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궁예
弓裔'''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의 궁예 벽화'''
<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존호'''
미륵불(彌勒佛)[1]
'''연호'''
무태(武泰: 904년 ~ 905년)
성책(聖冊: 905년 ~ 911년)[2]
수덕만세(水德萬歲: 911년 ~ 914년)[3]
정개(政開: 914년 ~ 918년)[4]
'''국적'''
신라 → '''후고구려'''
'''성'''
(金)[5][6] → 궁(弓)[7] / [8]
'''휘'''
궁예(弓裔, 躬乂) / 예(裔)
'''법명'''
선종(善宗)
'''왕후'''
부인 강씨[9]
'''왕자'''
청광보살(靑光菩薩)
신광보살(神光菩薩)
'''생몰'''
음력 873년(?)[10] 5월 5일
~ 918년 6월 14일[11][12]
'''재위'''
'''음력'''
901년 ~ 918년 6월 14일 (17년)
'''양력'''
901년 ~ 918년 7월 24일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2.2. 미륵정토를 꿈꾸다
2.3. 현실의 한계에 부딪힌 자칭 미륵
2.4. 몰락의 징후들
2.5. 최후
3. 궁예는 신라 왕족인가?
3.1. 긍정설
3.1.1. 거병 전의 궁예에겐 족보조작을 할 힘이 없었음
3.1.2. 왕실 족보의 매매·조작을 통한 사칭은 불가능하다
3.2. 부정설
3.2.1. 대체 누구의 아들이란 말인가?
3.2.2. 당대 조상 조작의 관행
3.2.2.1. 족보를 조작한다 하더라도 반발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
3.2.2.2. 궁예라는 인물의 비합리성
3.2.3. 궁예설화의 허위성
3.2.4. 고려 왕조의 날조 가능성
4. 폭군 논란
5. 평가
5.1. 조선시대의 평가
5.2. 현대의 평가 및 밈화
6. 후일담
7. 창작물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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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의 군웅이자, 고려의 전신이 되는 나라인 후고구려, 마진, 태봉의 유일한 군주.
말 그대로 한국사의 창업 군주들 중에서도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일개 떠돌이 승려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무력적 소양과 인심을 끌어들이는 능력 만을 바탕으로 점차 세를 불려 한반도중부와 남쪽의 경상북도 일부 지역, 그리고 수군을 이용해 후백제의 후방이던 나주목포, 진도와 그 부속 섬들을 점령해 당시 삼한의 3분의 2를 평정하는 등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재위 말년에 벌어진 가혹한 폭정과 무자비한 숙청[13], 지나치게 독선적인 정치 철학으로 인해 염증을 느낀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김락, 염상 등이 일으킨 왕건의 정변으로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국사의 숱한 정치지도자들 중에서도 가장 아웃사이더적 면모가 강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출생의 비밀, 애꾸눈, 미륵을 자칭한 종교적인 이미지, 초기의 성인군자 같은 모습과 대비되는 말기의 타락 등 여러 면이 겹쳐 수수께끼 같은 면모도 제법 보여주는 군주이다. 어떤 유형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사에서 특이한 삶을 살다간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외국에서 비슷한 유형을 찾자면 중국사에서 황건적의 난을 주도한 장각이나 태평천국운동의 지도자 홍수전 같은 종교 민란의 지도자 정도가 있겠다. 물론 제정일치에 지도자가 종교 지도자도 겸임한 사례는 고대에 흔했으나, 궁예나 홍수전처럼 종교의 수장, 더 나아가 (자칭)신과 왕을 동일시하며 신정 일치 왕국을 시도한 사례는 찾기 힘든 편.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씨로 헌안왕의 왕자라는 고귀한 신분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날이 단오였으며[14], 태어날 때부터 치아가 자라나 있었으며[15], 집 위로 흰 빛이 하늘에 뻗치는 등 불길한 징조가 있어 높은 곳에서 던져 죽이려는 것을 유모가 가까스로 받아 데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이때 실수로 유모가 떨어지는 아기 궁예를 받을 때 실수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16] 유모가 어린 궁예를 품에 안고 담을 넘다 넘어지면서 눈을 찔렀다는 전승도 있다.
