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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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편에 동명왕릉이 보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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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사의 복원도.
정릉사

1. 개요
2. 역사
3. 가람
4. 복원
5. 능침사찰 목록
6. 기타
7. 같이보기

정릉사(定陵寺)

1. 개요


한국 평양에 있었던 고구려사찰. 백제미륵사, 신라황룡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한국 건축물 중 하나. 평양직할시 력포구역 무진리[2]에 위치. 동명왕릉 앞에 있었는데 현재는 북한 정권이 부분적으로 복원했다. 비슷한 고구려 사찰로는 청암리 사지가 있다.

2. 역사


372년 전진에서 고구려불교가 전래되고, 375년 2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절인 초문사(肖門寺)[3]가 세워진다. 초문사의 주지는 경문을 가져와 불교를 전래한 전진의 승려 순도(順道)가 맡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이불란사(伊弗蘭寺)의 주지는 동진의 승려 아도(阿道)가 맡게 되었다.[4] 이후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393년 평양에 절 9곳(九寺)을 건립했다.
정릉사가 이때 지은 아홉 절 중 하나였던 듯하지만, 5세기 초에 세운 절로 보기도 한다. 북한의 학자들은 고구려가 천도하면서 시조인 동명왕의 능을 평양으로 옮겼고, 정릉사는 이 능을 지키는 '능침사찰'로서 창건되었다고 추측한다. 능을 지키는 절이라는 의미의 '정릉(定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출토 기와가 증거로 꼽힌다. 실제로 정릉사지 뒷편 숲에는 왕릉이 있다.

3. 가람


1탑 3금당식인데 중앙의 큰 탑을 동서북에서 금당이 에워싸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런 가람배치는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데라(飛鳥寺)[5]에서도 발견된다. 다만 아스카데라는 백제왕흥사를 본으로 삼았다고 알려졌고, 백제가 고구려의 가람배치를 모방한 적이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아무튼 정릉사는 면적이 총 3만 ㎡여 달하는 절로, 동서 223 m, 남북 132.8 m인 회랑에 둘러싸여 동서로 병렬된 다섯 구역으로 나뉘었다. 특이한 것은 돌을 가지런하게 쌓은 물 도랑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람배치 때문에 고구려의 절은 금당보다 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탑을 둘러 보호하는 형국이고 금당이 모두 탑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비슷한 1탑 3금당식 신라사찰 분황사와도 다르다.[6] 다층목탑 역시 평면이 팔각형이므로 신라, 백제와는 큰 차이가 있다. 돌 기단의 너비가 20.4 m인데, 목탑의 팔각 중 한 변의 길이는 약 8.4 m이므로 상당히 큰 탑이었을 것이다. 기단의 너비 등으로 추측하면 높이가 60~70 m급 목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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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사 부분 복원 모형
고구려 출토유물 중에는 붉은 기와가 있는데, 이를 반영해서 지붕을 붉게 만들었다. 안학궁과 아차산에서 이러한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아차산에 새로 만들어진 정자도 이러한 모습을 반영했다. 아차산 정자
정릉사의 뒤쪽에는 거의 완전한 우물이 발굴되었다. 그 안에서 투구, 방패, 보습을 비롯한 철제품 5종이 나왔고, 정릉사의 머리글자인 '정'자가 새겨진 자배기를 비롯한 질그릇들, 그리고 호랑이, 사슴, 노루, 너구리를 비롯한 짐승 뼈 11종 등 모두 35종에 1130점이나 되는 유물이 나왔다. 절에서 살생이라도 하며 제사를 지냈을까? 흠좀무. 고구려의 패기가 느껴진다.[7]

4. 복원


북한은 1974년에 발굴작업을 한 후 이 절의 일부분을 복원하였다. 금당들과 정문, 회랑 일부를 복원하였지만 거대한 팔각칠층 목탑은 예산 문제인지 복원하지 않고 대신 작은 석탑으로 대체하였다.[8]
단청이 꽤 독특해서 이슈가 되었었다. 가끔 이 정릉사 복원이 남한의 복원보다 낫다는 의견도 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릉사 단청은 4~6세기 무렵에 그린 고구려 고분 내 벽화에서 묘사된 건축물 단청 문양을 응용한 것이라[9] 고증 면에서 어느 정도 근거가 있고, 고구려 유적 발굴로 드러난 대로 붉은색 기와를 쓰므로, 남한처럼 단청을 천편일률적으로 조선시대 형태로 칠한 것보단 낫다.[10] 하지만 알려진 다른 지역의 비슷한 시기 건축물과 상이한 점이 많고, 적색이 주류를 이루는 고구려 고분내 건축 관련 벽화와 다르며, 금속 부재로 추정되는 것이 단청 문양으로 대체되는 등 세부적인 면에서 맞지 않는 점도 많아 정답이라고 확신하긴 어렵다. 창에 창호를 단 것 등이나 여전히 건축물의 비율이나 구조는 조선시대의 건물에 가까운 점 등도 의아하다. 게다가 중앙의 목탑이 복원되지 못하고 석탑으로 대체된 부분이나 경제적 사정상 불상에 금박을 못 입히고 비슷한 색으로 칠을 한 점이 좀 안습. 사진들

5. 능침사찰 목록




6. 기타


  • 구글 어스로 보면 부근에 김씨 일가의 별장이 2채나 있다.

7. 같이보기


[1] 조선 시대부터 해당 무덤이 동명왕의 무덤이라는 전승이 있기는 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전傳동명왕릉이라는 명칭이 보다 정확하다. 그리고 북한정권이 단군릉 등과 함께 '개건'했기 때문에, 옛날 그 동명왕릉과도 많이 달라진 상태라고 한다.[2] 이북 5도 기준 상으로는 평남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東頭面 眞坡里)[3] 명칭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성문사(省門寺)라고 표기되었는데, 고구려왕이 불교를 전래한 승려 순도를 맞이한 성문(省門)을 절로 고쳐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사하면서 생긴 오류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사당으로 출발해 능사로 승격되고 부속건물로 왕실의 별전이 들어섰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사찰이 되었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주춧돌의 배열상태가 매우 복잡하고 그 배치가 넓다는 것이 증거.[4] 이불란사아도는 후에 신라에도 들어가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신라의 최초의 절이라고 하는 흥륜사다. 이후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까지 150년이나 걸렸기에 왕실의 지원을 받지 못했는지 건물이 모옥(茅屋)(초가집)이었다고 한다. 법흥왕 14년(527)에 공인한 후에는 기와가 올라 갔겠지만.[5] 596년에 완성. 다만 창건 당시 건물은 모두 사라졌기에 보통은 호류지가 더 오래되었다고 설명한다.[6] 분황사는 금당이 모두 남쪽을 향한다.[7] 물론 이상하게 볼 수만도 없는 것이, 한반도 남부의 사찰에서도 절에 딸린 우물에 동물뼈가 발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주의 전(傳)인용사지 우물이나 안압지 우물터에서도 동물뼈가 수습되었다. 기우제의 대상인 용왕이 우물에 산다는 믿음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출처: 김현희 <신라 우물과 제사>[8] 유홍준은 이 때문에 장중한 건축의 마스터플랜과 고구려 문화 특유의 웅장함이 흔들려버렸다고 지적했다.(출처: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9] 이는 동명왕릉이나 청암리 사지 목탑 복원도 비슷하다.[10] 백제문화단지의 백제 궁궐과 능사 5층 목탑을 붉은색과 초록색 위주로 조선시대 단청을 칠했기 때문에 고증오류라 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