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흐루다크

 

나바흐루다크 (벨라루스)

1. 개요
2. 역사
2.1. 나바흐루다크 공국 & 리투아니아 대공국
2.3. 러시아 제국
3. 여담


1. 개요


나바흐루다크는 벨라루스의 도시로 오늘날에는 인구 3만여 명이 거주하는 중소도시이다. 중세에는 흑루테니아의 중심 도시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초창기 중심 도시이기도 했다. 1252년 쓰여진 히파티아 연대기에 따르면 나바흐루다크는 작은 신도시라는 뜻이라 한다. 1044년 키예프 공국야로슬라프 1세 현공의 지휘 아래 슬라브인들과 발트인들이 함께 건설한 것이 시초이다.

2. 역사



2.1. 나바흐루다크 공국 & 리투아니아 대공국


키예프 공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던 동슬라브족 크리비치족의 일파가 나바흐루다크를 중심으로 나바흐루다크 공국을 세웠다. 1241년 몽골 제국에 의해 한 차례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폴로츠크 공국[1]에 비하면 피해의 정도가 덜 했고, 이 덕분에 나바흐루다크가 오늘날 벨라루스 일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몽골 제국에 신종하던 나바흐루다크 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흑루테니아 일대로 팽창하자 베체의 결정 하에 리투아니아 측에 투항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왕 민다우가스[2]는 중심지를 나바흐루다크로 이동한 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적루테니아 일대로 팽창을 시도했다. 13세기에는 타타르,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이 여러 차례 공성을 시도하고 14세기 5차례에 걸쳐 튜튼 기사단이 나바흐루다크의 공략을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나바흐루다크은 방어에 성공했다. 나바흐루다크는 단순히 리투아니아인의 지배를 받는 도시가 아닌 루테니아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생존을 위해 협력하는 전쟁 기지였다. 당시 루테니아인들은 동쪽에서는 타타르족의 노예 사냥과 약탈, 서쪽에서는 정교회를 이단시하는 튜튼 기사단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체계적이고 철저한 파괴와 학살로 생지옥을 경험하는 상황이었고, 이는 리투아니아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계속된 튜튼 기사단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가 결혼을 통한 동군 연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요가일라야드비가의 결혼식이 나바흐루다크에서 비타우타스가 새로 지은 가톨릭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바흐루다크는 정교회 도시였으나 새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받은 리투아니아인들을 위한 조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동군 연합 이후 튜튼 기사단을 그룬발트 전투에서 격퇴한 이후 전성기에 이르며, 나바흐루다크도 1511년에는 마그덴부르크 법의 혜택을 받는다. 도시의 주민들은 봉건적 의무에서 면제되었고, 세금은 돈으로만 내면 되었다. 이로서 나바흐루다크는 상공업 중심지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2.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기



2.3. 러시아 제국


  • 1896 랍비 호로비츠가 유대교 학교 건설

3. 여담


아직 벨라루스가 관광친화적인 국가가 아닌 관계로 역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관광지 개발이 덜 되어 있다.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민다우가스 대공이 건설한 나바흐루다크 성채가 1706년 스웨덴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어 현재 그 폐허가 남아있다. 이 외에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의 민족시인[3]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생가 및 그가 세례 받았던 교회도 있다.

[1]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폴로츠크 공국의 다우가바 강 무역로를 봉쇄한 이후 몰락했다.[2] 잠시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가 배교하면서 취소되었다.(...)[3] 당시 아직 이 지역에 공교육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뚜렷한 기준을 가진 민족주의가 발달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