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고려)

 


'''고려 제8대 대왕
顯宗 元文大王
현종 원문대왕
'''
[image]
경기 개성 현화사지비 비신 상부 탁본
'''묘호'''
'''현종(顯宗)'''
'''별호'''
성조(聖祖) / 열조(烈祖) / 세종(世宗)
'''시호'''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
(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1] / 성렬대왕(聖烈大王)[2]
'''군호'''
대량원군(大良院君)
'''성씨'''
왕(王)
''''''
순(詢)
''''''
안세(安世)
'''왕후'''
원정왕후(元貞王后), 원화왕후(元和王后),
원성태후(元成太后), 원혜태후(元惠太后),
원용왕후(元容王后), 원목왕후(元穆王后),
원평왕후(元平王后)
'''왕태자'''
왕흠(王欽)
'''부왕'''
안종(安宗) 효의대왕(孝懿大王)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后)[3]
'''능호'''
선릉(宣陵)
'''출생지'''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 왕륜사(王輪寺) 남쪽의 헌정왕후 사저
'''사망지'''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4] 정궁(正宮) 중광전(重光殿)
'''생몰연도'''
'''음력'''
992년 7월 1일 ~ 1031년 5월 25일
'''양력'''
992년 8월 1일 ~ 1031년 6월 16일
(38세 10개월 15일)
'''재위'''
'''음력'''
1009년 2월 3일 ~ 1031년 5월 23일
'''양력'''
1009년 3월 2일 ~ 1031년 6월 16일
(22년 3개월 14일)
1. 개요
2. 묘호시호, 존호
3. 생애
3.2. 생명의 위협 속에서
3.3. 대량원군, 고려의 지도자가 되다.
3.4. 거란의 침입과 내정 정비
3.4.1. 거란의 2차 침입
3.4.2. 3차 침입과 금교역 전투 승리 그 후
3.4.3. 동여진 해적 방어
3.4.4. 5도 2계
3.4.5. 초조대장경
3.5. 전후, 나라를 안정시키다.
3.5.1. 도성제 정비
3.5.2. 현화사 건립
3.5.2.1. 현화사비
3.5.3. 홍경사 건립
3.5.4. 거란 견제
3.5.5. 국가 제도 정비
3.5.6. 문화 양성
3.6. 고려구국영웅, 하늘의 별이 되다.
4. 치세와 관련된 이야기
4.1. 현종은 신라계를 중용했나?
4.2. 많은 부인과 자식
4.3. 원조 무신정변 - 김훈·최질의 난
4.4. 현충일 유래
4.5. 현종과 흥료국
4.5.1. 흥료국의 지원요청
4.5.2. 현종의 반응
4.5.3. 흥료국의 영향
6. 태묘 악장, 글
7. 가족 관계
8. 사극
9. 같이 보기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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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8대 .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원문대왕'''(元文大王).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5] 승려 시절 법명은 선재(禪齋)이다. 즉위 전 군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
봉원(封院)된 대량원(大良院)의 대량(大良)은 오늘날 합천을 가리킨다.[6] 당시 고려 왕자들의 군호가 외가의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된 점으로 미루어 이례적인데 이 군호는 부친인 안종 왕욱의 외가 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7]
왕족이었지만 '''사생아''' 출신[8]이였기 때문에 온갖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에 숨어살다 왕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또한 국가사적으로는 당대의 위인 강감찬, 양규 등과 함께 내우외환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하고 동아시아 굴지의 강국으로 부상시킨 구국영웅'''이자, 이후 자신의 후손들까지 이어지는 '''고려의 전성기를 연 성군'''이다.
그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고려 왕조 제2의 개창자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현종 이후의 고려 임금들을 보면 그의 아들들인 덕종, 정종, 문종부터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까지 모두 그의 후손이기 때문. 또 현종 이후 고려는 내외적으로 격이 다른 나라로 성장해갔는데, 이런 의미에서는 사실상 고려 왕실의 중시조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참고로 6대 성종의 딸이 현종의 부인인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지만 원정왕후 소생은 없고 원화왕후 소생으로 효정공주와 천수공주 밖에 없기 때문에 태조 왕건의 아들들 중 그나마 오래 간 광종의 직계 왕통[9]은 사실상 현종 직전인 7대 목종에서 끊어지게 되었다.
경남 사천시 정동면에서는 2010년 중반 이후 매년 말 현종대왕제라는 축제를 행하고 있다. 현종이 왕이 된 후 어린 시절을 보낸[10] '사수현(泗水縣)'을 '은혜를 베푼 땅'이라고 해 '사주(泗州)'로 승격시켰는데 이를 기리는 행사다. 원래 이 축제는 아버지 왕욱과 아들 왕순(현종)의 부자상봉을 기리는 부자상봉제였지만, 2018년 왕의 어릴 적 고향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현종대왕제로 축제 이름을 바꾸었다.

2. 묘호시호, 존호


  • 묘호: 현종(顯宗)
  • 불천위: 세종(世宗)
  • 시호: 대효덕성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 존칭: 성조(聖祖), 열조(烈祖)
공식 묘호는 현종(顯宗)이다. 현(顯) 자는 "업적이 나라 안, 밖으로 널리 알려졌다."란 의미를 내포했다.[11] 존경의 의미로 성조, 열조라고도 불렸다. 최사위의 증손 최계방의 묘지명엔 '성조현종(聖祖顯宗)'이라고 불렸다.
희종 4년, 7묘 9실 종묘 제도를 정비할 때 현종과 혜종은 어떻게 해야할지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현종은 중흥군주로서, 혜종은 태조의 장남으로서 모두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결국 희종은 혜종, 현종 두 사람을 전한 태종, 전한 세종에 비유해 모두 불천위로 정한다.[12] 그래서 고종 41년 강도서 태묘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책문엔 현종을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칭했다.
공식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태자 덕종이 부왕의 시호를 원문(元文)으로 올렸다. 이후 셋째 아들 문종이 재위 10년(1056년)에 대효(大孝), 고손자 인종이 재위 18년(1140년)에 덕위(德威), 7대손 고종이 재위 40년(1253년)에 달사(達思)를 추증했다.
고려 군주들의 시호 중에는 처음 올려진 두 글자 시호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현종의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때는 현종 원문대왕(顯宗 元文大王), 줄여서 현종 원문왕(顯宗 元文王)이라고 한다.[13]
동문선에 실린 9대손 충렬왕이 아버지 원종을 태묘에 제사지낼 때 현종에게 시호를 추가로 올렸다. 이때 쓰인 죽책문에는 '''현종 성렬대왕(顯宗 聖烈大王)'''이란 존호가 나온다. 특이하게 묘호 대신 시호를 다르게 불러 존경의 의미를 나타낸듯 하다.
현종 재위 13년인 1022년에 세워진 '사자빈신사지석탑'엔 '성왕항거만세(聖王恒居萬歲)'[14]라 하여 그의 장수를 기원했다. 역시 현종 재위 중에 세워진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엔 현종을 '만승(萬乘)'이라 하고 그의 뜻을 '천심(天心)', 은혜를 '제택(帝澤)'이라고 표현했다. 현화사비에선 만승(萬乘), 독특하게 '제천(諸天)이 수호하는 인왕(人王)'으로 묘사됐다.

3. 생애


사생아로 태어난 데다 어렸을 때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난 탓에 고아가 되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목숨을 위협받았던 끝에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난을 극복하여 고려의 태평성대를 연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이다. 인생역전 테크를 탄 임금이라는 점에서 고구려미천왕과도 이미지가 꽤 겹친다.[15]
후에 안종으로 추존되는 왕건의 8남인 안종 왕욱과 천추태후의 언니이자 경종미망인이었던 헌정왕후 사이의 소생이다. 역대 한국 왕조 중에 서자 출신 군주는 자주 나왔지만 '''부모가 정식적인 혼례 절차 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하다.''' 그나마 부계와 모계 모두 왕족 출신이라서 망정이지, 사생아는 서자보다 훨씬 더 정통성에 위협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다. 그나마 신라 효공왕이나 고려 말 우왕의 경우도 정황상 사생아에 가까운 위치였지만 이쪽은 각각 진성여왕공민왕이 직접 정통성을 보증하고 자신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고 현종처럼 빼도 박도 못하는 사생아는 아니였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부분만 빼고 부모의 핏줄만 따지면 현종의 정통성만큼은 대단했고 혈통만큼은 그 누구보다 순수(?)했다.
즉 태조의 손자이자 외증손자이고 구 신라 왕실의 외손자이며 황주 호족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태조의 적자이자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외손자였고 어머니는 태조의 적손녀이면서 외손녀였다. 현종은 당시 고려 왕실과 신라 왕실, 고구려계 호족의 피를 모두 진하게 이었다.[16]
현종의 아쉬운 정통성은 천추태후김치양의 견제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목종은 후사가 없어 그가 붕어하면 현종이 매우 보위에 가까웠다. 천추태후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현종을 신혈사에 보내버린 뒤 누차 살해를 시도했다. 이는 현종의 정통성 때문이었고 '''이런 노골적인 차별이 가능한 이유는 현종이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현종의 순수한 정통성이 사생아라는 커다란 단점때문에 다 깎여버린 셈. 부모의 불륜으로 태어났으니 혈통은 현종이 겨우 죽지 않게 해주는 정도로만 작용했다.
다른 예로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들 수 있다. 현종과 똑같이 사생아로 태어난 김치양의 아들은 현종과 같은 정통성이 없었고 태후가 실각하자마자 6살의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한다.
참고로 태조가 60세가 다 된 나이에 안종을 낳았고, 안종도 60세에 가까운 나이에 현종을 낳아 태조와 현종은 할아버지-친손자 관계임에도 무려 105살이나 차이가 난다.

3.1. 출생의 비밀


현종의 아버지 왕욱왕건의 8번째 아들이며 현종의 할머니이자 왕욱의 어머니는 신라 경순왕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였다.[17]
위에서 언급했듯 혈통만 보면 현종은 고려 왕실의 혈통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가진 인물인 꽤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조카딸이 되는 헌정왕후와 정식 혼인이 아닌 사통을 통해 태어난 것'''이 문제였다. 사실 고려의 왕족들은 정권 초기에 근친간의 결혼을 정치적인 이유로 많이 올렸기 때문에 그 자체는 큰 문제라고는 볼 수 없었다. 또한 고려 왕들은 과부를 후궁으로 들이기도 했고 재가 또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재혼 또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가 된 것은 선왕의 왕후이자 현 국왕의 누나로서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 정식적인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삼촌과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선왕의 왕비가 사생아를 낳은 게 문제였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현실에 구현된 셈.
덧붙여 현종은 그 전까지 있었던 근친혼에다 친부모가 서로 숙질관계인 점 때문에 친척 관계가 무척 꼬인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기 때문에 모계로는 어머니 헌정왕후가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친언니여서 목종의 이종사촌 동생이지만, 부계로는 어머니가 자신과 같은 항렬인 사촌누나이고, 목종의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사촌 누나이자 이모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형 겸 이모부이며, 생모 헌정왕후는 어머니 겸 사촌 누나가 된다. 또한 외할아버지 대종은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그리고 할아버지인 왕건의 경우 현종의 외증조부이자 외외증조부(외할머니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후일의 일이지만 사촌형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2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1비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후궁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2비 원화왕후가 되었다. 따라서 성종은 현종의 장인이 되는 셈인데 이 때문에 현종이 태조의 손자 자격이 아닌,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18]
현종은 출생 비화도 꽤 드라마틱하다. 만삭의 헌정왕후가 안종 왕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하자 성종이 작은아버지이기도 한 왕욱 집에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빨리 가서 알아보라 하여 연유를 알아보니, 왕욱이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범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놀란 성종은 작은아버지 다신 그러지 말라며 왕욱을 멀리 사수현[19]으로 귀양 보낸다.
이때 헌정왕후는 큰 충격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에 이르자마자 산통이 와서 방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으면서 아이를 낳았고 결국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었다.[20] 출생 후 1년 정도만에 현종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고, 성종이 보모로 하여금 아기를 기르게 했다.
보모는 아기였던 대량원군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종종 가르쳤다. 그 때문인지 2년 후 성종이 대량원군을 불렀을 때, 성종을 보더니 "아빠"라고 불렀고, 또 성종의 무릎 위로 올라와 성종의 옷을 붙잡고 한 번 더 "아빠"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성종은 부모 없이 자라는 아기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와 떨어진 아이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후에 대량원군이라는 작위를 주고 귀양지에서 지내던 왕욱에게 보살피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런데 위 내용을 색다른 시각으로 각색해보면, 헌정왕후가 사망하고, 궁궐 내에 끈이 떨어진 대량원군이 궁궐 밖으로 내쳐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21]
어쨌든 현종은 극적으로 부자 상봉에 성공하였다.[22] 그러나 부자 상봉의 기쁨도 잠시였을 뿐, 왕욱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5살이 되던 해 병사하고 만다.
고려 초기의 왕실 가계도를 보면, 어머니가 엄마이자 고모이고 아버지는 외삼촌이자 아빠인 경우, 그리고 아버지가 작은할아버지이고 어머니가 사촌형제인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그래서 현대인 기준으로 보면 족보가 완전 꼬여있어 누가 누구라고??싶고 한눈에 알아보기가 어려워 문서 자체를 끝까지 읽기가 힘든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현종의 경우 사생아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조선 쯤만 돼도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강력한 왕위계승 후보로서 천추태후가 현종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난리를 친걸 보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가계를 봐야 하겠다.

3.2.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한 순간에 아버지를 잃은 뒤 홀로 지내던 현종에겐 슬퍼할 새도 없이 또 불행이 닥쳤다. 친부의 사망 이후에 늘 현종을 보살펴주던 외삼촌 성종도 병으로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 선왕 경종의 아들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하자 곧 험난한 시련에 부딪친다.
비록 사생아 출신이라고는 하나 현종 역시 엄연한 왕족이며, 태조 왕건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목종이 즉위한 후로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했던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의 경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현종이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게 한 뒤 양주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승려로 보내버렸으며 신혈소군(神穴小君)[23]으로 부르게 하고 이후로도 그를 암살하고자 몇 번이나 자객을 보냈다.
이때에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왕순이 채충순에게 편지를 보내어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안타까움을 느낄 지경.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신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

《고려사》 권93, 열전6, 채충순

그러나 다행히도 목종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훼방을 놓았으며[24], 신혈사의 주지인 승려 '진관(津寬)'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현종이 머물던 방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25]

태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암살하려 했으며, 하루는 내인(內人)을 시켜 독약이 든 술과 떡을 보냈다.

내인이 절에 당도해 소군을 만나 몸소 먹이려 했는데, 절의 어떤 승려가 소군을 땅굴 속에 숨겨 놓고는, “소군이 산에 놀러 나갔으니 간 곳을 알 수 없노라"고 속임수를 썼다.

내인이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참새가 주워 먹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경종 후비, 헌애왕태후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현종은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참고로 고려사 세가의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 역시 왕위에 야심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의 현종 총서에는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지었다는 두 수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를 읽어보면 꽤 의미심장하다.

一條流出白雲峯(일 조 유 출 백 운 봉 한 가닥 물줄기가 백운봉에서 솟아나

萬里蒼溟去路通(만 리 창 명 거 로 통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니

莫道潺湲巖下在(영 도 잔 계 암 하 재 바위 밑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지라

不多時日到龍宮(불 다 시 일 도 용 궁 머잖아 용궁까지 다다르게 될 물이니

시냇물(溪水).


小小蛇兒遶藥欄(소 소 사 아 요 약 란 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滿身紅錦自班斕(만 신 홍 금 자 반 란 붉은 비단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니

莫言長在花林下(막 언 장 재 화 임 하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 말하지 말라

一旦成龍也不難(일 단 성 용 야 불 난 하루 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으리.

작은 뱀(小蛇).[26]

[image]
진관사[27]
여담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현종이 있었던 '신혈사'는 바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북한산 진관사다. 진관은 위에 언급된 현종을 보호해준 승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신혈사는 큰 절이 아니라 진관이 혼자 수행하던 작은 암자였는데, 왕위에 오른 현종이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이다.[28] (은평뉴타운이 바로 이곳이다). 관련영상

3.3. 대량원군, 고려의 지도자가 되다.


이리하여, 1009년 2월 3일, 강조의 정변이 터지고 강조는 목종을 나라를 양보했다는 뜻의 양국공으로 강등하여 폐위하고는 법왕사로 내쫓아 버렸다. 대량원군은 본궐 연총전에서 즉위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현종은 왕위에 올랐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내린 조치가 인상깊은데, 교방(敎坊)을 없애고 궁녀 백여 명을 돌려보냈으며, 낭원정(閬苑亭)을 헐어 진기한 날짐승과 길짐승 및 물고기들을 산과 못에 풀어주었다.
이때 현종이 비록 강조가 정변으로 옹립시킨 왕이지만 자신이 내세운 왕의 권위와 예우가 실추되기를 원하는 권신은 없을테니, 현종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강조 입장에서는 목종의 명을 받고 왔다가 카더라에 낚여 일을 저질렀으니 억울할 만도 한데다, 안정복은 아예 현종이 정변의 주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당시 현종의 의도와 주체 여부에 대한 논쟁은 강조의 정변 문서를 참고할 것.
그 후 문무관료를 재편하고 세금과 요역을 경감해 주었다. 또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군량을 비축하고, 현종 개인으로서도 성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무난하게 정치를 해나가면서 즉위년 12월에 하교를 내리는데 즉위 이전까지 겪었던 고난과 이후 현종의 치세를 생각하면 마음에 와 닿는 바가 있다.

“짐이 외람되게 조업(祖業)을 이어받아 삼가 큰 기반을 계승하면서, 현도(玄菟)의 봉강(封疆)을 통치하고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게 되었다.

'''그동안 백성들을 자애롭게 기르느라 쉴 틈이 없으면서도 하나의 덕(德)이라도 미덥지 못할까, 혹은 올바른 윤리가 무너질까 늘 염려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여론을 듣고 단안을 내렸으니 이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가을철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안개가 걷히지 않았으며 음양(陰陽)이 뒤죽박죽되어 기후가 불순했다. 이에 더욱 성의껏 정무를 돌보면서 스스로를 통절히 자책하느라, 정전(正殿)에 들지 않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하늘의 감응을 받아 날씨가 맑고 화창해졌다. 이로 보건대 성심을 다하기만 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으며 재난을 복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알겠다.

'''이제부터 가일층 성심을 다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위로 하늘의 뜻에 부응할 것이며, 더욱 나라를 열심히 돌보고 정사에 정력을 다 바칠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온갖 일들을 혼자서 처리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마땅히 신하의 도움을 받아 함께 건곤지도(乾坤之道)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아로새겨야 할 바를 몇 가지 제시하노라.

재상의 직위는 실로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이니 정치에 있어 임금이 빠뜨리는 것을 보완(彌綸)하고 적절한 정책(謨明)을 건의할 것이며 치국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려 왕업을 도우라.

인재를 가려내고 관리를 선발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힌 현인을 잘 찾아내어 그가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인사에 공정을 기함으로써 아부하는 무리들의 말을 배격하라.

법령과 규율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죄상을 심리하고 판결을 내림에 있어 죄인을 불쌍히 생각해 가혹한 행위나 형벌을 내리지 말 것이며, 정상을 잘 참작함으로써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

국가 행정의 각 분야를 맡은 사람들은 각별히 서로 협조해 직무를 집행[官聯]하도록 할 것이며 자신이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하라. 또한 청렴을 장려하고 혼탁한 행동을 방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것이며, 멸사봉공의 자세에 어긋나지나 않는지 늘 반성하라.

