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
[clearfix]
1. 개요
'''태봉'''(泰封)은 후삼국시대의 왕조 중 하나로 한반도에 위치한 전제군주정 국가이다.
건국 당시의 초기 국호는 '''고려'''였지만, 왕건의 고려와, 고주몽의 고(구)려와 구분하기 위해 보통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편.
899년 궁예가 한 때 자신의 상관이자 한반도 중부의 군벌인 양길을 비뇌성 전투에서 제압하고 사실상의 국가를 세웠으나, 정식 건국 년도는 901년이었다. 이 왕조의 유일한 군주인 궁예는 특이하게도 국호와 연호[5] 를 자주 바꿨다. 901년 고려라는 이름으로 국가 건립을 선포했다가, 3년만인 904년에는 '''마진#s-3'''(摩震)으로 바꾸었고, 7년 뒤인 911년엔 또 태봉(泰封)으로 바꿨다. 그러나 918년 왕건의 역성 혁명으로 실각하면서 국호는 다시 고려로 회귀했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이 나라를 '''후고구려'''라고 불러왔다. 광복 이후의 한국 사학계에서도 그 관습을 따랐지만, 2000년대 들어서 거의 태봉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는 편. 일단은 태봉이 그나마 가장 오래 쓰이고 마지막까지 쓰였으며, 왕건의 정통성을 위해 후고구려라는 표현을 썼던 고려 때와는 달리 태봉도 고려도 사라진 지금은 그런 걸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
국호에 몇 차례 변동이 있었을 뿐, 첫 수도인 송악(개성)은 물론이고 지배층의 세력과 국가 조직이 이후의 왕씨 고려왕조로 완전히 계승된 고려의 실질적인 전신 국가였다. 이는 궁예가 왕건을 필두로 하는 패서 호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 애초에 첫 국호조차 원래 고려였으니,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한 것도 그저 '''원래대로 국호를 되돌린 것'''에 불과한 것이다.
태봉의 강역은 역사적으로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를 모두 차지한 건 물론 나머지 평안도[6] , 함경도[7] , 경상도[8] , 충청도[9] , 전라도[10] 등등 전국 팔도 모든 지방에 적어도 조금은 영토를 걸치고 있다.
한반도에서 이전 국가로부터 국가 조직이나 다른 여타 국권을 인수인계 받지 않고 건국된 마지막 국가다.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치하의 식민지 조선이나 미군정, 소련군정, 대한민국, 북한 등을 모두 포함하여 태봉 이후에 한반도에 등장한 모든 국가들은 자발적이든 강제로든 이전 국체로부터 국권을 넘겨받아 건국되었다.
2. 역사
894년, 후삼국시대 초반의 군벌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는 양길의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강원도 지역 정복에 착수했다가, 치악산을 중심으로 일어나 주천, 나성, 울오, 어진에 이어 명주(강릉)에 입성함으로서 북원경(원주)를 중심으로 한 호족 양길에게서 독립하였다. 명주에 입성할 때 그 무리가 3천 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2년 뒤인 896년에는 승령, 임강, 인물현 등 한주의 패강진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공암, 검포(김포), 혈구(강화)를 함락시켰다.
899년, 양길이 궁예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자 비뇌성 전투 끝에 승리, 이듬해 900년에 양길의 세력을 병합하면서 한반도 중부의 유일한 강자가 되었다. 901년 국호를 고려로 정했으며, 약화된 신라를 사이에 두고 견훤의 후백제와 후삼국시대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다. 903년과 909년 ~ 914년 사이에 벌어진 나주 공방전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904년과 905년에 각각 웅주, 상주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상주 지역에서 견훤을 물리치면서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후삼국시대 최강의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11] 그리고 평양성성주 검용, 증성의 명귀 등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북쪽으로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궁예가 915년부터 본격적으로 광기를 부리기 시작하면서 태봉의 확장은 멈췄고 궁예에 대한 민심은 악화되어갔다. 실제로 고려 건국 초기에 도적들이 들꿇어서 왕건이 사절들을 보내 회유시킨 기록이 존재하며, 윤선(尹瑄)이라는 인물은 궁예의 재위기간 말에 이탈하여 골암성(강원도 안변 일대)로 도주하여 독자세력화해버렸다. 결국 918년 6월,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멸망하였다.
