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우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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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우타스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사이의 폴란드 왕위에 오른 브와디스와프 2세의 사촌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전성기를 견인한 명군이다. 생년월일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1350년대에 출생했다 한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야기에우워가 결혼하는 과정에서 양국 사이의 동군 연합은 이루었으나 이는 두 나라의 통일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고, 브와디스와프는 어쩔 수 없이 켕스투티스 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이었던 비타우타스를 139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총독으로 임명한 후 1413년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정식 인정한다. 비타우타스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통치는 1392년부터 1430년까지 이어졌다.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 동부 영토를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방어하던 켕스투티스와 사모기티아인 여성 비루테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타우타스의 삼촌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던 알기르다스는 형제 켕스투티스와 함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동서로 분할해서 방어하던 상황이었다. 알기르다스는 켕스투티스가 본토를 방어하는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를 동쪽으로 크게 확장시킨 업적을 이룬 후 1377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알기르다스 사후 요가일라가 제위를 이어받았다.
요가일라는 자신의 배다른 형 안드레이[1] 를 모스크바 공국으로 추방한 후, 1380년 튜튼 기사단과 삼촌 켕스투티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주는 대가로 사모기티아 지방의 종주권 상당부분을 인정해주는 밀약을 체결했으나, 이를 파악한 켕스투티스에 의해 폐위당한 이후 비쳅스크의 공후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요가일라는 자신이 알기르다스가 정식으로 임명한 리투아니아의 대공임을 주장하였으며, 켕스투티스가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수도 빌뉴스를 장악하고 다시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하였다. 켕스투티스의 아들 비타우타스는 이 때 붙잡혔다가 하인의 복장으로 위장하여 감옥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아버지 켕스투티스는 노환으로 자연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요가일라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1382년 폴란드 왕 러요시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요가일라는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한 이후 1386년 폴란드의 왕으로 취임하여 새로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을 수여받았다. 요가일라가 폴란드의 왕 겸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되자 비타우타스는 빈 틈을 노리고 권력 투쟁에 뛰어들었다. 일단 비타우타스는 안드레이가 추방당한 모스크바 공국의 지원을 받아 루츠크Lutsk를 점령하고 이후 빌뉴스를 공격하였으나 공성에는 실패하였다. 공성에 실패한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인들의 숙적이던 튜튼 기사단 측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비타우타스가 모스크바 공국에 붙었다 튜튼 기사단 측에 붙었다 하는 와중에도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인들 사이에서 비타우타스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지기만 했다. 이는 요가일라가 원래 개인적으로 별로 매력적이지 않고, 알기르다스의 다른 아들 안드레이에 비해 못하다는 평가 때문이기도 했지만,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동군 연합으로 인해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기득권 층이 자신들의 발언권이 축소될 것을 우려한 것 때문이기도 했다.[2]
1390년 비타우타스와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발렌로트가 이끄는 4만 대군이 빌뉴스를 3개월간 포위하다 물러갔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튜튼 기사단 측으로 이반할 것을 두려워한 요가일라는 1392년 비타우타스에게 리투아니아 총독 자리를 제안하였다.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의 제안에 즉각 동의한 후 자신을 지지하던 카우나스 성으로 가서 모든 독일계 기사들과 상인들을 살해하고(...) 자신이 더 이상 튜튼 기사단과 협조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후 빌뉴스로 귀환하여 리투아니아 대공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미 14세기부터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루테니아 중심부 일대로 빠른 속도로 확장을 지속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비타우타스가 실질적인 대공 자리에 오를 무렵에는 이미 몰다비아, 왈라키아, 베사라비아 지역에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비타우타스는 이 기세를 물려받아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비타우타스는 토크타미쉬와 손을 잡고 1399년 오늘날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를 노리고 킵차크 칸국을 공격하다 대패를 당한 적도 있었지만,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을 계속 위협하던 튜튼 기사단을 섬멸하면서, 사모기티아 지방을 회복하고 리투아니아 본토를 안정시켰다. 그룬발트 전투의 승전의 대가로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13년 비타우타스를 정식으로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인정하였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비타우타스 치세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였다.