지방의 목민관들은 각자 애민 정신을 간직하고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잊지 말라.

변방을 지키는 지휘관들은 부대를 잘 조련하여 용맹한 군사를 길러냄으로써 불의의 사태에 힘써 대비하고 군율의 해이를 경계하라.

아! 너희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밤낮으로 게으르지 말고 시종일관 충성을 변치 말지어다.

'''아! 하늘이 가까이 감시하면서 이미 훈계를 내리셨으니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않아 이미 하늘에 감응한 바 있도다.'''

'''이제 더욱 정성스럽게 나의 행동을 반성함으로써 나날이 새롭게 경사를 더해가기를 기대하노니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노라.”'''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1010년) 경술년

이때 현종의 보령은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1~2학년의 청소년으로 국가 수장으로서 어린 나이에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고려,조선시대 학자들의 언급처럼 총명하고 인자하며, 성실하고 학문에 능한 성군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선지이다.

3.4. 거란의 침입과 내정 정비



3.4.1. 거란의 2차 침입


그러나 왕위에 오른뒤 오래 지나지 않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현종 2년, 요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해 온 것이다.[29] 결국 현종은 자신의 치세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을 걸고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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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침입 때는 요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자 실권자 강조가 30만 대군을 몰고 나가 이를 막으려 하였다. 초반엔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요 성종의 군대에 패배한 강조는 거란군에 붙잡혀 처형당했고 현종은 호남 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것도 피난 도중 지방 호족들한테서 갖은 행패와 수모를 당했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 성종의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하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현종의 몽진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 피난길에서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현종과 두 왕후[30]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 등 신하들과 금군 50여 명이 전부였다. 앞서 주전론을 펼쳤던 문신들과 장수들마저 태반이 왕을 버리고 도망가버렸다(…).[31] 이때의 몽진은 안습의 연속이다.

"적성현[32]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고려사절요》 현종 세가 원년

특히 몽진 도중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과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나중에 똑같이 몽진하던 선조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33] 당시 고려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였던 조선과 달리 지방 분권에다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었기 때문이다.[34]

임진왜란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조선과 고려)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중략)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드는 거예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어쨌든 추격하는 무리들을 떨쳐낸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 때 고을 아전이 왕의 일행을 보고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고 거만을 떨었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시절의 아전은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과 다르게 지방 호족으로 사실상 지방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아전 = 이방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현종은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났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종의 태도에 화가 난 아전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고 외치게 했다. 당황한 지채문이 무슨 이유로 오느냐고 묻자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 말에 현종 일행은 크게 겁을 먹었다. 채충순과 김응인은 현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하공진은 강조파에다가 이번 전쟁의 원인에도 관여한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함께 달아나버렸으며 밤이 되어 다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적[35]이 공격해오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 환관, 궁녀들까지 죄다 도망가 숨어버리고 경종의 후궁 대명궁부인, 성종의 2비 문화왕후[36]와 시녀 2명, 승지 몇 명만 남았다. 게다가 문화왕후의 딸인 현종의 1비 원정왕후는 이때 임신중이었다![37] 물론 지채문만이 남아 한 줌 남은 근위대 병력으로 적을 물리쳤지만 말과 기물을 빼앗겼으며 경황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상황을 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고려사절요》 현종 세가 원년

우여곡절 끝에 양주로 향한 지채문 일행은 달아났던 국근을 만나 합류하고 다시 하공진과 유종을 만났다. 지채문이 그들을 만나 정말 반역하였냐고 묻자 하공진은 극구 부인하였다. 그 다음엔 지채문은 하공진이 이끌고 있던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 빼앗겼던 안장을 되찾아왔다.
이처럼 안습에 안습을 거듭하였지만[38] 거란군이 물러날 때까지 현종은 2차 침입 내내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몽진을 마치고 충청도 공주에서 새 장가를 드는 성과도 올렸다.[39] 공주를 방문했을때 지은 시가 한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남쪽에 공주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선경의 영롱함이 길이길이 그치지 않도다. 이렇게 마음 즐거운 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모여 온갖 시름을 놓아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수도 개경이 거란군에게 함락되고 거란군은 개경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때 대량의 고서적, 특히 사서(史書)들이 불타 없어졌다. 역대 고려 왕조의 실록들도 소실되어서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 (7대 실록의 완성은 덕종 때 이루어짐) 하공진은 스스로 요성종에게 화친을 설득하겠다고 말하고 고영기와 함께 사신으로 북쪽으로 향했으며 현종은 남쪽으로 떠났다. 당시에 현종 일행은 앞서의 창화현에서 갓 벗어난 상태였다. 현종의 표문을 얻어 거란군 쪽으로 향하던 하공진은 창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과 조우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때가 실로 고려사에서 최고로 긴박한 순간이었다! 당시 거란 선봉군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십수리에 불과하였다.[40] 만약 붙잡혔다면 인조가 황제에게 머리를 직접 조아렸던 삼전도의 굴욕프리퀄이 되었을 것이다.
하공진은 거란군의 안내를 받아 성종을 만났다. 그리고 고려의 남방은 수천리에 달하며 고려 왕은 이미 그 밖까지 도주하였다고 거란 성종을 속였다. 그러자 이미 퇴로가 위험하여 전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거란 성종은 이 말을 믿고 고려 왕의 친조(직접 황제를 알현함)를 조건으로 하공진을 인질로 잡아 퇴각했다. 훗날 하공진은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고 결국 요성종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 이유는 요 성종이 하공진을 회유하려 무던히 노력하였지만 하공진은 고려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잡혔고, 이때도 하공진은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죽인 후 심장을 꺼내 먹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현종의 몽진 시간을 벌어준 충신. 후에 현종은 하공진을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에 추증하였고 영정을 그려 제사지냈으며 진주성에 추모비도 세워줄만큼 대우해주었다.
한편 통주, 귀주 등지를 확보하여 적진 후방을 위협하고 있던 양규 휘하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기습하여 거란군에게 섬멸적인 대 타격을 가하였다. 적병 1만 명을 격살한 귀주 별장 김숙흥의 대전과를 필두로 양규의 의주 지방 무노대 전투에서는 적 사살 2천, 포로 3천, 이수 석령의 추격전에서 적 사살 2천 5백, 탈환인 1천, 여리참 전투에서 사살 1천, 탈환 1천, 애전 전투에서 사살 1천여명의 전과를 올렸다. 전과를 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단순히 거란군의 섬멸뿐만이 아니라 많은 고려인 포로의 구출을 함께 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그들의 거의 모든 전과에는 항상 포로 구출이 들어있다. 특히 양규와 김숙흥이 구출한 포로는 물경 3만 명에 달한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41]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이 애전에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난다. 거란 황제의 친위군이었던 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성종의 친위군을 상대로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은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42][43].
양규 부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도 그의 공격에 입은 피해가 컸던 데다가 큰 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다. 게다가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은 흥화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맹렬하게 습격했다. 정성의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거란이 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니 순(현종)이 여진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막았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귀족을 지칭)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관속들도 태반이나 전몰했으므로 유계에 영을 내려 벼슬을 구하던 자와 '''조금이나마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 74 대중상부 3년(1010년) 11월'''

현종은 호종했던 지채문의 활약으로 딱히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이때까지 현종의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44]
이 와중에 끝까지 현종을 호종한 지채문채충순은 공신이 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관료들은 다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들 역시 몇 차례에 걸친 전면전으로 인하여 대단히 피로가 쌓인 상태였고, 양규, 김숙흥 등의 게릴라 전법에 말려들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공진은 전라도 남쪽에도 고려 땅이 수천리는 더 있어 현종이 얼마든지 더 멀리 도망갈 수 있다고 요 성종을 속여서 결국 거란군은 더 난장판을 만들지 못하고 물러났다. 충신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고려와 현종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종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양규는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45]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백 섬을 지급하게 했으며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校書郞) 벼슬을 내렸다.[46] 한편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은 장군직으로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건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 뒷날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아버지의 공도 있었겠지만 그 자신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으며, 이후로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사실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47]
고려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고려의 힘은 점차 견고해졌고 지도자였던 현종은 점차 노련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종과 고려의 앞에는 마지막 시련이 남아있었는데...

3.4.2. 3차 침입과 금교역 전투 승리 그 후


3차 침입 때 현종은 본격적으로 왕권을 잡고 앞서의 치욕을 잊지 않고 방비를 튼튼히 해서 잘 막아냈다. 다만 현종 본인도 의도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바로 강감찬을 사령관으로 주력군을 모두 북쪽으로 보내 거란군을 막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소배압이 고려군의 공격을 뿌리치고 개경 100여리 밖까지 접근해온 상황이라 위기를 맞았다.
당시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런 작전을 펼친 이유는 고려군 주력이 전부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기병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북방에 배치된 고려군 주력을 따돌리고 2차 칩입 때처럼 개경을 공격해서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소배압의 의도였던 것.
흥화진 전투 이후 소배압은 전략적인 기세를 잃지 않고 냅다 개경을 향해 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는 거란군이 기병을 토대로 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방 고려군의 총 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이곳 저곳에 배치해둔 별동대를 계속 보내 요군의 머리, 허리, 꼬리를 정신없이 계속 찔러대기 시작하였다. 자주(慈州) 내구산에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 부대를 잡아 격파했고, 평양 근처 마탄진에서는 시랑 조원(趙元)도 거란군 한 부대를 격파하는 등 연달아 피해를 입혔다. 기록에 따르면 마탄진 전투에서 거란군 1만여 명을 참획(斬獲)[48]하였다고 한다.

(1019년) 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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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고려군은 또한 동북면의 병사 3천 3백명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개경의 수비를 보충했다. 동북면[49] 병사 1명이라면 타 도의 병사 5명 ~ 6명에 맞먹을 정도로 최정예 병력이었다. 함경도 병사의 이러한 최정예 전통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는데 이는 동북면 쪽에 수렵을 하는 사냥꾼들이 많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50][51] 특히 김종현이 이끄는 1만 병력은 소배압을 맹추격하여 소배압의 주력을 끊임없이 견제 / 위협하였다.
이렇듯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소배압은 2차 여요전쟁 때처럼 수도 개경만 불태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결국 개경 근처의 신은현(新恩縣)까지 도착했다. 사실 이것은 절대로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요동 방어선을 우회한 거란에게 발해가, 병자호란 때의 청나라군에게 조선이 각각 이렇게 패배를 당하였다.[52] 때문에 소배압이 그렇게 수많은 방해를 뿌리치고 수백 km를 주파하여 전략적 목표인 개경까지 도착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이런 경우, 왕조국가에서 다음 선택은 왕의 도주였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병자호란때도 그랬고, 임진왜란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시대에도 공민왕의 경우 왜적이 쳐들어 올 때마다 개경을 비우고 도주했습니다. 사실 이건 왕조 국가에선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왕이 곧, 국가이니까요. '''하지만 현종은 도주하지 않았습니다.''' 적의 주력군이 개경으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군에 맞서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소배압과 거란군은 난감해졌습니다. 전쟁에서의 승패는 지휘관이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도 인간이 하는 것인지라 결국 의지의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이 의지의 싸움에서 현종이 소배압을 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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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2부- 거란전쟁, 동북아 균형자의 조건##}}}

신유일에 소손녕이 신은현[53]

에 이르니 서울과의 거리가 백 리였다. 왕은 성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청야하여 적군을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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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그러나 고려의 현종은 2차 여요전쟁 당시 개경이 홀라당 불타버렸던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방어를 위한 작계를 완비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엄청나게 보강된 개경의 성문과 성벽, 그리고 개경의 본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54] 외엔, 마치 핵폭탄이라도 맞은 듯 한 톨 집 한 채 없는 폐허, 그리고 쉴새없이 사방에서 찔러대는 고려군의 견제 병력들뿐이었다.[55] 그래서 꾀를 낸 소배압은 수하 장수인 야율호덕을 시켜 개경의 통덕문으로 가서 개경을 수비하고 있던 고려군에게 "이제 우리 철수합니다."하고 을 쳤다. 물론 그렇게 뻥을 쳐서 안심시킨 후에 몰래 척후병 300명을 보내 개경에 잠입시켰다. 즉, 개경의 방비를 소홀히 하게 한 뒤 척후병을 잠입시켜 성문을 몰래 열어서 쳐들어가려는 작전을 짠 것이다. 하지만 거란군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이 회심의 작전마저 고려군에게 간파되어 버렸고 개경의 성문을 열기 위해 잠입시킨 척후병 300명은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교역[56]에서 고려군 1백명에게 붙잡혀 죽었다.[57][58]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좀 무시무시한 기록이다. 상식적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거란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굳이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당시 개경의 수비 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이며,[59] 이 정예 1백명이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 수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을 했던 셈. 따라서 저 1백 명도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거란군의 정황을 포착해 내고 기민하게 대처한 개경의 고려군 지휘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낼 만하며 당시 개경 고려군의 사실상의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의 군사적 능력과 대담함, 용기에도 고평가를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북방에서 입은 타격도 컸던 데다가 개경의 방비도 만만치 않았고, 보급선이 단절되어 방위군과 추격군 사이에서 포위될 위험을 감지한 소배압은 퇴각을 결정한다.[60][61]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62]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현종은 금교역전투에서 회심의 일격을 성공시켜 적들의 사기를 꺽고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63]

가끔은 소수의 결정이 역사를 바꾼 때라든지, 역사의 방향을 결정할 때가 있는데 저는 현종이 도망치지 않고 거기서 버텼다는 것을 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가, 역사를 움직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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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소배압으로서도 전멸을 피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선택이었으나 마침내 귀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귀주 대첩이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귀주 대첩은 현종 10년(1019년) 2월 1일에 있었고, 고려군의 승리를 이끈 강감찬의 개선 행렬은 2월 5일에 현종대왕 본인이 직접 나와 영접을 받았다. 1019년 2월 5일, 현종대왕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아가 강감찬을 맞이하였다. 전하는 글에 의하면, 이때 임시로 지은 누각에 현종이 친히 올라 주연을 베풀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역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현종대왕은 강감찬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과 식읍 3백호에 봉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내렸다. 이후 1년여간 3차 거란 침입에 대한 전후 복구 작업과 보훈 작업이 이어진다.

고려판 병자호란이었거든요. 초반에 실수도 있었죠. 처절한 패배도 있었고. 하지만 고려는 침착하게 대처해 나갑니다. 침착하게 제도를 정비해 나가고. 중요한 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이 이후, 고려와 요나라, 송나라 간의 삼강체제가 확립된다는 겁니다. 고려는 (귀주 대첩 이후) 120년에 달하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죠.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전쟁이 끝난지 불과 3개월 후인, 1019년 5월. 힘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란은, 평화협정을 위한 사신을 파견합니다.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적국이자, 불과 석 달전에 고려에 의해 주력군이 몰살당한 거란. 여러분이라면 이들의 평화 제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70년 전의 왕건은 별다른 원한 관계가 없던 상태에서도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내기도 했지요. 하지만 현종의 선택은 할아버지인 왕건과는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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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2부- 거란전쟁, 동북아 균형자의 조건##}}}
이후 현종 11년(1020년) 2월에 현종대왕은 이작인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거란에게 예전처럼 사대의 예를 다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사대라고 해도 대승을 거둔 이후 상황이니 당연히 발언권에서 고려가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64] '''현종대왕이 사대를 한 이유는 전쟁을 끝냄으로써 백성들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실리를 챙긴 외교로 평가된다.'''[65] 실제로도 고려는 거란이 요구하였던 강동6주를 빼앗기지 않았고 현종대왕이 거란에 입조를 하여 항복하지도 않았다 또 송나라와 잠시 단교를 선언했지만 물밑에서 교류관계는 계속 유지하였다.[66]
이로서 거란과의 오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현종대왕의 보령은 고작 '''27세'''였다.[67][68]

대 거란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로 인해, 아시아의 세계 질서는 재편된다. 거란을 제압한 고려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만주 지역의 철리국(鐵利國)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하기를 원하는 표를 올렸다. 연이어 탐라국이 곡물을 바치고, 흑수말갈추장이 찾아왔다. 고려는 주변 소국을 거느린 나라로 성장해 갔다.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나라와 교류를 하고, 거란과도 교류를 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된 것이다. 송나라를 대국으로 생각하던 고려의 태도도 달라졌다.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려 했다.

2009년 11월 21일 역사 스페셜 中

거란은 사실상 고려의 완전 병탄과 강동 6주를 포기하였다.[69]
포기 뿐만 아니라 속자치통감장편에서는 귀주 대첩에서의 대패 이후, 고려를 두려워한다는 기록까지 등장하고 있다.

천성(天聖)[70]

3년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 (중략) 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고려를)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나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거란이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될 것을 의심하여 끝내 감히 무리를 다하여 남하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중국의 큰 이로움입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150 인종 경력 4년 6월 무오.


3.4.3. 동여진 해적 방어


현종은 거란 뿐만 아니라 여진족과의 전쟁에서도 고려를 지켜야 했다. 거란이 육지로 침략했다면 여진족은 바다를 통해 고려를 침략했다. 이들은 동여진 중 포로모타부(蒲盧毛朶部)로 포시에트만에 있는 발해의 항구를 이용하여 고려의 동해안을 침략하였다. 특히 동여진 해적의 동해안 침략은 이미 목종대 부터 시작되었다. 1005년(목종 8) 동여진이 등주(登州) 부락(部落) 30여 곳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등주를 비롯한 동해안 북부지역의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바다를 통해 침략했을 가능성이 크다. 목종은 동여진의 등주 침략이후 동여진 해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축조하였다.

1) (목종) 8년(1005)에 진명현(鎭溟縣)에 성을 쌓았다. 510칸이고, 문(門)은 5개이다.

2) 금양현(金壤縣)에 성을 쌓았다. 768칸이고, 문(門)은 6개이다.

3) 곽주(郭州)에 성을 쌓았다. 787칸이고, 문(門)은 8개, 수구(水口)는 1개, 성두(城頭)는 5개, 차성(遮城)은 2개이다.

4) (목종) 9년(1006)에 용진진(龍津鎭)에 성을 쌓았다. 501칸이고, 문(門)은 6개이다.

5) 구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1507칸이고, 문(門)은 9개, 수구(水口)는 1개, 성두(城頭)는 41개, 차성(遮城)은 5개, 중성(重城)은 168칸이다.

6) (목종) 10년(1007)에 흥화진(興化鎭)과 울진(蔚珍)에 성을 쌓았다. 또 익령현(翼嶺縣)에 성을 쌓았는데 348칸이고 문(門)은 4개이다.

7) (목종) 11년(1008)에 통주(通州)에 성을 쌓았다. 등주(登州)에 성을 쌓았는데 602칸이고, 문(門)은 14개, 수구(水口)는 2개이다.

『고려사』 권82 병지(兵志) 성보(城堡)의 기록이다.