태봉의 영토 대부분은 고려가 그대로 승계했지만 웅주(공주)와 운주(홍성) 일대의 호족들이 후백제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고, 명주의 김순식, 상주의 아자개, 하지성의 원봉(元逢), 명지성의 성달 등의 호족들이 잠시나마 독자세력으로 할거했다가 다시 고려에 귀부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한반도 내 이웃 국가인 후백제, 신라와 적대하였으며 905년 이후 신라를 '''멸도'''로 부르며 투항하는 자들을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 뜽금없는 반신라 정책이야말로 패서 호족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못할 궁예의 중요한 기행 중 하나'''였다. 영역 전체가 신라의 밀도 높은 직접 지배를 겪은 끝에 진골 귀족의 수취와 지방 혼란이란 폐혜를 온몸으로 겪어 반신라 감정이 강했을수밖에 없는 옛 백제 지역과는 달리, 패서 지역은 신라가 몇몇 중요 지역을 장악해서 영향력만 유지하는 간접지배 형태로 만족했던 터라 딱히 신라 중앙 정부에게 입은 피해는 없었고 신라말 그 영역 전체에 퍼진 말세적 분위기도 이들 입장에선 다른 지역 얘기에 불과했다. 그러니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이들을 족족 죽여대는 궁예의 이런 행동은 이들 입장에선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불필요한 미친 짓에 불과한, 한마디로 장기 집권에는 하등 도움이 안되는 실수였다.[12]
한편 915년에 거란에게 고려라는 국명으로 사신을 보내는 동시에 보검을 선물로 주었다는 사실이 요사 이외국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낸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거란이 북방을 넘어선 중원의 신흥 세력으로 뜨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우호 관계를 맺으려던 의도로 풀이된다.[13] 한편 거란의 적국이었던 발해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적어서 불명.[14]
존속 기간이 후백제보다 여러모로 짧다. 궁예는 기훤, 양길의 수하를 거쳐서 894년에 명주를 차지하면서 독자세력화한것과 달리 견훤이 스스로를 '도독'이라 칭하며 독립적 세력을 형성한 것은 궁예보다 2년 빠른 892년이었고, 견훤이 국호를 선포한 것도 900년으로 궁예보다 1년 빠르다. 멸망은 20년 가까이 늦다. 보통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끝을 후백제의 흥망을 기점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후삼국 판도 자체로 보면 비교적 빠르게 퇴장했다.
3. 국호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국호를 정식으로 고려로 변경했다.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한 발해의 군주들도 일본에 '고려 국왕'을 칭했기에, 궁예도 '고구려'나 '후고구려'[15] 로 국호를 정하지 않고 '고려'라고 했다. 다만 고려 시대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자신들의 고려와 과거의 궁예가 세운 국가를 구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는 표현을 썼다.
다만,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3년에 지나지 않으며, 이후 '마진'과 '태봉'이 각각 7년으로 '고려'라는 국호를 썼던 때보다 훨씬 길었다. 따라서 태봉을 '후고구려'는 물론 '고려'라는 국명으로 부르는 것도 어색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후세에 '후고구려'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부식 등의 삼국사기 편찬진들이 굳이 태봉의 국호를 고려라고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궁예를 건국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6] 왕건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궁예의 왕조는 독자성이 없는 '고구려' 잔당 세력처럼 묘사했다. 즉, 궁예의 '태봉'은 '후고구려'가 됨으로써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의 매개체로 격하된다. 실상 3년 쓰인 '고려'를 '후고구려'라 칭하면서, 각각 7년 쓰인 '마진'이나 '태봉'으로 부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궁예를 '마진 왕'이나 '태봉 왕'으로 대우하면 왕건은 명백하게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통성을 찬탈한 자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국호를 없앰으로써 궁예의 나라는 독자적인 왕조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물론 태봉 자체가 궁예 1대로 단명한 왕조인 것도 이러한 격하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 이유다.
게다가 태봉을 일부러 '후고구려'라고 부른 것은 왕건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통해 '후삼국'을 정의하고, 그 삼국을 통일한 것이 왕건의 고려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시각도 있다.
