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
* 응답하라 1994의 등장인물은 성나정 문서로.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은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장소로, 1970년에 이 자리를 사적 제245호로 지정하였다. 본디 그 이름대로 우물(井)이 있었다고 추정했으나, 2002년에 발굴을 시작한 후, (기존에 우물 터라고 생각한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가 원 우물 터라는 주장과 처음부터 우물이 없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발굴단은 다른 자리가 원 우물 터라고 판단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삼국유사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발굴 조사 전에는 일제강점기에 새로 세운 유허비(遺墟碑)[2] 와 전각이 있고, 전각의 북쪽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 초석 다섯 개가 있었다. 또한 담장이 전각과 화강암을 둘렀다. 사람들은 전각의 북쪽에 있는 네모난 초석 중 중앙에 있는 가로 세로 1.3 m짜리 돌덩이가 나정 우물이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다.
2002년에 전각과 초석들을 두른 담장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생겼다. 하여 법률에 따라 조사단을 꾸리고 경주 박씨 문중에 이를 알려 개토제를 지낸 뒤 형식적인 발굴조사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시작하고 보니, 조사단조차 미처 예상치 못한 팔각형 건물터를 발견하였다.[3]
조사 결과 한 변이 8 m, 지름이 20 m 정도 되는 8각 목조건물을 세웠던 흔적인 초석 50여 개와 둥근 돌기단의 흔적이 나왔던 것이다. 출토된 '의봉 4년(679)'이란 명문이 씐 기와를 통해 신라의 유적임도 확인하였다.[4] 8각형 건물은 지금까지 삼국시대 건축물 가운데 고구려의 탑[5] 형식으로만 알려졌지만, 신라에서도 팔각 건물터가 발견된 것이다. 또한 앞서 말한대로 이 건물은 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천단의 성격도 있었다고 추정한다. 기와 역시 품질로 미루어보면 고급건물이었다. 이로써 나정에 신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절충설에 힘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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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나정 우물이 있던 자리로 전해지던, 네모난 중앙 화강암 초석 자리는 우물 유적이 아니라 팔각형 건물 중앙부에 나무 기둥을 세우기 위한 초석 자리였다. 또한 초석 자리에서 남쪽으로 4~5 m가량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구덩이 터가 발견되었다. 이 구덩이 터는 강돌을 밑에 설치한 것 등을 근거로 처음에는 실제 우물이었으나 후대에 매립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자리도 실제 우물이 아니라 다른 건물의 중심기둥을 세운 초석 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 단정하기는 어려운 듯.[6]
아무튼 이 구덩이 주변으로는 원형으로 배수로를 파고 그 바깥으로 목책을 세운 흔적이 발견됐는데, 팔각형 건물 이전에 만든 듯하다. 아마도 중심에 어떠한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을 보호하고자 배수로와 목책을 설치한 듯하다. 이 건물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아들) 남해 차차웅 3년(서기 6) 세웠다는 박혁거세의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신라 초기에 (우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특정한 지점을 중심으로 원형 건물을 지었다. 그런데 후대에 (문무왕 즈음으로 추정) 원형 시설을 철거하고 원래 원형 시설 자리를 전부 포함할 만큼 큰 팔각형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첫 건물의 중심자리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중앙 기둥을 세웠다. 나중에 신라가 멸망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 모든 시설이 파괴된 뒤 팔각형 건물의 중심 기둥을 세웠던 자리가 나정 우물 터라고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이 삼국사기 등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간 신뢰성이 낮다고 여겨지던 삼국시대 초기 기록들에 대한 신뢰성 역시 높아진 측면이 있다.[7][8]
1. 개요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은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장소로, 1970년에 이 자리를 사적 제245호로 지정하였다. 본디 그 이름대로 우물(井)이 있었다고 추정했으나, 2002년에 발굴을 시작한 후, (기존에 우물 터라고 생각한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가 원 우물 터라는 주장과 처음부터 우물이 없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발굴단은 다른 자리가 원 우물 터라고 판단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2. 역사
2.1. 유래
삼국유사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2대 왕 남해 차차웅 3년(서기 6)에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고, 이후에 이 자리에 신궁을 세우는데[1] 이때부터 수백 년이 지난 통일신라대까지도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반드시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들이 삼국사기에 나온다.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 임자(기원전 69)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안일하여 제멋대로 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는데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을 찾아가보니 자줏빛 알(푸른빛의 큰 알이라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해와 달이 맑고 밝아졌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
발굴 조사 전에는 일제강점기에 새로 세운 유허비(遺墟碑)[2] 와 전각이 있고, 전각의 북쪽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 초석 다섯 개가 있었다. 또한 담장이 전각과 화강암을 둘렀다. 사람들은 전각의 북쪽에 있는 네모난 초석 중 중앙에 있는 가로 세로 1.3 m짜리 돌덩이가 나정 우물이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다.