이러한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현종대에 이르러 구체화 되었다. 현종은 즉위년(1009)에 과선(戈船) 75척을 만들어 진명현의 입구에 정박시켜 동북의 해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내 곧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면서 동여진 해적에 대해 신경쓸 수 없었다. 결국 현종 2년(1011) 8월 동여진 해적이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현종 3년(1012) 다시 동여진 해적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등 동해안을 침략하였다. 청하현·영일현·장기현에 대한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고려군이 막아냈지만, 거란과의 전쟁이후 계속되는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현종의 성보 축조로 이어졌다.
현종은 동여진 해적이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자, 같은 달 청하(淸河)·흥해(興海)·영일(迎日)·울주(蔚州)·장기(長鬐)에 성을 쌓았다. 동해안 북부에 집중적으로 축성하였던 목종과 달리 현종은 동해안 남부에 축성하였다. 이는 그만큼 동여진 해적이 남부 동해안까지 위협적으로 침략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당시 옛 신라의 수도이자 개경·서경과 함께 삼경(三京)이었던 경주가 침략당한 만큼 고려는 동여진 해적에 대한 방비에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군(水軍)을 양성하고, 이를 지휘할 도부서(都部署)를 설치하였다. 도부서는 동계의 진명도부서(鎭溟都部署)·원흥도부서(元興都部署)와 북계의 통주도부서(通州都府署)·압강도부서(鴨江都部署), 그리고 동남해를 관할했던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가 있었다. 현종이 즉위한 해에 바로 75척의 함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목종대부터 동여진 해적을 방어하기 위한 축성과 함께 수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종은 수군을 계속 증강 시켰고, 그 규모는 현종 10년에 이르러 수백 척에 이르었다. 일본측의 기록인 소우기(小右記)에는 고려의 군함이 거대하여 해적선을 전복시켰고 그 안에는 온갗 무기들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고려의 대응으로 더 이상 동해안을 침략할 수 없었던 동여진 해적은 우산국과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는 동여진 해적에 대한 고려의 방비가 효과를 보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 결과 우산국은 여진족 해적에 의해 초토화되어 많은 우산국인들이 고려에 정착하게 되었다. 우산국의 피해는 150여년이 지난 의종대까지 복구되지 못하였다. 의종 11년(1157) 김유림을 보내 울릉도의 거주 가능성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에 김유림은 촌락의 흔적이 있지만 사람이 살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동여진 해적은 일본의 쓰시마 섬(對馬島)와 이키 섬(壹崎島)을 비롯한 규슈(九州)의 북부지역과 하카타 만(博多灣)을 공격하였다. 이후 동여진 해적들은 한반도 남해안으로 도주하였고[71] 현종 10년(1019) 해적선 8척을 포획하여 일본인 259명을 구하기도 하였다. 이는 1012년 경주 공격에 실패하였던 동여진 해적이 재정비 이후 감행하였던 것이었다.관련영상

3.4.4. 5도 2계


이렇게 거란의 침입 와중에도 내치적으로도 많은 일을 하였는데, 우선 이 무렵까지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제대로 정비하고 호족 세력을 억눌러 안정화시킨 다음 군현제를 설립한 것이다.

기나긴 전쟁을 극복하면서, 현종은 그 와중에 정치 세력들을 잘 다스리고, 쿠데타를 극복하고, 그리고 교과서에서 배우셨겠지만 고려 시대의 본격적인 지방 제도를 정비한 것이 현종입니다. 자기가 나가서 죽을 고생을 해봤잖아요. 왜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요? 제도가 정비가 안되어 있으니까요. 지방을 관리가 아닌 토호들이 세력을 키워 다스렸으니까요. 그래서 (현종은) 지방제도 정비하고, 관리들을 보내고, 정치세력을 수합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자기의 치세에, 그리고 전쟁 중에 해내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72]

1018년(현종 9년) 5도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 - 목(牧) - 도호(都護) - 군(郡) - 현(縣) = 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골격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해 각 군현의 호장(戶長) 등 향리의 정원 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1022년에는 향리들에 대한 호칭을 개정,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3.4.5. 초조대장경


또한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법력으로 이겨내려고 만든 것이 『대장경』(일명 초조대장경)이다. 당시 송에는 억불 정책이 지나쳐서 많은 불교 경전을 불태워버렸는데 나중에 송은 이를 만회하고자 고려에 불경을 얻으러 올 정도가 되었다. 이런 사정에는 대장경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높은 문화 수준이 있었던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포함하고 있었다.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에는 정교하고 뛰어난 판화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고려 회화의 수준과 경향을 알 수 있다.
본디 세계 최초의 한역 대장경인 북송의 관판대장경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비교해 보면 그 체제가 다르며, 오히려 북송판보다 글씨가 좋고 정교하게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세계 두 번째의 한역 대장경으로서 고려의 독자적인 판각으로 당시의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73] 그리고 광종 때 벼락을 맞아 무너졌던 경주시황룡사 9층 목탑을 현종 때 다시 세우기도 했는데 이 역시 불교의 진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3.5. 전후, 나라를 안정시키다.



3.5.1. 도성제 정비


조선 왕조고려사 현종 세가, 왕가도 열전에 따르면 고려의 법궁 만월대는 태조가 창건하고 광종 대에 2년간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이후 개경은 궁성과 궁성 밖 정부기관을 둘러싼 나성[74]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어성의 범위가 작으니 당연히 적의 침공에 함락되기 쉬웠다. 고려-거란 전쟁 이후 재위 2년, 1011년 8월 현종대왕은 원 나성 발어참성을 황성으로 재건축해 높이를 더 올린다. 재위 5년, 1014년 1월, 불탔던 궁궐을 다시 지었다. 태조 대부터 현종 재위 초까지 정전(正殿)이었던 천덕전(天德殿)[75]은 제2정전으로 삼고 제1정전으로 회경전(會慶殿)을 새로 지었다.[76]
'''이후 조성도감(造成都監)을 설치, 재위 20년째인 1029년 8월 23km에 달하는 거대한 나성을 쌓아 올린다.''' 참지정사 왕가도가 공사를 담당했고 장장 21년 동안 공사가 이어졌다.
산과 평지, , 개경 시가지를 모두 둘러싼 이 새로운 나성은 후 조선 왕조의 한양도성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기관만 감쌌던 원 나성과는 다르게 개경 대부분의 범위를 감쌌고 이는 수도의 방어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현종은 나성 → 황성 → 궁성 순으로 중국 왕조의 천자식 도성제를 따라 만들었다. 하지만 평지에 인공적으로 직사각형 구조를 가지는 중국 왕조와는 다르게 자연을 최대한 파괴하지 않은 형식으로 지어 중국과 차별되는 도성 체계를 구축했다.
'''현종이 정비한 도성제는 이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77] 심지어 후대 고종최우강화도로 천도했을 때도 고려궁지에 현종이 만들어 놓은 방식으로 다시 지었다.
제1수도 개경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서경의 궁궐 장락궁도 새로 고치니, 재위 2년, 1011년 8월 개경의 황성을 증축하며 장락궁에도 새로 황성을 쌓는다. 이는 태조의 뜻을 받들어 고려의 제2수도이자 옛 고구려의 수도인 서경을 우대하기 위함이었다.
고려사 악지 속악 부분엔 현종이 지은 나성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다. 속악, 즉 우리말로 된 노래라 고려사 편찬자들은 가사를 기록하지 않고 노래 내용만 기록했다. 제목은 '금강성(金剛城)'인데 나성이 금강과 같이 튼튼하다고 칭찬하는 뜻이다.[78]

3.5.2. 현화사 건립



현종은 이렇게 고난 끝에 국가를 이끌고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 전쟁을 끝낸 현종은 1017년 황도(皇都) 개성부(開城府) 영취산[79][80]에 '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를 지었다.
현종은 원찰(原刹)을 세워 사생아인 본인을 낳아 힘들게 살다 죽은 부모 안종헌정왕후의 명복을 빌었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현화사비 기록엔 현종은 사찰을 완공하자 ''''직접'''' 향풍체(鄕風體)로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81] 아마 우리말로 가사를 쓴 향가인 듯 한데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신하 11명에게도 완공을 축하하는 시뇌가(詩腦歌)를 쓰게 해 나무판에 새겨 법당의 바깥에 걸게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이 사찰은 중흥군주 현종이 지은 절인 만큼 고려 왕실이 중시하는 절 중 하나가 되어 불교 교종 계열의 대사찰로써 한국 불교사에 이름이 남았다. 또한 역대 군주들은 자신이 밀어주는 승려를 현화사의 주지로 삼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인종 대엔 중기 고려 최악의 권신인 이자겸이 자신의 아들 의장을 현화사 주지로 넣은 흑역사가 있다.
의종 대엔 현화사가 매우 확장된다. 의종 대 별궁인 청녕재가 이 곳에 세워졌으며 승려들은 의종에게 아부하려 바빴다고 한다.
현종은 이 곳에 안종, 헌정왕후, 성목장공주, 원정왕후의 영정을 보관했다. 또한 현화사비엔 현화사에 금으로 만든 종을 달아 현종이 직접 종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인종 대엔 이자겸의 난이 벌어져 당시 이 곳의 주지 의장이 현화사의 승병을 끌고 만월대를 습격해 신봉문(神鳳門)[82]을 쓰러뜨리려 했다. 고종 대엔 안종, 현종, 강종 세 임금의 영정을 보관했다고 한다.
유적 현화사지가 남아있다. 현화사비, 돌다리, 7층 석탑[83], 석불의 잔해 등은 여전히 외롭게 서있다. 사서에 기록돼 있는 건축으론:
  • 장흥원(長興院)
  • 청녕재(淸寧齋)
  • 동각(東閣)
  • 서각(西閣)
  • 금종보(金鐘寶)
  • 봉래전(蓬萊殿)
  • 숭경전(崇慶殿)
  • 금당(金堂)
  • 진전(眞殿)
  • 법당(法堂)
  • 중미정(衆美亭)

3.5.2.1. 현화사비

[image]
현화사비 유적 사진.
현화사비는 현종이 왜 현화사를 세웠는지 밝히기 위해 세웠다. 상당히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는데 하단은 큰 거북이 상이 비석을 바치고 있다.
비석 뒷면에는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함을 기원하였다. 기록엔 이를 위하여 매년 4월 8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베풀고, 부모의 명복을 위해서는 매년 7월 15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타불회(彌陀佛會)를 열었다고 한다. 또한『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 3본의 『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의 인판(印板)을 새겨 현화사에 두었으며, 특별히 ‘반야경보(般若經寶)’라 부르며 길이 모든 지방에 인시(印施)하게 하였다고 한다.
비신 상단엔 현종이 직접 “靈鷲山大慈恩玄化寺之碑銘(영취산대자은현화사지비명)”[84]이라고 전서체(篆)로 썼다.[85]
비신 앞면은 원비명(原碑銘)으로 주저(周佇)가 짓고 채충순(蔡忠順)이 썼으며, 뒷면은 채충순이 짓고 썼다. 주저와 채충순에 관해서는 고려사 열전에 기록될 정도의 인물들이었으며, 특히 주저는 송나라 온주(溫州)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한 문인이다.
현화사비의 내용을 보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시 현종에 대한 고려사람들의 평가는 요순에 비유하는 구절도 나오듯[86][87] 신격화 수준인 것을 알 수 있다.[88][89] 또 현화사비엔 부족한 고려 초의 기록이 남아있어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가령 고려사엔 없는 현종대왕의 아버지 안종의 시호와 능호가 남아있다. 원 사천에 있던 능은 효릉, 이후 금신산이란 곳에 묻어 건릉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정확한 위치도 나오지만 고려사엔 효릉 능호는 나오지 않고 건릉의 위치도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 헌정왕후의 칭호가 ''''대왕태후(大王太后)''''라 되있는데 이는 고려사에 나와있지 않다. 현종이 태황태후로 추존한 사실이 없는 셈. 헌정왕후가 만월대 내 별궁 보화궁(寶華宮)에서 죽은 사실이나 붕어(崩于)했단 표현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성종이 후계자 목종에게 제사의 대리를 맡긴 것이나 헌정왕후의 능묘 조성을 위한 도감[90] 설치는 모두 고려사에 안나온다.
헌정왕후천추태후, 성종이 친남매지만 고려사엔 성종이 천추태후의 오빠란 기록만 있다. 헌정왕후는 남매의 몇 째인지 알 수 없는데 현화사비엔 헌애왕후가 성종의 둘째 누나란 사실을 밝혀 헌정왕후가 천추태후의 언니이며 고려사 기록되지 않은 대종의 맏딸이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종의 아버지 안종에겐 헌정왕후와 사통 전, 이미 아내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종의 누나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가 등장하기 때문. 현종이 누나가 있다는 사실은 고려사에 없다.
현화사에 배치됐던 대장경에 대한 기문은 천수현 개국후 강감찬이 썼다. 현종 본인이 직접 현화사에 대한 시, 글을 썼는데 아쉽게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현종과 11명의 신하가 향풍체로 노래를 만들었다는데 역시 실전되었다.
현화사비에선 자국을 '인방(仁邦)', '청방(靑邦)', '일방(日邦)'이라 불렀고 북송은 고려를 '대방(大邦)'이라 불렀다. 현종을 '성상(聖上)', ''''만승(萬乘)에 거주하는 인왕(人王)''''[91]로 표현해 북송천자와 대등하게 표현했다. 선대 임금을 부를 때 '묘호 + 대표시호 + 대왕'으로 불렀으며 더 줄여서 '묘호 + 대왕'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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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전액(御書篆額)'''[175]

신은 천지가 생겨난 이래 성명(聖明)하신 임금으로는 오직 요임금(唐堯)과 순임금(虞舜)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임금께서는 지극한 어짊으로써 천하를 다스리셨고, 순임금께서는 크신 효성으로써 나라를 교화하셨기 때문에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지고 역사책에 빛나고 계십니다.

이후에 중하주(中夏主)[176]

는 물론 여러 후왕(侯王) 등 모든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들로서 누가 요임금과 순임금의 자취를 잇고 유풍을 떨쳐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를 다스리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어짊을 닦되 어짊이 지극함에 이르지 못하였고, 효성을 행하되 효성이 온전하지 못하여서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일으킴에 있어 처음과 끝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서 대부분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이 심오하여서 계승하기 어렵고, 어짊과 효성의 도가 광대하여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도를 본받으며 중간에 그침이 없었던 것은 우리 성군(聖君) 뿐이십니다.'''

'''성상(聖上)께서는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봉양하려는 마음을 극진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빠뜨림이 없었고, 왕위에 오르신 후에는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효도를 다하지 못함을 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추존의 예를 거행하고 종묘에 모시는 의식을 갖춤으로써 예법에 정해진 절차 이미 모두 다 행하였지만 그래도 성상의 효심에는 부족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여 추모하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취하고 착한 일을 행하고 참된 가르침에 참여하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사찰을 짓고 돌아가신 영혼을 천도하시었습니다.

이로써 정토에 갈 수 있는 공덕이 늘어나고 하루 빨리 깨달음의 경지를 얻을 수 있게 하여 아버님과 어머님의 자애로운 사람에 보답하고 부처님들의 서원을 이루게 하시었으니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황고(皇考)[177]

이신 안종 효의대왕(安宗 孝懿大王)께서는 태조의 친자(親子)로서 인방(仁邦)[178]본지(本枝)이신데, 예(禮)·악(樂)·시(詩)·서(書) 등에 마음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시었으며 온화하고 겸손하신 태도를 몸에 갖추셨으니 진실로 왕자(王者)의 재능을 가지고서 고인(古人)의 행동을 실천하셨습니다.

성종 문의대왕(成宗 文懿大王)의 말년인 계사년(성종 12, 993) 겨울에 '''"못된 거란"'''[179]

이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영토에 쳐들어와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니, 이웃 군대가 가까이 옴에 우리의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서 성종대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한 적들을 물리치러 나아가셨습니다.

출발하시기 앞서 중추부사급사중(中樞副事給事中) 최숙(崔肅)을 보내 선지(宣旨)를 전하니:

“지금 이웃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朕)이 직접 무리를 인솔하여 그 군대를 물리치러 나아간다. 경도(京都)에 혹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니 군(君)은 가족들을 이끌고 잠시 남쪽의 안전한 곳으로 가서 이 어려움을 피해 있다가 변방이 조용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행차를 돌려 돌아오라”[180]

라고 하신 뒤 내알자감(內謁者監) 고현(高玄)을 선배사(先排使)로 삼아서 어조(御槽) 안마(鞍馬) 의복(衣服) 비단(匹帛) 주식(酒食) 은기(銀器) 등과 그곳에서 사용할 토지와 저택, 노비들을 하사하시고 호위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셨습니다.

곧바로 사주(泗州)에 이르셨는데, 성상께서는 함께 모시고 가면서 문안을 더욱 지성으로 하시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서 갑자기 병이 드셔서 낫지 못하시고 통화[181]

14년 병신년[182] 7월 초7일에 그곳에서 운명하시었습니다. 얼마 후에 장례치를 땅을 점쳤는데, 사주(泗州)의 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성종대왕께서는 곧 군사를 돌이키시고 다시 평안을 되찾으셨습니다. 서로 잘 지내기로 하여 그들과 화친을 맺었고, 이로서 군인과 백성들이 다시 근심과 어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안종대왕을) 다시 서울로 맞이할 겨를이 없다가 갑자기 돌아가심을 듣게 되었으니, 작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카로서 애통함을 다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을 갖추고 조정의 조회를 쉬는 예를 행하였으며, 장례에 부조하는 물건을 정해진 제도 이상으로 하였고 (임금께서) 슬퍼하시는 마음은 잠시도 그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상에게 본궁(本宮)으로 돌아와 머무르도록 하면서 깊이 위로해 주셨고, 이후의 돌봄도 매우 간절하셨습니다.

황비(皇妣)[183]

이신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께서는 대종대왕(戴宗大王)의 따님이고 성종대왕의 둘째 누님이셨습니다.

왕문(王門)의 후예이고 본종(本宗) 출신이셨지만 검소함은 대련(大練)을 따랐고, 아름다움은 금련(金蓮)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안종대왕과는) 난새와 봉황의 짝처럼 서로 잘 어울리고, 거문고와 비파의 소리처럼 서로 조화되었습니다. 여공(女功)과 부도(婦道)는 여유있게 하였고, 여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과 삼종지도(三從之道)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해로하지 못하고 황고(皇考)에 앞서서 돌아가셨습니다.

순화[184]

4년[185] 늦봄에 갑자기 병에 들자 성종대왕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병을 물으시고 아침저녁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명의를 보내어 거듭 치료하게 하고, 좋은 약초를 보내어 달여 마시게 하였으며, 또한 왕실의 보물을 사찰에 희사하고 낫기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수명이 길지 못하여 기도의 효험도 없이 그해 3월 19일에 대내(大內)의 보화궁(寶華宮)에서 붕어(崩于)하셨습니다.[186]

성종대왕께서는 지친(至親)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마음을 크게 애통해 하시며 '이미 주어진 수명을 다하여 편안히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누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목종대왕(穆宗大王)께서 당시 잠룡(潜龍)[187]

으로 있었는데 감호를 맡게 하여 삼사청(三司廳) 안에 빈소를 차리고 제궁(諸宮)의 비빈(嬪妃)과 문호양반(文虎兩班)[188]을 이끌고 금봉문(金鳳門) 앞에서 발상(發喪)하게 하였습니다. (상례 기간 동안) 아침과 오후에 음식을 올릴 때에는 늘 직접 참여하셔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곧 재상을 시켜 책문(冊文)을 올려 시호를 헌정왕후(獻貞王后)로 하였고 또 태복감(太卜監)에게 명하여 땅을 골라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과연 경성(京城) 간방[189]

에 길지를 얻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능호는 원릉(元陵)이며, 장례를 치를 때에는 재상과 근신들을 모두 차출하여 도감(都監)을 만들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셔서는 책문(冊文)을 올려 황고(皇考)를 안종 헌경효의대왕(安宗 憲景孝懿大王)이라고 하고 황비(皇妣)를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라고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어머님의 능은 가까운 곳에 있어 다시 옮길 필요가 없지만 아버님의 효릉(孝陵)은 먼 곳에 있어 계절마다의 제사를 천리 먼 곳에서 지내야 했으므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다시 장례를 지내게 하였으니 능이 왕도(王都) 가까이에 있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무덤을 열 때에는 중추부사 추충좌리공신 대중대부 수상서이부시랑 상주국 수안현 개국남 식읍 삼백호 사자금어대(中樞副使 推忠佐理功臣 大中大夫 守尙書吏部侍郎 上柱國 守安縣開國男 食邑 三百戶 賜紫金魚袋) 윤징고(尹徵古)를 파견하였고, 영구를 모시고 올 때에는 추충진절위사공신 금자흥록대부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 상주국 청하현 개국백 식읍 칠백호(推忠盡節衛社功臣 金紫興祿大夫 內史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監修國史 上柱國 淸河縣開國伯 食邑 七百戶) 최침(崔沈)을 여러 차례 보내어 영구를 감호(監護)하게 하였습니다.