이러한 기록, 전승들을 그대로 따른다면 궁예의 출생지는 옛 신라의 왕성이었던 경주시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궁예의 초기 활동 지역이 남한강 유역이었다는 점, 청주 사람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삼았다는 점 등을 보건대 실제로는 옛 서원경인 충청북도 청주시나 그 부근인 현재의 진천군, 증평군, 괴산군, 음성군 중 한 곳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더 높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성격이 괄괄한 탓에 늘 말썽을 피우며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큰 후 유모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자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17]라는 절에 들어가 이 되었다. 법명을 '''스스로'''[18] 선종(善宗)이라고 하고 장성할 때까지 세달사에서 지냈는데, "계율에 따라 주의하지 않고 담기(膽氣)가 있었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이후 세달사에서 나와 도적인 기훤의 부하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곳에 있으면서 무술을 더 단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으로도 치안이 나쁜 혼란기에는 종교인이라도 무장을 하고 자위 수단을 마련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대표적으로 중국소림사가 있으며, 일본에서는 자경단 수준을 넘어 조폭이나 일부는 용병으로 활동하던 승병 집단 소헤이가 있었다. 유럽마자르족이나 바이킹과 같은 이민족의 침공과 군웅할거로 어지럽던 중세 초기의 경우를 봐도, 외딴 수도원들은 어지간한 요새 저리가라 할 정도로 튼튼히 지어져 위기시 방어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게 설계 되었고, 수도자들도 철퇴로 남의 뚝배기#s-4를 잘만 까부수고 다녔다. 교황이 "제발 수도자들은 무기 좀 내려놓으라"고 여러 번 칙령을 발표해도, 현지가 너무 험악하다보니 씨알도 안 먹혔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해인사 묘길상탑기에는 도적의 침입에 맞서다 많은 승려들이 희생되었다는 언급이 있고, 고려 시대까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이나 을 관리하는 사찰의 경우 아예 성벽을 둘러 요새화하기도 해 김제 금산사에는 아직도 주변의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삼국시대 성터가 남아 있다.
야사에 따르면 육식도 서슴지 않고 했으며, 심지어 다른 동료 승려에게까지 강제로 먹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궁예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평소에 궁예에게 골탕을 먹었던 중들이 모여서 궁예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궁예 몫의 밥을 뭉쳐서 방 바닥에다 버렸다. 그 후 궁예가 돌아와 을 찾자 바닥에 떨어진 밥을 먹으라고 하는데, 궁예는 의외로 화내지 않고 말없이 도로 방을 나서더니 우물에 가 '''물을 한 두레박 퍼다가 다짜고짜 방바닥에 들이부었다'''. 경악한 중들이 따지고 들자, 궁예는 태연하게 "물에 밥 말아 먹는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그 중들은 다시는 궁예에게 찍소리 한번 못했다고 한다.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때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바리때에 까마귀가 떨어뜨리고 간 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고[19], 궁예는 자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

2.2. 미륵정토를 꿈꾸다


진성여왕 대에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었다.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나자 궁예는 891년 세달사에서 나와 죽주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의 재능과 인물됨을 잘 알아주지 않았다. 궁예는 더 이상 그의 휘하에 있어봤자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궁예는 함께 기훤의 밑에서 활동하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몰래 친분을 맺고, 892년에 기훤을 떠나 북원에서 위세를 떨치던 양길에게 투항했다. 다만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원회와 신훤이 주도하여 폭압적인 행태를 일삼던 기훤을 제거하고 궁예를 새 우두머리로 추대하나 세력에 한계를 느끼고 그 세력 그대로 더 큰 세력이었던 양길의 부장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왔다. 아무튼 기훤의 부하던 신훤이 훗날 양길의 부하로 나오는 점을 볼 때 기훤의 세력이 양길 세력에 흡수된 것은 정황상 실제 역사에서도 맞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했다. 궁예가 어떻게 민심을 얻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평무사한 궁예의 행보는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을 것이다.
