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차차웅

 



'''신라 제2대 국왕
南解 次次雄
남해 차차웅
'''
'''시호'''
'''남해 차차웅(南解 次次雄)'''
'''별호'''
남해 자충(南解 慈充)[1]
남해 거서간(南解 居西干)
'''출생
(음력)
'''
기원전 50년?
'''사망
(음력)
'''
기원후 24년 9월
'''능묘'''
사릉원(蛇陵園)
'''재위
(음력)
'''
기원후 4년 3월 ~ 24년 9월 (20년 6개월)
'''칭호'''
삼황(三皇)(?)[2]
'''성씨'''
박(朴)
''''''
남해(南解)
'''부모'''
부왕 혁거세 거서간, 모후 알영부인
'''왕후'''
운제부인
'''자녀'''
왕태자 박유리(朴儒理)
왕녀 아효부인
1. 개요
2. 호칭
3. 생애
4. 대중 매체에서 모습
5. 삼국사기 기록
6.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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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2대 국왕으로 혁거세 거서간알영부인의 아들. 이름은 남해(南解)이며 족보에는 유(悠), 민해(愍解)라고 적혀 있으나 사료로서의 가치는 적다. 칭호는 차차웅인데 삼국유사에서는 아버지처럼 거서간을 붙여 남해 거서간이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왕비운제부인. 제3대 국왕 유리 이사금의 아버지이자 제4대 국왕 석탈해장인어른이다.

2. 호칭


차차웅이라는 군주의 호칭이 특이한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의 글을 인용하며 "차차웅은 무당을 부르는 신라의 방언"이라고 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관이 왕이 된 셈. 물론 고대에는 신라뿐 아니라 여러 문화권을 막론하고 왕이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주재해 무속적 성격을 지니기는 했다. 당장 중국천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 의식의 신관 역할을 맡았고 근현대까지도 이런 성격이 있어서 예를 들어 중국 옆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환구단 문서 참고. 그래도 신라의 남해 차차웅처럼 대놓고 자기가 무당이라고 이름에 붙이기까지 하는 경우는 드문데 비슷한 예로 일본 여왕히미코 정도가 있다. 남해 차차웅뿐 아니라 왕비 운제부인도 농업여신으로 신격화된 기록이 있으며 여동생 아로공주시조묘의 제사장을 맡았다는 기록처럼 박혁거세 집안의 구성원 전체가 전통 신앙의 신관 성격이 있었다.
이를 샤머니즘적인 부족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혁거세가 기록상 사망의 형태가 미심쩍음을 보면 혼란한 국가를 종교로 수습했다는 해석이 더 타당할 것이다. 차차웅을 오늘날 스승이라는 말의 기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차차웅이 앞서 혁거세 거서간의 호칭인 거서간과 동격의 의미라고 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남해 거서간(南解 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해서 마찬가지로 둘이 비슷한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에는 삼국사기를 따라 거의 남해 차차웅으로만 쓴다.