(영구가) 서울에 도착하자 법가(法駕)를 엄숙하게 갖추고 동쪽 교외에 행차하여 받들어 모시고 임시로 귀법사에 빈소를 마련한 다음 직접 백료들을 이끌고 서울 동북쪽 약 30리에 있는 금신산(金身山)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곳은) 푸른 까마귀가 길함을 고하고 흰 학이 경사를 알리는 곳으로 그림을 살펴보면 산과 강의 흐름이 만나는 곳이고 점을 쳐보면 음양의 이치가 부합하는 곳이었습니다.

장례 치를 날짜를 정하고 (장례는) 처음과 마찬가지의 의식을 갖추어 행하였습니다. 애통함으로 (성상의) 몸은 잘리고 무너지는 것 같았고, 감동하여 하늘과 땅 역시 슬퍼하였습니다. 천희[190]

원년인 정사년[191] 4월에 건릉(乾陵)에 장사지냈습니다.

장례를 마친 후에 급하지 않은 일을 중단하고 농사가 바쁘지 않은 때를 살펴 능에서 가까운 영취산(靈鷲山)에 이 절(현화사)을 창건하였습니다. (이곳은) 여러 산봉우리들 사이에 산세가 되돌아 감싸안는 곳으로 서울 가까이에 있으면서 세상의 시끄러움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절을 짓는 일은 대단히 힘들어서 위엄과 덕망을 갖추지 않으면 그 일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시어 추충좌리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삼사사 상주국 청하군 개국후 식읍 일천호(推忠佐理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傅 守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判三司事 上柱國 淸河郡 開國侯 食邑 一千戶) 최사위(崔士威)를 시켜 별감사(別監使)로 삼았습니다.

재신 최사위는 사람됨이 청렴·공평하고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며, 밖으로는 인자함이 드러나고 안으로는 범행[192]

을 닦아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들으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즐거워하였는데, 명령을 받은 이후 집에서 잠자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며 올바로 되도록 헤아렸으니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모두 다 그의 마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다른 산에서 나무와 돌을 가져오지 않고, 할 일 없는 사람들만을 부린 끝에 세월이 흘러 4년만에 완성하였으니, 법당과 불전은 높고 엄숙하여 도솔내원(兜率內院)과 같고 형세는 두루 갖추어져서 급고독원(給孤獨園)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별도로 전각을 만들어 성상 아버님과 어머님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게 하였는데, 두 분의 성용(聖容)을 이곳에 봉안함에 이르러서는 예를 갖추어 황고(皇考)껜 영문(英文), 황비(皇妣)껜 순성(順聖)이라는 휘호(徽號)를 더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님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옛날과 지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193]

표(表)를 올려 공사가 끝났음을 아뢰자 난가[194]

가 직접 행차하셨으니 용안(龍顔)에는 즐거움이 가득하였습니다. 두 눈동자(重瞳)로 두루 살펴보시며 마음에 흡족해 하셨고, 여러 신하들도 함께 둘러보며 세속세계가 아니라고 찬탄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들르셔서 해가 질 때까지 돌아갈 생각을 잊으시고 계시다가 조(詔)를 내려 ‘이 절을 이끌 사람은 반드시 고승으로 하여야 한다.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면 어찌 대중들을 이끌 수 있겠는가’라 하시고, 드디어 삼천사(三川寺) 사주(寺主)인 왕사(王師) 도승통(都僧統) 법경(法鏡)에게 이곳에 머무르며 대중을 이끌고 법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또 전지(田地) 100경(頃)과 노비 100명, 소와 말, 공구(供具) 등을 시납하여 상주[195]

에 충당하게 하였습니다.

사주(寺主)인 왕사 도승통께서는 일승(一乘)의 법장(法匠), 대교(大敎)의 종사(宗師)로서 참된 가르침[眞乘]을 완전하게 깨닫고 불성(佛性)에 두루 통달하여서 후학들을 가르쳐 (불교의) 깊은 가르침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 때에 사방의 학도들이 태양처럼 받들며 구름처럼 모여들어 채 1년이 되기 전에 천여 명의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성상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미 이 아름다운 곳에 많은 승려들이 모였으니, 참된 가르침을 모은 대장경을 구하고 봉대(蜂臺)의 성사(盛事)를 기록하여야 한다’고 하시고 특별히 사신을 뽑아 사유를 자세히 기록한 후 바람을 타고 파도를 넘어 깊고 너른 바다를 건너게 하여 멀리 중국에 조회하여 대장경을 요청하는 표를 올렸습니다.

천자께서 그 표문을 보시고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10행의 한조(漢詔)를 내려 칭찬하시고, 대장경 한 질을 보내어 도와주시었습니다.

그 조(詔)에 이르기를 ‘경(卿)은 대방(大邦)[196]

을 맡아 조상의 공업을 계승하고서 난해(蘭陔)의 봉양을 잃어버림을 생각하고 바람과 나무의 때가 어긋남을 슬퍼하며 사찰을 크게 지어 정성스런 마음을 드러내고 공손하게 표문을 올려 대장경을 요청하였으니 순수한 효성은 아름답게 여길만하고 정성을 다한 것은 칭찬 받을만하다. 바친 물건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특별히 나누어주라고 명령하니 마땅히 총애와 은총을 느끼고 보내는 것을 삼가 받으라. 이제 특별히 경(卿)에게 대장경 한 질과 (대장경을 포장하고 쌀) 상자, 휘장, 금옥(金玉) 등을 보내니 받도록 하라. 비록 좋은 인연을 돕는 것이지만 효성의 감동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불전과 불상에는 안팎으로 향과 등을 공양하고, 대장경의 경전들은 아침저녁으로 독송하는 소리가 늘리게 하라. 복을 심고 좋은 일을 선양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우리 성군(聖君)의 효행의 공덕이 여기에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본받으면서 중간에 그침이 없었다고 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일이 모두 이루어짐에 좋은 돌에 이를 새기고 커다란 비를 세워 후대에 전해지게 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특별히 윤지(綸旨)를 내려 신에게 문장을 짓도록 명령하시니 신이 재주가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여 사양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하였고 임금님의 명령을 끝까지 받들지 않는 것도 신하의 정성에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좋은 문장은 이미 조아(曺娥)의 비송(碑頌)에 미치지 못하고 문(文)과 질(質)을 맞추는 것은 육기(陸機)의 부언(賦言)에 어그러집니다. 얼굴이 두꺼운 것을 깊이 부끄러워하면서 다만 그 일을 기록하되 있는 사실을 기록할 뿐입니다. 명(銘)으로 운을 맞추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의 성군으로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계셨으니,'''

'''도(道)와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仁)과 효(孝)로 백성을 교화하셨네.'''

'''순임금은 효성으로 다스리고, 요임금은 어짊으로 다스리니 '''

'''윗사람은 실천하고 아랫사람은 순박하며, 풍속은 두텁고 풍속은 아름다웠다. (其一)'''

'''뒷사람이 계승함에 모두 그 다스림을 생각하니'''

'''비록 어질고 효성을 하였지만 끝까지 한 사람 드물었다.'''

'''처음에는 실천하여도 중도에 그만두니 '''

'''책에서 아름답게 칭송함을 듣지 못하였다. (其二)'''

'''오직 우리 밝은 임금 옛 성현을 스승삼아 정사를 베푸시니'''

'''요임금을 따라서 풍속을 보살피고 순임금을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시네.'''

'''그 덕을 닦음에 조상을 잊지 않았으니'''

'''지극한 효성에 사람들이 귀의하고, 지극한 덕에 하늘이 돌보시네. (其三)'''

'''무엇을 성인이라 하나. 덕으로 선정(善政)을 베풀고 '''

'''윗사람을 편안히 하며 백성을 다스리고, 조상을 높이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

'''자비로 만물을 기르고 효성은 모든 행실에 으뜸이니'''

'''우리 임금의 하시는 일 여기에 다 갖춰져 있네. (其四)'''

'''왕위에 오르시고 늘 부모의 은혜 생각하니'''

'''추존(追尊)의 예절 갖추고 의호(懿號) 높이 올리셨네.'''

'''개장(改葬)을 함에는 현침(玄寢)을 견고히 갖추었다.'''

'''유전(儒典)을 이미 받들었으니 부처의 가르침 어찌 따르지 않으리. (其五)'''

영취산 아래에 형세가 으뜸이니

안개 빛은 계곡에 빛나고 산은 연이어 들판을 둘렀다.

터를 살펴 정사(精舍)를 세우니

산천의 주인을 얻고 경전은 중국에서 왔다. (其六)

'''빈번히 대장경을 펼치고 거듭하여 용이(龍頤)를 움직이시니'''

'''사부대중에 가르침을 전하고 설법은 온종일 이어진다. '''

'''복은 산 자와 죽은 자에 두루 미치고 이익은 신기(神祇)에도 미치니'''

'''한 사람의 효성을 모든 백성이 따라 하도다. (其七)'''

'''부모님의 사랑은 갚아도 한이 없고'''

'''부처님의 서원은 실천함에 쉴 때가 없네.'''

'''착한 일을 행하면 부처님이 찬탄하시니'''

'''교화는 먼곳까지 미치고 행적은 유현[197]

에 두루 빛나네. (其八)'''

'''생전에 보답함은 황천을 감동시키고'''

'''사후에 명복을 빌면 황천에 미친다. '''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키면 조상의 업적이 길이 이어지리라.'''

'''공덕은 두텁게 될 것이고 효성도 이보다 큰 것이 없다. (其九)'''

'''복을 심는 땅이니 여기가 곧 좋은 밭이라'''

'''추모의 방법으로 이보다 좋은 일 없도다.'''

'''세월이 흘러 바다가 마르고 골짜기가 변하여 평평하게 되어도'''

'''우리 임금의 효성은 만대에 전해지리라. (其十)'''

천희(天禧) 5년 신유년[198]

가을 7월 갑술 초하루의 21일째 갑오일에 세우다.[199]

대덕 사자사문(大德 賜紫沙門) 신(臣) 정진(定眞), 비서성저후(秘書省抵侯) 신(臣) 혜인(慧仁) 신(臣) 능회(能會) 등이 왕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유격장군(游擊將軍) 신(臣) 김저(金佇)가 왕명을 받들어 비석의 덮개를 새겨 만들다.

고려국 영취산 대자은현화사비 음기

추충진절위사보국공신 흥록대부 검교태위 수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겸태자소부 상주국 제양군 개국후 식읍 일천호(推忠盡節衛社輔國功臣 興祿大夫 檢校太尉 守內史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兼太子少傅 上柱國 濟陽郡 開國侯 食邑 一千戶)인 신(臣) 채충순(蔡忠順)이 선지(宣旨)을 받들어 짓고 쓰다.

신이 성인의 지극한 가르침을 들으니, 유교의 경전에서는 뜻을 기르고 부지런히 닦으면 정교(政敎)가 잘 된다고 하였고,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마음을 경건하게 하면 복록(福祿)을 얻게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 바 서로 삼교[200]

의 으뜸이라고 하지만 서로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참된 이치를 안으로 깨달으면 교화의 공덕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어짊과 효성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므로 선생[201]

께서는 ‘효는 덕의 근본으로서 가르침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선왕들은 효성으로 천하를 다스렸으니 그 가르침은 엄하지 않아도 잘 이루어졌고, 그 정치는 무섭지 않아도 잘 다스려져서 천하는 평화롭고 재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불교에서도 또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이야기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그 책의 내용과 같아서 다시 번거롭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유교와 불교의 두 가르침에서 모두 효성을 으뜸으로 하였으니 효성은 지극한 것이고 그 공덕은 두텁습니다.

또한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업(業)의 쌓임으로 인하여 사람들 중의 왕으로 태어나고, 국토를 거느리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이라고 부른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하늘의 신들이 수호하며 혹은 먼저 수호를 받고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간다. 비록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사람들의 왕으로 태어난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지금의 성상께서는 하늘의 신들이 수호하여 사람들의 왕(人王)으로 태어나셨으니 청방[202]

를 다스리면서 그윽한 덕을 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만승[203]

의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사총(四聰)을 타고 나셨으니 삼교(三敎)의 지극한 가르침을 한 마음에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

'''어짊을 베풀어 도덕이 빛나고 효성으로 다스려 교화가 이루어지니 백성들이 기꺼이 모시고 팔방(八方)의 사람들이 즐거이 섬기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밖으로는 유교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여 안과 밖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옛날과 지금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이른 바 신령스러운 앎이 선왕과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부합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금의 임금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과인(寡人)[204]

이 처음 대보(大寶)에 오른 이래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건릉(乾陵)이 사주[205]에 있어 제사를 드리기에 조금 멀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전쟁이 계속되어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비로소 지난 정사년[206]

4월 중에 길일을 택하여 인타리산(因陀利山) 아래의 좋은 땅으로 옮기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제 능 동쪽 가까운 곳에 산과 물이 감싸고 도는 형세로서 산들이 앞으로 무한히 펼쳐져 있고, 삼나무와 소나무가 푸른 자태를 보이며 날카로운 바위 사이에 울창하게 드러나는 곳이 있으니, 넓이는 불전(佛殿)과 법당(法堂)을 세우기에 알맞고 높이는 계단을 놓기에 적당하다.

바람과 볕을 끌어당기고 구름과 안개를 밀어내니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이제야 드러난 곳으로서, 마치 신인이 오랜 세월 감추어 두고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가 신성한 임금의 오늘의 요구에 응하여 드러낸 것이니 (이곳에) 들어와 사용하여도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아름답고 멀리서 바라보니 그림과 같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관리와 백성들의 복일 뿐 아니라 신성한 임금이 기뻐하시는 바였습니다.

'''곧바로 이 신비로운 곳에 이와 같은 큰 가람 하나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으니 부모님을 천도하여 명복을 빌고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임금님의 살피심에 부합하여 일방[207]

에 복을 가져왔으니, 북조(北朝)에서 거듭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여 무기를 감추고 백성들이 편안히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208]

사찰을 짓는 공사가 거의 끝나고 불상의 모습도 갖추어지자 다시 절 안 서북쪽에 별도로 진전[209]

한 곳을 지어 임금님의 돌아가신 아버님이신 안종 헌경영문효의대왕(安宗 憲景英文孝懿大王)과 돌아가신 어머님이신 효숙인혜순성대왕태후(孝肅仁惠順聖大王太后) 그리고 돌아가신 누님인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 원정왕후(元貞王后) 등의 진영을 봉안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서 살아계실 때에 못지 않기를 빌었으니 이는 부처님과 하느님의 은택을 기원하면서 또한 돌아가신 분들이 복을 내려주실 것을 바란 것이었습니다.

경신년[210]

10월중에 이르러 임금님의 어머님의 고향인 황주(黃州)의 남쪽 지역에서 진신사리가 출현하여 빛을 내며 허공에 떠서 빛나는 감응이 있었고, 또한 임금님 아버님의 산릉 근처에 있는 보명사(普明寺) 안에서 다시 부처님의 어금니가 출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의장을 갖추고 직접 교외로 나가 (진신사리와 부처님의 어금니를) 궁궐로 맞아들였으니 이는 그 깊은 경건한 마음에 불가사의한 감응이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 절에 7층석탑[211]

하나를 만들어 부처님의 어금니 하나와 사리 50알을 봉안함으로서 귀의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어서 또 신유년(현종 12, 1021) 4월 중에 상주(尙州) 관할하에 있는 중모현[212]

에서 다시 사리 오백여 알이 출현하여 허공에 떠서 빛을 내는 일이 있으므로 근신인 중추부사 상서우승(中樞副使 尙書右丞) 이가도[213]를 그곳에 보내어 맞아 오게 하고 성상께서 다시 예를 갖추어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습니다.

과연 흰색과 붉은색으로 각기 광명을 내었습니다. 이에 그중 50여 알을 나누어 이 절로 가져와 주존불의 가운데에 안치하고 소상을 만들어 공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밖의 나머지는 모두 가져다가 내전도량[214]

에 안치하고 임금님께서 공양하셨습니다.

또다시 영험과 기이한 일이 있었으니, 처음 이 절을 만들 때에 강당의 터를 파낼 때에 그 안에서 문득 검은 수정 구슬 한 알을 줍고, 그 뒤에 다시 지난 경신년에 금당의 터를 닦을 때에 다시 자수정 구슬 하나를 주워 주존불의 백호 사이에 안치하였는데, 이 일들은 서로 부합하고 상응하는 것으로서 영험을 찬탄하여야 합니다.

또한 지난번에 사신에게 종이와 먹 값을 들려 중화[215]

에 보내어 사유를 아뢰고 대장경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송나라에서) 특별히 대장경 한 질을 보내면서 (종이와 먹) 값으로 가지고 간 물건들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고 다시 우리의 바람에 따라 채색물감 2천여 량(兩)을 보내라는 (북송의) 선지(宣旨) 덕에 이 절의 불전과 법당, 진전 등을 모두 법도대로 채색하고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216]

이미 금종과 법고를 만드는 일이 완성되자 (성상께서는) 난가[217]

를 타고 군신들과 함께 예를 갖추어 행차하시어 함께 종을 치시고 더불어 기쁨을 함께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직접 조곡(租穀) 2천여 석(碩)을 시납하셨고, 여러 신하와 양반들도 각기 문서에 기록된 것처럼 시납하여 별도의 금종보(金鍾寶)를 만들어 운영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궁원[218]들도 (성상의) 큰 효성을 본받아 각기 전지(田地)를 헌납하여 (사찰을 완성하는) 훌륭함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다시 발심하고 서원하시어 나라의 발전과 사직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매년 봄 4월 8일부터 3일낮 3일밤 동안 미륵보살회[219]

을 개설하였고, 또한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 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워 다시 매년 가을 7월 15일부터 3일낮 3일밤 동안 미타(彌陀) 도량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장인들에게 특별히 명령하시어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과 3종류의 『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의 목판을 새겨 이 절에 비치하고 별도로 반야경보(般若經寶)를 만들어 널리 이들을 인쇄하여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검교태부 수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檢校太傅 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인 최사위[220]

가 지난 번 별감(別監)을 맡은 이래로 세심하게 마음을 다하여 이 큰 원을 이루고자 하여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계속하여 사찰에 머무르면서 힘써 지휘하고 직접 감독하여 꼼꼼하게 만들고 장식과 꾸밈도 두루 갖추어 조금도 빠뜨림이 없으니 성상의 뜻에 그대로 부응하며 현명한 생각을 의지할만 하다고 생각하여 시중(侍中)을 더하여 주시고 나머지 관직은 전과 같이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의 성조도감사[221]

인 예빈경(禮賓卿) 황보유의[222]와 부사(副使)인 전전중소감(前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 장작소감(將作少監) 이영(李英), 예빈소경(禮賓少卿) 용운(龍運), 판관(判官)인 중추일직 형부낭중 겸어사잡단(中樞日直 刑部郞中 兼御史雜端) 안홍점(安鴻漸), 녹사(錄事) 4인인 신호위장사(神虎衛長史) 이휘좌(李徵佐), 내사주서(內史主書) 백사효(白思孝), 소부승(少府丞) 최연가(崔延哿), 상서도사(尙書都事) 이성자(李成子), 그리고 도관사[223]인 좌가도승록(左街都僧錄) 대사(大師) 광숙(光肅)과 부사(副使)인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 언굉(彦宏),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 석진(釋眞), 판관(判官)인 우가승정(右街僧正) 성보(成甫) 및 승기사(僧記事) 2인과 속기사(俗記事) 5인, 지리업[224]의 삼중대통(三重大通) 정웅(鄭雄), 중대통(重大通) 김득의(金得義) 등에게도 각기 은택을 차등있게 베풀어 마음을 같이 하여 공덕을 함께 이름을 기억하고 믿음과 정성을 다함을 표창하셨습니다.