양길의 부하가 된 궁예는 양길의 병력을 이끌고 892년까지 치악산 석남사에 머물면서 신라의 주천, 나성[20], 울오, 어진 등 10여개의 군현을 공략했다. 이 중 어진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동해 연안까지 강원도 지역을 정복한 셈이다. 여러 성을 정복한 궁예는 견훤후백제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자립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여 2년만인 894년에 대관령을 건너 명주(강릉시)의 귀부를 받아냈다. 이 때 궁예를 따라가는 무리가 3천 5백 명이었다고 하니, 기훤에서 양길로 갈아탈 때처럼 양길군의 세력 일부를 흡수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명주의 성주는 김순식으로 그의 조상은 신라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었다. 김순식 일가는 김주원[21] 이후 김순식 때까지 명주에서 100년 이상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22] 김주원과 그 후손들은 명주에서 대단한 위세를 누렸다. 918년 왕건의 정변으로 궁예가 몰락하고 고려가 건국되었는데도 김순식은 무려 10년을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928년 1월에 가서야 완전히 투항했다. 당시 궁예의 실력으로 명주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김순식이 기득권을 보장받는 대신 명주를 궁예에게 바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한때 주군이었던 양길로부터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였다. 898년까지 지금의 강원도 북부와 패서 (평안도) 지역, 대동강 이북 일부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 시기에 항복한 호족은 박지윤, 황보제공, 유천궁 등이 있었고 특히 훗날 고려 태조가 되는 왕건의 아버지 왕륭도 있었다. 궁예는 897년 왕륭의 영토인 송악을 수도로 정했고, 그의 아들 왕건을 2인자격으로 중용하기 시작한다. 북원의 양길은 궁예의 독자 행보에 분노해 30여 성의 병력으로 궁예를 습격하려 했지만 궁예가 이를 예견하고 선제 공격을 가해 양길을 깨트렸다. 그리고 나서 899년에는 본격적으로 양길과 대립하기 시작하더니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이듬해 900년에는 왕건을 지휘관으로 삼아 청주ㆍ충주에 있던 양길군 잔당 청길(淸吉), 신훤(莘萱) 등을 토벌해 소백산맥 이북의 영역을 거의 장악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23]라 하고 지금의 개성에 해당하는 송악을 수도로 삼았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송악을 비롯한 경기도 북부 지역과 황해도를 아우르는 패서 지역 호족과 백성들은 옛 고구려 남부 지역으로, 고구려 유민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계 호족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왕건은 이 시절 승승장구해 나갔다.

2.3. 현실의 한계에 부딪힌 자칭 미륵


그런데 904년, 궁예는 돌연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정한 뒤 적잖은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다만 철원은 한 나라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다. 자세한 것은 철원 태봉 본궐, 철원한탄강 문서를 참조.
왜 궁예가 3년 만에 철원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국호와 연호까지 싹 갈았는지에 대해선 저마다 의견이 나뉘지만, 대체적으로는 왕건을 필두로 한 고구려계의 패서 호족들의 세력이 건국과 초기에는 큰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몇 년이 지나자 궁예의 왕권 강화 정책에 걸림돌로 작용하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 의식이 없거나 희박한 철원 지역으로 천도를 시행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마진이란 이름 자체가 불교 용어 '마하진단'(摩荷震檀)[24]의 준말, 혹은 마한, 진한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궁예는 국호를 변경함으로써 고구려의 색채를 지우는 동시에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의 입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천도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 가는 행동이었다. 단지 궁예가 수도로 옮긴 곳의 입지가 그다지 좋지 않았을 뿐..
