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리투아니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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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 지그문트 3세(Zygmunt III) 치세의 최대 강역. 1618년 데울리노 협정[1]으로 러시아령 체르니고프,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스몰렌스크 등을 획득한 이후의 강역이다. 프로이센 공국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봉신국이다.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1569~1791)
'''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폴란드어)
'''Lenkijos Karalystė ir Lietuvos Didžioji Kunigaikštystė'''(리투아니아어)
'''두 민족의 공화국'''(1791~1795)[2]
'''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폴란드어)
'''Abiejų Tautų Respublika'''(리투아니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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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3]
1569년 ~ 1795년
표어
Si Deus Nobiscum quis contra nos[4][5]
국가
기뻐하자, 아 어머니 같은
조국 폴란드여.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
위치
동유럽
수도
크라쿠프(1569 ~ 1596)
바르샤바(1596 ~ 1795)
정치체제
군주제[6](귀족공화제)
국가원수
왕(폴란드 왕국)
대공(리투아니아 공국)
주요 군주
지그문트 2세(1569~1572)[7]
스테판 바토리(1576~1586)
얀 3세 소비에스키(1674~1696)
언어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루테니아어
라틴어
인구
11,006,745명(1735년)
종교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유대교[8]
종족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루테니아인(루스인) 등
주요사건
1569년 연방 설립
1618년 데울리노 조약
1648년 대홍수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72년 1차 분할
1793년 2차 분할
'''1795년 3차 분할(멸망)'''
통화
즈워티
성립 이전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멸망 이후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언어별 명칭
폴란드어
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
/ 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
리투아니아어
Lenkijos Karalystė ir Lietuvos Didžioji Kunigaikštystė
/ Abiejų Tautų Respublika
라틴어
Regnum Poloniae Magnusque Ducatus Lithuaniae
/ Res Publica Utriusque Nationis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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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Polen-Litauen
스웨덴어
Polsk-litauiska samväldet
러시아어
Речь Посполитая
우크라이나어
Річ Посполита
프랑스어
République des Deux Nations
영어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1. 개요
2. 성립 배경
3. 정체성 및 영향
4. 역사
4.1. 동군 연합과 야기에우워 왕조의 성립
4.2. 연방의 성립과 야기에우워 왕조의 단절
4.3. 연방의 전성기
4.4. 쇠퇴
4.5. 폴란드 분할과 연방의 최후
4.6. 쇠퇴와 멸망의 원인
5. 행정구역
6. 정치와 군대
6.1.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치
6.2.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대
7. 경제
8. 문화
9. 봉신국
10.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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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역사에서 1569년에서 1795년까지 두나라가 단일국가를 존속했던 시기의 명칭. 수도가 총 세 군데로 크라쿠프(Kraków), 바르샤바(Warszawa), 리투아니아의 빌뉴스(Vilnius)였다.
정식 명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공화국(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Abiejų Tautų Respublika), 또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Królestwo Polskie i Wielkie Księstwo Litewskie/Lenkijos Karalystė ir Lietuvos Didžioji Kunigaikštystė)이다. 곧 연방의 지배자가 폴란드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임을 말해주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이 시절을 제1공화국(I RP)으로 부르고 있다. 제2공화국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존재했고 제3공화국이 지금 현재의 체제다.

2. 성립 배경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루블린 협정을 통해 연방으로 탄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385년 호전적인 튜튼 기사단의 위협을 받자 요가일라 대공(1377~1392 재위)은 폴란드와 크레보 동맹을 맺어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해 폴란드 왕이 됨으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한 통치자 밑으로 연합시키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요가일라는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1386 ~ 1434 재위)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그후 리투아니아에서는 폴란드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으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엄연히 별개의 국가로 단지 동군연합 관계이었을 뿐이다.
1447년에 19세의 리투아니아 대공 카지미에시가 카지미에시 4세로 폴란드 왕에 추대된 후 두 나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보장해주기 위해, 자신을 대공으로 추대(1447)한 리투아니아의 보야르(대귀족)들에게 특허장을 내려 귀족들의 권리와 특권을 인준하고 소작농에 대한 광범위한 지배권을 부여함으로써 귀족의 정치적 세력을 높여주었다. 그뒤 대공의 권위는 떨어졌고 리투아니아는 사실상 귀족 연합체 국가가 되어 남부 타타르족의 침입과 몽골-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 시간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루스 차르국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16세기에 들어와 리투아니아는 루스 차르국에 맞서 리보니아 전쟁(1558~83)을 치르는 동안 물자가 고갈되어 결국 폴란드에 도움을 청했으나 폴란드는 두 국가가 정식으로 통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대신 폴란드의 주도로 두 나라의 의회를 하나로 합치고 완전히 한 나라가 되는 조건으로 리투아니아에 대한 지원에 동의하겠다고 제안했다. 폴란드 주도의 통합에 대해 의회를 이끌던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폴란드에 완전히 종속당하는 결정이라고 크게 반발했지만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리투아니아 대공 1544~72 재위, 폴란드 왕 1548~72 재위)가 폴란드군을 동원해 리투아니아 영토의 절반에 달했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하자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루블린 합병의정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1569). 이때 점령한 우크라이나는 리투아니아에 반환하지 않고 여전히 폴란드 관할이 되었으며 이 지역 농민들에 대한 폴란드 귀족들의 종교탄압과 가혹한 수탈은 결국 코사크 대반란인 대홍수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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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린 합병전의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리투아니아의 영토가 폴란드보다 훨씬 크다. 빗금 표시된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의 봉신국, 검은색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주축이 된 리보니아 연맹으로 1558년부터 1583년까지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루스 차르국, 덴마크-노르웨이가 리보니아를 놓고 리보니아 전쟁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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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린 합병의정서 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리투아니아의 관할 지역이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빗금 표시된 프로이센 공국과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연방의 봉신국이다.
루블린 협정에 따라서 폴란드 왕이 연방을 통치하고, 폴란드 크라쿠프의 세임(Sejm)에서 왕이 선출되도록 정해졌으며, 빌뉴스의 의회 및 리투아니아 대공 선출 제도는 폐지되었다. 행정과 재정 그리고 군대와 사법권은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지만 폴란드보다 영토가 더 넓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 체제가 더 정교하고 판례가 많다는 점 덕분에, 연방의 법 체계는 리투아니아 대법전을 기본으로 하여 재작성되었다. 이로써 '''루블린 협정전까지 단순한 동군연합 관계였던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완전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3. 정체성 및 영향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중 어느 국가가 더 위대했느냐고 논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어느 쪽이 더 위대했냐고 논쟁하는 것은 현대적인 기준에 불과하고 당대의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은 서로를 구별하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9] 어리석은 질문이기도 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치, 사회사를 관통한 큰 주제가 소프트파워는 약했는데 땅 크기는 넓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 쪽에서 혼수품으로 가져온 현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정립할 것이냐였으니 재미있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의문이기도 하다. 이런 양국간 정체성의 미묘함은 현대 민족주의의 시대 들어와서고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음 한 20세기 폴란드의 빌뉴스 병합 문제를 두고 둘러싼 논쟁 중 나온 한 폴란드측 지식인의 주장을 들어보자.

야기에우워, 호드키에비츠, 미츠키에비츠, 피우수트스키와 나 같은 사람은 리투아니아'인(Litwini)'들이고, 당신들 (독립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지도층) 같은 사람들은 리투아니아'족(lietuvisy)' 일 뿐이오.

미하우 유츠크니에비츠 (Michal Juckniewicz).

원문에서 전자는 폴란드어로 리투아니아 사람을 뜻하는 'Litwini'란 단어를 사용했고, 후자는 리투아니아어 자체로 리투아니아인을 뜻한 'lietuvisy'란 단어를 썻는데, 문화나 정치의 지배어로서 역사가 짧았던 리투아니아어에 기반한 정치적, 문화적으로도 단절된 정체성을 고집하는 쪽은 편협하고 맹목적인 지엽적 민족주의자들인 뿐이고, 리투아니아계 정체성도 분명 가지고 있지만 보다 더 문화적으로 역사가 깊고 영향력이 큰 폴란드쪽 정치적 정체성을 주장한 자신들이야 말로 진짜 자랑스러워할만한 '문화인'으로서 리투아니아인이란 뉘앙스이다.

내 조국? 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최후의 시민이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코브노[10]

. 리투아니아 땅 한복판이 고향이니 적어도 우리들의 대선배[11], 미츠키에비츠보단 '리투아니아인'이라 주장할 권리가 있지.

우리 집안은 16세기부터 폴란드어를 모어로 썼소. 현대 핀란드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스웨덴어를 썼고, 아일랜드에 살던 사람들이 영어를 썼듯이 말이오.

1980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은 소설가 체스와프 미워시. 대외적으론 '폴란드 문학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본인 말대로 실제로 나고 자란 고향은 현대 리투아니아땅 일대였고, 본인도 그 출신과 이런저런 시사적 견해가 폴란드와 주변국 정치, 역사 문제에 맞물려서 종종 생겼던 소위 '소속' 논란이 일어날때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곤 했다.