비타우타스는 말년에 신성 로마 황제인 지기스문트의 도움을 받아 교황에게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책봉[3] 받으려 했지만, 폴란드의 방해로 교황청의 승인이 늦어지던 와중에 1430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여 흐지부지된다.
비타우타스 사후에 대공위는 요가일라의 동생인 스비트리가일라가 물려받았고[4] , 그의 후임 대공으로 요가일라의 아들인 카지미에시 4세(카지미에라스)가 즉위한다.
중세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다룬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서에는 비타우타스 대공이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5] , 그리고 발트 다신교 숭배자 이렇게 3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소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의 가톨릭 세례명은 알렉산데르였다. 중세 리투아니아에서는 원래 다양한 정체성이 어우러진 국가였으며 비타우타스는 이들을 통합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야기에우워에 의한 리투아니아인의 가톨릭 개종 이후에도 리투아니아 민중 사이에서는 발트 토속 신앙과 가톨릭이 이중 신앙 형태로 공존했으며,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들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에게 상당히 관대했던 인물로도 명망이 높았는데, 립카 타타르인들은 그를 “비무슬림 국가에서 무슬림들을 보호해주는 정의로운 통치자”로 대를 이어 기념했다 한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리투아니아 전성기의 상징과 같은 인물로 이 덕분인지 오늘날 리투아니아인 중에 비타우타스의 이름을 딴 사람이 많다.(여성형은 비타우테Vytaute) 리투아니아 제 2의 도시 카우나스 시에는 비타우타스의 이름에서 따온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이 있다.
제위년도 : 1392년 8월 4일 ~ 1430년 10월 27일
1. 개요
비타우타스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사이의 폴란드 왕위에 오른 브와디스와프 2세의 사촌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전성기를 견인한 명군이다. 생년월일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1350년대에 출생했다 한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야기에우워가 결혼하는 과정에서 양국 사이의 동군 연합은 이루었으나 이는 두 나라의 통일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고, 브와디스와프는 어쩔 수 없이 켕스투티스 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이었던 비타우타스를 139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총독으로 임명한 후 1413년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정식 인정한다. 비타우타스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통치는 1392년부터 1430년까지 이어졌다.
2. 생애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 동부 영토를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방어하던 켕스투티스와 사모기티아인 여성 비루테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타우타스의 삼촌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던 알기르다스는 형제 켕스투티스와 함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동서로 분할해서 방어하던 상황이었다. 알기르다스는 켕스투티스가 본토를 방어하는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를 동쪽으로 크게 확장시킨 업적을 이룬 후 1377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알기르다스 사후 요가일라가 제위를 이어받았다.
요가일라는 자신의 배다른 형 안드레이[1] 를 모스크바 공국으로 추방한 후, 1380년 튜튼 기사단과 삼촌 켕스투티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주는 대가로 사모기티아 지방의 종주권 상당부분을 인정해주는 밀약을 체결했으나, 이를 파악한 켕스투티스에 의해 폐위당한 이후 비쳅스크의 공후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요가일라는 자신이 알기르다스가 정식으로 임명한 리투아니아의 대공임을 주장하였으며, 켕스투티스가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수도 빌뉴스를 장악하고 다시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하였다. 켕스투티스의 아들 비타우타스는 이 때 붙잡혔다가 하인의 복장으로 위장하여 감옥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아버지 켕스투티스는 노환으로 자연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요가일라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1382년 폴란드 왕 러요시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요가일라는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한 이후 1386년 폴란드의 왕으로 취임하여 새로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을 수여받았다. 요가일라가 폴란드의 왕 겸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되자 비타우타스는 빈 틈을 노리고 권력 투쟁에 뛰어들었다. 일단 비타우타스는 안드레이가 추방당한 모스크바 공국의 지원을 받아 루츠크Lutsk를 점령하고 이후 빌뉴스를 공격하였으나 공성에는 실패하였다. 공성에 실패한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인들의 숙적이던 튜튼 기사단 측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비타우타스가 모스크바 공국에 붙었다 튜튼 기사단 측에 붙었다 하는 와중에도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인들 사이에서 비타우타스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지기만 했다. 이는 요가일라가 원래 개인적으로 별로 매력적이지 않고, 알기르다스의 다른 아들 안드레이에 비해 못하다는 평가 때문이기도 했지만,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동군 연합으로 인해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기득권 층이 자신들의 발언권이 축소될 것을 우려한 것 때문이기도 했다.[2]
