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공방전

 


'''나주공방전'''
'''시기'''
903년~935년
'''장소'''
나주 일대
'''원인'''
견훤과 나주 호족들의 갈등으로 인한 나주 호족들과 궁예의 동맹.
'''교전세력'''
후고구려ㆍ고려
후백제
'''지휘관'''
'''궁예
김언
왕건
종희
오희
나총례
강선힐
흑상
김재원
강공훤
김길
구존유
유금필
향예
왕만세
능선
충질
오담
구진
박수경
견서
권직
인일'''
'''견훤
능창[1]
지훤
구도
구단서
상귀
상애'''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후고구려의 승리.
1. 개요
2. 전개
3. 평가
3.1. 나주 정벌이 가능했던 이유


1. 개요


903년, 909~914년 동안 나주(羅州, 현 전라남도 나주시)를 둘러싸고 태봉후백제 사이에서 벌어진 후삼국시대의 전투.

2. 전개


당시 금성군이라고 불렸던 나주는 남쪽 지역의 곡창 지대 역할 뿐 아니라 대중국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해 주었다. 이 점을 노린 궁예왕건을 파견해 인근 호족들과 연합하여 진도와 나주를 공격,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사실 현대의 인식으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전투로 그 이유는 후술하겠다.
903년의 나주 정벌은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903년에 나주가 이미 고려 땅이었다면 909년 이후에야 벌어진 나주 공방전에 대한 설명을 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 903년에는 기습으로 확실히 점령했고 909년에 이르러 나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다시 투입된 거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나주를 공략한 건 909년이라는 의견, 공략은 했으되 성 단위 점령이 아닌 주변 섬들에 영향력을 심은 정도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 그 시기에 왕건의 수군이 그 지역에 머물면서 오월로 보내는 후백제의 선박을 나포하기도 했고, 903년에 양주(현재의 양산) 지역의 호족 김인훈이 구원을 청하자 뱃길로 가서 구원하기도 했다는 걸 보면 아예 거짓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고 북쪽으로도 계속 공격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견훤도 이 지역을 탈환할 계획을 쉽게 세우지 못했을 듯하다.
태봉의 수군이 주둔한 곳은 현 경기도 개풍군인 정주로 왕건은 태봉의 수군을 책임지는 총 대장으로서 알찬 종희와 김언을 부장으로 2500명의 병력으로 진도를 함락, 곧이어 고이도에 상륙하였다. 견훤은 이에 맞서 덕진포로 나아갔고 여기서 두 영웅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면서 공격을 명령하였고, 백제는 이 기세에 밀려 일시 퇴각, 왕건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화공을 벌였다. 이 때 백제군의 전사자는 500여명에 달했고, 견훤은 작은 선박을 타고 황급히 몸만 빠져나갔다고 한다.(909년 덕진포 전투)
태조 왕건에서는 이 전투를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대놓고 베껴 묘사했고, 남동풍을 이용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때 제대로 된 포상이 없었는지 부하 및 병사들의 사기가 꽤 떨어져 있었다. 특히 나주에 계속 주둔한 김언 등은 더 했던 듯. 결국 견훤이 나주를 탈환할 움직임을 보이자 다시 내려가게 되는데 이때 첩자를 풀어 그 유명한 '''수달'''을 생포하게 된다. 수달은 그때[2] 매복해서 왕건을 잡으려 했는데 왕건의 계책에 의해 되려 사로잡히고 궁예에게 끌려갔다. 이때 궁예가 신나게 가지고 놀다가 죽인 걸로 봐서는 태조 왕건에서의 묘사된 것 ''' '''처럼 실제론 견훤의 부하였든가 이래저래 태봉을 많이 괴롭힌 듯. 일단 기록상으론 백제와 별개의 해상세력이었다.
아무튼 910년에 견훤은 직접 보기 삼천을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하지만 왕건이 파견되어 수군으로 백제 진영을 기습, 물러나게 만들었으며 이듬해인 911년에는 무진주를 공격하는 등 꽤 기세가 커졌다. 이때 무진주의 성주였던 지훤은 성을 굳게 방어하여 태봉군이 물러나게 하였다.
912년에는 다시 덕진포에서 직접 나주로 내려온 궁예가 견훤의 수군과 맞서 싸웠으며, 914년 다시 나주로 가서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즈음에는 확실히 나주와 서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후에 대야성이나 강주 등에 병력을 보낸[3] 기록 등을 보면 두고두고 잘 이용해 먹은 것 같다. 사실상 한반도 주변 바다를 완전히 지배한 것.
물론 견훤은 후에 대반격을 준비하여 나주의 공격에서 꽤 성과를 거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견훤이 다시 나주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보여지는 때는 무려 20년 후인 929년으로, 철저한 준비와 노력 끝에 다시 해군력을 양성하여 나주를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4] 정말 근성있는 공방전이었다.
그 후 후백제의 나주 탈환 성과는 좋아서 나주를 빼앗아 주변 제해권을 확보한 후인 932년 9월, 여세를 몰아 장수 상귀를 예성강 유역으로 보내 고려 군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고려가 정성들여 키운 군마 300필도 빼앗는다. 심지어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려 왕궁을 포위공격[5]하는 등 고려를 크게 위협하였고 바로 다음 달인 932년 10월에는 장수 상애를 보내 고려의 대우도와 저산도 등을 불바다로 만든다. 이에 고려 측은 수군 총사령관인 왕만세를 출진시키지만 상애의 백제 수군에 패퇴당한다.[6]
이렇듯 나주는 당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훗날 나주를 유금필에 의해 도로 빼앗겼다는 설이 있다.[7]