그대가 사라진 다음에야 그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느니,

내 조국 리투아니아여, 너는 마치 건강과도 같도다

아담 미츠키에비츠, 기사 타데우스 서문

이런 현대적 민족주의의 틀로선 설명이 불가능한 근세적 폴란드-리투아니아적 정체성을 그 자체로서 보지 못하면 언어는 폴란드어로 쓰여져 있는데 첫 문장은 "내 조국 리투아니아여"로 시작한 서사시를 쓴 시인이 왜 현대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삼국에서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는지 이해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양국이 동군연합을 넘어 연방 국가로 거듭나면서 대격변이 생긴건 현대 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모태가 되는 정교회권의 동슬라브계 루스인들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속한 루스인들의 땅, 루테니아에서 기존의 폴란드 왕국이 중세에 걸쳐 남진하면서 정복, 개발한 포돌리아, 갈리치아 같은 폴란드령 루테니아는[12] 그나마 폴란드화가 많이 진행되고, 리비우[13], 카미야네치포딜스키[14], 이바노프랑키브스크[15] 같은 도시들은 확고히 폴란드계가 주도하고 있었으니[16] 어느 정도 자국의 문화와 지도층 내부에 포용을 할 수 있었으나, 리투아니아령 루테니아인 백러시아나 동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리투아니아는 기독교 왕국으로 자리 잡은 역사가 짧았고, 워낙 오리지널 '순수' 리투아니아인들의 수가 적었기에[17] 리투아니아 쪽에서 혼수품으로 데리고 온 체르니히우, 키예프, 브라츨라프 같은 지방들은 여전히 정교회의 영향력도 강했고,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폴란드 문화에 대한 저항감도 컸으며, 나름 키예프 공국의 후손이란 의식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신들 이익에 맞추어 크림 한국과 그 물주, 오스만 제국과의 변경 지대에서 카자크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은 귀족 공화정의 평등주의, 귀족의 자유에 기반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고, 실제로 한때는 세임의 30% 정도가 슐레지엔 지방이나 그단스크를 필두로 한 서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포교된 개신교와 흡수된 우크라이나 지방의 정교회였을 정도로 그럭저럭 잘 시행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을 넘어 트렌티노 공의회 이후 유럽 가톨릭 세계가 본격적으로 이교도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격에 들어가고, 많은 수의 귀족 자제들이 예수회 교육을 받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애초에 현지 정교회의 상황 자체가 몽골의 침략 이후로 리투아니아, 크림 한국의 분쟁 지역에 놓이면서 제대로 재건 되지도 못했고, 그나마 교회 활동을 비호하던 인근 지주 정교회권 귀족들이 하나 둘씩 몰락하거나 개종하면서 근본적인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 것이다. 르부프를 중심으로 이 일대의 가톨릭 영향력을 더 공고히 하려고 했던 예수회측과 그 계통의 귀족들은 결국 1596년, 키예프 총대주교좌를 상대로 전례는 정교회식을 유지하되 나머지 정교회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바티칸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 내부의 동방 가톨릭 교회로 전환한 브레스트 연맹을 체결하게 된다. 귀족 공화정의 종교의 자유가 이 시대 기준으로 지나치게 앞선 개인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나마 현지 자체 공동체나 시민 단위로도 아닌 귀족 단위로만 보장이 되니 중앙 정부는 관용을 베풀어도, 이렇게 지방 권력이 종교적 탄압을 가하면 이를 제제할 장치 또한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농토를 노리고 가톨릭 신앙과 농노제를 폴란드계 귀족들이 큰 규모로 이주해 오며 강요하면서 불만이 쌓이고 싸인 카자크 집단들은 17세기 중반 대홍수라는 엄청난 피바람과 대혼란을 불러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를 터뜨린다.
전체군주정의 특징만 뺀 복합군주제 국가이며 정치 시스템에 현대적인 요소인 민주주의, 입헌군주제, 연방제가 섞여있으며 공화정 말기 때 삼권분립을 제창하는 헌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완벽한 민주주의라고 하기에 곤란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엄연한 귀족 공화정이었다.
최대 영역은 지금의 중앙유럽에 해당되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동유럽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대부분에 걸쳐있었다. 초반에 깡패였다가 막판에 안습에 가까울 정도로 호구로 전락한 역사와 100년 이상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전설적인 폴란드 기병대 윙드 후사르로 유명하다.

4. 역사



4.1. 동군 연합과 야기에우워 왕조의 성립


연방이 성립하게 된 시초는1386년 튜튼기사단을 막기 위해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일라(야기에우워)가 결혼해 야기에우워 왕조가 성립되었을 때다.
당시 폴란드는 피아스트 왕조 이후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지배하고 있던 앙주 왕가의 러요시 1세가 외숙부였던 카지미에시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슬하에 딸 둘만 있는 상태였고 급기야 1381년에 러요시 1세가 승하하자 결국 헝가리와 보헤미아는 러요시의 맏딸인 마리어를 여왕으로 옹립했고, 폴란드는 둘째딸인 야드비가를 옹립하게 된다. 허나 야드비가의 나이 9살에 왕위에 올랐기에 권위가 약했고, 또한 독일 기사단의 폴란드 진출도 문제였다. 이에 귀족들은 야드비가의 배우자를 찾을 겸 약소국으로 전락한 폴란드와 영구 동맹을 맺을 대상을 찾아야 했다.
당시 귀족들은 야드비가의 약혼자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을 싫어했고, 결국 폴란드를 침공했던 발트 신화 다신교 국가였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요가일라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리고 요가일라 또한 폴란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기사단의 팽창을 경계하는 상태였다. 이에 크레바 성에서 이른바 크레보 조약을 맺게 된다. 이때 폴란드 귀족들은 당시 요가일라가 빼앗은 영토를 돌려줄 것, 요가일라를 포함한 전 리투아니아인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폴란드에 합병한다'라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요가일라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고 대신 야드비가와의 공동통치를 보장받게 된다. 1386년 2월 2일 요가일라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고, 15일에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때 요가일라의 나이 35세였고 야드비가의 나이는 고작 13살 이였다. 귀족들에겐 정략결혼이 기본이던 당시 기준에는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후 야드비가가 일찍 승하하자 요가일라의 통치는 잠시 위험에 직면하지만,[18] 1401년 빌노 조약을 체결해 외교적으로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영구적 통합을 결의하였고,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기사단[19]에게 승리해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엔을 포함한 튜튼 기사단의 고위 간부들을 상당수 전사시켰다. 그 후 여세를 몰아 기사단의 본부인 마리엔부르크(Marienburg, 폴란드명 말보르크)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퇴각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비록 바르나 전투에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지만, 요가일라의 둘째 아들인 카지미에시 4세는 1466년 숙적 튜튼 기사단을 13년 전쟁에서 대파하여 독일 기사단국을 봉신국으로 만들었으며 장남 브와디스와프를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으로 만들어(1490) 야기에우워가의 영지를 더욱 확장해 나갔고[20] 지그문트 1세 대에는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세속화 조치로 프로이센 공국이 설립되어 공국의 종주국 역할을 맡게 되었다.
'''주의할 것은 1569년 루블린 협정으로 연방이 성립되기 전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엄연히 별개의 국가로 단지 동군연합관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야기에우워 왕가의 몰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4.2. 연방의 성립과 야기에우워 왕조의 단절


1569년에 당시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혈육이라곤 오직 누이 안나 아기엘론카 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세번이나 결혼은 했지만 그때마다 부인들이 먼저 세상을 뜨거나 귀족들의 반대로 이혼해야 했다.
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 대공국에 맞서 리보니아 전쟁(1558~83)을 치르는 동안 물자가 고갈되어 결국 폴란드에 도움을 청했을때 이를 이용해 1569년 루블린 조약과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단순 동군연합이 아닌 완전한 하나의 연방으로 만들게 된다. 지그문트 2세의 계획은 앞으로 귀족들이 왕을 선출하는 선거제를 막고 누이 안나의 배우자가 왕위를 공고하게 만들도록 할 셈이었다.
하지만 1572년에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의 남계 자손들은 '''다 끊어지게 된다.'''[21] 결국 정국은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되어 가지 못했다.

4.3. 연방의 전성기


지그문트 2세의 사후 신분제 의회인 세임[22]은 서둘러 연방의 군주를 선출하였고 그 결과 두명의 인물이 물망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인도 아닌 외국인인 프랑스 발루아 왕조[23]의 국왕 샤를 9세의 왕제 앙주 공작 앙리와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막시밀리안 2세의 4남이었던 에른스트 대공이었다. 이들은 각각 모후인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와 부친 막시밀리안 2세의 후원을 등에 업어 폴란드 왕위를 두고 경쟁했고, 그 결과 카트린느가 슐라흐타들에게 강하게 유세하면서 앙리 드 발루아가 세임에 의해 헨리크 발레지로서 왕위에 선출되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헨리크 발레지가 지그문트 2세의 누이동생 안나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밀어주었다. 그러나 2년이 채 안되어 형 샤를 9세가 죽자 도망치듯이 크라쿠프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 샤를 9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앙리 3세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로 돌아오라는 귀족들의 요청을 묵살하고 연방의 군주직에서 사실상 사임한다. 계획대로 안나와 결혼했으면 프랑스-폴란드 동군연합을 이루었겠지만 절대군주정인 프랑스에서 자란 헨리크는 진절머리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헨리크 조약은 폴란드 왕위 세습도 금지했으니 그가 죽으면 어차피 동군연합은 자동으로 해체됐을 것이다.
그의 폴란드식 이름을 따 헨리크 조약이라 명명된 이 조약은 다섯 조항으로 되어있다. 첫째, 국왕은 세임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에 의해 계승되지 않는다. 둘째, 국왕은 입법부인 세임을 2년에 한번 6주간 열게 한다. 셋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 없이 조세와 관세를 부과할 수 없다. 넷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총동원을 할 수 없다. 다섯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선전포고와 정전을 선언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세임에 의해 권력이 매우 제한된 완전한 꼭두각시 국왕이었다.[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차이 뿐만 아니라, 헨리크 입장에서는 폴란드의 상대적으로 추운 기후, 음식, 그리고 나름 바르샤바, 르부프, 크라쿠프 같은 곳은 발달했지만 파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던 낙후된 도시 문화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도 몽땅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다.
프랑스의 샤를 9세가 사망하자 헨리크 발레지는 미련없이 폴란드 왕위를 버리고 프랑스로 도망쳐 앙리 3세로 즉위했다. 세임은 앙리 3세보고 돌아오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지그문트 2세의 여동생이자 마지막 왕가의 구성원인 안나 야기엘론카[24]를 1576년 2월에 국왕으로 선출했고, 4월에는 그 약혼자인 스테판 바토리[25]를 연방의 공동군주로 선출하였다. 이후 폴란드 출신의 가문을 둔 군주는 연방의 붕괴까지 통틀어 단 세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선출왕들도 헨리크 조약을 따라야 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2세와 스테판 바토리가 폴란드 왕위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그 결과 막시밀리안 2세가 선거에서 이겼으나, 폴란드 내 신교도 귀족들이 그가 가톨릭 교도라는 점을 들고 반대했다. 막시밀리안 2세는 당시 합스부르크가 내에서 신교도들에게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촌 펠리페 2세는 지독한 가톨릭 원리주의자였던 것을 본다면 신교도 귀족들의 반대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결국 트란실바니아의 스테판에게 폴란드 왕위가 돌아가고, 그 과정에서 대공위 시대를 거치며 폴란드 귀족인 슐라흐타들의 세력의 권력이 강해지는 입헌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국왕이 아닌 슐라흐타들이 세력을 잡은 세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또한 그 슐라흐타들 위에 극소수의 대귀족들인 마그나트들이 지배권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리베룸베토와 공통의 정치 목적을 위한 단체를 만드는 권리인 콘페데라치아를 이용해 국왕과 소귀족들인 슐라흐타들을 통제했다.
이때부터 연방은 거대한 입헌군주국으로서 동유럽에 명실상부한 깡패국가로 군림한다. 특히 1576년 안나와 스테판 바토리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황금기가 시작된다. 안나 여왕이 수도 크라쿠프에서 내치에 집중하는 동안 스테판은 풍부한 왕실 재산을 미끼로 일부 귀족들을 끌어들여 군사개혁을 실시해 병사와 기술자로써 훈련을 받는 농민병인 피에호타 비브라니에츠카(Piechota wybraniecka)라 불리는 반상비군(semi-professional)형 보병부대를 창설했고, 또한 카자크들을 등록 카자크군이라 하여 대거 비정규군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후사르를 중무장해 후일 윙드 후사르라 불리게 된 정예 기병부대를 만들었다. 또한 연방에서 벗어나려던 단치히를 무력으로 복속시켜 연방의 힘을 만방에 과시하게 된다. 1582년 이반 4세의 사후 혼란기의 러시아를 공격해[26] 러시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프스코프까지 밀어버리자 이에 러시아쪽에서 협상을 제의해 결국 얌 자폴스키 조약을 통해 리보니아를 영토로 편입하였다.
1586년 스테판 사후 안나 여왕이 단독군주가 되었으나 이미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못해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바로 선거를 치루도록 지시하였다. 1년간의 공백 끝에 선출된 스웨덴의 왕세자 지그문트 3세(스웨덴에서는 지기스문드)는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의 아들이자 지그문트 1세의 외손자로, 안나 여왕의 조카이기도 했다. 지그문트 왕자는 이모 안나 여왕의 지지를 통해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2세의 동생 막시밀리안 대공과 왕위를 경쟁한 끝에 이모부인 스테판 바토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의 치세는 연방의 짧은 전성기인 동시에 긴 쇠퇴기의 시작이었다. 1592년 지그문트 3세는 아버지가 승하하자 곧바로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 두 국가의 군주가 되었지만 지그문트 본인은 폴란드에 남아 있었으며, 스웨덴은 신교 국가였으나 지그문트 3세 본인은 가톨릭 교도였고, 스웨덴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결국 재위 7년만에 섭정이던 숙부 칼 9세가 이를 이용해 스웨덴 귀족들을 설득해 쿠데타를 벌여 궐석 상태로 폐위된다. 지그문트는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1605년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Jan Karol Chodkiewicz)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스웨덴 왕령인 에스토니아를 침공했으나 다 이긴 전쟁에 입법부인 세임이 리베룸베토를 내세우면서 정전을 선언해 결국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하고 만다.
이후 러시아의 혼란 시대를 틈타 등장한 가짜 드미트리를 이용하면서 러시아를 신나게 털어버리며, 1610년부터 1612년에는 ''''모스크바까지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며 흑해까지 영역을 확대했고, 당시 차르였던 바실리 4세를 바르샤바로 압송해 지그문트 3세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지그문트의 아들을 러시아의 차르 자리에 앉혀놓는 등 러시아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었다. 2년만에 쫒겨나기는 했지만, 이는 이후로도 스웨덴칼 12세, 나폴레옹프랑스 제국, 아돌프 히틀러까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한, 역사상 마지막으로 모스크바가 외세에게 점령당했던 경험이다.[27] 그리고 폴란드와 오스만 제국이 각각 영향력을 행사하던 카자크와 크림 칸국간의 전쟁과 현재의 몰도바에 있던 몰다비아 공국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1620년에서 21년까지의 전쟁을 통해 남쪽의 영역을 드네스트르 강으로 확장했고 튀르크의 힘을 약화시키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16세기 후반부터 주장해왔던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해야 했다. 더군다나 노원수인 연방대원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전쟁 중 병사했고 그나마 첫 전투였던 체초롱 전투에서 패배해 왕국대원수였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law Zolkiewski)가 전사하는 등 군사력이 약화되어 결국 스웨덴과 러시아가 성장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래도 연방은 세임의 결정으로 30년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사태를 주시해 국력을 크게 낭비하지 않았다.
허나 지그문트는 쫓겨난 스웨덴 왕위에 계속 미련을 가져 몇 차례에 걸쳐 스웨덴 왕위를 요구하고 스웨덴은 연방의 리보니아 지역을 노리면서 몇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으나 당시 스웨덴의 국왕은 지그문트 3세의 사촌, 북방의 사자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로 그의 치세 동안 강력해진 스웨덴군의 공세에 밀려 무적의 기병대 윙드 후사르가 야전에서 여러 번 대패하는 등 국제적 위신까지 떨어져 연방에 쇠퇴기가 다가온다.

