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영광을 누렸지만, 완벽주의자에 공무원 시절 생긴 깐깐한 성격까지 더해서 대중의 인기를 크게 받진 못한 케이스였다. 사토 사임회견 당시 이야기다. 깐깐한 성격 탓에 언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토는 사임회견에 신문사 기자들은 오지 않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놨는데, 이게 싸인이 맞지 않아서(…) 결국 신문사 기자들이 우루루 몰려와 회견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자들을 본 사토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고, 급기야 '''"TV는 어디 있어! 신문사들 앞에서 이야기하기 싫어! 기자들은 나가! 난 국민과 직접 대화하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신문사 기자들은 보란듯이 모두 빠져나갔고, 때문에 총리 사임회견이라는 빅 이벤트 장소에 남은 건 사토와 그의 보좌관 몇, 그리고 그를 촬영하는 TV 카메라맨 뿐이었다(…)는 매우 훈훈한(?) 이야기. 하지만, '''정작 당시 일본 국민들도 총리 사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안습. 여기서 총리사임 기자회견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다(약 1분 17초쯤 부터). 우루루 빠져나가는 신문기자들과 텅 빈 회의실에서 혼자 기자회견하는 모습이 일품.
이를 방증하듯이 사토 에이사쿠 집권 시기에 자민당의 득표율이 50%대 중반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수준에서 40%대 후반으로 우려할 정도로 떨어졌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일본 야당 지지기반이 다당화되어가며[15] 자민당과 사회당 득표가 동시에 떨어지는 덕분에 일단 현상유지는 가능했다. 공명당. 공산당. 민사당의 득표율과 의석이 불어나는데 반해 사회당의 의석수와 득표율은 오히려 떨어졌던 것. 사실 상당수 지자체에서 이른바 혁신붐이 일면서 도쿄도를 비롯한 상당수 지자체에서 야당이 집권했지만 이러한 경향이 중/참의원 총선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자민당 약세지역인 대도시에서 야당 후보들이 각개각패 당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토는 마지막 선거인 1971년 참의원 선거에서 63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면서 낮은 인기를 확인했다.)
50년대 자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부총재 '''오노 반보쿠'''는 이누카이 다케루[16] 전 법무 대신을 가리켜서 얼굴만 희멀건 쭉정이라고 무시하고 다녔는데, 이누카이의 은혜를 입은 사토가 이누카이에게 안부인사 한번 다녀오지 않은 것을 친우인 오키 신지로 과기청 장관을 통해 알고는 격노하면서 이누카이를 자파로 초빙하였다. 이후 오노는 사토가 이누카이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대놓고 반 사토를 외치고 다녔는데, 정작 '''사토는 장례식이 끝나고 반년 후에 이목을 숨겨가며 은인인 이누카이의 집으로 와 문상을 했다고.'''
실제로 오노 반보쿠와는 견원지간이었다. 사토는 오노를 가리켜 지성없는 나니와부시(浪花節), 오노는 사토를 가리켜 거만한 관료라고 서로 씹어댔다. 오노 반보쿠의 추모회에서는 서민적인 이미지의 오노 반보쿠가 '''반짱'''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자신도 '''에이짱'''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따로 칭찬할 거리가 없잖나." 라고 했다고.(…) 실제로 후에 개그맨 출신 정치인인 요코야마 노크가 '에이짱'이라 불렀더니 무지하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고….
사실 사토가 총리, 총재가 되고 대파벌의 장으로 성공한 데는 다나카 가쿠에이라는 부하의 존재도 컸다. 사토는 다나카를 부려서 당내의 정보를 철저히 긁어모았고, 그것을 토대로 정치활동을 했다. 1950년대에 사토에게 붙은 별명인 "귀 밝은 사토"는 다나카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붙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사토는 중의원에서 야당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 도중에 "다나카는 나의 오른팔"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였다. [17]
요약하면 사토는 대중적인 스킨십에는 워낙 취약해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토가 장기집권을 할수 있었던 비결로 첫째, 막대한 자금 동원력[18]. 둘째, 교묘한 당내 역학관계 조정과 실력자들에 대한 인사[19][20]. 셋째, 참의원 내 자민당 세력에 대한 확고한 통제[21]마지막으로 경제호황을 들 수 있다[22].

