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국제공항/건설 역사
1. 필요성
1960년대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으로 항공교통 수요가 문자 그대로 '''폭발'''하면서 하네다 공항의 혼잡도는 극심한 수준이었고, 이에 일본 정부는 하네다 공항의 확장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도쿄만, 그것도 타마가와 하구에 바로 위치한 연약지반 때문에, 공사상의 난점[1] 및 기존 항만 시설의 개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로 옆에 요코다 공역[2] 이 존재하여 하네다의 이착륙이 매우 제한되었기에, 확장하더라도 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2. 부지 선정
따라서 일본 정부는 도쿄에서 조금 멀지만 적당히 접근성이 있고, 궁내성 관할의 목장이 있어서 토지 보상이 쉬울 것으로 '''보이는''', 도쿄의 위성도시 중 하나인 치바현 나리타시에 신 공항을 짓기로 1966년에 발표하였다.
3. 히키아게샤의 반발과 투쟁
하지만 문제는 나리타시에는 '''전투종족'''이 살고 있었다는 것.
전투종족의 정체는 히키아게샤 농민들. 게다가 이 농민 대다수는 과거 일본 제국 시대에 정부의 말만 믿고 만주와 몽골로 이주했으나 일제가 패망할 즈음 거의 무일푼으로 쫓겨나듯 귀국해 겨우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이었는데, 자기들을 고생시킨 일본 정부가 이번엔 땅을 내놓으라니 좋게 비켜줄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한 분노에 의해 농민들은 여러 수단을 동원해 항의하다 끝내 '''전투종족'''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1970년대 당시는 고도성장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주의 운동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였는데[5] 때마침 이런 사건이 일어나자 이미 전투종족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회주의 운동가들까지 가세해 나리타 공항 부지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나리타 국제공항은 1966년에 건설 발표 후 1972년까지 완공하기 위해[6] 행정대집행을 동원해 알박기들을 다 치워버릴 심산이었다. 자세히 말하면 일단 공무원들이 경찰들과 함께 동원돼 시위대가 길에 드러눕든 인간띠를 만들든 하여간 앞길을 가로막으면 모조리 공무집행방해죄로 잡아들이고, 이후 행정대집행으로 깔끔하게 만드는 획기적인지 엽기적인지 모를 사회주의식 방법이었다. 행정법 관련책자에는 행정대집행 관련해서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급되는 유명사건. 하지만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이 방법을 이후에 쓰고 있지는 않다.
하여간 그렇게 부지를 확보했음에도 이 전투종족들은 부지 옆에 철탑을 설치, 항공기의 운행을 방해하며 저항을 이어 나갔고[7] 이에 따라 개항은 1978년으로 연기되었다.
4. 완공 직후
예정 개항일 4일 전인 1978년 3월 26일, 시위대가 공항 관제탑에 침입해 시설물을 사보타주하면서 개항이 5월 20일로 미루어졌다. 미루어진 개항일 전후에도 공항 시설 자체와 나리타 공항철도인 케이세이 전철에 대한 테러가 일어났다. 개항 5일 후인 5월 25일 밤에는 나리타 국제공항 인근 맨션에 과격파가 불을 질렀는데 이곳은 대한항공을 비롯한 일부 외국 항공사가 숙소로 쓰는 곳이었다. 심지어 개항 두 달 후에는 후쿠다 다케오 총리가 G7 정상회담차 서독의 수도 본으로 출국할 때 국책 홍보 차원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가려 했으나, '''경호상 문제가 많다는 수행원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결국 하네다를 통해 출국했을 정도. 당시 기사
이곳의 지명을 따 산리즈카(三里塚) 투쟁이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21세기에 접어든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물론 2010년대 들어서는 투쟁의 강도가 현저하게 약해졌다.
[image]
만화 나츠코의 술 작가가 시위주민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만화도 있다. 심지어(?) 정발도 되었다!
오가와 신스케의 산리즈카 7부작은 이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상당히 유명하다.
5. 터미널 신설과 B 활주로
1986년 11월, 공항 측은 건설 2단계에 들어가 두번째 터미널과 신설 활주로 착공에 들어갔다. 뼈저린 교훈을 얻은 일본 정부 측은 공항 개항 때와 같은 강제집행은 없고 주민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겠다고 발표했지만, 주민들은 계속 반대했다.
1992년 12월 4일 2터미널이 개장했다. 그러나 기존 터미널의 반대편에 지어져 이착륙을 위한 택싱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이착륙 소요시간보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사태가 빈번해졌다.
B활주로(16L/34R)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맞춰 2002년 4월 17일 개통되었다. 하지만 상술한 시위대와 부지 문제로 활주로는 계획보다 더 짧은 7152피트(2180 m)의 길이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사유지를 피하기 위해 유도로가 굽어지면서 B 활주로를 사용할 수 있는 비행기에는 제약이 걸렸다. 특히 2009년 3월 A활주로에서 FedEx Express 80편 착륙 사고가 벌어지자 대형기와 화물기들은 하네다로 회항하거나 결항되기까지 하면서 B활주로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동년 10월 B활주로를 북쪽 방면으로 총 2500 m로 연장하는 공사를 완료했다.
2015년 8월에는 저가 항공사 전용 터미널인 3터미널이 개장했다.
6. 시설 개선과 C 활주로
7. 관련 문서
[1] 말이 좋아 난점이지, 당시는 1960년대다. 1980년대에도 힘들게 확장했는데, 쉬울 리 없다.[2] 주일미군이 직접 통제하는 공역인데 수도권에 크게 둘러져있다[3] 일명 10.20 나리타 현지 투쟁. 중핵파가 주축이 되었다.[4] 거의 전쟁급의 시위력을 보여 준다. 얼마나 이 공항에 대해 반대했는지 알수 있다. 특히 오른쪽 영상의 7분 42초에 등장하는 시위대의 진압경찰 집단난타와 9분 41초에 등장하는 폭행으로 기절한 경관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5] 딱히 사회주의 계열이 아니라고 해도 당시의 일본 국민들이 이미 전투종족이었다고도 생각되는데, 그 증거가 바로 일본 국철의 아게오 사건이다.[6] 21세기의 시각에서 볼 때는 어처구니없이 압축된 스케줄이다. 고도성장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 참고로 육상에 가장 최근에 건설된 사례인 시즈오카 공항은 산지를 메우는 형태로 비교적 저항이 적은 방식이었음에도, 정부 인가 후 개항까지 13년 걸렸다. 이 쪽도 반대파들의 나무심기로 2년여를 까먹은 건 덤.[7] 시위의 규모도 대단해서, 철탑 철거 와중에 시위대 중 최루탄 맞고 죽은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