4.4. 쇠퇴


이후 1632년 지그문트 3세가 승하하고 장남이 브와디스와프 4세로 연방의 군주에 선출된다.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와 달리 유능해 1612년 당시 러시아와의 전쟁 때 러시아의 차르로 잠시 재위했다. 그는 연방의 실추된 위신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뒤 러시아의 4만 대군이 스몰렌스크를 포위하자 과감하게 자신이 직접 개혁한 군대를 직접 지휘해 지휘관까지 사로잡았다. 이후 폴랴노프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해 20만 루블을 지불하면서 폴란드가 획득한 영토의 주권을 확실하게 보장받았고, 또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해 서로에게 귀속되었던 카자크와 크림 칸국의 지배권을 보장했고 아울러 공동으로 몰다비아왈라키아를 지배했다. 그리고 구스타브 2세가 전사해 쇠퇴중인 스웨덴마저 압박해서 휴전 협정을 맺고, 1629년에 빼앗겼던 영토 중 일부를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아쉽게도 스웨덴 왕위 주장권을 완전히 철회하게 된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형 사고가 거하게 터지고 만다. 당시 중요한 군사세력중 하나였던 카자크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준 폴란드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지만, 귀족들인 슐라흐타들은 지나칠 만큼 카자크들을 착취하고 차별대우했다. 여기에 카자크 헤트만이던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야심까지 겹쳐 1648년 대홍수라고 불리게 될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 이들은 숙적이던 크림 칸국의 타타르들을 끌여들어 반폴란드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브와디스와프 4세는 어린 아들의 죽음에 상심이 컸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카자크들이 타타르와 손잡고 반폴란드 봉기를 일으키자 충격을 받아 죽고 만다.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카자크 대반란은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전에도 종종 카자크들이 봉기를 일으킨 적은 있었으나 그때마다 연방의 정예 병력에 대패하여 계속 복속되었다. 그러나 주테 보디(Zolte Wody) 전투를 시작으로 흐멜니츠키는 승승장구하여 코르순(Korsum)[28]과 피와브체(Pilawce)에서 계속 연방군을 깨부쉈고, 결국 1649년 7월부터 8월 후반까지 계속된 즈바라즈(Zbaraz) 공성전에서 연방군의 10배가 넘는 카자크-타타르 공성군이 끝내 점령하지 못하고 즈보루프(Zborow)에서 연방 측과 휴전 협정에 조인한 이후에야 봉기가 겨우 끝났다.
그러나 이후 휴전 조약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흐멜니츠키와 카자크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1651년 6월 베레스테츠코(Beresteczko)에서 연방군에세 뼛속까지 탈탈 털려서 완전 시망 수준으로까지 몰린다. 그러나 이후 바토흐(Batoh)에서 폴란드 정예군을 쌈싸먹어 전멸시켜 연방을 벙찌게 만들었고[29][30] 이후 연방이 주춤한 사이 흐멜니츠키는 '''러시아에 도움을 청한다'''.
브와디스와프의 왕위를 이어받은 이복 동생 얀 카지미에슈(얀 2세)는 이 난장판을 해결해야 했으나 이미 카자크 반란으로 100만여 명이 죽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흐멜니츠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자크들과 연합해 연방의 동부를 휩쓸었고,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스웨덴마저 폴란드 왕위를 내놓으란 명목으로 참전하여 전 국토를 휩쓸었다.[31] 그리고 프로이센 공작이기도 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측도 동군연합 중인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위해 역시 봉기에 가담했다. 사방으로 포위된 연방에겐 동맹인 덴마크와 신성 로마 제국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슐라흐타들 중 야누슈 라지비우와 보그스와프 라지비우 등이 스웨덴과 결탁해 리투아니아를 분할하려 하는 등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스웨덴군에게 바르샤바까지 함락당해 얀 2세가 슐레지엔으로 망명하며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던 연방은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의 약탈과 학살에 진절머리를 낸 농민과 귀족들이 각지에서 저항군으로 들고 일어나 외국군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이를 보고 폴란드 편으로 갈아탄 브란덴부르크와 타타르의 도움에 힘입어 1660년 스웨덴을 몰아냈으며 7년 후에는 러시아와도 안드루소보 협정을 맺었다. 허나 신나게 털린 후유증으로 인해 스웨덴과는 올리바 조약으로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의 영유권을 포기했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베리우 조약을 맺어 봉신국이던 프로이센 공국은 독립해버렸으며, 러시아와는 하디치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공동관리권를 포함해 러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한 스몰렌스크와 키예프를 포함한 드레프르 강 동쪽의 좌안 우크라이나 전역을 내주고 만다. 또한 이 대재앙으로 인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였고[32] 더군다나 대홍수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 오면서 포돌리아와 우안 우크라이나를 할양하는 등 '''동유럽의 패권국에서 동유럽의 환자로''' 추락하기 시작하여 거의 2류국가 수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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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악재로 정치에 환멸을 느낀 얀 2세가 자진퇴위한 후,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왕으로 선출됐으나 3년 만에 죽자 1674년 얀 3세 소비에스키[33]가 국왕으로 취임하면서 연방은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얀 3세는 대홍수로 인해 국제적 위신이 떨어진 폴란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했다. 얀 3세는 친프랑스 노선이었지만 그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가까운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게 된다. 이 동맹은 곧 오스트리아와와 폴란드에게 유리한 결과를 주었다. 우선 연방의 남쪽 국경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반란을 일으킨 헝가리 신교도들의 지원요청을 받고 출병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14만 대군을 상대할 동맹군을 얻었다.
제2차 빈 포위 동안 연방은 윙드 후사르를 포함한 8만의 지원군을 파견했고, 얀 3세가 직접 친정했다. 빈이 막 함락당하기전 얀 3세가 이끄는 8만의 병력이 오스만 제국군을 급습했고 그 결과 오스만군이 패배하며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허나 그 뒤로 계속된 대 튀르크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더 악화되고 만다. 얀 3세는 프로이센을 다시 복속시키려 했지만 국내외의 여러 문제로 흐지부지됐고 오스만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686년에 러시아가 점령한 동부 영토의 러시아 영유권을 인정했다.
이후 1697년도에 얀 3세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고 이후 작센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 왕위에 선출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는 신교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자신의 영지민들이 멀리했으며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부인이 별거를 선언하는 막장 사태가 벌어졌고 그 결과 독일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작센의 베틴 왕가는 신교도 신민들 위에 군림하는 가톨릭 왕가가 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아직까지 진행중이던 대튀르크 전쟁의 종전을 선언했고 이후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어 포돌리아 지방을 수복했으며 이후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스웨덴이 빼앗아간 리보니아를 탈환하려 애써으나 그때마다 세임은 리베룸 베토를 앞세워 그의 칙령을 거부했다. 허나 그는 세임의 거부권을 무시하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대북방전쟁에 참전하고 만다. 허나 스웨덴 제국 최후의 별이던 칼 12세에게 박살이 나고 역으로 칼은 수도 바르샤바까지 쳐들어와 깽판을 부리면서 강화 조건으로 아우구스트 2세의 폐위를 요구했다.
결국 세임에 의해 아우구스트 2세는 폐위되었고 친스웨덴 계열 슐라흐타인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가 왕위에 선출되면서 한동안 연방은 스웨덴 측에 가담해서 싸웠다. 하지만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이 대패하고 칼 12세가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치는 등 상황이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아우구스트 2세는 표트르 1세의 후원을 받으며 스타니스와프 1세를 몰아내고 다시 권좌에 올랐다. 허나 이 일로 인해 연방은 오래전에 탈탈 털어먹었던 러시아의 보호국 신세가 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1733년에 아우구스트 2세가 승하하자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타니스와프 1세가 사위 루이 15세의 후원을 받고 비밀리에 바르샤바로 돌아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다시 국왕이 되었고, 이에 폴란드가 프랑스-스웨덴 동맹에 가담할 것을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아우구스트 2세의 장남 아우구스트 3세를 앞세워 전쟁을 선포했다. 그 결과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생하고 만다. 이 전쟁에서 폴란드는 일방적으로 유린당했고 러시아-작센의 연합군이 폴란드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결과 스타니스와프 1세의 당선은 무효가 되었고 그는 프랑스로 추방되었다.[34] 새 국왕으로 아우구스트 3세가 즉위한다. 이 전쟁으로 폴란드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것이 폴란드 분할이라는 사건의 서막이 되고 말았다.