3. 한국계 도래인 후손 설




<조건>
  • 토론 관리 방침의 신뢰성 판단 기준 7순위 이상의 근거자료 위주로 서술하고, 그 외 한국계 도래인 설에 대한 주관적 의견은 최소화하여 서술한다.
  •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가 공개 석상에서 한국계 도래인인지 아닌지를 직접 발언한 내용이 없음을 서술한다.
  • 사토, 아베 가문이 도래인 후손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일본 내 역사학적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을 서술한다.

  • 한국계 도래인 집안 설이 있다.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2006년에 발간한 책 <슬픈 열도-영원한 이방인 사백년의 기록>의 내용에서, 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 일본에 끌려간 도공으로 일본의 도자기 종가를 이루게 된 심수관(沈壽官) 가문의 14대 후손을 인터뷰하는 과정 중 1964년부터 72년까지 일본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1901~75)가 죽기 1년 전 자신을 찾아와 사토 집안도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계임을 직접 고백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14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가문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임을 추정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964∼1972년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게서다. 지금도 그의 거실에는 사토 전 총리가 써준 휘호가 걸려 있다. ‘묵이식지(默而識之)’라는 글씨 곁에 ‘심수관 선생에게, 갑인년 봄 에이사쿠’라는 서명이 적혀 있다. 갑인년은 1974년을 뜻한다. # #
  • 2016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심수관 14대는 같은 얘기를 한다.
>14대는 사토 전 총리가 이 휘호를 써준 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사토 전 총리는 차를 대접받은 뒤 “좋은 차였습니다”고 인사하고는 “수관 씨, 몇 대째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14대입니다”라고 하니 “저는 좀 더 짧을 겁니다. 당신네는 게이초(慶長·1596∼1615년) 때 왔는데 우리 선조는 그 뒤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붓과 벼루를 청해 글씨를 써줬다는 것이다. 묵이식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는 뜻이다.
>
>이에 대해 14대는 “그 말의 진위를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사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는 예로부터 조선반도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현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친동생이다. 1975년 세상을 떴다.#
  • 이와 관련해서 사토 에이사쿠가 생전에 공개 석상에서 자신이 한국계 도래인 후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직접 발언한 적은 없다.
  • 현존하는 일본 내 사료(史料) 중에서 사토 가문의 시조가 도래인이라고 기록된 사료가 발견된 적은 없다.