또한 고(구)려는 옛 삼국 중 한 나라의 이름일 뿐이라 이 정체성을 너무 강조한다면 청주시, 충주시, 나주시같이 과거 백제였던 지역과 옛날부터 원래 신라였던 지역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고구려라는 틀을 넘어 백제와 신라까지 공통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더 넓은 의미의 불교적이고 추상적인 이름인 마진으로 국명을 바꾼 것일지도 모른다. 이후의 태봉 역시 그 의미에서 삼국 중 하나가 아닌 모두를 포괄하겠다는 의지가 선명히 남겨있다.[25]
궁예는 야심찬 이상주의자로서 자신과 백성들의 이상향이 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과로 인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해버린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의 협조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는데, 그들은 이상향보다 자신들의 현실적인 이익만을 중시하였다. 단지 재산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궁예에게 협조하고 그의 정통성에 힘을 보태고 있지만 진심으로 궁예를 따른 것이 아니었고 패서 지역 민심도 딱히 궁예에게 순종적이지 않았다. 궁예의 정책 중 호족의 이익과 상반되는 것에는 여과없이 제동이 걸렸다.
그가 카리스마와 애민 정신이 매우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평생을 승려로 살았던 궁예는 백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별 어렵지 않았지만 지배층들을 포섭하는 데 필요한 정치력은 갖추지 못했다.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고 귀부해 온 신라인들을 첩자로 의심하여 족족 살해한 것이 한 예다. 궁예가 신라를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증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시 신라 지배층 출신이었고, 중앙에서 배제된 지배층이나 골품제의 제한에 절망한 6두품, 일반 백성 정도는 쉽게 포섭할 수 있었을 텐데도 무조건적으로 감정 만을 앞세워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한편 궁예의 신라 귀순자 학살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궁예가 부석사에 걸린 신라왕의 초상화를 칼로 내리친 것이나, 신라를 '멸도'라고 칭하며 적대시한 것은 정사에도 기록된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적대한 대상은 신라 국왕과 왕실, 진골 귀족, 즉 신라 지배층에 한정되었다는 이야기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소위 4기장 중 신숭겸과 복지겸을 제외하면, 홍유와 배현경은 옛 신라 지역의 농민 출신으로 태봉의 장군이 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홍유'의 경우 경북 의성 출신이고, 배현경의 경우는 경주시 출신이다.
각설하고 궁예의 급진적인 고구려색 제거 정책에 대해서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이 막후에서 은근히 저항했을 것은 당연지사이고, 궁예는 자신의 새로운 정치가 지지부진한 상황에 큰 염증을 느꼈을 것이다. 궁예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말 안 듣는 고구려계 호족들의 근거지를 떠나 새로운 수도의 백성과 친위 세력을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궁예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901년에 보였던 친고구려적 성향을 철원에 천도하면서부터 완전히 버렸다. 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이던 청주 주민들을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아지태를 위시한 백제계 호족인 청주 세력들을 적극 등용한 것 등은 궁예가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궁예의 이런 움직임은 결국 철원 지역의 백성들을 피폐하게 해 도리어 자신의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

