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

 


1. 백제가 서울에 수도를 두었던 시대


1. 백제가 서울에 수도를 두었던 시대



백제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을 때부터 백제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의해 공주의 웅진성으로 천도하기 전 위례성에 도읍했던 전체 677년 중 492년 간의 백제를 뜻하는 명칭이며, 지금의 풍납토성 안의 모 아파트 뒷쪽 부지가 위례성의 위치로 추정되고 있다. 이 용어를 따라 웅진, 사비로 천도한 후기 백제를 '웅진·사비 백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백제 유적이라는것이 밝혀지면서, 서울은 2000년 역사를 가진 도시임이 확인되었다. 당연히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포괄하는 이 지역의 중요성은 강했고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무너지고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자 백제는 크게 혼란해진다. 적국한테 수도를 함락당한데다 왕이 개처럼 끌려가서 목이 베였다는 건 전쟁이 흔했던 삼국사에서도 전대미문의 사태였던 것. 일본서기에서는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백제가 망한 걸로 기록했을 정도. 하지만 개로왕의 바로 아래 동생 문주왕이 신라-백제 연합군의 비호 아래 고구려군이 한강 너머 바로 북쪽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어쨌든 풍납토성에서 정식 즉위식은 거행했고, 한 달 걸려 여하튼 공주에 제대로 된 궁실과 조정을 그럭저럭 꾸릴 수는 있었기에 아예 그냥 완전 중앙정부 자체가 일시에 공중분해된 상태였던 북송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천도도 바로 공주로 쫓겨온 것처럼 내려온 게 아니라 그 폐허가 된 궁성 자리에서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천도 위치를 심사숙고했었다.
그러나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 왕실의 힘은 한성 시기에 비해 크게 약해졌으며, 정상적인 제도적 관행도 무너졌기에 한동안은 지역 세력가들이 군사력만으로 정치적 의사를 관철시키기 쉬운 환경이 벌어졌고, 무령왕때까지 무려 의 왕이 암살되거나 암살 당한 듯한 기록이 보이는 등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는 점은 부인할수 없다.
사실 대중의 일반적 관념과는 달리 백제가 가장 오랫동안 도읍한 곳은 충청도의 웅진성, 사비성이 아닌 한강 이남 한성(위례성)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실제로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 건 기원전 18년보다는 훨씬 이후일 것이 분명하므로 실질적으로 수도로서 기능한 기간은 500년에는 많이 못 미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여전히 웅진 시기(63년)나 사비 시기(122년)보다는 길지만 그렇다고 백제를 서울로만 한정지어 보는 것 또한 정도를 벗어난 편향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신라 치하에서도 서울 지역은 수도는 아니었지만 신라가 나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던 지역이었고 무려 삼백 년 동안이나 안정적으로 판도에 넣어 관리했었다.
그러나 최초로 경기도 지역을 중심지[1]로 하는 고대 국가였기에 한성백제란 명칭은 큰 의미와 비중이 있으며, 그랬기에 서울 지하철 9호선 한성백제역이 만들어졌고, 2004년부터 서울에 백제예술대학교 아트센터가 있다.

2. 바람의 나라



바람의 나라의 백제 구역 중 일부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바람의 나라(게임) 참조.

[1] 서울 뿐만 아니라, 개성도 본디는 고구려 이전에 백제가 대방군에게서 빼앗아 경영하던 주된 북방거점이었고, 광개토대왕에게 크게 패배한 이후에도 아신왕이 어떻게든 개성까진 수복해서 다시 판도에 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