3. 평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그 시작부터 자세히 묘사하며 왕건의 전략전술을 보여주며 그가 궁예 치하에서 어떻게 잘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로 내세운다.[8] 한편 나주는 이성계의 동북면처럼 왕건의 영지가 되어 궁예에게 의심 등 압박을 받을 때마다 백제의 위협을 핑계로 나주로 향하는 걸로 묘사된다.
실제 학계에서의 평가도 이와 비슷한 편. 왕건이 직접 갔든 부하만 보냈든 한두 번 정벌이 아니라 계속 수군력을 투입하여 서남해와 각 섬들을 점령하면서 백제를 괴롭히고 이곳을 기점으로 남해에도 병력을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일차적으로 나주 평야와 그 부속도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로 인해 나주 평야의 준수했던 농업 생산력을 상실하고, 영산강 수운과 서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어버리면서 이를 통한 교통과 상업의 손실도 결코 적지 않았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끊겨서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었다.[9] 드라마에서 묘사된 염전을 통한 이익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소금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것을 잃은 손실도 제법 되었을 듯. 이후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까지 백제 수군은 없다시피 하였다.
왕건의 첫째 부인이 수군이 주둔했던 정주 출신 류씨고, 둘째 부인이 나주 출신 오씨라는 걸 생각하면 왕건 스스로에게 이 작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느낄 수 있다. 여러모로 후삼국시대 중반 최고의 사건.
이후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 나주를 재점령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후에도 친고려적인 성향이 사라지진 않았는지 견훤이 고려로 탈출할 때 나주를 이용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 고려에서 국가에서 주관하는 산신제를 지내는 사당 5곳이 있는 산은 고려 수도 개성 송악산과 나주 금성산 뿐이였다.