4.5. 폴란드 분할과 연방의 최후


이 사건은 1772년부터 1795년까지 연방에 한명의 국왕이 즉위한 후부터 세차례나 발생했고, 결국에는 러시아,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의해 갈기갈기 분할되어 허무하게 역사속으로 사라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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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에 걸친 연방의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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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연방의 완전 분할 후 유럽 지도. 여담으로 서쪽에서는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프랑스의 두드러진 확장을 볼 수 있다.
몇 년 후 나폴레옹은 유럽을 평정하며 그에 반하는 프로이센을 물리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땅을 일부 할양받아 바르샤바 공국을 이미 사라진 폴란드의 강역에 설치하면서 폴란드를 잠시나마 부활시킨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전하고 나서 바르샤바 공국도 재분할(4차 분할이라고도 한다.)되면서 사라진다.

4.6. 쇠퇴와 멸망의 원인


이 일이 이렇게까지 간 것은 국왕과 입법부인 세임의 대립 때문이었다. 일단 지그문트 3세의 무리한 스웨덴 왕위 탈환시도에서 비롯된 대립은 바사 왕가의 3대 국왕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전쟁의회반란에 질색해 스스로 퇴위해 프랑스로 건너가는 사태를 낳는다. 얀 2세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어쨌든 승리하고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꽤 유능한 국왕이었건만...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혼란의 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나마 얀 3세 소비에스키 같은 국왕이 나타나 중앙집권제, 왕위세습권의 공식화같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세임이 무제한 거부권인 리베룸 베토를 앞세워 모든 법안을 폐기시키며 국왕과 충돌하였다. 국왕이 토호들간의 연합체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중앙집권제를 도입하려 시도하면서 세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임의 행동에 정당성이 없는건 아니었으나, 당시로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도 남을 짓이었다. 그나마 국왕들이 대부분 외국 출신들이었고 그들을 선출한 것이 바로 세임이었으며, 특히 1, 2차 분할에 세임이 동의하면서 사실상 연방 자체가 스스로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격이었다. 그리고 이 사형선고가 이후 있을 개혁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침체기를 맞이했다. 연방은 유럽 최대의 곡물수출국이었으며, 그 돈으로 서방의 산업국가에서 각종 공산품을 수입했다. 귀족들에 의해 장악된 폴란드 정부는 도시 상인들과 시민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억제했으며, 그러는 한편 슐라흐타의 제조업과 무역에 대해서는 면세조처를 내렸다. 관세는 18세기 후반에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가 관세 정책을 실행할 때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는 폴란드의 독자적인 공업이 발달할 길을 막아버렸다. 이로 인해 이러한 후진국형 무역체제가 폴란드에 정착되었다. 그 결과 폴란드는 '유럽의 주막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까지 붙을 정도로 나라가 부실하고 가난해졌다.
주변에 적대국가들로 포위된 상태에서 특히 러시아, 스웨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연방의 국력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험악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했다. 또한 귀족들의 탐욕은 카자크같은 주요 군사세력이 떨어져 나가게 했다. 그리고 그 슐라흐타는 근대적인 상비군과 그 강화을 위한 세금을 지불하는 것을 거절하고 마그나트는 여러 나라와 손을 잡으면서 공화국의 정치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등 내부의 이반도 한몫 했다. 아직 연방이 강대하던 16세기 초중반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유능한 계몽전제군주 하에 발전해가던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폴란드에 칼을 들이대던 18세기 무렵부터다.
어쨌든 긴 시간 동안 발생한 국내외의 문제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파멸로 몰고 갔다.

5.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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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1648년 전성기 시절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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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1768년 안드루소보 협정후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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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1793년 1차 분할후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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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년–1795년 2차 분할후의 행정구역