2.4. 몰락의 징후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속설에 따르면 오행설에 근거한 것으로 금생수(金生水)의 원리로 금의 기운으로 일어난 신라의 금덕을 이기겠다는 의도에서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더하여 만세는 황제에게 부르는 찬양어구이기 때문에 은연 중에 자주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덤.[26] 이 즈음부터 궁예는 황권 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고려사에 의하면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했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사람의 마음을 뚫어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때려 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대강 유추해 본다면 모두 황권을 갑작스레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미륵.'으로 칭한 것은 신라 후기 혼란한 시대에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미륵 신앙을 활용해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고 관심법은 거기에 더해 딴 마음 안 먹고 절대 복종하도록 호족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궁예의 무리하고도 성급한 황권 강화책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 신앙을 활용해 자신의 황권을 전제화하려던 생각은 당시 미륵 신앙의 총본산인 법상종 교단과 갈등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법상종은 앞으로 세상을 구하러 올 미륵불을 주불로 삼는 종파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상한 젊은 외눈박이 중놈이 나타나서 미륵을 자칭하면 "아, 그렇군요. 미륵이시군요. 미륵 부처님 만만세"[....]하고 따를 리가 없는 것. 궁예 또한 순순히 뜻을 꺾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결국 자기 신격화 목적의 ''''미륵 신앙 왜곡''''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법상종의 거두 석총을 백주 대낮에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극단적인 수를 두기까지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 써진 기록에 따르면, 궁예가 20권의 불경을 손수 지었는데 이게 요망스러운 불쏘시개여서 이 불경을 주제로 한 강설을 듣던 석총[27]이 "이런 해괴한 이야기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철퇴를 맞고 끔살당했다고 한다. 궁예가 제멋대로 지었다는 경전의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용이 어쨌건 대놓고 경전을 제멋대로 저술한 것은 불교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이 때문에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궁예가 경전을 새로 저술하는 것을 목격하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궁예의 최측근 핵심 심복이자 같은 승려 출신인 종간마저 충격을 받아 ''''경전을... 경전을... 새로 쓰시옵니까? 아니, 경전이란 오로지 부처님만이 쓰시는...''''이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일부 문학 작품에서는 미륵불이 속임수를 사용한 석가불에 의해 밀려나 세상이 혼탁해졌다는 내용의 무가인 '창세가'를 궁예의 불경의 내용으로 넣기도 하나[28], 어디까지나 문학적 상상력일 뿐 근거는 없다. 어쨌든 당시 높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법상종의 명망 높았던 고승을 무참히 처형했으니, 당시 불교계에서는 승려와 신도를 불문하고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궁예에게 거센 반감을 가졌을 것이 뻔하다. 어쨌든 이번 일을 계기로 오히려 궁예의 광기가 더 가중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어쨌든 궁예의 관심법은 호족들에게는 자신들을 때려 잡으려는 공포 정치로 받아들여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궁예는 호족들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는가하면 황권 강화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황후 강비를 잔인하게 처형시켰다. 이를 말리던 아들 청광과 신광까지 살해하는 잔혹한 짓까지도 벌였다. 고려사는 이를 궁예의 광기로 규정했지만 아마도 궁예는 옛 고구려계 호족인 신천 강씨 출신의 딸로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강비가 제위 계승권을 가진 자신의 아들들을 앞세워 궁예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나, 아니면 더 나아가 반역을 했기 때문에 강비와 두 아들들까지 처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기록처럼 강비가 궁예의 폭정에 직언을 많이 해서 강비는 물론이고 그녀가 낳은 두 아들까지 모두 죽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궁예의 첫번째 아들인 청광은 이미 황태자로 책봉된 상태이기까지 했다.