3. 생애


서기 4년 봄에 즉위했다. 가을에는 혁거세 거서간 사망 직후의 국상 기간을 노리고 낙랑이 쳐들어와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가 결국 점령하지 못해 곧 물러났다.
서기 6년 재위 3년째 봄에 시조묘, 혁거세의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삼국사기 제사지에도 있는데 남해왕 3년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여동생인 아로공주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혁거세 거서간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박혁거세 말년의 기록이 비록 반란 같은 사건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심쩍은 묘사가 있는데 아버지 박혁거세의 사망과 장례식을 치른 기간이 차이가 나는 사실 또한 반란설에 무게를 두는 대목이라 한다. 물론 이때 건립한 것은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종묘와 비슷한[3] 곳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사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오르면서 "두 분(혁거세와 알영부인)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한 시점에서 의혹 확정이다.[4]
기원후 8년에 딸 아효부인을 어질다는 소문이 나있던 석탈해혼인시켰다. 석탈해는 기록상 신라 외부 출신으로 앞서 금관가야수로왕과 대결했으나 패배하고 계림으로 들어와 있었다.
기원후 10년에 남해 차차웅이 사위인 석탈해를 '대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고 한다.[5] 석탈해를 실질적으로 정치를 하는 국왕으로 대접했다는 소리이다. 여담으로 석탈해가 맡은 대보는 신라 전체 왕사에서 세 명만 맡았으며[6] 이는 석탈해의 출신 지역을 추리하는 데 단서가 되기도 했다. 석탈해 문서 참고.
기록상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는데 4년(즉위 원년)에 낙랑군이 금성(경상북도 경주시)을 두 겹으로 에워쌌다가 물러났다. 14년(즉위 11년)에 가 100여 척의 배를 타고 몰려와 해변가의 민가를 약탈하자 경주 6부의 병사들을 보내 격퇴하는 사이 이번에는 낙랑 군사들이 빈틈을 노려 다시 신라에 쳐들어왔다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왜는 그렇다 치고 낙랑이 정말로 한사군의 낙랑인지는 의문인데 여러 학설이 있다.
19년(즉위 16년)에는 북명(北溟)에서 예맥#s-2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해 남해 차차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북명은 삼국시대 기록에서 종종 등장하는 정체 불명의 나라인데 원산만 근처의 동예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북명이 동북 부여를 가리키는 것임을 들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있다. 초기 신라의 범위가 아무리 영향권을 크게 잡아도 부여와 접점이 있을만큼 그리 넓지는 않았다는 것. 이를 석탈해가 이끌던 집단이 통째로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 외에 박혁거세의 치세에서는 보이지 않던 천재지변의 기록이 잦은데 11년 봄과 여름에 가뭄, 15년 봄과 여름에 대기근, 18년 서라벌에 가뭄, 7월에 누리(蝗蟲(황충): 메뚜기)의 재해가 있었으며 22년 질병이 크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으며 24년 9월에 누리의 피해가 컸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기록이 적기 때문에 적었을 수도 있다.
24년에 사망하고 왕위를 아들인 유리 이사금이 물려받았다.

4. 대중 매체에서 모습


  • MBC 사극 김수로에서 권성덕이 연기했다.
  • 점프에서 아이들을 역사 여행을 보내는 차차웅 선생님의 이름은 여기에서 따왔다. 사실 위에서 말했듯 차차웅은 스승의 가차로 추정되기에 이걸 현대 한국어로 쓰면 스승 스승님이 된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남해 차차웅 본기'''
一年秋七月 낙랑의 군사들이 침공했다가 물러가다
三年春一月 시조 를 세우다
三年冬十月一日 일식#s-6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왕의 장녀를 탈해의 처로 삼다
七年秋七月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다
八年 가뭄이 들다
十一年 낙랑인들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다
十三年秋七月 일식#s-6이 일어나다
十五年 서울이 가물다
十五年秋七月 창고를 열어 기근구제하다
十六年春二月 북명 사람이 예왕도장을 바치다
十九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十九年冬十一月 겨울얼음이 얼지 않다
二十年 금성이 태미로 들어가다
二十一年秋九月 왕이 죽다

6. 관련 서적



[1] 자윤(慈允)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2] 삼국유사 남해왕조엔 "이 왕은 삼황 중 첫째라고 운한다.(此王乃三皇之第一云)" 이라고 쓰여있다. 아내인 운제부인이 농업의 신으로 여겨지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삼황 중 둘째인 신농과 유사하지만. 그리고 복희여와의 창세신적 면모와 남매혼 묘사를 감안하면 복희=박혁거세에 대응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3] 아직 중국에서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기 때문에 흔히 아는 조선 스타일의 종묘와는 다르다. 그런 것은 통일신라 대에 가야 생긴다.[4] 예를 들어 아들인 남해 차차웅이 아버지인 혁거세를 상대로 왕위를 계승받는 중이라며 쿠데타를 일으켰을 수도 있다. 당장 후대의 후백제만 봐도 신검견훤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위에 올랐다. 석탈해한테 국정을 맡긴 것도 남해 차차웅이 일으킨 쿠데타의 논공행상에 석탈해의 지분을 인정했다거나 쿠데타 직후의 혼란상을 석탈해가 잘 수습해서 공로를 인정하여 국정을 맡겼을 수 있다.[5] 저 2가지 일을 빼고 국왕이 할 일이 몇 가지나 남는지를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외교지역 순방 정도밖에 없고 굳이 왕호를 무당 칭호로 한 것을 보면 제사 정도는 치렀을 수도 있겠다. 사실상 남해 차차웅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 정도로 실권이 없었다.[6] 호공, 탈해, 김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