'''(성상의) 지극한 서원이 거의 이루어졌으니 그 훌륭한 생각을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인 주저(周佇)에게 명하여 먼저 비문을 짓게 하고, 이어서 행이부상서 참지정사(行吏部尙書 參知政事)인 채충순(蔡忠順)에게 이를 쓰게 하신 후 곧바로 훌륭한 장인을 시켜 글씨를 새겨 끝마치자 비석을 세울 때에 직접 왕림하셨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행차하여 직접 보시고 ‘나의 뜻에 거의 부합되어 나의 마음이 매우 즐겁다’고 하시고 친히 비석 위에 오르시어 직접 붓을 휘두르셨으니, 비석의 전액(篆額)은 물론 ‘왕이 전액을 쓰다(御書篆額)’ 네 글자 역시 성상께서 직접 쓰셨습니다.'''

'''성상께서 붓을 휘두르심에 용들[225]

이 구름과 물 속에 움츠리는 것 같고, 성상의 마음 쓰심에 거북이[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석의 귀부(龜趺)를 가리킴]도 반드시 그 영광에 감동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행차를 따른 많은 관료들이 모두 절하여 (성상의 글씨를) 보고서 다함께 만세를 외치며 우러러 찬탄하였습니다.'''

'''진전에 성상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존영을 안치할 때에는 성상께서 직접 시책[226]

을 지어 예를 행함으로써 직접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어 반드시 명계에까지 통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아울러 성상께서 직접 진전에 대한 찬문을 지어 전각 안의 동쪽과 서쪽 벽에 쓰게 하시고, 진전을 노래한 시는 나무판에 써서 진전 문 바깥에 걸어두게 하셨으며, 별도로 성상께서 지으신 시를 나무판에 써서 법당 문 바깥에 걸어두게 하여 다 함께 길이 전하여 두루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효성이 황천에 감응하고 도덕이 성스러운 시대에 비치는 것이니 실로 훌륭하신 군주의 문장으로 금으로 된 바닥에 금을 굴리는 소리이고, 훌륭하신 성인의 말씀으로 옥으로 된 거리에 옥을 굴리는 소리일 뿐 아니라 세속을 떠난 신인이 높은 산에 오른 감흥을 이야기하고 덕 높은 승려가 깨달음의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서 예전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고 오늘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 신하들에게 각기 진영에 대한 찬문을 바치도록 하셔서 모두 진전 안쪽의 벽에 쓰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진전을 노래한) 시들을 모두 나무판에 써서 진전 바깥의 회랑에 걸어두게 하였는데, 재상과 추밀, 한원[227]

과 윤위[228], 봉각[229]의 뛰어난 인재와 현인, 학자 등 모두 21인의 것이었고, 또한 이 절의 완성을 축하하는 시들을 모두 나무판에 써서 법당 바깥에 걸어두게 하였는데, 44인의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구절을 처마 밑에 배열하고 좋은 문장을 창문 사이에 늘어 놓은 것이니 아름다운 비단이 함께 빛나고 아름다운 구슬이 비추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말과 풍속은 비록 같지 않지만 일을 찬미하고 생각을 서술한 것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시경』에서 ‘찬탄함에 부족함이 있어 노래하고, 노래에 부족함이 있어 손과 발로 춤춘다’고 이야기한 뜻일 것입니다.

'''성상께서 향풍체(鄕風體)로 노래를 지으시고 이어서 신하들에게도 축하하는 시뇌가(詩腦歌)를 바치도록 하니 모두 11인이었고, 이들을 모두 나무판에 서서 법당의 바깥에 걸게 하였습니다.'''

'''이는 구경오는 사람들이 모두 각기 자신이 익힌 바에 따라서 아름다운 뜻을 알게 하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다만 걸려있는 시들을 보고서 노래한 뜻을 알게 하여 아름다운 소리가 두루 퍼져서 훌륭한 다스림이 완성되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장경에 대한 기문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강감찬[230]

에게 짓도록 명령하셨고, 금당의 기문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 최항[231], 종명(鐘銘)은 중추사(中樞使) 이공(李龔), 진전의 기문은 한림학사(翰林學士) 곽원(郭元), 숭경전(崇慶殿)의 기문은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 김맹(金猛), 현화사를 경찬하는 시들에 대한 전체 서문은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주저(周佇), 진전을 경찬하는 시들에 대한 전체 서문은 기거사인(起居舍人) 최충(崔冲), 봉래전(蓬萊殿)의 기문은 치사한림학사승지(致仕翰林學士承旨) 손몽주(孫夢周)에게 각기 짓게 하시니 각자 훌륭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다함께 깊은 진리를 담아서 저 부처님의 교화의 방법을 서술하고 우리 임금님의 도덕의 가르침을 찬탄하였습니다.'''

'''모두 벽에 걸어 두어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바인데, 그 자세한 것은 이미 색깔있는 비단에 기록하였고, 그 나머지는 찾아서 이제 듬성듬성한 삼베에 적었습니다. 이에 신 채충순(蔡忠順)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비의 뒷면에 (음기로) 적게 하시니 붓놀림의 둔함은 홍두깨를 잡은 것 같고 학식의 모자람은 벽을 뚫고 있는 것 같은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외람되이 밝은 명령을 찬(撰)받았으니 오직 정성을 다하여 좋은 문장의 나머지를 주워서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고자 바랄 뿐입니다. 군자들이 두루 살펴본다면 감히 저의 하는 바가 어찌 (성상의) 영명하심을 더럽히는 황송스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태평[232]

2년 임술년(현종 13, 1022) 가을 10월(相月) 어느 날에 삼가 적다.

대덕 사자사문(大德 賜紫沙門)인 신(臣) 석정(釋定)과 진속비서성지후(眞屬秘書省祇侯)인 신(臣) 혜인(慧仁), 지후(祇侯)인 신(臣) 능회(能會) 등이 선지(宣)을 받들어 새기다.


대덕 사자사문(大德 賜紫沙門)인 신(臣) 석정(釋定)과 진속비서성지후(眞屬秘書省祇侯)인 신(臣) 혜인(慧仁), 지후(祇侯)인 신(臣) 능회(能會) 등이 선지(宣)을 받들어 새기다. }}}


3.5.3. 홍경사 건립



현종은 현화사 말고도 안종 한 사람만을 위한 사찰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 절이 바로 왕립사찰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이다.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가 남아있어 홍경사의 기원을 알 수 있으며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서북면 군단 부원수였던 강민첨이 주도하여 지었고 절은 약 200여 칸으로 안에 약 80여 칸 크기의 휴게소가 있어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했다고 한다.
비석은 안종을 선황(先皇), 황고(皇考)라 부르며 칭송했다. 또한 현종을 성상(聖上)이라 높히고 현종의 명령을 선지(宣旨)라 했다. '성상이 나라를 다스린지 18년째 되는 해(聖上御國之十八載)'라 하여 비석을 세운 날짜를 기록할 때 북송의 연호보다 현종의 재위기간을 먼저 적어 자주성을 드러냈다.
천안 홍경사에도 현화사비처럼 봉선 홍경사 갈기비가 남아있었다. 봉선 홍경사 갈기비의 내용을 보면 현화사비처럼 현종과 해동공자 최충, 당대 명필인 백현례를 비롯한 고려사람들의 생각를 알 수 있는데 현종은 5살때 돌아가신 아버지 안종을 항상 그리워 했던 것 같다.번역블로그글

3.5.4. 거란 견제


전쟁 이후 요나라는 힘이 약해져 송나라에 대한 침략은 고사하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대로 고려는 송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만주의 여러 여진 부족이나 탐라국 그리고 11세기 이후 규슈의 지방관들의 조공을 받게 된다.
속자치통감에 의하면 1014년에 현종이 거란의 2차 침입을 막은 이후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송에 연호를 요청하면서 송에게 황제 존호 사용에 대한 허락을 요청했다.
한편 현종은 요나라에 대한 추가적 공세책으로 발해부흥운동국가인 흥료국을 지원하였으나 곧 실패하면서 흥료국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았다.[92] 이후 흥료국은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거부하였고 이후 멸망당한다.[93]
1차 지원 이후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은 것은 국가의 번성보다 전쟁으로 백성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인이 왕이 되자마자 전쟁터져서 수도 개경까지 잃고 나주까지 튀어야 했으니 내실부터 튼튼히 하는게 먼저였을 것이다.
거란족의 침입 외에도 여진의 침입이 있었으나 모두 격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94]
그 뒤 거란이 발해 유민들을 요의 본토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사』에는 1030년부터 1033년에 이르는 3∼4년 동안 약 740명의 발해 유민이 흘러 들어왔다고 전한다.[95]

3.5.5. 국가 제도 정비


여요전쟁 이후 현종은 드디어 국왕을 정점으로한 강력한 왕권을 발휘하여 국가를 발전시킨다. 고려는 성종 이후 다시 중앙집권화를 이룩, 통일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백성이던 때와 피난길 중에 겪은 위험과 고난을 바탕으로 주창수렴법[96]이나 면군급고법[97], 구분전 지급[98] 같은 구제법을 마련했다 매년 억울한 누명을 쓴 백성들을 풀어주는 일을 실시했으며 이는 이후 삼남 문종대에 사형수 삼심제로 이어진다 또한 일부 특권층의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기 위해 각도의 기술자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향리 정원제, 향리 공복제, 주현공거법등을 실시하여 지방세력 규제 및 중앙 집권 강화책을 폈다. 이외에도 감목양마법, 나성 축조 등 전쟁에 대한 대비를 지속했다.
훌륭한 왕들이 그렇듯, 현종은 능력있는 신하들을 계속해서 기용하였고 채찍과 당근을 병행했다.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며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강감찬 열전.


3.5.6. 문화 양성


현종은 엉망이 된 고려의 문물을 다시 정비했다. 왕실의 기록인 고려실록 재편찬[99], 고려 불교의 정수인 초조 대장경 간행[100], 교종 대사찰 현화사 건립을 지시했고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 팔관회[101]가 다시 부활했다.
불교 뿐 아니라 유교 진흥에도 힘썼는데 설총최치원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는 한반도의 유학적 전통의 맥을 짚고 고려가 유학적 정치를 지향하는 국가임을 강조한 조치였다.
국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훌륭하게 대처하였고 아버지로서의 자식 교육도 훌륭하였는데 은 모두 무난하게 고려를 잘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게 현종을 기점으로 고려 100년 전성기가 열렸다.

3.6. 고려구국영웅, 하늘의 별이 되다.


한국사 인물들 중 손에 꼽을 만큼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고[102]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위업을 남겼다. 하지만 오랜 고생으로 인하여 심신이 많이 지쳐있던 탓인지[103] 전쟁 이후에도 과로한 탓인지 어쨌는지 사서엔 '1031년 여름 4월 을사일. 왕이 편찮았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5월 신미일 현종은 병환이 위독해지자 태자 왕흠(王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6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조용히 붕어했다.
현종이 붕어하자 왕흠[104], 왕형, 왕휘 등의 고려 황실 사람들과 강감찬[105]을 비롯한 고려의 중신들, 그리고 고려의 온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106] 그리고 송나라, 요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사신을 보내어 현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107]
나이는 38세였으며 22년간 재위했는데 고려사 현종 세가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애로웠으며, 장성해서는 배움에 민첩하며 부지런히 공부하고 글씨를 잘 썼다. 또 시문(詩文)과 사장(辭章)을 좋아해 한번 보고 들은 것은 다 기억했다.'''

태자가 시호를 원문(元文), 묘호를 현종(顯宗)이라 하였으며, 송악(松嶽)의 서쪽 산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선릉(宣陵)이라 하였다.
당시 84세까지 장수한 강감찬도 있지만 현종은 40살에 일찍 붕어했다. 기록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고난이 병으로 이어지고 전쟁 이후에도 과로하다 붕어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4. 치세와 관련된 이야기


요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현종 때부터 고려의 입지는 꾸준히 상승하여 이후 송나라와 표면적인 사대를 행하지만 당시 송황제가 현종 개인에게 많은 선물을 주기도 하는 슈퍼 을의 입지를 지니게 된다. 송이나 요나 서로를 견제하려면 주변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 점을 잘 이용한 것.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5)〉 그 해에 〈고려가〉 다시 어사민관시랑(御事民官侍郎) 곽원(郭元)을 보내 와서 조공하였다. 곽원이 스스로 말하기를, “본국의 도성에는 원장(垣牆)이 없고, 부(府)는 개성(開城)으로, 6개 현(縣)을 관할하고 주민은 3~5천호를 내려가지 않습니다. 주(州)마다 군사 1백여명이 있고, 10로(路)에 전운사(轉運司)를 두어 〈전운사를〉 거느립니다. 주(州)마다 현(縣) 5, 6곳을 거느리고, 작은 주는 또한 3, 4현이며, 현(縣)의 호(戶)는 3, 4백호 정도입니다. 국경(國境)은 남북 거리가 1,500리(里), 동서 거리가 2천리(里)입니다. 군사와 백성이 섞여 살고, 군대에 편입된 자들은 얼굴에 자자[黥面]를 하지 않습니다. 한낮에 시장을 열며, 돈[錢]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베와 쌀[布米]로 교역합니다. 땅은 메벼[秔稻]가 적합하고, 풍속은 자못 중국(中國)과 비슷합니다. 양, 토끼, 낙타, 물소, 당나귀는 없습니다. 기후는 추운 날이 적이 더운 날이 꽤 많습니다. 승려는 있으나 도사(道士)는 없습니다. 민가의 그릇은 모두 동(銅)으로 만듭니다. 음악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당악(唐樂)과 향악(鄉樂)입니다. 3년에 1번 거인(舉人)을 시험하는데, 진사(進士), 제과(諸科), 산학(算學)이 있고, 시험마다 100여인을 시험보는데, 합격자는 10, 20명을 넘지 않습니다. 매년 정월 초하루와 5월 5일에는 조상의 사당에 제사지냅니다. 또 정월 7일에는 집집마다 서왕모(西王母)의 상(像)받듭니다. 2월 15일에는 승려와 속인(俗人)이 연등(燃燈)을 하는데, 마치 중국의 상원절(上元節)과 같습니다. 상사일(上巳日)에는 푸른 쑥떡을 음식상에서 으뜸으로 꼽습니다. 단오(端午)에는 그네 뛰는 놀이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옷은 흰색을 숭상합니다. 땅에서는 용수석(龍鬚席), 등석(藤席), 백수지(白硾紙), 서랑미필(鼠狼尾筆) 등이 납니다.”라고 하였다. 곽원은 말과 용모가 공손하고 단정하며, 매번 연회를 받을 때마다 반드시 스스로 사례하는 표(表)를 지어 올렸는데, 나름 문장을 지을 줄 알아서 조정(朝廷) 또한 후하게 대접하였다. 9년(1016)에 〈곽원이〉 인사를 하고 〈고려로〉 돌아가니, 〈'''고려왕〉 왕순(王詢, 현종)에게 조서(詔書)가 들어있는 7개의 함(函)과 습의(襲衣), 금대(金帶), 그릇과 비단, 안장을 갖춘 말 그리고 유교경전과 역사책, 역법에 대한 책, 『성혜방(聖惠方)』 등을 내려주었다. 곽원이 다시 『국조등과기(國朝登科記)』와 〈황제가〉 내려준 시[御詩]를 베껴서 돌아가겠다고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송사 전문 中

건흥(乾興) 원년(1022) 2월에 한조(韓祚) 등이 인사하고 고려로 돌아가니, '''〈고려왕〉 왕순(王詢, 현종)에게 예전과 같이 〈물품을〉 하사하였다. 마침 진종(真宗)이 붕어하자 또 〈진종의〉 유물을 싸서 왕순에게 내려주었다.'''

송사 전문 中


4.1. 현종은 신라계를 중용했나?