3.1. 나주 정벌이 가능했던 이유


아무래도 현실적 인식과 가장 괴리가 큰 부분일 것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견훤의 건국 기반이 되어준 나주 호족 종례와 오다련[10]의 박탈감에서 원인을 찾는다.
후백제는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를 기반으로 코 앞인 무주(광주)를 점령해 세워진 나라인데 이후 도읍이 완산주로 옮겨가면서 중심지에서 멀어진 나주 호족들의 박탈감이 심해졌다. 세금을 지속적으로 올리며 압박을 주기도 했거니와 수달을 내세워 사실상 군정을 실시하며 호족들의 자치권을 무시하고 아랫 사람 취급해 모멸감이 심했다. 이게 쌓이고 쌓여 태봉/고려로 돌아서는 걸로 묘사했다. 나주 공방전이 시작된 903년은 궁예의 폭정이 미치기 전이라서 별 부담이 없기도 했고. 또한 전남 중동부 호족(순천의 박영규와 김총, 광주의 지훤 등으로 일부는 견훤과 인척이 된다.)들과 이해관계가 더 가까운 견훤에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왕건의 집안이 경기만 일대의 해양 호족인 점으로 볼 때 영산강 일대의 해양 호족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당시 서남해 일대는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지인 청해진의 근거지일 정도로 해상세력이 융성했던 지역이다. 이후에도 왕건은 2대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의 고장인 나주에 특별기구인 나주도대행대를 설치하고 시중(국무총리급)을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으며, 현종은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하던 국제행사인 팔관회를 나주에서도 개최하게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이전 삼국 시대, 아니 목지국이 맹주였을 시절부터 진행되던 전남 남서부 VS 전남 중동부 & 남해안과의 대립과 갈등 양상이 정확히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원삼국-삼국 시대의 대립은 백제의 협박과 회유를 통해 해소되었지만, 후삼국 시기에 이르러 견훤과 왕건을 끌어들인 군사적 대립으로 촉발된 것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호남 지역이 6세기 중엽까지도 백제의 통치력이 닿지않는, 독자세력으로 존재했다는 인식인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인식이다.
우선 백제가 그 시초부터 마한과 별개로 존속한 적이 없고, 목지국이 망한 후 엄연히 후기 마한의 영도국은 백제였음은 차치하더라도, 호남 자체에 단일 세력권이 자리잡은 적이 없었고, 실제로는 세 별개의 고고학적 세력이 서로 견제하며 존재했음을 모르는 나머지 생기는 편견이다. 따라서 호남 전체가 백제와 마한으로서 늘 항쟁했다는 건 심각하게 잘못 알려진 설이다.[11] 다만 마한 지역이 워낙 넓고 백제가 고구려와도 쟁패해야 했으니 통합이 늦어지다 직접 지배로 편재해서 지배한 게 전남 중동부 및 남해안은 150년 정도, 전남 남서부는 120년인데, 직접 지배 시기만 영역이었다고 해석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인데다 직접 지배 시기도 120~150년이면 결코 짧지 않다.[12]
이 지역은 한성백제가 처참하게 무너진 시기에 잠깐 다른 길을 찾아보면서 신라, 가야, 왜 등과 제휴했지만 이런 외도는 불과 20~30년을 넘기지 못했고 그동안에도 백제에게 군사적 도전이나 대결을 시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같은 시기에 가야는 거꾸로 백제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하면서 신라를 견제했으니, 애초에 영산강 세력의 외도는 성공할리가 없었다.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된 것도 어디까지나 백제와의 적절한 타협과 회유를 통해 가능했으니[13], 그 시대 이후로도 전남 서남부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퇴락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통합 과정에서 예전의 부하 나라 백제국에게 격렬히 저항한 천안 목지국 세력이 백제의 적극적 견제를 받아 크게 쇠락해버린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의미가 큰 차이였다.[14]
그런 와중에 통일신라 시기에 이르러 변화가 생기는데, 통일신라가 전남 중동부와 남해안에 의도적으로 원신라인들을 대거 사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력을 키운 것이 역시 백제가 영산강 유역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키운 거점인 무진주, 즉 호남 중동부 내륙 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영산강 세력과 호남 중동부 세력이 대립 관계에 들어가는데, 그런 상황에서 호남 중동부 일대를 중심으로 백제를 재건하겠다는 신라 군인 견훤의 주장이 영산강 세력에게 전혀 먹히지 않은 건 당연했다. 물론 견훤이라는 인물에게 후기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도와 후기백제의 제2수도권이었던 전주-익산 일대가 견훤의 손을 들어줬고, 꾸준히 견훤에게 호의적인 면을 보였던 걸 보면 명분은 충분했으나, 적어도 원래부터 마한-백제 영역 중 하나였던 영산강 세력이 보기엔 전혀 매력도, 설득력도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영산강 세력은 마진-태봉-고려의 해상 세력과 제휴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해적들의 경우 무정부주의적인 속성이 강한데 특히 신라 말은 해적이 활개 치던 시절이었다.