궁예가 나라 이름을 바꾼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삼국 중 하나 고구려에 한정된 고려 국호 대신 더 넓게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넓은 의미를 찾아 바꾸었다거나, 나라를 세우는 초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지속적인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는 고구려계 패서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고구려색이 옅은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다. 궁예는 고구려 유민 의식을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용했지만 궁예의 혈통은 기록상 엄연히 신라 왕족이었고, 토착호족 출신인 왕건과는 달리 고구려 유민 의식에 귀속이 강하진 않았다. 아래 단락에서 설명하는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옛 고구려와 직접적인 연고가 없는 철원으로의 천도도 그 일환으로 볼 여지가 있었으며, 이런 고구려색 빼기 작업은 고구려 유민 의식을 갖고 있던 패서 호족의 불만을 샀고 결국 궁예가 그들에 의해 몰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 수도 철원성
5. 역대 국왕
6. 연호
7. 관제
904년 건국할 때 광평성, 병부, 대룡부, 수춘부, 봉빈부, 의형대, 납화부, 조위부, 내봉성, 금서성, 남상단, 수단, 원봉성, 비룡성, 물장성, 사대, 식화부, 장선부, 주도성을 두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부서는 광평성으로, 신라의 제도에 기초하여[19] 명칭을 태봉식으로 고친 최고 관부였고 후일 고려의 중서문하성에 대응되는 포지션에 있었다. 남아있는 구체적인 기록이 적어 신라의 제도에 기초했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은 신라의 집사부와 유사한 기능을 했다는 설과, 신라의 화백회의를 계승해 호족이나 유력자의 의견을 수렴하여 의사결정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광평성의 장관은 '광치나'라고 하였는데 신라와 초기 고려의 시중에 대응한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병부로, 군사를 담당하던 부서였다.
대룡부는 고려의 창부[20] , 수춘부는 예부[21] , 의형대는 형부[22] , 납화부는 대부시[23] , 조위부는 삼사[24] , 내봉성은 도성[25] , 금서성은 비서성[26] , 남상단은 장작감[27] , 수단은 수부[28] , 원봉성은 한림원[29] , 비룡성은 태복시[30] , 물장성은 소부감[31] 에 대응한다. 사대는 통역관을 양성했고, 식화부는 과수를 심었으며 장선부는 성과 해자를 수리했고 주도성은 그릇을 만들었다. 위 주요 부서 중 대부분이 신라의 관제와 대응하며, 이는 후대의 고려로도 이어진다.
이런 관부 체제는 어느 시점에서 개편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이 집권하고 6일 만에 내린 포고나, 그 외의 역사기록을 보면 위 제도와 비슷하지만 다른 관부들이 언급되기 때문. 우선 '순군부'가 설치되어 서열 3위로 올라섰으며, 내봉성 역시 서열 2위로 상승했다. 또한 내천부, 진각성[32] , 백서성, 내군이 추가되었다. 내군은 궁예의 친위대로,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에 나오는 그 내군이다. 한편 대룡부가 창부로, 수단이 도항사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관계는 9품제였는데,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으로 아홉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 건국 즈음에는 대대재상, 중부, 태사훈, 보좌상, 주서령, 광록승, 봉조판, 봉진위, 좌진사 로 명칭이 바뀌었다.
8. 논란
8.1. 마진의 어원 논란
궁예가 7년간 사용한 국명인 마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엇갈리고 있다. 일단 삼국사기 원문에서는 마진으로 지었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의미에 대한 기록은 일절 없다.
기본적으로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약자이며 '대동방국(동방의 큰 나라)'이라는 뜻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 마진이 마하진단의 약자라고 명시한 사료가 있는 건 아니며, 단지 미륵을 자칭한 궁예 정권의 특성이나 마진이란 한자에 미루어 추정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하와 진단 모두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음역한 말로 불교에서 쓰는 단어들이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시니타나(Cinitana)의 음역으로 동방을 뜻한다.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나레이션이 '대동방국을 뜻한다' 라고 못박아서 그렇게 아는 사람도 있지만 확실한 정설은 아니다.
한편 마진이 단순히 마한(馬韓)과 진한(辰韓)을 합칭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물론 흔히 쓰는 마한과 진한의 '마', '진' 자와 한자가 다르지만 이 이름들이 본래 한자어가 아니라 순 우리말이었기 때문에 표기상 같은 발음의 여러 가지 한자로 표기되었다는 주장이다.[33]
마진이라는 국호가 정말 마한과 진한을 합친 것이라면 고구려 계승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천 년 왕조인 신라를 흡수하겠다는 의지도 아울러 천명한 것일 수 있다. 그 전에 사용한 '고려'라는 이름은 옛 3국 중 고구려 1개국만 포괄하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크기 때문. 물론 현대 역사학적인 지식으로는 고구려는 삼한이 아니었고 마한이 백제로, 변한이 가야로, 진한이 신라로 흡수됐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달라서 삼국시대 후기부터 마한이 고구려, 변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가 됐다는 시각이 퍼져 있었다.[34] 따라서 "마진 = 마한 + 진한"이라면 "마진 = 고구려 + 신라"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된다.