현종이 '서경을 좋아한' 목종이 시해당하고 그 뒤를 이었다는 것과 신라계를 외척으로 가진 왕욱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신라계를 중용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목종 재위기에 관직에 나선 인물들이 현종 재위기에도 중용되었다는 기록을 종종 발견할 수 있고 아버지 외가보다 더 가까운 현종 본인의 외가는 고구려계 패서 호족 황주 황보씨였다. 사촌 형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딸들과 혼인을 맺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오히려 현종은 이들 세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목종은 서경을 옛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으로 개칭하고 남달리 여겼는데 그 호경에 목종 폐위를 주도한 강조가 서북면(西北面) 도순검사(都巡檢使)로 있었다. 결과적으로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강조 역시 목종의 최측근이었다는 것만은 자명한 사실이다. 목종은 김치양 일파가 득세하여 왕권을 위협하자 현종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최우선으로 보호하려고 했고 현종 역시 김치양 일파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서신을 보내 위급을 알리고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즉 목종 폐위와 현종 즉위는 목종 지지 세력과 현종 지지 세력이라는 2개의 정치 세력이 충돌하여 빚어낸 결과가 아니라, 목종 지지 세력이라는 하나의 정치 집단이 자기들끼리 정치적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실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종, 김치양, 유행간을 포함해서 7명 ~ 8명에 지나지 않았고 귀양을 간 사람도 30여명에 불과했다.
현종은 서경 장락궁에 성용전을 지어 태조를 숭배하는 신전을 지었을 뿐더러 개경 황성을 지을 때 서경 황성도 같이 짓는 등 꾸준히 서경을 우대해줬다. 서경에 있는 동명왕묘와 목멱사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던 임금도 현종이며 현종이 아들들에게 내려준 군호와 작위도 정종은 평양군[108], 문종[109]은 낙랑군[110]이었다. 현종이 중용한 왕가도, 유소(고려), 최충은 모두 서경 및 북방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인물들이었다. 이를 봐도 현종이 서경파보다 신라파를 우대했다고 보긴 힘들다.
신라의 옛 수도인 동경(東京)을 폐지하고 경주로 격하한 임금도 바로 현종이었다. 당시 현종은 수도의 행정구역인 개성부(開城府)도 폐지시키고 상서성에서 총괄시킬 정도로 수도제 개혁에 열을 올렸는데, 개경과 '''서경만 남기고''' 개성부와 동경을 격하해 없애버린다. 이 행정구역 정리만 봐도 현종이 신라계에 치우쳐졌다는 평은 옳다고 보기 힘들다.[111][112]
물론 현종이 그렇다고 고구려만 일방적으로 우대하고 신라 측을 핍박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고려 초기에 벼락을 맞아 훼손되어 한동안 그 상태로 있었던 경주시황룡사 9층 목탑을 고쳐 지은 것이 현종이다. 수도 개경에 있는 사찰보다 높은 황룡사의 목탑을 복구하는 것은 상당한 국가예산이 들었을 것이며, 고려시대 여러 문인들의 경주 답사기를 보면 옛 왕도의 상징으로서 계속 등장한다. 현종 본인의 혈통도 그렇듯 구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시각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한참 뒤 인물인 김부식이 나중에 삼국사기를 지으며 현종이 경순왕 김씨의 음덕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면서 칭송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김부식이 옛 신라 쪽 혈통이라 자기 가문 띄우려고 그랬던 것 정도에 불과하다.[113] 즉 신라계가 현종을 띄워주었던 것이지 현종이 신라계를 띄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

4.2. 많은 부인과 자식


목종이 충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적성현에서 강조에 의해 시해당했고, 훗날 현종이 적성현에서 공격당할만큼 목종의 죽음과 현종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다. 또한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이 거란 2차 침입의 명분이였으며 강조는 후세의 꽤 우호적인 평가와는 달리 엄연히 고려사 반역 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즉 강조가 즉위시키고 강조가 섭정까지 한 현종이 목종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 현종 역시 즉위 초에는 왕권이 약했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 귀족, 지방 호족들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해야 했다.
예를 들어 현종은 여요전쟁 당시 나주 지역과 공주 지역으로 몽진하면서 이 지역 호족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114] 몽진 당시 전주의 조영겸의 반란을 겪은[115][116] 현종은 나주에 머물다가 다시 바로 전주를 거쳐 공주로 이동하는데 현종은 전주에 머무르는 7일 동안 무력으로 조용겸 일당을 진압하고 체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진압 과정에는 몽진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현종 친위 세력보다는 현종이 머물던 호남 일대의 군사력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다.[117]
그리하여 현종의 후비는 7명의 왕비와 6명의 후궁이라는 태조 이외의 왕으로선 초월적 숫자를 자랑한다.[118] 이는 현종의 왕권이 약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저 7명의 왕비 중에서 2명이 성종의 딸[119]이고, 3명은 현종이 피난갔던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딸이다. 위에서 언급된 경주 김씨와 호남 세력의 공집합이 바로 이 김은부이다. 현종은 친가가 신라계의 핏줄을 받았고 외가가 고구려계 패서 호족인 황주 황보씨이면서 처가가 백제계가 된다. 따라서 혈통으로 보나 국가 정책으로보나 현종 이후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를 아우르는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을 이룩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어쩌면 진정한 민족 개념 통일의 선구자는 문무왕이나 할아버지인 태조 왕건이 아니라 현종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현종은 발해부흥운동을 했던 흥료국의 유민들도 받아들였으니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많은 부인과 자식이 있었지만 현종 사후 태조, 세종, 강희제 때와는 다르게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지는 않았는데, 현종이 생전에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며 가족들과 신하들에게 모범을 보임으로서 내부적 단결을 강화하였기에 형제나 가문간의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강희제처럼 자식교육에 공을 들였음에도 자식들이 좋은 머리로 권력다툼에 골몰해 근심거리가 된 걸 보면 현종은 자식들도 본래 인성이 좋았거나 인성교육이 꽤 잘 된 걸지도.[120] 아님 장자계승 원칙을 현종이 잘 지켰고, 이후 덕종이 18세에 너무 일찍 사망하면서 아우 정종, 문종까지 바톤터치가 되며 치세가 이어진거라 굳이 권력다툼할 필요가 없었던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121]

4.3. 원조 무신정변 - 김훈·최질의 난


다만 현종 본인의 성품이 자애로웠던 것과는 달리 치세 때 또 하나의 중차대한 반란을 겪게 된다. 바로 3차 침입을 대비하면서 일어났던 김훈·최질의 난. 이 난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벌어졌다. 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할 전시과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런데 문지는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해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거란의 2차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빅엿을 먹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손가락 빨게 만들어버렸다. 특히나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은 2차 침임 때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이게 현종 재위 초기인 3년차 1012년으로 그러니까 반란 2년 전. 이때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였으며 이 해에 이미 거란과 산발적으로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122]
그러니 이런 조치는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딱 좋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결국 월급이 안나와서 뿔난 최질과 김훈이 주도하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월급을 빼앗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정권을 세웠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를 모두 들어줬다. 이런 부분을 보면 무신들이 문신들의 정책에 불만이 있던거지 현종자체를 미워하진 않은 모양.[123]
그러나 몇 달 안가 현종이 이자림[124]의 계책으로 무신들을 서경 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항복하면서 의외로 싱겁게 끝나게 된다. 사실상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허무한 결말 때문인지 이상하게 비중이 적은 사건.
어쨌든 이런 실책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종이 나름 뒷수습은 잘 했다. 19명 이외에 가족들은 한명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이후 등용문을 막아버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125][126] 그러므로 이 사건 때문에 나라에 무신이 없어서 문신인 강감찬이 활약해야만 했다는 식의 해석은 옳지 않다. 원래부터 고려나 조선이나 전쟁의 총사령관 및 주요 지휘관은 문관이었다.[127]
이후 현종은 무관에 대한 예우도 개선하여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만여명 씩 포상을 줬다. 이게 별 것 아닌 조치 혹은 당연한 조치 같지만 당시 고려의 재정 문제나 관등의 인플레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하면 리스크도 꽤 클 수 밖에 없는 대대적 조치였다. 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종은 요와 큰 전쟁을 벌여야 했고, 전쟁중인 상황에서 군인들 월급 횡령하고 나쁜 대우를 해주면 당장 칼과 창이 어느 방향을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해당 조치의 리스크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저걸 안했을 경우엔 오히려 2차 반란의 가능성마저 생긴다. 그러니 현종이 이런 조치를 취했고, 기존 문신들도 이를 반대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훗날 이런 교훈을 잊어서 터졌던 것이 진짜 무신정변.

4.4. 현충일 유래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기념일인 현충일은 거란 전쟁 전몰자에 대해 24절기 중 하나인 망종에 제사를 지내던 전통을 감안한 것이다. 달력을 보면 현충일과 망종이 같이 써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128]

4.5. 현종과 흥료국



4.5.1. 흥료국의 지원요청


현종 재위 20년차인 1029년, 거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거란의 지배 하에서 신음하던 발해 유민들이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를 거점으로 독립을 시도한 것이다.[129]
주동자 대연림(大延琳)은 고려사 현종 세가발해 고왕 대조영의 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130]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동경 요양부는 갈수록 거란의 탈취와 강압적 통치가 강해면서 동경 시민들은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대연림은 이 상황을 이용해 동경의 지방관들을 체포 및 제거하여 통제권을 손아귀에 넣는다. 곧이어 연림은 국호를 '흥료(興遼)',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하고 건국했다.[131] 이 때부터 흥료와 고려의 접촉이 시작된다.
1차 연락은 1029년 9월, 대연림이 대부승(大府丞) 고길덕(高吉德)이 고려에 와 건국을 고(告)하고 구원을 겸하여 요청했다. 고려사 곽원 열전엔 같은 해에 거란도 지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흥료와 거란의 요청을 두고 현종이 고심하고 있을 무렵 당시 형부상서[132] - 참지정사[133] 곽원이 현종에게 주청했다.

'''"압강(鴨江)의 동쪽 땅을 거란이 차지해 막고 있습니다. 지금 가히 기회를 타 취해와야 합니다."'''

곽원은 고려와 송 이외의 민족은 모조리 오랑캐 취급하던 강경파였는데 '''흥료국과 거란이 싸우는 틈을 타서 북진을 주장한 것이다.''' 다른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조정의 3인자급이던 곽원은 꿋꿋히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고 결국 일으켰다고 한다.[134]
이 고려의 군사행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아쉽게도 알 수 없다. 고려가 군대를 얼마나 동원했는지도 모르고 고려사 곽원 열전엔 단지 그 결과만 두글자로 기록했다. 불극(不克), 이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곽원은 이 군사 행동의 실패로 부끄럽고 화가 난 나머지 얼마 안가 1029년 11월에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고려사에선 이때 거란의 반응이 나오지 않지만 한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대연림은 9월에 지원 요청을 하였고 북진 책임자 곽원은 11월에 죽었으니 고려의 북진은 아무리 길어도 2~ 3개월 정도만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요사에서는 흥요국이 건국되자 고려에 사람을 보내는 협조를 부탁하는 한편 보주에 발해태보(渤海太保) 하행미(夏行美)를 보내 대비를 갖추고 격퇴하였다고 나온다. 즉, 거란도 흥요국이 일어난 틈을 타 고려가 침공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이에 대비했다는 뜻이다. 보주로 보낸 하행미에 의해 막혔다는 것을 보면 곽원은 보주를 공격하였고 목적도 여요 전쟁 중 빼앗긴 보주의 탈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5]
2차는 같은 해 12월,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136]이 동여진(東女眞)과 북여진(北女眞)을 이끌며 거란과 전쟁을 시작했고, 고려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걸(乞)했다.
고려사 최사위[137] 열전에 따르면 현종은 대연정의 요청을 받고 여러 보신(輔臣)[138]을 소환해 의논했다. 당시 문하시중 최사위는 '저(彼)들이 싸우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겠지만 우선 방어만 하자.'며 의견을 올렸고, 현종은 채택하여 지원을 불허(不許)한다.[139] 곧이어 같은 달 서북면 판병마사(西北面 判兵馬事)[140] 유소[141]를 최전방에 파견해 급변 상황을 대비하게 했다.
이 때부터 흥료국이 거란의 남부를 차지했음으로 이 때 잠시 고려와 거란 간의 연락은 단절됐다.
3차는 1030년 1월,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郞) 고길덕(高吉德)이 고려에 와 표문(表文)을 바치며 장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142]
4차는 같은 해 7월, 흥료국의 행영도부서(行營都府署) 유충정(劉忠正)[143] 이 영주자사(寧州刺史) 대경한(大慶翰)을 보내 표문(表文)을 바치며 구원을 요청했다.
5차는 같은 해 9월, 영주자사(郢州刺史) 이광록(李匡祿)이 도와달라고 왔으나 그가 고려에 있는 사이 흥료국이 망했고, 이광록은 고려로 귀화한다. 이후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동경 수복을 축하했고 거란은 발해투주(渤海偸主)[144]를 잡았으니 다시 연락이 될 것이라고 사신을 보내 알렸다.

4.5.2. 현종의 반응


당시 고려는 곽원과 같이 '''전쟁을 시작하자는 매파'''[145]도 있었고, 최사위와 같이 '''수성에 집중하자는 비둘기파'''[146]도 있었다. 현종의 직접적인 의중은 어땠는지 알아내기가 힘들다.
처음 대연림이 병사를 요청했을 때 내부적으로 논한 걸 보면 마음 한켠엔 북진을 시도하려는 의지도 아예 없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곽원 열전이나 타 기록을 보면 조정은 전체적으로 반대하는 기류가 우세했고, 현종 또한 크게 호응은 하지 않았던 듯. 곽원은 틈을 타서 의주를 탈환하자고 주장했지만 반대가 심해 독단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고 거란도 이를 예측, 발해인 하행미를 보내 대비하고 있어 막아냈다고 한다.[147] 결국 북벌 책임자였던 곽원은 부끄러움에 등창이 나서 세상을 떠난다. 이후 현종은 태사 대연정의 지원 요청을 거부, 수비적 태도로 돌아선다.
이는 고려의 내부사정도 그닥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흥료국에게 큰 도움을 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시기는 1019년에 여요전쟁이 끝나고 정확히 10년이 흐른 시기였다.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고려라는 국가가 완전히 회복되는데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여요전쟁 동안 고려는 30만, 20만 대군을 계속 출정시켰고, 백성들의 피로도가 높았다.[148] 이런 상태에서 회복된지 얼마 안됐으니 현종은 재차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부담을 가졌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대공사도 문제가 됐을 수 있다. 개경의 나성을 짓기 위해 20년을 썼고[149] 북방에 수많은 진(鎭)과 성(城)을 설치했다.[150] 1029년에야 겨우 이런 공사들이 끝을 보았는데 곧바로 인력을 쭉쭉 소모하는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무리 고려가 10년 동안 국력을 회복했어도 손실이 컸을 것이다.
이외에도 흥료국과 거란의 체급 차이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고려 입장에서야 한번 몰살시켜 본 거란이 싸울만하지 동경 요양부와 그 근처 지역만 끌어모은 흥료국은 어차피 거란의 상대가 안됐다. 고려 입장에선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승패가 뻔한 싸움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거란 또한 흥요국 건국 후, 고려의 개입을 크게 경계하여 겉으로는 고려에 사정을 설명하며 협력하자는 뉘앙스를 보내면서 실제론 고려의 침입을 대비하여 의주를 방어하고 있었다.[151]

4.5.3. 흥료국의 영향


거란의 남부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여진과 발해인들도 거취에 여러 패턴이 나타난다.
우선 1029년엔 여진 총 500여명이 배 40척을 타고 세번이나 고려를 공격했다. 고려는 이를 모두 격퇴했다. 거란인 조올(曹兀)이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귀화했고 여진 족장 쾌발(噲拔)이 자기 부족 200호를 데리고 귀화했다.
반대로 1030년엔 동여진이 다섯 차례에 거쳐 말 수십 마리, 선박 7척, 검과 창, 철갑 수십 개, 화살 18만 개를 바쳤고[152], 거란 수군 장교 대도(大道)와 이경(李卿)[153] 외 6명이 귀화하였으며[154],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는 담비 가죽을 바치고 현종에게 책력을 요청해 내려주었다.[155] 해가(奚哥)족과 발해인 500여명도 귀화했고, 서여진 27호도 귀화했다. 여진 130명이 말, 병기를 바치고 발해인 50명도 귀화했다.
현종이 붕어하고 태자 덕종이 즉위한지 1년차인 1031년 7월, 흥료국을 도왔던 발해감문군(勃海監門軍) 대도행랑(大道行郞)과 발해제군판관(渤海諸軍判官) 고진상(高眞祥), 공목(孔目) 왕광록(王光祿) 등 20여 명이 고려로 와 모두 귀화했다.
즉, 흥료국의 실패는 여진의 일시적인 노략질 증가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반대로 소동을 겪은 해가족, 여진족, 발해 유민, 거란인들이 현종 대를 지나 덕종 대까지 계속 귀화해오고 조공을 바쳐 고려의 존재감을 굳건히 해준 측면도 있었다.

5. 평가




6. 태묘 악장, 글


'''고려 태묘 백세불천위'''
'''성종 ~ 인종'''
태조 신성왕
'''의종 ~ 공양왕'''
태조 신성왕
혜종 의공왕
'''현종 원문왕'''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구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현종 왕순의 찬가 제목은 "흥경(興慶)"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크고 위대하신 열조(烈祖)[156]

께선,

잠덕(潛德)이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어려움과 위험을 날로 겪으시니,

성현을 모아 흥할 수 있었습니다.

용산(龍山)엔 옥작(玉爵)이 있었고,

사수(泗水)엔 부반(浮磬)이 있었습니다.[157]

증손(曾孫)[158]

이 효도하고 존경하니,

복록(福祿)을 가져다 주시길 빕니다.

우리 아름다운 성조(聖祖)께선,

잠저에 계시다가 으뜸으로 올라오셨습니다.

난을 뽑고 바름을 돌아오게 하니,

신령한 무예[159]

와 아름다운 문학[160] 덕분이었습니다.[161]

왕업(王業)을 중흥(中興)하시니,

후손이 계몽되고 보호를 받습니다.

음식을 드시게 하는걸[162]

멈추지 않으니,

자자손손 이어질 것입니다.

공민왕 12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하늘이 경업(景業)을 도우시니,

부정한 것을 쓰셔도 창성하였습니다.

삼한이 재조(再造)[163]

되니,

백도(百度)[164]

가 융성했습니다.

당신의 큰 계획과 열정적인 기운은,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부디 천만년(千萬年) 동안,

우리를 무한히 축복해 주소서.

고종 2년, 태묘에 제사를 지내며 글을 올렸다.

왕실(王室)이 어지러울 때,

다스리고 공을 세우셨습니다.

방인(邦人)[165]

을 깨우치고,

이치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밖으론 구제(舊制)[166]

를 완성하셨고,

안으론 사직(社稷)을 정하셨습니다.

적국(敵國)의 백만병(百萬兵)[167]

을 없애시고,

변성(邊城) 18읍[168]

을 건축하셨습니다.

드디어 태평의 기틀에 다다르셨으며,

그렇기에 중흥지주(中興之主)라 불리우십니다.


7. 가족 관계


그는 출신이나 권력 기반이 매우 약해 자신의 할아버지태조가 한 것처럼 정략 결혼을 통해 왕권을 다졌다. 그래서 자식이나 후비가 매우 많다.
  • 제1비 원정왕후 김씨
  • 제2비 원화왕후 최씨
    • 장녀 적경공주(積慶公主)→효정공주(孝靜公主/孝靖公主)
    • 차녀 천수전주(天壽殿主)
  • 제3비 원성왕태후 김씨
    • 장남 덕종
    • 3남 정종[169]
    • 3녀 인평왕후 김씨(仁平王后 金氏) - 안산 김씨(安山 金氏), 문종 제1비
    • 4녀 경숙공주(景肅公主)
  • 제4비 원혜태후 김씨
    • 4남 문종
    • 5남 정간왕 왕기
    • 5녀 효사왕후 김씨(孝思王后 金氏) - 안산 김씨(安山 金氏), 덕종 제3비
  • 제5비 원용왕후 류씨
  • 제6비 원목왕후 서씨
  • 제7비 원평왕후 김씨
    • 6녀 효경공주(孝敬公主)
  • 후궁 원순숙비 김씨(元順淑妃 金氏) - 경주 김씨, 평장사 김인위(金因謂)의 딸[170]
  • 후궁 원질귀비 왕씨(元質貴妃 王氏) - 청주 이씨개성 왕씨, 중서령 왕가도와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의 딸[171]
  • 후궁 귀비 유씨(貴妃 庾氏)[172]
  • 궁인 한훤영(宮人 韓萱英) - 양주 한씨(楊州 韓氏), 한인경(韓藺卿)의 딸
    • 6남 검교태사 왕충(檢校太師 王忠)
  • 궁인 이씨(宮人 李氏) - 이언술(李彦述)의 딸
  • 궁인 박씨(宮人 朴氏) - 박온기(朴溫其)의 딸
    • 8녀 아지阿志 - 검교소감檢校少監 정민상井民相에게 하가(下嫁)
고려사 후비전에는 여기까지 나오지만 여기에 누락된 아내도 있었다. 현종 20년 2월 궁인 한씨의 부친 한빈경(韓彬卿)이 겸 태자빈객 동지중추사 계국(同知中樞使 桂國)을 삼았다는 기사가 있는데, 한빈경은 한인경의 동생으로 여겨진다. 또 현종 22년 3월 상궁 한씨(尙宮 韓氏), 상침 김씨(尙寢 金氏), 상식 한씨(尙食 韓氏), 상침 서씨(尙針 徐氏)를 임명하는데 두 한씨는 한인경의 딸과 한빈경의 딸로 추정되지만 상침 김씨가 원순숙비 김씨인지 다른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또 상침 서씨가 원목왕후 서씨인지 다른 이천 서씨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이미 궁인을 벗어났음에도 고려사에 여전히 궁인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8. 사극


그야말로 판타지 만화의 주인공과도 같은 삶을 살다 간 왕이라서 미천왕처럼 별로 각색을 안 해도 사극화하기 안성맞춤인 서사구조를 가진 왕이지만, 정작 사극의 주인공이 된 적은 없는 임금. 출연한 드라마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주역도 아니었고 드라마도 실패했다... 그래서인지 천추태후 방영 후반에는 '차라리 현종을 주인공으로 했었으면 좋았겠다'는 소리도 많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현종의 일대기를 되짚어 보면 그의 인생은 '성장형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사극에 딱 들어맞는다. 게다가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들을 고증에 맞춰서 넣는게 가능하다.
  • 1) 불륜 관계로 출생[173]
    • 막장 드라마는 불륜을 단골 재료로 써먹어서 비판을 받는데, 현종은 정말로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심지어 가족관계마저 개족보였다. 삼촌과 여조카 관계에서 태어났으니 말 다한 셈.
  • 2) 권력 다툼으로 궁에서도 쫓겨나고,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고생함.
    • 퓨전 사극이나 팩션 드라마를 보면 극의 재미와 전개를 위하여 선덕여왕이나 근초고왕처럼 실제로 있지도 않은 주인공의 고생담과 암살 위협 떡밥을 넣곤 하는데, 현종은 진짜로 궁에서 쫒겨나 개고생하고 죽을 위기도 수차례나 넘겼다.
  • 3) 복귀하여 고려의 임금으로 즉위.
  • 4) 내우외환으로 인한 고난을 겪음. 그리고 모두 극복.
    •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국가 내부가 대단히 어지러운 상황에서 여요전쟁으로 인해 수도 개경을 포기하고 나주까지 험난한 피난을 해야 했고,[174] 도중에 거란군과 수십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3차 침입 때는 떳떳하게 개경을 지키며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 5) 왕조의 태평성대를 연 성군이자 고려 왕실의 중시조로 후대에 칭송됨.