2.2. 발굴
2002년에 전각과 초석들을 두른 담장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생겼다. 하여 법률에 따라 조사단을 꾸리고 경주 박씨 문중에 이를 알려 개토제를 지낸 뒤 형식적인 발굴조사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시작하고 보니, 조사단조차 미처 예상치 못한 팔각형 건물터를 발견하였다.[3]
조사 결과 한 변이 8 m, 지름이 20 m 정도 되는 8각 목조건물을 세웠던 흔적인 초석 50여 개와 둥근 돌기단의 흔적이 나왔던 것이다. 출토된 '의봉 4년(679)'이란 명문이 씐 기와를 통해 신라의 유적임도 확인하였다.[4] 8각형 건물은 지금까지 삼국시대 건축물 가운데 고구려의 탑[5] 형식으로만 알려졌지만, 신라에서도 팔각 건물터가 발견된 것이다. 또한 앞서 말한대로 이 건물은 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천단의 성격도 있었다고 추정한다. 기와 역시 품질로 미루어보면 고급건물이었다. 이로써 나정에 신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절충설에 힘이 붙었다.
[image]
그런데 정작 나정 우물이 있던 자리로 전해지던, 네모난 중앙 화강암 초석 자리는 우물 유적이 아니라 팔각형 건물 중앙부에 나무 기둥을 세우기 위한 초석 자리였다. 또한 초석 자리에서 남쪽으로 4~5 m가량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구덩이 터가 발견되었다. 이 구덩이 터는 강돌을 밑에 설치한 것 등을 근거로 처음에는 실제 우물이었으나 후대에 매립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자리도 실제 우물이 아니라 다른 건물의 중심기둥을 세운 초석 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 단정하기는 어려운 듯.[6]
아무튼 이 구덩이 주변으로는 원형으로 배수로를 파고 그 바깥으로 목책을 세운 흔적이 발견됐는데, 팔각형 건물 이전에 만든 듯하다. 아마도 중심에 어떠한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을 보호하고자 배수로와 목책을 설치한 듯하다. 이 건물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아들) 남해 차차웅 3년(서기 6) 세웠다는 박혁거세의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신라 초기에 (우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특정한 지점을 중심으로 원형 건물을 지었다. 그런데 후대에 (문무왕 즈음으로 추정) 원형 시설을 철거하고 원래 원형 시설 자리를 전부 포함할 만큼 큰 팔각형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첫 건물의 중심자리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중앙 기둥을 세웠다. 나중에 신라가 멸망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 모든 시설이 파괴된 뒤 팔각형 건물의 중심 기둥을 세웠던 자리가 나정 우물 터라고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이 삼국사기 등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간 신뢰성이 낮다고 여겨지던 삼국시대 초기 기록들에 대한 신뢰성 역시 높아진 측면이 있다.[7][8]
[1] 시조묘 기록이 꾸준히 나오다가 485년 마지막으로 수백 년간 시조묘가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 대신 마지막 시조묘 기록에서 2년 뒤(487)에 신궁을 설치했단 기록이 나오므로, 신궁이 시조묘의 기능을 계승, 흡수하는 시설이라고 추정한다.[2] 원래 이 유허비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것을 일제시대에 같은 내용으로 비석을 복제하여 새로 세운 것이다. 원래 있던 비석은 땅 속에 묻혔지만 발굴 과정에서 발견하였다.[3] 물론 앞서 말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나을`이 나정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있었다. 다만 그걸 증명하기 위해 발굴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4] 삼국사기에 문무왕 19년(679) 삼국통일전쟁을 이제 막 끝마치고서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때 이곳도 같이 손보았을 것이다. 신라 때에는 나정을 별궁처럼 궁궐 건축물의 하나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5] 정릉사, 청암리 사지 참고[6] 삼국유사에 기록된 전설을 따라 보더라도 좀 이상한 부분이 있다. 박혁거세가 나정 근처에서 알을 깨고 나오자 동천에서 씻겼다고 한다. 만약 나정이 정말로 우물이었다면, 그냥 우물물을 떠서 씻겨야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정이란 지명에 비록 우물 정(井)자가 있다고 해도 실제 우물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다.[7]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라의 경우 지증왕 즉위(500년) 이전 기록들은 과연 정확한 것인지 부정되는 편이었는데, 고고학적인 발견이나 외국 당대 기록과 안 맞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초기 기록이 거의 완전히 못 믿을 것으로 간주됐고, 현대에는 절충안이 대세인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믿는지는 학파마다 다르다.[8]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 논쟁은 정확히는 내용의 사실관계에 대한 불신이라기 보다는 사건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구체적인 연대가 어긋난 경우가 많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