8.2. 태봉국은 한국사의 뿌리인가?
고려가 진정한 한반도의 통일 왕조라면, 고려의 전신으로서 태봉이 한국사의 뿌리라고 볼 수도 있다는 주장을 일부에서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스갯 소리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래도 진지하게 보는 입장에서 몇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있다.
첫번째는 조선 왕조에 있다. 조선은 고조선에 뿌리를 두고 이름을 정했으며,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한'은 삼한을 기원을 두고 있다고 명시했다. 무엇보다 태봉 자체는 한국사에서 그다지 오래 존속한 정권이 아닌데다가 민족사에 기여한 바도 적다.
둘째로, 태봉과 동시대에는 고구려의 또 다른 후신으로 자처하는 발해가 있었다. 발해는 태봉이 고려로 바뀐 8년 후인 926년이 되어서야 거란의 요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이후로도 발해부흥운동으로 정안국(938년 ~ 986?년), 후발해(926년 ~ 938년) 등이 꽤 유지되었다. 고려를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 왕조로 보는 건 후삼국은 물론이고 발해의 세력도 어느 정도 흡수한 것도 있다. 태봉은 고려와 달리 멸망 직전까지 강성한 모습을 보인 발해를 흡수하지 못했다.[35]
그러나 태봉과 고려 사이의 정부 혹은 국가 연속성은 결코 부인할 수 없으며, 그저 영토 크기와 당위성에만 집착한 나머지 발해만을 고구려의 '진짜' 후신이라고 보는 시각 또한 분명 틀려 있음 또한 명심해야 한다. 발해는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로 인정받지 못했고, 또한 유독 만주 영토가 실질 지배 영토에서 없다는 이유로 궁예가 깃발을 먼저 들어올린 고려가 발해보다 고구려 계승성이 덜하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가 없다.[36] 고려와 조선 사이의 국가 연속성은 기록으로 남아있으므로 확실하니, 태봉으로부터 연속성을 찾는 얘기는 위에서 든 이유들 탓에 우스개가 될 수밖엔 없지만 완전히 허튼 소리로 보기에는 또 어려운 형편이다.
8.3. 태봉국은 신라를 계승한, 고려와 신라를 이어주는 국가인가?
그렇다면 신라를 계승한 국가로서 한반도의 왕조들 사이에서 고려와 신라 사이의 징검다리로서의 의미라도 있는가? 그렇지 않다. 태봉의 인적, 문화적 토대는 상당수가 신라(정확히는 통일신라)에서 왔으나 태봉 건국 자체가 기존 신라 체제 자체를 부정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인데다가 명백히 신라로부터 떨어진 별도의 국가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궁예를 지지한 초기 호족 박지윤의 아버지 박직윤의 경우는 신라가 혼란에 빠진 하대에 스스로를 대모달[37] 이라고 일컫고 있다. 하나의 사례로 일반화는 어렵지만, 초기 궁예를 지지한 호족 세력은 고구려계이고, 남북국시대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살아왔으며,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서는 반독립 상태로 고구려 계승 나아가서는 부흥을 원했다고 볼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게다가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왕자라고 되어 있으나 궁예는 한번도 이를 내세우지 않았다. 도리어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했으며, 심지어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기 직전인 905년부터 신라를 '멸도(滅都)'[38] 라고 부르게 시켰다. 덤으로 일찍이 영주시 부석사에 있는 신라 왕의 어진을 칼로 찌르는 등의 행동을 했으며, 멸도라고 부른 이후로는 신라에서 투항한 인사들을 죽였다.[39] 무엇보다, 신라가 태봉이 망한 뒤에야 망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신라는 9주 5소경에서도 옛 삼국의 영토를 각각 3주로 나누어 다스렸듯이 삼국을 완벽하게 동화시키지 못했다. 조상 대대로 신라인일 개연성이 농후한 상주 출신 신라 군인 견훤이 백제 의자왕의 복수를 내세우고, 역시 신라 왕자라는 궁예가 고구려 계승을 선언했을 때 토착민에게 지지를 받았음 자체가 여전히 고구려인, 백제인이라는 인식이 남아있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신라가 옛 고구려의 제2수도권인 패서 일대를 흡수하는 시기가 늦었고, 흡수했어도 상당한 자치가 허용되었으며, 또한 그 지역은 대조영의 발해 건국 당시 영주에서 탈주하던 고구려 유민들이 탈주 중 방향을 틀어 합류했던 상황 등은 이 대목에서 특기할 양상이다.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와 청나라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 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중심 세력과 한참 떨어져 방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변방 여진족들이 원나라와 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 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 이 상황 역시 꽤 비슷했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궁예와 견훤의 출신이 분명 신라지만, 기반은 고려계, 백제계란 것이다. 