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공훤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고려 태조를 도운 개국공신이다.
2. 생애
상국이던 시기 당나라에서 유학한 대경대사 여엄을 마음속으로 따르다 교류를 가진 뒤로는 매일 설법을 들으며 질문하고, 그에게 귀의한다.
태조 10년(927) 시중으로 왕명에 따라 신라에 구원군으로 급파된다. 대상 손행, 정조 연주와 병사 1만을 이끌고 고울부(경상북도 영천시)를 지나 왕도로 향하는 후백제군을 저지하려 한다. 그러나 견훤 등은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왕도에 도착해 경애왕에서 경순왕으로 신라왕을 갈아치운다. 공훤 등은 직접 5천 병력을 끌고 온 태조와 합세해 공산(대구광역시 팔공산)에서 요격을 나온 후백제군과 공산 전투를 벌인다. 고려군이 대패하고 고려의 주요 장수들이 목숨을 잃는 중에도 공훤은 살아서 복귀한다.
태조 12년(929) 견훤이 고창군(경상북도 안동시)을 포위하니 왕이 장수들을 모아 상황이 불리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의논한다. 상국 공훤은 상국 홍유와 함께
라고 진언한다. 유금필이 빠르게 선공할 것을 주장해 공훤 등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고창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승리한다.만약 불리해지면 죽령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하니 마땅히 사잇길을 미리 닦아두어야 합니다.[1]
만약 우리가 불리하면 마땅히 사잇길로 가야지, 죽령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2]
위는 『고려사』, 아래는 『고려사절요』. 표현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의미는 통한다.
태조 18년(935) 후백제의 공격으로 고려는 6년동안 나주와 해로로 통하지 못한다. 왕이 나주를 공격하는데 어떤 장수를 보낼지 논의하는 자리에서 대광 제궁과 함께 유금필을 추천한다. 유금필은 도통대장군에 임명돼 나주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다.
태조 19년(936) 일리천 전투에서 대장군 대상 공훤은 원윤 능필, 장군 왕함윤과 함께 기병 3백과 각 성의 병사를 합한 1만 5천 군사를 이끌고 좌, 우, 중 3군의 원병으로 출전한다. 공훤이 직접 백제군 중군을 맡은 사이 3군이 나머지를 대파하고 전투에서 승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