1390년 비타우타스와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발렌로트가 이끄는 4만 대군이 빌뉴스를 3개월간 포위하다 물러갔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튜튼 기사단 측으로 이반할 것을 두려워한 요가일라는 1392년 비타우타스에게 리투아니아 총독 자리를 제안하였다.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의 제안에 즉각 동의한 후 자신을 지지하던 카우나스 성으로 가서 모든 독일계 기사들과 상인들을 살해하고(...) 자신이 더 이상 튜튼 기사단과 협조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후 빌뉴스로 귀환하여 리투아니아 대공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미 14세기부터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루테니아 중심부 일대로 빠른 속도로 확장을 지속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비타우타스가 실질적인 대공 자리에 오를 무렵에는 이미 몰다비아, 왈라키아, 베사라비아 지역에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비타우타스는 이 기세를 물려받아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비타우타스는 토크타미쉬와 손을 잡고 1399년 오늘날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를 노리고 킵차크 칸국을 공격하다 대패를 당한 적도 있었지만,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을 계속 위협하던 튜튼 기사단을 섬멸하면서, 사모기티아 지방을 회복하고 리투아니아 본토를 안정시켰다. 그룬발트 전투의 승전의 대가로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13년 비타우타스를 정식으로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인정하였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비타우타스 치세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였다.
비타우타스는 말년에 신성 로마 황제인 지기스문트의 도움을 받아 교황에게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책봉[3] 받으려 했지만, 폴란드의 방해로 교황청의 승인이 늦어지던 와중에 1430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여 흐지부지된다.
비타우타스 사후에 대공위는 요가일라의 동생인 스비트리가일라가 물려받았고[4] , 그의 후임 대공으로 요가일라의 아들인 카지미에시 4세(카지미에라스)가 즉위한다.
3. 의의
중세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다룬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서에는 비타우타스 대공이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5] , 그리고 발트 다신교 숭배자 이렇게 3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소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의 가톨릭 세례명은 알렉산데르였다. 중세 리투아니아에서는 원래 다양한 정체성이 어우러진 국가였으며 비타우타스는 이들을 통합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야기에우워에 의한 리투아니아인의 가톨릭 개종 이후에도 리투아니아 민중 사이에서는 발트 토속 신앙과 가톨릭이 이중 신앙 형태로 공존했으며,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들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에게 상당히 관대했던 인물로도 명망이 높았는데, 립카 타타르인들은 그를 “비무슬림 국가에서 무슬림들을 보호해주는 정의로운 통치자”로 대를 이어 기념했다 한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리투아니아 전성기의 상징과 같은 인물로 이 덕분인지 오늘날 리투아니아인 중에 비타우타스의 이름을 딴 사람이 많다.(여성형은 비타우테Vytaute) 리투아니아 제 2의 도시 카우나스 시에는 비타우타스의 이름에서 따온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이 있다.
[1] 알기르다스와 루테니아 비쳅스크 공주 사이의 아들이었으며 폴로츠크 공국을 다수라는 동안 정교회로 개종하였다. 안드레이부터가 정교회식 이름이다.[2] 요가일라는 친 켕스투티스 지역이었던 사모기티아 지방의 지배권을 튜튼 기사단에게 공식 인정해 준 일로 이미 평판이 상당히 나빠져 있었다.[3] 13세기 중반에 리투아니아를 통일한 민다우가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교황에게 책봉받았지만, 그가 정적인 친척에게 암살당한 뒤로 리투아니아 통치자들은 쭉 대공 칭호를 썼다. 비타우타스는 이 관례를 깨려고 했다.[4] 비타우타스 또래여서 즉위할 때 이미 노인이었고, 즉위 후 비타우타스 동생인 지기만타스와 내전을 벌여 승리했다.[5]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인구 대다수는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 지역 주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