신라가 지방요충지 장악을 위해 나름대로 여러 이해가 가는 조치를 하였고 백제의 제2중심지였던 전북일대에는 고구려 유민들을 사민했던 게 그것인데, 사비와 익산이 아니면 백제의 중심지가 아니므로 백제와 무관하다는 건 대단히 비상식적인 해석이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익산에 보덕국인들을 사민했다고, 갑자기 그 시부터 익산과 백제와의 관련성이 거의 없어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백제인을 집단학살하고 심기라도 했단 말인가? 게다가 익산에 심었던 보덕국인들은 신라가 보덕국를 해체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시 전라남북도 일대로 뿔뿔히 흩어져 사민되거나, 일부는 아예 서라벌로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익산에 그대로 집단 정체성을 유지하며 남아있게 되지 못했다는 말. 보덕국인들이 고구려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백제유민의식에 포섭된 건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 왕건이 고려와의 연계성이 불분명하다는 얘기는 고려 왕족과의 직접 연결성만을 찾는 견해인데, 이렇게 전 왕조와의 직접적 혈통만 강조하는 괴상한 생각은[40] 애초에 세계사적 견지에서 봤을 때 성립불가한 궤변이다.
또한 고려 '''무신정권''' 시대까지도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기 서경(평양), 담양, 동경(경주) 지방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계승을 외치며 반기를 든 민중 반란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으로, 이는 비록 명분상 계승을 외쳤다고 하더라도 각 지방민들에게 아직 과거 삼국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매우 컸다는 증거이다.[41] 이에, 본격적으로 한반도 전체가 하나의 한민족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들어선 게 신라의 삼국통일도 왕건의 후삼국통일도 아닌 여몽전쟁이라는 주장은 여기에 주로 기반을 둔다. 이런 해석 하에서 태봉은 주요한 계승 국가로서 설 자리가 없다. 김부식 등 삼국사기의 편찬자, 사관들이 견훤과 궁예를 평하며 '''“태조에게 백성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라고 단언한 것은 그 점에서 의미가 있다.
9. 인물
- 종간
- 신훤
- 원회
- 은부(적철)
- 강비
- 환선길
- 염상
- 이흔암
- 임춘길
- 아지태#s-1
- 김순식(훗날의 왕순식)
- 금대
- 장일#s-1
- 선장
- 석총
- 형미(선각대사 / 先覺大師)
- 궁예
- 왕건
- 신혜왕후
- 장화왕후 오씨
- 왕무
10. 같이보기
[1] 다만 위 지도는 태봉이 차지했던 나주가 후백제 영토로 돼 있고, 독자 세력이었던 아자개의 영지가 표시돼 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2] 궁예 특유의 이질적인 종교 지도자적 색채에서 보아 신권정치 기반의 전제군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 비슷한 국가로 태평천국이 있다.[4] 궁예의 성이 진짜 궁(弓)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그래서 국성(國姓)은 알 수 없다.[5] 무태, 성책, 수덕만세, 정개.[6] 평양 등의 평남 남부 일대[7] 함경남도 영흥 이남 지역[8] 상주를 비롯한 경상북도 북서부 일부[9] 청주시, 충주, 천안, 홍성 등을 포함한 북부 지역[10]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하구의 월경지[11] 반면 후백제는 901년과 917년 대야성 공격이 실패했고 나주공방전으로 무진주 일부를 상실하였고 인접한 웅주, 상주 지역으로의 진출도 태봉에게 선수를 빼앗기거나 격파당했다.[12] 훗날 궁예 대신 집권하는 왕건이 신라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한 건 물론 왕건의 개인적인 판단과 성향이 큰 원인이지만, 그 전에 패서 호족이 놓인 이런 역사적 상황도 무시못할 이유였다.[13] 이렇게 거란과 꾸준히 외교 관계를 맺었던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중원 국가와의 외교를 중시하면서 거란과는 철저히 척을 졌다. 자신의 유조인 훈요십조에 거란을 배척하라고 남겼을 정도.