6. 정치와 군대



6.1.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처음 역사에 등장할 때 토호들 간의 연합체와 점차 강력해지고자 하는 왕권이 혼재된 상태였다.
1572년에 발생한 루블린 합병이 있을 때까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정치는 분할되었다. 요가일라가 폴란드 국왕이 되자 리투아니아 대공은 그의 경쟁자이자 사촌인 비타우타스에게 넘어갔다. 이후 요가일라의 동생인 슈비트리가일라가 차지했지만 비타우타스의 동생 지기만타스가 그를 몰아내고 대공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결국 슈비트리가일라의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후 대공위는 요가일라의 아들인 카지미에시가 대공이 되었지만 형인 브와디스와프 3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함[35]에 따라 폴란드 국왕까지 겸해 완벽한 동군연합을 이루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상징인 세임(의회)은 1182년에 그 기틀을 다졌고 이후 1493년 얀 1세 올브라흐트가 추밀원 회의를 개최하면서 비로소 세임이라 불리게 되어 확대된 입법권을 받는다. 이후 세임은 중앙집권화한 행정기관이 없는 폴란드에서 사실상 최고 행정 기관이 되기까지 한다. 이후 1572년 지그문트 2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여 야기에우워 왕가가 폐문되자 귀족들의 공동체이자 입법부인 세임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될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국왕들은 세임에 의해 휘둘러지거나 아니면 세임과 대립해 국론을 둘로 나누는 우를 범하게 된다.
세임의 권한은 초대 선거왕이었던 헨리크 발레지의 이름을 딴 헨리크 조항을 통해 명명백백해졌다. 그리고 이조항을 기초로 황금의 자유라는 귀족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정치는 국왕을 비롯한 도시민, 부르주아, 법조인 등같은 사람이나 계층들의 정치참여를 철저하게 배제했지만 참정권자만 10%로 1867년도 참정권자가 3%인 영국보다 많았다. 허나 국왕과 중산층을 배제시킨 결과, 주변국가들에 비해 절대왕정을 경험하지 못해 강력한 리더쉽이 없었고 귀족들만이 정치를 했기에 근시안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다만 세임도 지방의회격인 세이미크(sejmik)의 결의를 충실히 반영하는 기관에 불과했다. 세이미크는 중앙의회인 세임에 보낼 의원을 선출하고 세임의 보고서 및 결의를 심사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며 자신들 지역의 재정과 교역, 세금, 군사적 봉사 등의 제반적 문제를 총괄하고 국왕 선출에도 관여하기까지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체제 성격은 세가지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과두제로 슐라흐타들이 참정권을 갖고 있더라도 그들의 계층은 인구의 약 10%만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에 의한 지배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모든 슐라흐타들은 대등한 권리와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국민주권과 약간 비슷한 측면이 있다. 비록 그 권리의 대상이 귀족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지만, 일단 성문화된 단일 규칙에 따라 한 계층의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정치 참여권을 보장받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고 수호할 저항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거군주제로 슐라흐타에 의해 선출된 국왕, 말하자면 세습군주가 아닌 국왕이 국가의 수장이라는 점이다. 이는 최소한 세습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능한 군주의 즉위를 막을 수는 있었지만 외국 출신의 왕족이나 군주를 끌여들어 외세의 입김만 세지는 꼴이 나고 말았다. 세번째로 입헌군주제로 말하자면 군주가 파크타 콘벤타 및 기타 법률에 의해 계약되어, 슐라흐타는 국왕이 법적으로 부정한 행위를 한 경우 따를 의무가 없었다. 이는 무능한 군주의 어리석은 정책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국왕과 의회간의 충돌을 낳을 수 있었다.
어쨌든 황금의 자유는 아래의 항목에 기초한다.
  • 자유 선거: 국왕선출은 투표를 희망하는 모든 슐라흐타에 의해 자유선거로 치러진다.
  • 세임: 국왕에 의해 2년에 한번 소집되는 공화국의 대의제의회.
  • 파크타 콘벤타: 즉위때 국왕이 공화국정부 사이에 맺어진 통치계약. 여러 권리의 청원도 이루어진다. 국왕의 정치행동을 속박하고, 초기 헨리크 조항에서 유래되었다.
  • 로코슈: 귀족에게 보장된 여러 권리가 왕에게 위협을 받을 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권리
  • 리베룸베토: 세임의 결의에서 다수파의 결정을 대의원 1명의 반대에 의해 부결될 수 있는 권리. 세임의 회기 중 모든 법안을 폐기시키는 "무제한의 거부권"으로 악명이 높다. 17세기 후반의 위기시대에 들어서 리베룸 베토는 지방의회에도 적용되었다. 이 리베룸 베토는 왕권을 심각하게 제한하여, 후에 폴란드가 주변 절대 군주제 국가들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일을 가져오게 되기도 한다.
  • 콘페데라치아: 공통의 정치목적을 위해 단체를 결성할 권리.
이와 같은 요소를 갖춘 세임은 국왕과 중산층을 누르며 독자 정치를 행했고 심지어 대원수들은 세임의 동의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외세에 의해 연방이 침략당하고 있다하더라도 세임이 군비징발을 거부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공화국 말기에 강력한 군사력과 관료제를 갖추지도 못한채 무너지고 말았다.
허나 초기에는 30년 전쟁 당시 어느 한쪽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수수방관 지켜보며 군사력을 유지한 좋은 면이 있었다. 또한 세임의 기반인 슐라흐타는 저항권, 사회계약, 개인의 자유, 합의에 기초한 정치운영, 독립심의 존중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본다면 근대에 이르러 널리 보급된 자유주의 민주정치의 개념이기도 하며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앞선 정치 시스템이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앞선 정치 시스템이었기에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주들이 지배한 주변국가들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 무너졌다. 너무나도 앞선 정치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와, 지나치게 강력하면서 오늘날에 월권에 가까운 행위를 한 강력한 입법부 덕분에 이미 막장 테크의 플래그는 세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오늘날 3권 분립, 즉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간의 상호 견제가 없이 귀족들의 입법부가 사실상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이었고, 여기에 국익에 관심이 없었던 귀족들이 1652년부터 리베룸 베토를 남용하면서 '''행정부와 사법부마저 무력화했다.''' 국정의 원칙은 근대 민주주의를 예고했다 할만큼 자유주의적이고 자발성을 보장했던 반면, 실제로는 귀족만 견제받지 않는 무한한 권리를 향유하여 어느 순간 다른 계층이 열받아 펑 터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초래했다. 코자크의 대봉기는 이 중 가장 치명적인 사례였을 뿐이고.
어쨌든 이러한 정치 시스템에 혜택을 받은 것은 소수의 귀족층인 슐라흐타들로 이들은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으며 도시의 성장조차 심각할 정도로 정체되기도 했다. 당대 폴란드에서 귀족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웠던 곳은 폴란드의 주요 곡물수출기지였던 그단스크였으며, 그단스크는 당대 중세적 도시특권을 받은 유일한 폴란드 도시였다. 그리고 이들 슐라흐타들 또한 자신들보다 고위 귀족층인 마그나트들에게 종속되어 가고 있었고 그 마그나트들은 콘페데라치아를 이용, 자신들 밑에 종속된 슐라흐타들을 끌어모아 당파 싸움에 이용하면서 이상적으로 보였던 공화국은 점차 쇠락의 위기로 갔다.
그나마 1791년 스타니스와프 2세의 개혁을 통해서 귀족들의 권한을 악화시키고 부르주아들에게 참정권을 주려는 시도가 있었다. 1788년부터 시작된 4년 의회(또는 위대한 의회)는 귀족과 성직자에 각각 10%와 20%의 재산세를 물리는 등 조국의 회생을 위한 수많은 법령을 통과시켰다. 귀족과 러시아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폴란드 개혁파는 꾸준히 개혁을 밀어붙였고, 결국 1791년 5월 3일에 헌법을 통과시킨다. 아래의 조항들은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이 헌법은 세계에서는 2번째, 유럽에서는 최초의 성문헌법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헌법의 사상적 기반, 급진성은 더도 덜도 말고 동시대 미국, 프랑스 혁명기 쏟아져 나온 각종 천부인권 관련 세계사 교과서에 수록된 국제 인권사의 금자탑과 같은 발표문들에 비해 꿀릴게 없다. 당시 귀족 공화정의 정치 체제는 단순히 동네 왕초들끼리 서로 우리가 남이가 하는 수준이 아니라 깊이 있는 평등과 민권에 대한 사상적 기반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이런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1791년 5월 헌법도 기존에 귀족들에게만 적용되는 권리를 비교적 간단하게 확장시키만 하면 되니 외부적으로는 바로 무너질 듯한 나라였어도 이런 과감한 내부적 개혁 시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 소작농의 권리 향상[36]
  • 리베룸 베토의 폐지
  • 슐라흐타의 연맹[37] 결성 금지
  • 국민 주권 창출
  •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3권 분립을 도입[38]
이 항목들의 진정한 목적은 입법부인 세임을 장악한 귀족세력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나아가 일반 시민들의 특권을 만들고 보장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결속시키고자한 방안이었다. 일단 소작농에 대한 권리 향상은 소작농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소작농들을 지배하는 지주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안 중 하나였고 리베룸 베토의 폐지와 슐라흐타들의 연맹 결성 금지는 더이상 세임과 세임을 장악한 귀족 세력들이 국가의 중대한 정책을 방해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국왕 세습제의 확립 또한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귀족들이 각자의 사심에서 벗어나 국가에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구실이 붙었다.
그리고 종교적 관용 보장과 국민 주권 창출은 비가톨릭 국민들의 종교 자유를 보장해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면서 대홍수 이후 붕괴된 종교의 자유를 회복시키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민 주권의 경우 국민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면서 귀족세력을 더 약화시키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에게도 참정권을 확장하겠다는 것은 더이상 정치가 귀족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였고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의 분립은 세임의 과도한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다. '''폴란드 민족의 구약성서''' 또는 '''돌아가신 조국의 마지막 유언''', '''(외세와 귀족의 반대에 맞선)폴란드인들의 우아한 쿠데타'''라는 평을 받은 이 헌법은 기존의 토착귀족세력인 슐라흐타와 신흥 부르주아 세력 간의 권력 분점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비록 프랑스 혁명에 비해서는 보수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인민주권론을 담지하고 있었다. 뒤이은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인해 박살이 났지만 '''5월 3일 헌법은 충분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일대 대사건'''이었다.
조국 폴란드, 신생 미국, 혁명기 프랑스에서 혁명가 트리플 플레이를 날리며 계몽시대의 체게바라 마냥 아이콘이 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마찬가지로 미국 혁명에 의용군으로 자원해 사바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도 미국 기병대의 아버지가 된 카지미에시 푸와스키[39], 1848년 헝가리 혁명을 지휘하며 지금도 폴란드-헝가리 양국간 우호 관계의 상징적 인물인 유제프 벰[40] 폴란드 뿐만 아니라 19세기 모든 중부유럽 민족주의자들의 우상이었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츠, 나폴레옹과 함께 종군하며 지금까지도 폴란드 애국가에서 추앙 받는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 너무나도 유명한 바르샤바 대공이자 프랑스 대육군의 기병대장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같은 유수의 폴란드 민족주의 혁명가들의 사상적 기반엔 '''외세의 외부적 강압'''과 '''내부적 낙후성''' 모두를 한꺼번에 타파하려 했던 이런 5월 헌법의 정신이 이념적 기반으로 자리 잡았기에 폴란드는 19-20세기 중동부 유럽 민족주의 열풍에서 주도적 선봉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근대국가로 들어서려는 노력은 불만을 품은 귀족층의 반란과 공화국 내에서 영향권이 사라질까 우려한 러시아군의 침공, 뒤이은 2차 분할, 이후 발생한 코시치우슈코의 민족봉기 실패와 3차 분할을 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6.2.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대는 1505년 창설된 4명의 헤트만(Hetman, 원수)의 지휘 아래 전쟁을 수행했다. 각각 폴란드 원수와 리투아니아 원수가 있었으며 밑에 육군원수를, 그 위로 대원수가 있었다.
폴란드 왕국:
국왕 대원수
국왕 육군원수
리투아니아 대공국:
리투아니아 대원수
리투아니아 육군원수
본래 중요한 전역이 없을때 비상직이었지만 연방 공화국으로 이행되면서 상시 존재하게 되었으며 1585년 이후, 원수직은 반역행위을 하지 않는 한 삭탈하는 일 없이 평생 직위를 잇는 종신제였다. 그리고 국왕 다음의 군통수권을 장악한 자들이었으며, 왕 자신은 사실상 얼굴마담이었기에 이들이 실질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이들이었다. 이 때문에 1621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병상에 누워있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계속 지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외 국왕이 폐위권을 갖고 있지 않는 상황은 원수들이 국왕에게서 분립되는 경향이 생기게 만들었고, 실제 원수들은 각자 독자적인 정책등을 추진했다.
이 시스템은 국왕이 무능하고 원수들이 매우 유능한 상황에서는 유효한 체제를 쌓을 수 있었으나 1648년 대홍수 당시 무능한 사람이 대원수로 있는 상태에서 개털린 원인이 된다. 또한 이 원수들이 외국에 의해 조종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원수들은 폴란드의 개혁적이고 부국강병적인 법안들을 모두 파기하고 전횡을 저질러 폴란드가 저수준에 머무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1776년 개혁에 의해 그 권한이 줄어들었고 3차 분할때 연방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대홍수 이전까지 연방의 중요한 군사세력이던 카자크 또한 스테반 바토리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등록 카자크로 편성되면서 자신들만의 원수를 가지게 되었고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연방에 소속된 등록 카자크의 원수로 활동했다. 이후 대봉기 이후 폴란드에서 떨어지면서 등록 카자크의 원수는 카자크 국가의 국가원수 명칭이 되었다. 국가수반으로서의 이들의 임기는 약 4년이었다.
아래 목록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의 군단들과 장비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넓은 스텝 지형 덕분에 거의 기병에 의존했고 그중 으뜸인 것이 바로 윙드 후사르였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나 종교적, 문명사적 차원에서 큰 틀은 서방의 라틴 카톨릭 문화를 받아 들였지만, 기독교화 이전 문화 사회적 기반은 서유럽식 게르만 봉건 사회가 아니라 슬라브, 발트족 부족 사회였다. 슬라브 사회에서 드루지나, 즉 기병은 서유럽처럼 상속 가능한 봉토를 전문 전사-지주 가문 하나가 독점하고, 군사적 능력 제공을 댓가로 이를 대대손손 상속 시킬 성문화될 권리를 가진 귀족 집단이 아니라 보예보트, 즉 지역 군주 아래 상속 불가능한 봉토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먹고 살며 대신 집단적 법적 특권을 부여 받은, 마치 인도의 라지푸트 같은 사회적 계급에 더 가까웠다.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나 따라서 훗날 외국에서 선출돼서 온 군주들이 특정 귀족들과 친목질하기 위해 개인적, 작위적으로 '만들어' 하사한 경우를 제외하곤 서유럽과 같은 공후백자남식 작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중세 후기 피아스트-야기웨우워 왕조가 분열하면서 기존에 존재하던 이 드루지나 전문 기병 집단이 서유럽식 귀족 제도를 받아 들이면서 계급 전체가 '귀족'이란 법적 신분을 얻게 된 것이다.
복잡한 문화인류학적 설명을 배제하고 약간 과장을 가미해서라도 축약해 설명하자면 다른 서유럽은 귀족 가문들이 기병이 되었던 반면, 슬라브, 발트 사회는 원래 있었던 자유 기병 집단 전체가 중세 후기 서유럽의 제도문물과 교류하며 귀족이 된 것이다. 러시아는 류리크 왕조 후기와 로마노프 왕조 시절 대대적으로 서유럽식 개혁을 추구하며 결국 게르만 왕국들의 봉건제를 토대로한 귀족 제도를 받아 들였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망할때 까지 귀족 문장을 한 가문이 물려 받는게 아니라 같은 부대에 소속 된 귀족 개인들이 같은 문장을 공유하는 슬라브식 귀족 제도를 유지했다. 따라서 귀족의 숫자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았고, 현실적인 격차야 어쨋든 법적으론 농토 하나도 없어 평소엔 순수히 군업으로만 먹고살거나 심지어 도시에 사는 시민 귀족들도 왠만한 소국 군주만한 농토를 지닌 오스트록스키, 라드지비치 같은 대귀족 가문들과 평등한 권리를 누렸던 것이다.
실질적 용병의 영역에서도 지정학적 여건도 그렇지만 상술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구조도 이렇게 철저히 귀족 기병 중심 군사 사회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전쟁의 패러다임이 나머지 유럽에선 슬슬 기병에서 보병으로 전환함에도 폴란드는 철저히 기병 중심 군대를 유지했고, 놀랍게도 대홍수와 스웨덴 침공 당시 고전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야전에선 충분히 경쟁력 있고 주변 열강들에게도 위협적인 군사력을 달성했다.정말 기병 운용이란 분야 하나만 보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오히려 쇠락해가던 중갑 창기병을 본질은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만큼 경량화 시키는데 성공한 윙드 훗사르란 병종으로 중세식 중기병의 한계를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식 경무장 비정규전 특화 기마궁사, 필요에 따라 서방식 총기병 리터까지 굴리며 당대 최강의 전력을 유지했다. 반면 보병은 뒤에서 대포나 만지거나 고기 방패 역할이나 하는 철저한 쩌리 신세(...) 일반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야전군은 윙드 후사르를 주축으로 이들이 적절한 기병 돌격 각을 잴때까지 고기방패 역할로 버틸 영주들의 사병 보병들이나 전투마차 끌고온 등록 카자크 보병, 그리고 상황과 자금 여유에 따라 주로 네덜란드, 독일어권, 브리튼 섬 등지에서 모집한 용병 포병대로 구성되었다.
  • 카자크 기병대: 비정규전에 능숙했으나 정규전에서는 맥주병 그 자체였다. 주로 우크라이나 지방의 카자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칼, 창, 총은 물론이고, 때로는 화살같은 구시대적인 무기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 리소브치치(Lisowczycy): 카자크 기병대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전에 능숙했다. 리소브치치는 카자크 기병대와 마찬가지로 칼, 창, 총, 화살 등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했다. 리소브치치라는 이름은 폴란드의 유명한 군사귀족이자 군지휘관 리소브스키(1580~1616)에서 나온 것이다. 리소브치치는 약탈, 강간, 방화, 살육을 일삼은 학살자들로 이들의 악명은 30년 전쟁 당시 가톨릭 측으로 참전한 소수의 용병대로 인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타고난 잔인함 덕분에 '묵시록의 기사'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라이터 기병대(Rajtaria): 라이터 기병대는 그 수가 적었다. 이들의 무기는 주로 총이었다. 서유럽에서는 라이터 기병대가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크우쉰(Kluszyn) 전투때 윙드 후사르가 라이터 기병대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유명유실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육군의 보병은 기병의 빛에 가려 그 효과를 별로 내지 못했다. 일단 폴란드군은 주로 야전용 기병대를 양성했으며, 공성전에 필요한 강력한 보병이나 포병은 별로 육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역 점령에 지진부진한 적도 있거나 공성전에도 실패할 때도 있었다.
  • 보이스코 크바르치아네(Wojsko kwarciane), 보이스코 콤푸토베(Wojsko komputowe): 각각 국가 세금에 의한 상비군과, 전시에 창설되는 반상비군. 1652년 이후 개혁으로 두 군대를 혼성하게 되었다.
  • 피에호타 비브라니에츠카(Piechota wybraniecka): 스테판 바토리의 군제개혁으로 창설된 반상비군으로, 왕실 직속 농지에서 먹고 사는 농민의 신병을 기반으로 한 군대였다. 근데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 체제가 상술된대로 애초에 선거제 왕실이었고, 왕권 자체가 워낙 유명무실해서 서류상으론 왕실 직속인 농지들도 현실적으론 마그나트 대귀족들이 다스리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중세도 아니고 16-17세기에 왕실 직영지에 귀족들이 부동산 말뚝박기라니 다른 나라 같으면 뒤집어졌겠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의 주권은 귀족 의회에 있고, 왕은 선거로 꿔다 놓은 수준인 폴란드에선 이게 통했다. 게다가 귀족 의회가 정신나갔다고 국왕 직속 상비군에 덜컥 동의할리가 없는건 비단 귀족 공화제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뿐만 아니라 동시대 다른 유럽 나라들도 마찬가지인지라 이런 군사조직은 결국 왕의 사비로 운영해야 되는데 폴란드는 선거제 왕국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한 집안의 왕가가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 폴란드에서 역대 왕들은 딱히 자체적인 왕실 비자금을 조성할 이유도 여건도 안됐고, 그렇다 보니 왕 개인이 군사적 능력과 관심이 지대해서 이런 조직 창설에 직접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했던 스테판 바토리, 얀 3세 소비에스키 시절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항상 징병도 똑바로 안되고, 유지비도 없어서 겨우 2천명 정도의 규모가 전부였다.
  • 등록 카자크군: 역시 스테판 바토리의 군제 개혁으로 생긴 군대. 등록 카자크군의 최고 수장은 카자크 대원수였다. 카자크군은 대부분 보병이었으며, 기병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들은 대포, 화살, 총, 칼 등 각종 무기들을 사용했으며, 비정규전에서 특히 뛰어난 능력을 구사했다. 흔히 경기병으로 이미지가 강한 카자크군이지만 실제 주력은 전투 마차 타보르를 중심으로 야전 임시 요새를 축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싸우는데 능했던 경보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카자크 보병들은 개개인의 무장은 가벼웠지만 동유럽 전장에서 최고의 미덕인 장시간 험지에서 종군하며 추위, 배고픔을 견디는데 워낙 뛰어났다 보니 오히려 아래 영주들의 사병이나 비싼 외국 용병대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 포스폴리테 루셰니에(Pospolite ruszenie): 마그나트의 사병들을 모두 끌어모은 병력으로, 평상시에는 마그나트 한 명 당 수백 명 단위의 연대로 육성했다. 하지만 전시에는 마그나트가 병력을 모두 합하여 그 규모가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16세기 초중반 이후 이웃 라이벌 세력들은 서방은 테르시오 전술을 사용하는 대규모 전문 용병대,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러시아의 스트렐치, 일련의 군제 개혁을 겪은 스웨덴 보병 같이 대대적인 화약무기 중심 전문화된 보병을 운영하는데 이런 마그나트의 사병들은 징집 기준, 훈련 수준이 중세의 농민병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대부분 머릿수만 채우는 오합지졸이었다. 게다가 이는 대지주 군사 귀족 연합체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근본적인 정치사회적 기반과도 직결되어 있어 전반적인 개혁이 가능한 사안도 아닌지라, 연방군은 대체로 이들보다 등록 카자크나 서방에서 고용해온 용병 보병대를 사용하는 걸 선호했다. 따라서 신뢰할만한 전문 보병대의 주축이었던 카자크들이 흐멜니츠키와 함께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땐 단순한 지역 반란을 넘어 아예 국가적 군사 체계의 중대한 일부가 반란일으킨거와 마찬가지라서 전술적 붕괴가 전략적, 나아가 국가적 위기로 직결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용병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돈을 주고 전투에 투입시킨 외국 군대. 독일(프로이센), 영국(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루마니아(왈라키아,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세르비아, 체코(보헤미아, 모라비아) 등 유럽 각지에서 채용했다. 상술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사회적 구조와도 연결된 구조적 문제들로 인해 양질의 대규모 보병대를 자체적으로 양성하는게 힘들었기 때문에 중요한 대규모 야전에서 중보병대의 주축은 독일어권,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스페인과 이탈리아, 발칸 반도에서 고용해와 서방식으로 훈련 받은 외국인 용병단들이었다. 사실 상술한 농민 경제 사회에서 귀족권과 왕실이 대표하는 중앙 권력의 문제들은 사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성문화된 국가 기반부터 계층 집단적 귀족 공화정이라서 부각된 것이지, 그 자체는 근세 유럽의 보편적인 현상인만큼 근본적인 상비군의 문제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군사 기술적으론 근대의 문을 연 16-17세기가 인적구조상으론 모순적으로 용병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것이다. 이를 감안해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 정도가 상당히 지나치긴 했지만.
  • 왕립 근위대: 국왕과 그 가족을 호위하는것을 주목적으로 한 소부대
해군의 경우 연방의 역사 속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이는 연방군이 거의 동유럽같은 대륙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27년 스웨덴의 해상봉쇄를 격파한 올리바(Oliwa) 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하지만 이후 비스와 기습전에서 스웨덴 해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주력은 갈레온이어야 했지만 연방의 국고 사정과 신생 함대였다는 것이 겹쳐, 개조한 무장 상선들이 많이 있었다.
대홍수 이전까지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의 해군은 거의 카자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수백명이 분승하는 갈매기라는 이름의 소형선인 차이카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쓰면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과 대적했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교외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는 간이 배밖으로 나온 짓까지 벌인다.