4. 여담


총리 시절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퇴임 후인 1974년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라는 비핵 3원칙을 내세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총재 선거에서 예전 보스의 심기를 거스른 다나카가 사토와 관계 회복을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편 끝에 노벨상을 안겨준 것 아니냐는 소문도 꽤 돌아다녔다고 한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전범, 동생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이색적인 기록도 낳게 되었다.
  • 일본에선 한때 신임 미국 대통령을 가장 먼저 만난 일본 총리는 단명한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게 사토 이후의 일본 총리들에게 해당된다. 그 정점은 아무래도 빌 클린턴을 만나고 자민당 38년 여당의 종지부를 찍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버락 오바마를 만난 아소 다로 아닐까 싶다. 다만 웃기게도 사토 에이사쿠가 만난 리처드 닉슨워터게이트로 반대 상황이 되었다. 물론 이런 속설은 총리 자리에 2년 이상 있기 힘든 일본 정치 자체의 특성 탓도 커보인다.
  •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 못했지만 사후에는 일본에서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사적으로는 상당히 남을 돌봐주길 좋아하고 의리가 있었다고 한다. 철도성 관료시절 대립했던 국철 노조원들이 은퇴 후 어려움을 겪자 도와주거나 중국에 근무하던 시절 인연을 맺은 홍사익의 유족들이 미국 이민을 가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면을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 차남 사토 신지가 아버지인 에이사쿠의 출신지가 속한 야마구치현 제2구에서 중의원을 역임한 적이 있다.
  • 매우 입이 무거운데다 정책 결정 과정, 인사 등에 있어서 보안유지를 중시했기 때문에 언론계에선 사토의 저택이 있던 아와시마(淡島)[23]에 빚대어 '아와시마에 특종은 없다'는 말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 야마사키 토요코의 소설 '운명의 인간(運命の人)'[24]에서는 '사하시 케이사쿠'로 이름이 약간 변경돼서 등장했다. 과 함께 일본의 석유 이권을 장악하고 거기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으로 정재계위에 군림하는 초거물이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재상학(宰相學)은 사토 에이사쿠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요시다 시게루의 재상학이 천성적인것이라면 사토 에이사쿠의 재상학은 열심히 배우고 노력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1] 지케이카이는 한자로 자혜회(慈恵会)라 읽는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자혜회병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린다.[2] 노부스케와 에이사쿠 형제의 아버지의 본성은 기시였는데, 데릴사위로 오면서 성을 사토로 바꾸었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어찌어찌해서 부친의 원래 성인 기시를 가족 중에 홀로 이어받았고, 사토 에이사쿠는 외조부와 아버지의 성인 사토를 이어받았으므로 형제끼리 성이 다른 것이다.[3] 사촌혼에 대해 한국이나 중국 등 일부 나라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사촌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사촌혼을 인정하는 국가는 의외로 많다. 아니 한국 중국 미국 일부 주들 정도를 제외한 전세계 대부분 국가들에서 허용된다. 물론 현대화되면서 유럽이나 일본도 젊은 세대들 사이엔 사촌혼이 상당히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사촌혼이 우리나라처럼 그리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 나오토 총리가 사촌혼을 했다가 일각에서 멸시받은 사례도 없지는 않다.[4] 당시 참의원을 가리켜 시게무네 왕국이라고 할 정도였다.[5] 비슷하게 이들의 야마구치현 선배들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를 한데 묶어 조슈삼존(長州三尊)이라고 불렀다.[6]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고 선언[7] 자유주의자로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최후 총리였던 이누카이 쓰요시의 외아들이었다. 참고로 다케루는 1920년대 내내 소설가로 꽤 나갔던 경력이 있다.[8] 이케다도 내심 사토가 자신의 뒤를 잇길 바랬는지 사토가 총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서관인 이토 마사나리에게 "잘됐다, 사토라면 내가 편하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9] 하지만 훗날 알고보니 이게 다 거짓 아니냐얘기도 나돌고 있다.[10] 이때 다나카는 선거에 500억엔에서 1천억엔을 동원하였다고 한다.[11] 그야말로 세속적인 부와 권력, 명예 세가지 분야에서 모두 최고까지 다 누렸다고 볼수있다.[12] 일본에서 가장 비싼 요정으로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의 심사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13] 요시다 시게루보다도 더 긴 총리 생활을 하였다.[14] 이케다를 정계로 끌어들인 게 사토라고 알려져 있다.[15] 일본의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였기때문에 제1야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식의 투표행태가 먹히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16] 5·15 사건으로 살해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전 총리의 아들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17] 이미 사토 집권기부터 사토파의 정치자금은 사토4:다나카6의 비율로 모금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파벌 내부에서 다나카의 비중이 매우 컸다.[18] 사토의 풍부한 자금은 부하 다나카 가쿠에이, 경제 4단체를 중심으로 일본 경제를 장악한 재계 주류의 전폭적인 사토 정권 지원에서 기인한다.[19] 인사의 사토라는 별명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더불어 고노 이치로, 오노 반보쿠등 사토에 맞설만한 당인파 거물들이 잇달아 죽은 이유도 컸다.[20] 이에 대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가와시마 쇼지로(川島正次郞), 호리 시게루(保利茂), 후쿠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등의 명마를 잘 다루어 장거리를 완주하였다"고 평가하였다.[21] 당시 참의원의장이던 시게무네 유조(重宗 雄三)는 천황이라 불리울 정도로 참의원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자민당 총재선거때마다 80표 이상을 동원하며 이케타, 사토 정권을 지탱하였다.[22] 유명한 이자나기 경기가 사토 집권 시기다.[23] 현재의 세타가야구 다이자와(世田谷区 代沢)[24] 2012년에 TBS에서 10부작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