[14] 일각에서는 915년부터 꾸준히 거란과 사신을 주고 받은 기록을 통해 당시 거란 측과 대립하던 발해와 자연스레 소원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진 추측의 영역일 뿐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15] 역사 서술에서 후(後)+국명의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후대의 사가들이 구분상의 용이를 위해 붙인 일종의 가칭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 역사 중 오호십육국, 오대십국 시기의 무수히 난립했던 '후(後)'자가 붙는 국가들은 당대에는 전부 본래 국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영토나 중심지 변화로 방위를 붙인 국명도 마찬가지(서주, 동한, 동진, 남당,남송 북위)[16] 당대의 외국 사서인 요사나 남당서에는 당대 태봉의 국명을 고려라고 정확히 명시하고 있다. 참고로 요사는 태봉이 거란에 사신을 여러 차례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다.[17] 고대 한국에서는 오행설에 따라 한 나라의 천명이 오행 상생의 순서로 이어지며 흥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박씨 신라는 목덕, 고구려는 화덕, 백제는 토덕, 김씨 신라는 금덕, 궁예의 태봉은 수덕에 대응되었다. 원래 찬탈이나 혁명, 점령 등은 상극을 따라야 했으나, 중국에서 한무제 이래 내려온 선양에 따른 상생설을 따르면서 이렇게 전해진 것이다.[18] 후백제 임금 견훤의 연호였던 정개(正開, 900년 ~ 936년)와 다르니 주의[19] 비록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자처하긴 했지만 이미 고구려가 멸망해 없어진 지 무려 240여년이 지나서 고구려의 정치제도를 완전히 고증해낼 만큼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거란의 침입 때문에 많은 기록이 유실되어 완전히 남아있진 않지만 일단 남아있는 기록만 살펴봐도 궁예나 고려 초기의 통치제도는 후기 고구려와 공통점이 별로 없다.[20] 국토와 인구조사 및 그에따른 세금부과를 맡았다. 현재의 국세청.[21] 각종 예절 제사 의식과 외교를 맡았다.[22] 법률을 제정하고 재판을 했으며 형을 집행했다.[23] 왕실의 재물과 화폐를 관리.[24] 화폐와 곡식에 대한 회계와 출납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의 삼사와는 매우 다르다.[25] 인사관리.[26] 도서 관리와 제사문서 작성.[27] 궁청과 관청 등의 건축과 수리.[28] 기술자 및 건축수리를 담당한 공부의 하위부서.[29] 왕명이나 외교문서 작성.[30] 왕이 사용하는 수레와 말을 관리했다.[31] 공예 담당부서.[32] 신라의 예궁전의 옛 이름이 진각성이었기에 아마 기능이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각성 역시 정확한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름에서 왕실의 진물(珍物)=보물을 관리하는 부서로 추정된다.[33] 신라도 음역 명으로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는 뜻으로 한자를 '新羅(신라)'로 고정 표기하기로 정하기 이전에는 비슷한 발음의 수많은 다른 한자(사로, 서라벌 등)로 음역되었다.[34] 《삼국사기》〈잡지(雜志)〉 3권에는 최치원의 글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의 글에서 이런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우리를 자칭하는 명칭 중에 삼한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신라중대부터 三韓=三國이라는 인식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35] 궁예가 거란에 몇 차례 사신과 선물을 보냈다는 기록과는 달리 정작 더 가까운 위치에 있는 발해와는 별다른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없다. 순전히 이러한 정황에 의거한 추측이긴 하지만 궁예는 새로이 중원의 패자로 떠오르던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하고 발해는 관심 밖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거란과의 접촉으로 인해 그들의 적국이었던 발해와 소원해졌을 가능성도 있다.[36]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면서 고구려 계승성에 대한 주장은 상당 부분 후퇴하거나 접어둔 걸로 볼 개연성은 있지만.[37] 고구려어. 고구려의 장군명[38] 멸도라는 표현은 '''이미''' 망해서 없는 '''동네'''라는 뜻이다. 궁예는 신라를 나라 취급도 안 했다.[39] 모두 삼국사기의 기록인데, 삼국사기에서는 '출생시에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다'라고 추정하였다. 부석사 사건에 대해서는 깨알같이 '그 칼자국이 지금(=250년이 지난 당대의 고려 시대)도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40] 특히 일본인들이 이미 허상으로 밝혀진 만세일계를 지지하며 이런 주장을 펴고 있다.[41] 애초에 푸대접을 받은 옛 백제 영토를 제외하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과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각각 서경과 동경으로 우대 받았다는 것이 지방 세력의 힘을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