7. 경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농노제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 농업에 의존했다. 농노제가 지속되는 동안 귀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폴바르크(folwark)라고 불리는 대규모 농장에서 국내유통, 국외수출을 위해 농작물이 농노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이 경제 체제는 곡물 생산이 가장 호조를 보였던 시기에 해당하는 연방의 초기에는 지배계급에게 좋은 방향으로 기능했다. 물론 농노제 지속 기간 동안에도 농민의 소수는 농노와 같은 인신의 구속을 당하지 않는 자영농이었다. 자유 자영농 중에는 농촌에 정착한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유대인 농민들은 농촌에서도 자신들만의 마을을 이루어 뭉쳐 살았다.[41]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내의 경제상황은 악화일로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에 귀족계급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중노동을 강요하게 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어째든 러시아를 제외하면 동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에 비옥한 옥토는 아니지만 밭을 개간한 초원이 많았다. 연방 형성 이후 비옥한 우크라이나 지대를 안정화하며 유럽 최대의 곡물생산국이었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곡물들은 대부분 생산 지역에서 소비되고 만다.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는 토질이 매우 비옥하여 많은 잉여 식량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연방의 주 수출품은 밀과 같은 곡물이었다.
그리고 산업에 대해서는 동시대의 서유럽보다 낮은 단계였다. 이는 농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부르주아에 대해 슐라흐타들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이는 국내의 도시와 산업의 성장을 더디게 하는 결과가 되어 항상 국고가 바닥나는 사태에 직결하게 되고 만다. 슐라흐타로 인해 근대적인 폴란드인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이 억제되는 대신 도시에 주로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국가와 귀족에게 필요한 상업 수요를 대행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도 수출과 수입의 필수 상업 활동은 안할 수 없었는지 루블린에 대규모 시장이 열렸고 발트해를 중심으로 비스와 강, 피라차 강, 서 부크 강 등에서 연안 항구가 개설되었다. 이러한 시장과 항구의 운영에도 유대인들이 관여했음은 물론이었다. 폴바르크의 소유주였던 폴란드 귀족들은 단치히의 상인들과 계약해 1590년부터 1620년대까지 서유럽이 흉작에 괴로워하고, 남부 유럽국가가 체제안정을 위해 경쟁하여 곡물 수입을 벌이던 시기에 연방은 6%의 곡물을 팔아 많은 이문을 남기게 된다. 그외 해상교역에서의 수출품은 목재및 목재로 만든 타르 등이 있었다.
그리고 육상교역의 수출품은 피혁, 모피, 삼베, 비단, 리넨 등의 물품들로 이것들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 수출되었고 그 외 향신료, 사치품, 값비싼 의복같은 것들이 연방으로 흘러갔다. 일부는 서유럽으로 재수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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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1799년 동안 그단스크 항구를 통한 곡물 수출 지표