견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순천 부근의 해적을 소탕하면서였고, 왕건 역시 해적들을 소탕해 가면서 나주를 노릴 수 있었다.[15] 친견훤 성향의 반독립세력으로 보이는 해적두목 수달이 서남해에서 활개쳤던 것도 이걸로 설명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서해안 지역, 특히 전남 해안 일대는 과거 청해진이 위치할 정도로 동아시아 물류의 거점으로도 통했는데 이들이 쥐고 있는 막강한 경제력을 감안하면 제휴를 하면 했지 굳이 누구를 왕으로 모실 필요성이 없었을 수 있다.
이처럼 나주공방전은 초기백제시절부터 내려온 온갖 정치공학적 방정식이 응집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1] 사서에는 압해현의 해적으로만 나오기에 후백제 소속이라는 말이 없다.[2] 태조 왕건에서도 거의 본명으로 안 나오지만 본명은 능창이다.[3] 나주를 통하여 남해, 진주를 거치는 수로를 이용했다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개성에서 육로를 통해 경남 합천으로 대규모 부대를 보내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충북 보은, 영동 일대는 주로 후백제의 세력권이었다. 해당 지역들은 주로 후백제가 경북 방향으로 진출하는 루트였다.[4] 구체적인 전투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사 열전 유금필전에 서기 935년에 해당하는 해에 왕건이 6년 전에 후백제에 나주를 잃었다는 기사가 있어 역산하면 929년에 후백제가 나주를 탈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박수경이 사력을 다 하며 왕건을 구출한다.[6] 급기야 누명을 쓰고 귀양 가 있던 유금필이 의병을 모으고 어선을 전투함으로 급조해서 출진하였고, 상애의 백제 수군을 물리친다.[7] 후백제가 한창 후계자 문제로 소란스러울 때 유금필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는 설인데 기록 상에는 공격했다고만 언급되어 있지 실제로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견훤이 훗날 신검에게 폐위된 이후 고려로 도망칠 때 나주에서 배를 타고 고려로 건너간 걸 보면 어쩌면 고려가 탈환했을 수도 있으나 확실한 기사가 없다. 탈환은 못하였으나 나주 지역의 일부 해안지대를 고려의 영향권에 넣었다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8] 아예 이 작전을 위해 왕건을 잠시 파직시키며 '''백제의 내부에 고려의 깃발을 세운다'''는 게 크게 묘사된다.[9] 견훤은 후당과 오월, 왜, 거란 등 외국과 다각도로 외교전을 벌이며 그들을 통해 후삼국의 전란기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모두 각자 사정이 있는지라 실익으로 이어지진 못했다.[10]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버지[11] 근초고왕이 전라남도 해남에 비정되는 침미다례를 '도륙' 했다는 묘사는, 여전히 백제의 주도적 위치에 동의하지 않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주도 소국을 무력으로 완전 해체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도 4세기 중후반 경부터 그 일대는 어떤 주도적인 세력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주도한 바 없이 백제의 일정한 견제를 받아 성장이 저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성 함락 이후에야 이 속박이 약간 풀리지만 오래가진 못했다.[12] 그러면 해당 지역들을 아예 이백 년 넘게 직접 지배한 신라는 뭐냐고 하겠지만 그건 그만큼 신라의 지방민 회유와 포섭책이 백제, 고구려만도 못했다는 학설의 확증에 불과하다.[13] 5세기 말~6세기 초부터 이 지역 분묘는 그 규모가 크게 줄긴 했어도, 직접 지배로 편제되었다고 기록된 시기 즈음부터 오히려 백제 중앙 조정에서 하사한 위신재가 더욱 많이 발굴되는 상황이다. 이는 직접 지배 영역으로 더 일찍 들어온 다른 전남 지역보다도 활발한 양상으로, 백제가 영산강 유역 세력을 무력으로 찍어누르지만은 않았다는 강력한 반증이다.[14]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오히려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백제에게 저항하다 그 주도력을 잃어버린 채 백제에 의한 인위적인 세력 개편이 의심되는 양상이 고고학적으로 꽤 관찰되는 양상이다. 목지국의 저항이 생각보다 만만찮았던 반증이다. 반면 영산강 일대는 근초고왕 시기로 추정되는 때에 영산강에서 가장 강했던 소국이 완전 해체되어 타멸되어버린 후론 그런 모습이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15] 실제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은 패서지역의 대표적인 해적집단의 수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