8.1. 드라마 천추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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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천추태후에서의 현종'''
배우는 성인 배역 김지훈. 특이하게도 현종 역으로 출연한 아역 배우는 3명이었다. 현종의 아버지 안종(경주원군)은 김호진이었고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신애가 출연했었다. 불륜 출생이나 초반의 고난은 묘사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극의 주역이 천추태후이다보니 그리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천추태후를 미화하는 경향이 짙은 드라마의 특성상 현종이 신혈사로 가게 된 것도 천추태후가 현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묘사되며 김치양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주지 스님이나 강감찬 등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다.
즉위 직후에도 거란의 침공으로 피난을 가면서 고생하는 것도 나왔고 돌아오면서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무릎을 꿇기도 했었다. 그 후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천추태후와 함께 농사 짓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천추태후가 1029년에 사망하고 2년 뒤인 1031년에는 현종, 요 성종, 강감찬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고려는 약 150년간의 태평성대를 맞이했다는 나레이션을 끝으로 극의 마지막을 장식. 하지만 여요전쟁 자체가 상당히 간략화되어버린 탓에 현종의 전쟁 대비나 업적 등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원래 KBS 대하사극에서 고려사 시리즈라고 태조 왕건에서부터 시작해 고려 사극들을 역사 순서대로 10년간 쭉 방영할 계획이 있었는데 '''현종과 강감찬 대신 갑툭튀한 주인공이 나온 이 사극이 실패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한국사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인거 치고는 대접이 시원치 못한 셈.