8. 문화


연방은 근대적인 정치, 사회사상의 발전에서 유럽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철학자가 칭찬한 당시로는 희귀했던 외견상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대응 종교 개혁의 시대에 있어서도 매우 특이했던 종교적 관용을 실현시켜, 유대교[42], 동방정교[43], 아르메니아 가톨릭, 개신교[44], 국교였던 가톨릭과 더불어 이슬람교[45]까지 공존한 것을 가만한다면 동시대의 여러 국가에서 그 풍경을 보고 까무라칠 정도였다. 대홍수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카자크들에 의해 유대인들이 수천 단위로 학살당하는 일에서 보듯이, 종교가 다른 여러 민족들을 이간질시킬 때도 많았다.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연방으로 합치기 전부터 이미 '''코페르니쿠스'''나 프란시스크 스카리나(Francysk Skaryna) 같은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나라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블린 조약으로 통일된 이후에도 역사학, 지도학, 화학, 민족학, 군산업에 종사하는 개발자, 천문학, 수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명망있는 학자들이 연방의 문화 발전을 이끌어 왔다. 이중 미하우 보임은 과학자이면서 외교관이기도 해 남명 정권을 섬긴 전적이 있었다. 그외에 수많은 고전작가들도 모습을 들어냈다. 또한 슐라흐타들은 회상록이나 일기를 남겨 문학적 역사적 가치가 있는 저서들을 남겼다. 그외 건축술은 마그나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건축가들을 후원하면서 성당, 궁전같은 것들이 연방의 최전성기때 세워지게 되어 현대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에 문화유산으로 남겨지게 된다.
교육 시설들이 대부분 종교기관에 예속되어 있던 중세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에, 카톨릭에 바탕을 둔 폴란드 문화는 서유럽의 최신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용이했다. 루테니아 지방에 널리 퍼져있던 리투아니아인들 중 적지않은 수가 성당을 통해서 전파되는 최신 폴란드 문화에 매료되어 '''폴란드인으로 완전히 동화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리투아니아어 사용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동군 연합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부터 꾸준히 축소되었다.[46] 오늘날에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의 정교회 유력자들도, 같은 이유로 카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폴란드어를 쓰며 폴란드인으로 동화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리비우정교회 신도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압력과 당시의 시대 상황의 영향으로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연방 귀족층들 사이에선 사르만티즘(Sarmantyzm)이란 이데올로기가 유행했다. 사르만티즘이란 폴란드 민족의 선조라고 생각된 사르마티아인들과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숭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슐라흐타들의 문화에 깊숙히 스며들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들의 생활영역의 전면에 침투했다. 사르만티즘은 슐라흐타 계급에게 있어 평등의식, 그들의 기마 취미, 전통 중시, 지방에서의 전원생활, 평화주의를 장려하고 오리엔트에 영향을 받은 복식의 유행을 낳았다. 거기에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연방의 귀족계급에게 단일 민족의식에 가까운 연대감을 주었고, 슐라흐타의 "'''황금의 자유'''"에 정통성을 각각 부여했다.[47] 초기 사르만티즘은 이상주의적인 것으로 문화활동에서 분류되어 나온것으로 신앙심, 성실함, 애국심, 용감함, 평등과 자유를 고취시키는 작용을 했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성격은 서서히 부정되었다. 후기에 나타난 과격한 사르만티즘은 신앙심을 광신시키고, 성실함을 정치적 무지로 변화시켰으며, 자랑을 오만으로 만들고, 용감을 완미로, 자유를 무질서로 변모시키는 작용을 하고 말았다. 이 사르만티즘은 당대 폴란드의 개혁가들이나 독립운동가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48] 이러한 비판은 폴란드의 붕괴가 내부 분열에 의한 것으로 포장하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역사왜곡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영항으로 현대 폴란드에서는 아이러니를 뜻하는 단어가 'Sarmata' 일 정도로 역사적, 사회적 측면에서도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연방의 주류계층들이 이렇게 좋은 문화와 생활을 향유했던 것에 반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노들은 슐라흐타들의 착취 때문에 엄청나게 고통받았다. 당대 연방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농업 덕분에 농노제는 약화되긴 커녕 오히려 더 철저하게 강화되었다. 농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결혼도 마음대로 못했다. 그들의 직업은 지주의 명령에 따라 효율적으로 결정되었다. 이들의 땅에 매겨진 세율은 살인적이었으며 부역 기간은 심하면 '''일주일에 7일''' - 일 정도로 심했다. 세임에서는 자신들의 사유재산인 농노들을 더 착취하기 위해 세월이 흐를수록 법령을 강화했고 나중에 가면 '농민이 토지를 소유할 시 사형'도 가능하다는 법령까지 나왔다.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노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와 위에서 언급한 사르만티즘 같은 이념이 자주 사용되었으며, 카톨릭 교회에서는 슐라흐타들이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의 후손이며, 농노들은 둘째 아들이자 저주 받았다고 알려진 함의 후손이라고 가르쳤다.[49] 그밖에도 일종의 우민화 정책으로 각 가정마다 의무적으로 일정량의 보드카를 구입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많은 농노들은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냈다. 흑인 노예들처럼 이들은 개별 단위로 판매되진 않았지만 대신 토지에 묶여서 도매급으로 거래 되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더 가혹했는데, 연방 본토의 농노들은 적어도 같은 민족으로 봤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들에게 그저 야만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슐라흐타들은 자신들이 이 야만인들을 문명인으로 개화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으며 정교회 신앙을 탄압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였다. 전성기에는 7천명의 슐라흐타들이 3백만명이나 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농노로 부렸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다 준 것은 문명이 아니라 증오뿐이었고 훗날 대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쯤 되면 노예보다 더 안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할수 있다. 어련하면 연방 시절을 가리켜 '''귀족들의 천국, 유대인의 낙원, 농민들의 지옥'''이라 불렀겠는가.
이런 농노제의 철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시점은 폴란드 분할 이후 벌어진 코시치우슈코의 봉기 때로, 이를 통해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하지만 봉기가 실패로 끝나고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백년에 가까운 러시아의 지배하에서 농노제는 계속하여 유지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864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그 잔재는 이후로도 몇십년 가량이나 지속되었다. 전간기폴란드 제2공화국 정부조차 이런 제도들을 개혁하는데 실패했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2차대전 이후인 1940년대 후반에서였다.

9. 봉신국


폴란드 리투아니아에 종속된 신하국들.
  • 프로이센 공국
  •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 몰다비아 공국[50]

10. 의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한때 중앙유럽동유럽에서 강력한 국가였다. 정치, 군사, 문화에 있어서 찬란한 역사를 자랑했다. 정치적으로는 공화정을 실시[51], 왕을 선출하였고 군사적으로 전성기에 동유럽 최강국을 자처했으며 그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하면서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라는 칭호도 얻었다. 문화적으로는 서쪽으로 서유럽을 비롯한 신성로마제국과 동쪽으로 러시아, 북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쪽으로 발칸 반도와 오스만 투르크와 위치하고 있어 동유럽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허나 주변에 강력한 적들이 산재한 것이 불행이었고 이들과 적절히 동맹관계를 맺지 못한 것도 화근이었다. 또한 후기에 들어서는 귀족들의 야욕과 탐욕도 연방을 나락으로 끌고 가는데 한몫했다. 귀족들의 세임에 대해 견제할 세력이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사사건건 왕권에 대항했으며 심지어 이익에 눈이 멀어 조국을 배반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력을 악화시켰다. 한때 강성했던 나라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에 의해 국토가 분할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데에는 이같은 지배계층의 애국심 부족도 한몫을 했다.
더구나 앞서 말한대로 주변국들간의 관계를 적절히 조율하지 못한 것 역시 화근이었다. 스웨덴의 경우 폴란드계의 바사 왕가가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 위해 자주 전쟁을 벌이며 급기야 대홍수 당시 북방전쟁 때 라트비아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러시아와는 대대로 원수지간에 1612년 당시 러시아를 탈탈 털어먹을 뿐만 아니라 차르까지 끌고와 폴란드 국왕 앞에서 굴욕감을 줬다. 결국 러시아는 대홍수 당시 반란을 일으킨 카자크들을 잠시나마 대폭 지원해주었고 세차례에 걸친 폴란드 삼국 분할때 가장 많은 영토를 빼앗아 이득을 챙겼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유럽침공을 사실상 홀로 막을 뿐만 아니라 몰디비아를 두고 경쟁까지 해 두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관계는 원만해보였지만 프로이센의 경우 한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제후국이다가 프로이센 공작위를 상속받았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대홍수 당시 연방을 공격하면서 프로이센은 연방의 속령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왕국으로 격상되고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 삼국 분할에 참여하는 등 연방은 급변하는 국제관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고, 어제의 적을 오늘의 적으로 계속 남게했으며 이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판에 집단 다굴을 맞는 꼴이었다.
허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간접적으로나마 세계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마지막으로 채택한 헌법은 미국과 혁명으로 공화정이 된 프랑스의 기본 헌법으로 제정되었으며 그들의 정치사상은 미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국을 공화정을 유지하되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혼재하게 했다.
이 때의 이미지 때문에 대체역사소설 다아시 경 시리즈에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바르고 게르마니아(독일 지방) 영주들을 위협하며 주무대인 영불제국을 견제하려는 나라로 등장한다. 한니발의 승리를 다룬 시간여행 SF타임 패트롤 시리즈》의 "델렌다 에스트"에서는 리톤(리투아니아에서 유래된 듯)이라는 이름으로 동부유럽 전체를 차지하기도...

[1] 러시아 역사에서 혼란 시대로 일컫는 차르의 공위기를 틈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일으킨 폴란드-모스크바 전쟁에 대한 협정으로 영지를 빼앗긴 러시아의 연방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게 되어 후에 휴전효력이 다하는 1632년 스몰렌스크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고, 훗날 연방에서 대홍수라고 불리우는 제2차 북방전쟁에 러시아가 간섭하는 감정적 계기가 되어 연방의 몰락 원인이 된다. 또한 이 기간 프로이센 공국 호엔촐레른 가문의 대가 끊겨 연방의 왕이 프로이센 영지를 회수했어야 했으나 이 때,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연방의 왕을 섬긴다는 조건으로 공위가 넘어가게 된다. 역시 이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대홍수 시기 연방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을 명분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어, 프로이센 영지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하여 더 훗날에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변화한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하여 삼국분할이 되는 시발점이 된다. 여러모로 연방의 최전성기를 만듬으로서 연방의 몰락의 원인이 된 비운의 협정인 셈.[2] 연방 멸망 직전인 1791년에 헌법으로 확립한 공식 명칭이다. 두 민족이라 함은 당연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3] 국기와 국장은 정확히는 스웨덴의 바사(Vasa) 왕가의 출신의 왕이 통치한 시기의 것이다. 국기와 국장 안의 문장이 바로 바사 왕가의 것.[4] 라틴어 (하느님이 우리편에 있으니 그 누가 대적하리오)[5] 18세기 이후: Pro Fide, Lege et Rege 라틴어 (믿음, 법률, 국왕을 위하여)[6] 세습→선거→입헌[7] 폴란드의 왕으로서는 1548년부터 재위[8] 한 때 유대인의 낙원이라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에게 관용적인 나라였다. 176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수는 75만 명 이상으로 당시 유럽 유대인의 절반을 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9]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이 현대에는 서로를 제대로 구별하게 된 것은 똑같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폴란드가 폴란드 입헌왕국이라는 명목상의 독립국가로 한동안 이어져온 반면 리투아니아는 그런 것도 없었던 것, 20세기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각각 따로 독립한 것(폴란드 섭정왕국폴란드 제2공화국/리투아니아 왕국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냉전 시절 폴란드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위성국)로 존재한 반면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구성국(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어 또다시 러시아계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것 때문이다.[10] 16세기부터 일찍 폴란드어 화자가 다수였고, 2차대전 이후 소련이 뜯어갈때 까진 폴란드가 항상 영유해왔던 빌뉴스와 달리 카우나스는 중세부터 지금까지 리투아니아어 모어 화자가 다수거나 적어도 폴란드계와 비등했고, 전간기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때도 폴란드쪽에 뜯기지 않고 저 상술한 외교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투아니아'족'의 신생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끝까지 영유했다. 본 발언의 문맥에 따르면 완전 편협하고 몰역사적인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봐도 '순수 리투아니아 땅'이라 주장할 여지가 훨씬 더 큰 도시 태생이란 의미이다[11] 언어는 폴란드어를 쓰지만 나고자란 지방은 현대 폴란드 땅이 아닌 폴란드어계 지식인 전통 전반[12] 이 중세 폴란드 왕국령 내 루스인들이 주로 살던 지역을 20세기 이전에는 적러시아, 즉 말 그대로 붉은 러시아라고 불렀다.[13] 폴란드어: 르부프[14] 폴란드어: 카미에니에츠-포돌스키[15] 폴란드어: 스타니스와부프, 우크라이나어로도 1960년대에 민족주의 시인 이반 프랑코를 기념한다고 개명하기 전에는 스타니슬라비우라고 불렀다.[16] 단 도시만! 조금만 도시 외곽으로 빠지면 확고하게 루스인들이 절대다수였다. 이러한 민족분포는 20세기 초중반까지 이어져 나치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당시 소련의 동부 폴란드 병합 명분이 되었다.[17] 언어학적 조사에 따르면 15세기 초반쯤 되면 리투아니아 대공국 전체 인구 9백만명 가량 중에서 리투아니아어 모어 화자가 1백만명이 안됐다.[18] 아내의 사망으로 폴란드를 잃기도 전에 사촌 동생인 비타우타스와 리투아니아의 대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요가일라 측에서 한발짝 양보, 비타우타스를 자신의 부섭정에 임명하였다. 사실상 그를 리투아니아의 실질적 지배자로 인정한 것이라 리투아니아 내의 권력기반이 상당부분 실추된 상태였다.[19]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국력이 그렇게 강대한 편은 아니었다. 그룬발트 전투에 참전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은 4만 명 내외, 많이 쳐줘봐야 5만여 명 정도였다. 한편 독일 기사단의 병력은 2만 7천여 명이었다.[20] 하지만 어디까지나 별도의 왕국이며, 브와디스와프는 보헤미아의 왕자리가 빈 1471년부터 왕위를 주장했으나 경쟁자인 헝가리왕 마차시 1세가 후계 없이 사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야기에우워 왕가의 헝가리-보헤미아 왕국은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전사하면서 2대만에 단절되고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가게 된다. 보헤미아 참조.[21] 지그문트 2세는 카지미에시 4세의 차남의 후손이지만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지한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의 자손들도 러요시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문을 닫게 되고 말았다.[22] 프랑스의 삼부회에 해당한다. 여담으로 현재에도 폴란드(Sejm)와 리투아니아(Seimas), 라트비아(Saeima)의 의회가 이 이름을 쓰고 있다.[23] 정확히는 발루아 왕조의 방계인 발루아-앙굴렘[그러나] 헨리크 발레지 역시 노름을 피우고 술이나 마시는 등 국정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날 폴란드에서는 먼 나라에서 오더니 아무것도 안하고 불평불만이나 하다가 곧 돌아간, 도대체 뭐하러 왔는지 모를 잉간 취급이나 당하고 있다고.[24] 왕위 계승 문제로 결혼을 하지 않다가 결국 왕조가 단절되는게 기정사실화된 50세가 넘어서야 결혼했다.[25] 헝가리어로는 '바토리 이슈트반'. 그 유명한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외숙이다. 스테판의 누나 안나가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26] 분쟁 지역인 리보니아(Livonia, 지금의 라트비아 동부)는 이미 16세기 중반부터 러시아와 폴란드-스웨덴 측이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었다.[27] 훗날 국력 관계가 역전된 러시아 제국과 이를 계승한 러시아 정부들이 폴란드와 그 일대를 그토록 가혹하게 공격하고, 탄압했던 것도 이런 전례가 있어 러시아 입장에서 폴란드는 무슨 무해한 작은 이웃이 아니라 자국에게 실존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였고,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다른 변경 지대가 폴란드 주도로 독립적인 하나의 세력으로 묶여버리면 이런 실존적 위협이 되살아 날 수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같은 후대 폴란드의 지도자들도 똑같은 계산에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키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폴란드가 러시아를 견제할 만한 국력을 아예 '''정신적인 차원'''에서부터 갈아버리자고 카틴 학살을 저지르며 저런 상호 불신의 역사를 되풀이했다. 여하튼 러시아 입장에서 폴란드는 러시아가 동유럽의 패자, 나아가 세계적 열강으로 클려면 반드시 꺾어야 하는 전통적인 강적이자 라이벌이었다.[28]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인 독소전쟁에서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이 벌어진 지역.[29] 이 때 연방군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는데, 최고의 엘리트 병력이 바토흐 전투에서 모두 전멸했기 때문. 따라서 흐멜니츠키 봉기가 끝나고 나서는 동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러시아 군과 북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스웨덴 군을 막을 정예군이 없었다.[30] 이 전투에서 흐멜니츠키와 휘하 카자크는 포로로 잡은 8천여 명의 폴란드 포로들을 모두 참수하거나 내장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학살했다.[31]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전의 바토흐 전투에서 정예군이 전멸한 탓도 있지만 폴란드 국가 시스템 자체의 결함도 스웨덴 군의 쾌속 진격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32] 이 시기 연방의 인구가 1,100만 정도 되었으니 거의 300~400만 정도가 죽었다고 보면 된다. 이후 상황을 보면 잘 알겠지만 임진왜란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폴란드는 실로 지옥 같은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된다.[33] 대홍수 때 일어난 바토흐 전투에서 자신의 형이 포로로 잡혀 학살당했고, 전공을 세워 왕으로 선출될 시점에선 연방군 총사령관이었다.[34] 대신 스타니스와프는 프랑스가 로트링겐의 프란츠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 승인 조건으로 얻은 로렌 지방을 노후를 보낼 영지로 받게 된다. 그리고 스타니스와프는 자식이 없기에 사후 로렌은 그대로 프랑스 땅이 된다.[35] 이 때문에 브와디스와프 3세의 별명은 바르넨치크(Warnenczyk)이다. '바르나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36] 계속 농촌에 남아 농업에 종사하던지, 도시로 떠나 임노동자로 먹고 살든지 자유롭게 택할 수 있도록 했다.[37] 위에서 말한 콘페데라치아[38] 위에서 보았다시피 헌법 이전에는 입법부가 사법부와 행정부를 거의 쥐고 흔드는 상황이었다.[39] 영어로는 캐시미어 풀라스키[40] 헝가리에서 죽을뻔한 이후 당시 폴란드, 헝가리 민족주의 혁명가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가 종교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무라트 파샤로 개명했다. 그러나 양국 모두 현대와선 우익 권위주의 정권이 장기 집권하며 민간의 반이슬람주의 성향을 부풀려놨기 때문에 개종은 양쪽 다 입 싹 씻고 거론 안한다(...)[41]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에는 농촌 유대인의 일부는 심지어 폴란드어를 할 줄 모르고 이디시어밖에 할 줄 몰랐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의 사촌 쉬베크가 이 케이스.[42] 약간 과장이 가미된 중세 기록에 따르면 전 세계 유대인의 80%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살았다. 아슈케나짐 항목 참조[43] 통념과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적 차원에서 종교에 대하여 내린 지침은 귀족의 종교의 자유 뿐이고, 적어도 법적으로 16세기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리투아니아쪽에선 절반에 가까웠던 정교회 신자들에게 대한 공식적인 차별은 없었다. 물론 카톨릭 반종교개혁과 예수회의 진출에 따라 비공식적 차원에서 불이익을 받기 시작했지만 오스트록스키 가문처럼 끝까지 개종도 안하고 영향력과 위세는 그대로 유지한 정교회 대귀족들도 충분히 있었다.[44] 독일계 이주민들이 연방 도시 곳곳에 정착해서 상공업에 종사했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루블린 처럼 폴란드 자체적으로 도시민들 중심으로 개혁교회를 받아 들인 지방들도 있었고, Polish Brethren이라 부르는 이웃나라 보헤미아의 후스파 현지 신도들도 있었다. 그단스크가 있는 왕령 서프로이센, 발트 연안 봉신국 쿠를란트 같이 루터교 독일인들이 주류였던 지방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45] 립카 타타르라고 해서 그룬발트 전투 당시 참전했던 타타르인 전사들이 귀화하여 대대손손 군인으로 활약했다. 한때는 빌뉴스와 트라카이, 나바흐루닥과 민스크를 중심으로 무슬림 타타르인 구역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였다.[46]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빌뉴스는 한동안 주민 대다수가 폴란드인과 완전히 폴란드에 동화된 리투아니아인들 그리고 아슈케나짐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47] 리투아니아의 립카 타타르는 사르만티즘의 수혜자들로 인종과 종교가 다름에도 같은 핏줄이라며 우대를 받았다. 주류계층이 아닌 우크라이나 카자크들 역시 이런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선조가 하자르 칸국에서 시작 되었다는 요상스러운 신화를 창조해내기도 했다.[48] 당시 폴란드인들의 이러한 자기반성은 볼레스와프 프루스가 쓴 인형이란 소설에서 잘 확인해볼 수 있다. 굳이 폴란드에 관심이 없더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주제는 일단 폴란드의 미래와 애국주의에 관한 것이다.[49] 재밌게도, 근대 미국에서도 노예들에게 이와 비슷한 사이비 교리를 주입 시켰다.[50] 15세기 말에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 됨[51] 단, 민주적이어서가 아니라 귀족들의 권력이 막강했던 것이다. 왕권이 귀족들을 휘어잡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