8.2. 평화전쟁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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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전쟁 1019에서의 현종'''
2019년 11월 23,24일 jtbc에서 2화 분량으로 고려-거란전쟁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를 방영했다. 이때 재연식으로 배우들도 출연시켰는데 당연히 현종도 등장했다. 배우 권영민이 연기했으며 용기와 리더십으로 전쟁의 승리와 고려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였던 길승수 작가는 나무위키 현종문서를 참조하였다고 블로그에 밝혔다jtbc 귀주대첩-현종(顯宗, 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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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원문대왕 어필.'''
[1] 고려사 현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동문선 기준[3] 헌정왕후는 경종의 아내로서 받은 시호이며 안종의 아내로 받은 시호는 孝자 돌림인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이다.[4] 현종은 개성부를 없애고 중경에 통합시켰다. 아들 문종 때 다시 떨어진다.[5] 중국의 삼국시대를 끝내고 진나라를 연 사마염과 자(字)가 같다. 둘 다 자가 안세(安世). 그러나 군주의 능력, 인성 측면에선 현종이 훨씬 앞선다고 보여진다.[6] 그 유명한 대야성(大耶城)과 소릿값이 통한다. 삼국 시대의 대야성은 대량주(大良州 / 大梁州)라고도 기록되어 있다.[7] 이 때문에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성종이 갓 태어난 현종의 군호를 짓는데 매우 고심하고, 이를 자신의 한때 스승이자 중신이었던 최량이 대량원군이라는 군호를 건의해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8] '''한국사 유일한 사생아 출신 임금'''이다. 다만 사생아 출신이긴 해도 아래 서술되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태조 왕건 자식으로 왕족이였고, 아버지는 거기에 신라왕실 혈통, 어머니는 선대왕의 왕후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왕실의 피가 매우 짙게 흐르고 있었다.''' 결국 이 점 때문에 서자 출신 왕들보다 유년기에 고생을 더 하긴 했지만..[9] 광종 → 경종 → 목종.[10] 현종의 아버지 왕욱헌정왕후와 사통한 이후, 992년 세기의 스캔들에 난감해진 조카 성종에 의해 유배당한 장소가 지금의 경남 사천시인 사수현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헌정왕후가 죽고 갓난 아기였던 현종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이 유배지에 있던 왕욱에게 현종을 돌려주었고, 왕욱이 사망할 때까지 몇년간 둘은 사천에서 지냈다.[11] 태조 왕건의 능호 현릉도 이 현 자다.[12] 충렬왕의 시책문에 의하면 현종은 만사불천지종(萬祀不遷之宗)이 됐다고 한다.[13] 사서 중 고려사 현종 세가 총서, 동국통감이 이렇게 줄여서 표기함.[14] 거룩한 왕(聖王)께서 만세(萬歲)동안 (천하에) 문제 없이 거주하길 바랍니다.[15] 미천왕도 생애 봉상왕의 권력욕심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인 돌고가 목숨을 잃었다. 자신도 위협을 받아 노비 생활을 했고 그 후 소금 장수로 살았으며, 이마저도 어느 노파의 욕심에 누명에 씌워져 거지로 전전긍긍하는 등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나중에 창조리가 봉상왕의 폭정에 새 왕으로 추대하려 찾기 전까지는 행색이 말이 아니게 남루해져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16] 후에 나주로 피난가서 공주부사 김은부의 딸들까지 부인으로 받아들이니 진정한 의미의 삼한일통 군주라고 할 수 있다.[17] 신성왕후에 대해서는 합주(지금의 합천)의 군수를 지냈던 태위(太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고 성은 이씨라고 적은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종족기> 기록도 있다. 해당 책은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내용이다. 다만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안종 왕욱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한 사론이 맞고 신성왕후는 김씨라고 보았으며, 이제현도 "김관의ㆍ임경숙(任景肅)ㆍ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서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는 태위 정언의 딸로서 안왕(安王, 안종)을 낳았다'고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고려사에는 태조의 후궁 중 한 명으로 합주 사람 이원의 딸인 후대량원부인 이씨가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량원부인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이름만 등장한다. 하여튼 이래저래 족보가 꼬인 현종이다(...).[18] 정작 현종의 아들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덕종, 정종은 원성왕후 김씨, 문종은 원혜왕후 김씨 소생이다. 원평왕후까지 합쳐서 이 세 명은 신라 왕족 출신 공주 사람 김은부의 딸들로, 거란의 2차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갔던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길에 공주에서 당시 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을 때 김은부의 첫째 딸이 현종의 의복을 지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현종이 왕후로 책봉하니 이 사람이 원성왕후이고 나중에 남은 두 딸도 모두 왕후로 들이니 모두 친자매들이다.[19]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20] 하지만 현종이 세운 현화사비에는 헌정왕후가 이듬해 별궁 보화궁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빙성을 따지자면 당대의 1차사료인 현화사비의 신빙성이 더 높다...가 더 합리적인 추론이겠지만, 현화사비는 그 내용이 (특히 친부 왕욱 관련해서) 고려사와 차이가 많이 나서 신빙성을 의심받긴 한다. 안종(고려) 문서 참조.[21] 막말로 성종 입장에서는 현종이 향후 왕위 계승 문제에서 문제만 일으킬 가능성도 있는 아이였기 때문. 본인에게 아들이 없으니 다음 왕위는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에게 이어지는데, 성종 입장에서 보면 현종은 후계 구도를 망쳐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물론 현종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도 되겠지만, 출신이 사생아라 잡음이 많겠고 친부를 알려주지 않아야 혼란이 오지 않을 테니 이 역시도 땡기는 선택은 아니다. 물론 다 떠나서 친부랑 같이 살게 하는게 인륜적으로 맞기도 하고.[22] 이때 왕욱은 왕순에게 왕이 되라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먼 훗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23] 소군은 왕의 서자로서 출가해 승려가 된 자에게 주어졌던 호칭이다.[24] 목종은 자식이 없어 본인이 죽으면 남은 태조 왕건의 적자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대량원군 하나뿐이라 갖은 수를 써가면서 대량원군을 필사적으로 지켰다. 왕건에겐 비록 자식이 많긴 했지만 후궁이 아닌 왕후의 핏줄을 이어받은 왕자들은 왕건 사후의 고려 초기 피튀기는 왕위쟁탈전으로 하나하나 대가 끊겨, 첫째 혜종부터 일곱째 대종까지의 피를 이어받은 자는 사실상 목종이 마지막이었고 여덟째인 안종의 피를 이어받은 현종이 가장 계승순위가 높은 상황이었다.[25] 만화 판본에서는 서둘러 현종을 숨긴 뒤 진관이 지하실이 답답하지 않냐고 걱정하지만 현종은 오히려 조용해서 공부하는 데에는 좋다고 한다.[26]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조에 따르면 2번째 시를 지은 곳은 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자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유배되어 있던 사천시 배방사라고 하며, 절은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27] 현재는 대부분 근대에 재건축된 건물들이라서 고려 시절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28] 본래는 진관내동, 진관외동 이렇게 따로 있었으나, 2007년 은평뉴타운이 조성되면서 구파발동과 함께 통합되었다.[29]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명분으로 침공했다. 그러나 실상은 송과의 통교를 저지시키기 위한 침입이었다.[30] 당시 현종은 왕비로 1비 원정왕후, 2비 원화왕후를 두었다.[31] 심지어 이때 항전을 주장한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도망갔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파견을 갔다는 이야기. 다만, 3차 침입 때 전군을 지휘하는 위치까지 오른 것을 보면 어딘가에 파견가서 방어선을 지휘한 것 아니냐는 설이 많다.[32]경기도 연천.[33] 도중에 백성들이 여기를 지키긴 할 거냐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선조가 나서서 지킬 거라고 말을 하며 돌아가라고 설득하자 모두 순순히 돌아갔고 그나마 평양에서 백성들이 폭발해서 왕의 행렬에 있는 사람들을 구타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주동자 몇 명을 잡아죽이자 그들이 돌아가면서 해결되었다.[34] 당장 한국사 교과서를 보더라도 통일 신라 말기에 호족들이 득세했다는 구절과 함께 조선 태종이 실시했던 사병 철폐를 생각해보면 알기 쉽다. 그만큼 호족들과 지방 귀족들의 득세가 심했고 조선이 왕권 강화를 위해서 신하들을 여러 차례 누른 것은 그만큼 왕권 강화를 위한 목적이었다.[35] 아전과 연관된 군대라고 추정된다. 특히 고려의 호족들은 사병을 보유했다.[36] 당시 천추태후는 황주에 유배된 상태였다.[37] 참고로 원정왕후는 전쟁 당시 임신중이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소생의 자식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를 보면 이때 임신한 아이는 유산했거나, 태어나기는 했는데 너무 일찍 죽었거나 둘 중 하나로 추정된다.[38] 중간에 왕후를 버려두고 뛰는 경우도 있었다[39] 온갖 반란에 휘말리고 고초를 당하면서 피난을 가는 도중에 도와준 사람이 나주 백성들과 공주 절도사인 김은부 딱 1명이었다고 한다(...). 어찌나 고마워했던지 현종은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김은부의 딸 3명 모두를 왕비로 삼았다.[40] 좋게 잡아도 4~5km(!)밖에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41]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에 '밭 전'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김정호의 동여도에 의하면 평안북도 영변군곽산군 북쪽에 '애전현'이라는 고개가 있다고 한다. [42] 이는 양규에게 엄청난 전공인데 과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양규는 그야말로 고려가 나중에 3차 침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군사 징집이나 군량미 등을 보충해 줄 수 있으며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 덕분에 외교에서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더불어 요나라 성종에게 굴욕감을 준 셈이다. 특히 요나라는 명색이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가 후방에서 계속 찌르자 큰 피해를 입었고 후방 포위라는 위기에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물러날 수 없으니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에서 물러났다.[43] 더군다나 양규를 무시해버리면 보급로가 차단되는 위험과 도망갔던 고려 귀족들이나 문신들, 무신들, 병사들이 갑자기 역공을 가할 수도 있었다. 당시 고려는 주전파들이 도망갔다고는 하나 임진왜란 당시에 광해군이 의주로 향하지 않고 분전하자 흩어졌던 사대부들이 다시 모인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현종은 아직 무사하고, 양규가 아직 배후를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문신들, 무신들을 비롯한 병사들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한반도 지리를 잘 모르던 요 성종과 거란군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에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판국이었다.[44] 현종은 그야말로 충신복(福)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다음 왕조인 조선의 임진왜란 선조병자호란인조 진행 상황과 비교해볼만한 대목.[45] 임금의 조서는 왕이 대략 내용만 지시하고 실제 글을 쓰는 신하(한림학사)가 따로 있다. 하지만 양규의 활약이 엄청나니 현종이 직접 글을 쓴 것. 또한 현종은 국가적으로 중요하거나 본인에게 고마운 일에는 직접 행동하였는데 현화사비문이나 당시 기록으로도 왕은 자애롭고 글씨를 잘썼다고 기록되어있다. 양규의 업적은 둘 다에 해당되니 고려사에서도 직접 썼다고 강조한다.[46] 이것이 구분전, 즉 조선시대로 치면 수신전의 기원이 된다.[47] 그래도 재상직까지 지낸 것을 보면 나름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고려 계급 제도가 문신들이 병과까지 겸비했던 것을 생각하면 양대춘은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노력해서 그 이름을 빛냈다.[48] 베거나 사로잡음.[49] 현재의 함경남도.[50] 당시 호랑이늑대와 같은 맹수들을 상대해야 했던 사냥꾼들은 최정예 병력의 자질을 가졌다.[51] 또한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해당 지역은 수시로 소규모 교전이 발발하고, 조선시대에는 툭하면 예방전쟁으로 레이드를 뛰고 다니던 동네다. 임진왜란의 발발로 조선이 이러한 동북면에서의 예방전쟁 여력을 상실한 것이 후금의 세력 확대에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다. 군대에서 실전경험만큼 병력의 질을 높이는 훈련은 없다. 그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력들이 동북면 병사들인 것이다. 또한 해당 지역은 체격이 좋은 북방 유목민족이 사실상 공존하는 지역이다 보니 근대 신장조사에서도 다른 한반도 지역보다 평균신장이 클 정도로 체격요건도 좋았다. 화기로 전쟁하는 현대에도 병사의 체격이 튼실하면 전투력 측면에서 큰 이점을 가지게 되는데, 하물며 개개인의 신체스펙이 현대전 이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는 냉병기 시대의 전장상황을 생각하면 다른 지역의 병력 따위와 비교하기가 힘든 수준이었을 것이다.[52] 제2차 세계대전프랑스독일에게 이런 방법으로 점령당했다.[53] 현재의 황해도 신계군.[54] 이 또한 2차 침공 이후에 거란의 재침을 대비해 만든 요새였다.[55] 청야전술에 군량 보충이 막히고, 왕이 수도에서 항전 하니 군과 백성들의 사기가 올랐다. 거란군으로서는 그야말로 난관.[56] 오늘날 황해도 금천군이다.[57] ○신유일(辛酉日)에 소손녕(蕭遜寧)이 신은현(新恩縣)에 이르렀는데, 경성에서 1백 리 떨어진 곳이었다. 왕이 명하여 성밖의 민호(民戶)를 거두어 성안으로 들어와 청야(淸野, 적에게 이로움을 주지 않도록 들판을 치움)하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소손녕이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서찰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회군(回軍)하겠다고 알리고는 몰래 후기(候騎) 3백여 명을 보내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는데, 왕이 군사 1백 명을 보내어 밤을 틈타 기습해서 그들을 죽였다.[58] 이것은 현종이 군사를 쓸 줄 알았다는 이야기인데 기병은 돌격과 공격에도 자주 사용하지만 제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기습이다. 기병이 야간이든 아니든 기병의 기동력으로 기습해 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과거 유목국가들이 자주 쓰던 방식이며, 역대 중국 국가도 여러모로 골치를 앓은 적이 있었다. 당장 한나라 당시에도 흉노의 약탈에 힘들게 쌓은 장성도 무용지물이었다는 말도 있었으니.[59] 위화도 회군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전 병력을 전방으로 보낸 고려 개경수비병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몇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안시성 전투, 귀주성 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이 이와 유사한 상황일 것이다.[60] 이것만으로도 현종이 정신적인 전술에서도 이겼다고 볼 수 있는데 군사도 적고, 무엇보다 개경은 산성이라기보다는 수도이면서 행정의 핵심인 평야성인지라 적에게 일단 포위당하면 병자호란남한산성 때처럼 수비측이 더 고전한다. 그런데 소배압의 목적이 왕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것인데 오히려 현종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소배압과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누가 이기나 끝장내 보자!"라는 식으로 강감찬이 보낸 추격군들이 올 때까지 성 안의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싸운 것이다.[61] 거기다 왕이 수도에서 이번에는 몽진이 아닌 항전을 택한다고 하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같이 싸우지 않으려야 안 싸울 수가 없다. 거기다 한 나라의 수장이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데 백성들 중 급하게 민병대를 만든다고 해도 성 안의 수비군을 비롯해 사기가 올라 오히려 소배압을 비롯한 요나라 정예군이 사기가 저하되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왔지만 오히려 맞이한 것은 투지를 불태우는 현종과 고려 백성들의 항전의지였고 굳게 닫힌 개성 성문과 성벽뿐이었으니(...)[62]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을 비유적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다.[63] 귀주대첩은 이미 이긴 전쟁에서 적들을 몰살시켜 앞으로의 전쟁가능성을 없애버린 포위섬멸진이다.[64] 그리고 말이 사대지, 거란도 주변 국가의 눈치 때문에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최정예 부대가 귀주에서 격파되었는데 최강 국가로서 체면을 구기기에는 딱이고 이 전투로 인해 송나라를 비롯한 여진도 "어? 거란은 무서워 보였는데 고려가 이겼네? 잘하면 우리도 이길지도?"라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최정예 부대가 갈려나간 거란 입장에서도 지금은 내정을 안정시켜야하는 문제가 우선시 되었기에 고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65] 이는 이제 더 이상 전란 상태가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거란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송에게 어필함으로써 실리를 취하고 또, 송과의 동맹을 과시해 거란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66] 북송도 고려에게 귀주 대첩에서의 승리에 대해서 찬사와 감사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는데 어떻게 보면 요나라가 고려에서의 원정에 실패함으로서 경제 및 군사적으로 침체가 되어 북송도 당분간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현종대왕이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위신을 떨친 셈이다.[67] 이후에 정말로 요나라인 거란이 고려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아무래도 3차 침략에 보낸 정예병들을 비롯해 요 성종 이후로 요나라가 혼란에 접어들어서 고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68] 여요전쟁은 우리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강대국에게 자력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69] 1차 침공 당시 요는 고려를 완전 병탄할 의도 자체가 없었다. 때문에 이런 제스처가 미리 있었으면 2차 거란의 공격부터는 애초에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송은 고려와 서로 1전 어치의 군사적 도움도 서로 주고 받지 않았고, 요의 입장에서는 사대까지는 아니라도 고려가 중립적 입장만 표현했어도 당면 상대인 송을 버려두고 고려를 먼저 선제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의 주장. 그렇지만 2차, 3차 침입 때의 요나라는 강동 6주 탈환이라는 목표가 분명 있었다. 고려 입장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면 전략적 요충지인 땅을 내주어야 한다는 무리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외교로 단순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70] 천희(天禧)의 오기.[71] 일본측 기록에 해적선들이 섬에 숨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나온 이 섬들이 동해안의 울릉도인지, 남해안의 다도해인지 주장이 엇갈린다.[72] 임용한 교수는 저서인 전쟁과 역사에서도 현종을 대단히 뛰어난 성군이라고 극찬했다.[73]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그 뒤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졌으며,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의 인경본만이 전하고 있다. 이외에 대마도의 한 신사에 있던 500권은 모두 도둑맞았다. 그 외에 국내 수집가나 국가 기관에서 인출본을 꽤나 많이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상당한 초조대장경을 가지고 있고, 이들은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팔만대장경도 이 초조대장경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74] 태조가 궁예의 신하일 때 지은 발어참성.[75] 이후 인종이 대관전(大觀殿)으로 개칭했다.[76] 이후 인종이 선경전(宣慶殿)으로 개칭했다.[77] 후손 우왕 대에 나성에 내성이 추가로 지어지긴 했다. 근데 고려의 극후기에 지어졌으니 고려 역사에 큰 영향은 없는 셈.[78] 근데 여기다 부연설명을 붙혔는데 '혹자는 몽골을 피해 강화도로 갔다가 다시 개성에 왔을 때 지은 노래라고도 한다.'라고 해뒀다.[79]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80] 현 경기도 개경특급시 장풍군 월고리.[81] 증손자인 예종도이장가, 뻐꾸기향가를 만든 기록이 있다.[82] 만월대의 두번째 대문.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위봉, 영봉과 함께 세 봉(鳳)자 돌림 대문 중 하나다.[83] 9m 크기이다. 만약 탑 위의 장식까지 멀쩡했으면 족히 10m는 됐을 것이다.[84] 영취산에 있는 대자은현화사의 비석명문.[85] 이 사실은 고려사에도 보인다.[86] 유교 문화권에서 당대에 군주를 요순에 비유할 정도면 거의 끝판왕급 성군이라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비슷한 케이스로는 세종이나 강희제 등이 있다.[87] 에이브러햄 링컨도 남북전쟁때 흑인들에게 메시아라고 불렸다.[88] 부처나 미륵의 환생이라는 표현도 종종 보이는데 가톨릭으로 치면 예수에 비유했다고 생각하면 된다.[89] 아랫사람으로서 잘보이기 위해 윤색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2차 침입 당시 지방 향리에게도 털리고 최질, 김훈의 난이 일어난 경우들에서 보듯이 왕권자체는 굉장히 약했으며 그럼에도 양규, 김숙흥, 하공진 등 현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허위, 과장이 없는 평가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90] 임시 기관.[91] 만승은 천자의 별칭이고 인왕은 '천신이 보호하는 사람들의 왕'이란 뜻으로 불교식 표현이다.[92] 가을 9월 ○거란의 동경 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대부승(大府丞) 고길덕(高吉德)을 보내어, 건국(建國)을 고하고 겸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대연림은 발해(渤海)의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인데, 거란을 배반하여, 흥요(興遼)라 국호를 정하고 천흥(天興)이라 건원(建元)하였다. 겨울 11월 ○참지정사(參知政事) 곽원(郭元)이 졸(卒)하였다. 곽원은 성품이 청렴하고 문사(文詞)를 잘하여 대성(臺省)의 직을 두루 거치면서 관리의 능력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자중(自重)하지 않아서 이작인(李作仁)과 친밀하게 지내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난하였다. 흥요국(興遼國)이 거란을 배반하기에 미쳐서 몰래 아뢰기를, “압록강 동쪽 경계에 있는 거란의 보루(堡壘)를 이제 기회를 엿보아 취할 수가 있습니다.”하니, 최사위(崔士威)·서눌(徐訥)·김맹(金猛) 등이 모두 상서하여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곽원이 고집하고 군사를 보내어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자, 부끄럽고 분하게 여긴 나머지 등창이 나서 졸하였다.[93] 겨울 12월 ○흥요국의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이 동북 여진을 이끌고 거란과 서로 공격하면서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하였다. 왕이 보신(輔臣)들과 의논하니, 시중 최사위와 평장사 채충순(蔡忠順)이 말하기를, “전쟁이란 위태로운 일이어서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이 어찌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다만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봉수(烽燧)를 삼가 사세의 변동을 볼 뿐입니다.” 하니, 왕이 따랐는데, 이때부터 길이 막혀 거란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서북면 판병마사(西北面判兵馬事) 유소(柳韶)를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출사(出仕)함)시켜 진(鎭)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때 흥요국이 원병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소를 보내어 방비하게 한 것이었다.[94] 현종 10년(1019) 4월 ○ 병진(丙辰)에 진명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府署) 장위남(張渭男) 등이 해적선 8척을 잡아 적이 약탈한 일본 남녀 259명은 공역령(供驛令) 정자량(鄭子良)을 보내어 그 나라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출처 : 『高麗史』 권5, 무진 19년(1028) ○ 여름5월에 여진이 와서 평해군(平海郡, 慶北 蔚珍)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적선(賊船) 4척을 추격해 잡아 그들을 모두 죽였다. 출처 : 『高麗史』 권5[95] 대연림이 고려에 수 차에 걸쳐 원군을 청했던 사실은 이 시기까지 여전히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역사의식이 일정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96] 의창의 보완격. 주마다 창고설치.[97] 70세 이상의 부모가 있으면 군역면제.[98] 군인 유가족 지원.[99] 황주량이 주도했다.[100] 팔만대장경의 원본 격이다.[101] 최항의 권유에 다시 개최하였는데 팔관회를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구국영웅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102] 한국사 군주들 중에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고 이순신과 비교하더라도 고난의 정도가 부족함이 없다.[103] 10살이 되기 전부터 부모를 잃고 암살을 두려워하면서 살았으며 10대 후반~20대의 끝까지 전쟁으로 목숨이 왔다갔다 했으니 압박이 심했을 것이다.[104]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방)에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애림(哀臨)(슬퍼서 통곡)하였다.[105] 약 2개월 후 강감찬도 세상을 떠난다.[106] ○갑술일(甲戌日)에 왕이 뭇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복(成服)하였으며, 백성들은 검은 관을 쓰고 소복(素服)하였다. 6월○병신일(丙申日)에 선릉(宣陵)에 장사지냈으며, 뭇 신하들은 공무를 중지하였다.[107] 을유일. 서여진의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아지대(阿志大) 등 27명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을미일. 동여진의 장군 대완사(大宛沙)와 이라(伊羅) 등 58명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 철리국(鐵利國) 임금 무나사(武那沙)가 약오자(若吾者) 등을 보내 담비 가죽을 바쳤다. ○ 송나라의 태주(台州 : 지금의 중국 저장성 린하이현) 상인 진유지(陳惟志) 등 64명이 왔다.[108] 둘째 아들. 첫째인 덕종은 연경궁에 봉해졌다.[109] 셋째 아들.[110] 옛 평양 일대에 있던 군 혹 국가.[111] 고려사 왕경개성부 지리지, 동경유수관경주 지리지 출처.[112] 현종 3년에 동경에서 격하된 경주는 후 5년에 안동대도호부로 바뀌고, 풍수지리에 좋다는 조언에 따라 현종 21년 동경으로 다시 승격된다.[113] 경주 김씨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강릉 김씨, 통천 김씨 등 다른 김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들 역시 신라 왕실의 혈통을 이었기 때문.[114] 나주로 몽진한 이유에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가장 설득력있는 설은 그의 조부인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배후지였던 나주를 무력으로 접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권력에 다가가기 시작했고 그의 2비이자 2대 왕인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의 고향 역시 나주였던 것으로 인해 고려 왕실에 있어서 근거지와도 같은 곳이었기에 그 곳으로 향했다는 주장이다.[115] 당시 현종의 수행원은 5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116] 1011년 8월, 형부(刑部)가 조용겸 일당이 현종의 피난 행렬을 놀라게 한 죄를 지었으므로 귀양 보내라는 건의를 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이는 기록이 있다.[117] 나주로부터 왕의 위엄에 걸맞는 군사적 보호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조용겸의 소행에 대한 추측은 지나치게 과장된 듯 하다. 조용겸이 군사를 일으켜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무례를 범한 조용겸 일당을 당일 하룻밤만에 불러들여 굴복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으로 죄목 또한 왕의 행차를 놀라게 한 죄이다.[118] 확인된 숫자 기준으로 혜종이 1왕비 3후궁, 정종이 2왕비, 광종이 1왕비 2후궁, 경종이 4왕비 1후궁, 성종이 3왕비, 목종이 1왕비 1후궁이다.[119] 왕족이자 중앙귀족.[120] 사실 강희제의 자식교육은 너무 엄했던 측면이 있다.[121] 당장 상기된 강희제는 장자를 제치고 넷째가 왕위에 올랐고, 세종은 장남이던 문종까진 별 탈이 없었는데 그 문종이 생각보다 빨리 사망하면서 아들 대에 삼촌사단이 난다.[122] 흔히 여요전쟁에 대해서 1차는 993년, 2차는 1010년 ~ 1011년, 3차는 1018년 ~ 1019년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을 보면 1011년에서 1017년까지도 거란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강동 6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는 피해를 입었지만 강동 6주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거란 또한 고려의 땅을 빼앗지 못했다.[123] 영류왕, 의종, 우왕 등의 경우를 보더라도 현종이 정치를 잘했기에 무신들이 계속 모셨는 것으로 보여지며 정변의 도중에도 문신들을 죽이지않고 귀양보내는 것으로 타협한 것을 보면 현종의 정치력이 정말 출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덕분에 정변후 문신들은 현종에게 더욱 더 충성하게된다.[124] 이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 덕종의 2비 경목현비와 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 때 처벌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왕무숭의 아버지다.[125] 강희제권신 오보이를 숙청했던 상황과도 비교할 수 있는데, 군인들의 공을 인정하고 무신에 대한 대우를 격상하는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가더라도, 그들이 무력으로 황제의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은 사실이기에 그들을 처벌하여서 앞으로의 폐단을 막는 일도 왕조 시절 임금으로서 겸했던 것이다.[126] 기축옥사때 선조의 처벌을 생각해보더라도 필요한 선에서 정말로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127]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였던 김명원권율도 문관이었다. 수군을 총지휘했던 이순신이 다소 특이 케이스였던 셈. 이순신이 역임했던 삼도수군통제사는 이 때만 해도 정3품 수군절도사와 동급의 별정직이었으나, 임란 이후 종2품 관찰사 및 병마절도사와 동급의 상설직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사 역임 당시 이순신은 이미 정2품 정헌대부 문반 품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지휘권을 행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사실 조선 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사 최강의 소드 마스터라는 농반진반 촌평을 받는 척준경 역시 중추원 별가라는 문관(!) 출신이었다.[128] 나타날 顯자가 현충일과 현종이 일치하는데 현충일의 기원을 정착시킨 현종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129] 동경 요양부는 옛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던 곳으로 발해의 영토였다.[130] 요사엔 동경사리군(東京舍利軍) 상온(詳穩).[131] 고려사는 대연림의 연호를 천흥이라 했지만, 요사는 천경(天慶)이라 기록했다.[132] 형부의 장관. 형부는 법률 담당 부서이다.[133] 중서문하성의 차관. 문하시중의 두단계 아래다. 중서문하성은 고려 정부조직 중 최상위 기관이다.[134] 정식 인가를 받았는지는 기록이 없다.[135] 보주는 지금의 의주로 역시 지금은 의주에 속하는 흥화진 바로 위 압록강변에 위치한 지역이다. 거란은 1015년에 압록강을 건너 보주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의 전초기지로 삼았는데, 이곳은 요동과 한반도를 잇는 데다가 거란, 여진, 고려 세 세력의 경계에 절묘하게 걸쳐있어 고려 입장에서는 가만히 두고보기에 상당히 껄끄럽고 민감한 지역이었다. 이때 곽원이 보주 공격을 실패한 뒤로 고려는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이쪽 방면으로는 북진을 시도하지 않다가 예종 시기인 1117년에 금나라가 요나라와 발해 유민 고영창이 세운 대발해를 차례로 제압하고 요동 지역을 차지하면서 아직 요나라 영토로 남아있던 내원과 보주가 고립되자 금, 요와 협상을 통해 두 성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보주 혹은 포주의 명칭이 의주로 바뀐 것도 이 때부터다.[136] 고려사 최사위 열전엔 대연림이 연정을 태사에 임명했다고 한다.[137] 고려의 문하시중. 작위는 청하현 개국남(淸河縣 開國男) → 청하현 개국백(淸河縣 開國伯)이고 시호는 정숙공(貞肅公)이다.[138] 조정의 고위직을 맡았거나 나이가 많은 신하.[139] 특이하게 고려사 현종 세가나 유소 열전엔 대연정의 요청을 '불허'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5번의 요청 중 유일하게 연정의 요청만 현종의 답변을 기술했다. 곽원의 군사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와 현종이 직접 답했을 수도 있다.[140] 서북방의 군단장. 서북면과 동북면 두 판병마사가 있었다.[141] 곽원 사후 참지정사에 오른 인물로 정융진(定戎鎭), 위원진(威遠鎭), 흥화진(興化鎭) 설치를 주도한 인재이다.[142] 고려사 현종 세가 원문 기록은 걸사(乞師)라 했다.[143] 목종의 충신이던 그 유충정과 같은 이름이다. 목종의 충신 유충정이 발해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강조의 정변 이후 생사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래서 유충정이 목종 시해 후 고려를 떠나 옛 발해 영역으로 돌아가서 살다가 20년 후 흥료국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다.[144] 발해의 훔친(가짜) 군주. 정황상 대연림을 의미하는 듯 하다.[145] 유소(고려), 왕가도 등 출병하여 거란의 성을 처부수자고 덕종에게 주청한 신하들도 있었다.[146] 최사위, 서눌, 황보유의 등 외교로 풀자는 신하들이다.[147] 고려사와 요사 기록.[148] 이는 거란도 마찬가지로 40만, 10만 대군을 계속 출진시키며 국력을 소비했고, 흥료국과 같은 반란들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149] 나성을 짓는 동안 왕실 소속 인부들이 크게 고생해 현종이 부담을 줄여준 기사가 남아있으며 나성 완공 후 조세를 걷지 않았을 정도였다.[150] 진과 성을 세웠으면 군대가 주둔해야 한다. 군대만 있으면 안되니 그들을 보조해줄 인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장기 거주를 희망하거나 강요된 군인과 보조인원들은 가족이나 친지를 데려올 것이고 이들이 또 정착하는데 시간이 걸린다.[151] 의주와 내원성은 현종의 증손자 예종 대인 1117년 3월에 탈환된다.[152] 근데 이렇게 많은 조공품을 들고오면 고려 입장에선 나름 자존심(?)은 세워지지만 동시에 하사품을 그만큼 맞춰서 줘야되기 때문에 은근 피곤했을 것이다. 실제로 3대 정종은 말 700마리와 토산품을 조공하러 온 여진에게 은제 가구, 비단, 베 등을 일일히 하사했다. 괜히 조공무역이란 말이 나오는게 아니다.[153] 대도리경이라고도 읽으며, 대도, 이경으로 두 명의 발해인이었다는 이야기와 대도이경(대도리경)이라는 한 명의 발해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54] 이들은 나름 고위 해군 장교로 보이는데 고려사 현종 세가는 이 때부터 고려로 귀화하는 발해인이 대폭 증가했다고 기록했다.[155] 책력을 내려주는 것은 연호를 세우는 것과 동일하게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156] 현종의 묘호를 존경의 의미로 다르게 부른 것이다.[157] 용산과 사수는 현종이 왕이 되기 전 있던 곳으로 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자질이 보였다는 뜻이다.[158] 가계도가 현종 > 문종 > 숙종 > 예종 순이니 예종은 현종의 증손이다.[159] 전쟁에서의 지휘.[160] 내치에서의 지혜.[161] 무신, 문신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강희제도 평시에는 뛰어난 능력과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신하들을 부려먹었지만 쉴때는 문신들과 문학, 역사 내용을 토론하고 선교사들과 수학 문제를 주고 받으며 지식을 교류하거나 무신들과 사냥을 나가며 같이 말을 타고 술을 마셨고 신하들과 어울리며 노는 것을 즐겼다 사회성도 군주의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162] 제사 지내는 것.[163] 조선 왕조가 명나라 만력제에게 쓰던 재조지은과 같은 뜻이다.[164] 백가지 법도.[165] 국민, 백성의 다른 말.[166] 성종이 만든 제도를 의미.[167] 100만까진 아니지만 요성종은 의군천병 40만, 소배압의 30만 대군을 끌고 전쟁을 시작했으나 결국 대패하였다.[168] 현종이 북방에 세운 여러 성(城)과 진(鎭)을 의미.[169] 차남 수秀의 어머니는 알 수 없으며 요절했다.[170] 이자연의 아내 계림국대부인의 자매이자 인예태후 이씨, 인경현비 이씨(仁敬賢妃 李氏), 인절현비 이씨(仁節賢妃 李氏)의 이모다. 경흥원주景興院主로 입궐해 1024년 음력 1월 24일 덕비(德妃)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 원순숙비의 아버지 김인위에게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 경조현개국남(尙書左僕射 叅知政事 柱國 京兆縣開國男)의 작위와 식읍 300호가 내려지고, 잉령치사(영에 따라 그대로 벼슬하게 하는 것)하게 하였다. 1057년 음력 5월 원목왕후의 장례에 대해 문종이 대신들과 의논할 때 "을미년 12월 판지에 경흥원주 귀비를 문화대비의 예에 의하여 장례하고, 그 능호를 제하게 하였다."고 한 것을 보아 그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며 능호도 없었고, 문화왕후 김씨의 예로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원순숙비는 시호다.[171] 덕종 제2비 경목현비 왕씨(敬穆賢妃 王氏)의 자매.[172] 궁인 출신으로 1025년 귀비로 책봉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173] 현종에 대한 영화는 아니지만 현종의 부모였던 안종과 헌정왕후에 대한 영화가 1970년대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되었던 적이 있었다.[174] 험난해도 그냥 험난한게 아니다. 선조의 몽진보다도 훨씬 더 고난이었다. 적어도 선조는 백성들이 개빡쳐서 서울에서는 선조가 떠난 궁에 불을 지르고 평양에서는 선조의 행렬을 막고 하급 관리들을 두들겨 패기는 했지만 현지 유력가에게 모욕당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