강비의 충격적인 처형 이후 패서의 고구려계 호족들은 궁예가 조만간에 자신들을 모조리 제거하거나 모든 힘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했다. 이들의 우려는 그간 왕건만은 건드리지 않았던 궁예가 왕건마저도 반역을 했다며 죽이려 드는 사건을 통해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건은 호족 중의 1인자로 태봉에서 궁예 다음 가는 실권자였다. 그런 왕건마저 죽이려 하는 궁예를 보고 호족들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 것은 민생 면에서도 큰 오판이었다. 한반도에서 전근대의 주요 물자 이동 수단은 수운과 해운이었던 만큼, 도성이라면 원활한 물자 수급을 위해 응당 배가 다닐 수 있는 큰 강이나 항구를 끼고 있어야 했다. 철원은 근처에 큰 강도 항구도 없는 내지이기 때문에 교통이 너무나 불편했다. 한탄강은 그다지 큰 강이 아닌데다 고저차가 심하고 물살이 세서[29] 수운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 임진강이 있기는 하지만 임진강 수계의 수운은 임진강 본류에서만 가능하다. 경기도에서 발간한 나루터·포구 일람을 보면 연천군의 포구들이 모두 구 임진강변에 몰려있고 한탄강 수계인 전곡 이동으로는 전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원이 교통의 요지가 된 것은 철도같은 육상 교통 수단이 발달한 근현대 이후의 이야기이다. 이는 철원군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물론 철원에는 ''''철원 평야''''라는 꽤 풍요로운 곡창 지대가 있다. 아마 궁예도 철원 평야의 부양력을 믿고 천도를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철원 평야 자체의 생산력만으로 수도의 경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탄강의 유량으로는 농업용수 정도나 공급할 수 있었던 곳에 도성을 짓다 보니 폭증한 생활용수 소요 때문에 농업용수 공급까지 엉망이 되어, 풍요로운 들판까지 황무지화되었다. 이 때문에 농업용수가 귀해져셔 다른 지역이 평작일 때조차도 유독 철원의 중하층 농가에만 매년 흉작이 반복되었다. 수도의 값이 폭발적으로 치솟아 대지주와 대상인은 폭리를 취한 반면 백성들의 반감은 계속 커졌다. 고려사 태조 원년 8월 신해에 따르면 '가는 포 1필로 쌀을 5되 밖에 살 수 없었다'는 표현이 있다. 후대인 조선 시대에 값이 대략 1필 당 20되 ~ 40되 수준임을 볼 때, 농업 생산력의 변화를 감안해도 당시 철원의 물가는 심각하게 높았다. 게다가, 농업용수가 고갈될 정도로 물을 끌어대어도 생활용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는 대체로 큰 강을 끼고 있으며, 이는 교통과 산업이 크게 발달한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많은 인구가 매일 배출하는 막대한 양의 하수를 처리하고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선 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평양, 개성특급시, 경주시, 서울, 공주시, 부여군 등 주요 왕조의 수도였던 곳 치고 배산임수 지형이 아니었던 곳이 드물다. 방어와 교통 양자에 모두 유리해야 비로소 수도의 요건을 갖추지만, 철원은 방어는 몰라도 교통은 영 좋지 않은 곳이었다. 패서 호족들을 견제한다는 목적은 좋았지만 좋은 입지를 가진 송악(개성)을 버린 것은 엄청난 실책이었다.
한가지 야사를 소개하자면 왕창근이라는 상인이 길을 가던 중 오른손에 큰 거울을, 왼손에 도마 3개를 들고 있는 늙은 거한을 만났는데, 거한이 왕창근에게 2말이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거울을 팔고자 했다. 예사로운 거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왕창근은 제의를 수락하여 거울을 샀는데, 그 거한은 그 을 저잣거리의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거울이 햇빛을 받으니 글씨가 나타나는데,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삼수중사유하 상제항자어진마 선조계후박압
三水中四維下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縛鴨

옥황상제께서 아들을 에 내리셨으니 그가 먼저 을 잡은 후에 오리를 잡을 것이다.

어사년중이룡견 일즉장신청목중 일즉현형흑금동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形黑金東

그가 2마리의 중 하나로 나타나니 1마리푸른 나무 뒤에 잠시 몸을 숨겼고, 1마리검은 금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었는데, 괴이히 여긴 왕창근은 이 거울을 왕궁에 가져가 궁예에게 바친다. 궁예는 왕창근과 함께 사람을 풀어 이 거울을 판 거한을 찾게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도저히 나라 전체를 뒤져도 이 사람은 고사하고 지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잠시 쉬고자 한 허름한 절간에 들어간 왕창근 일행이 벽에 걸린 불도를 보니, 놀랍게도 치성광여래의 좌우에 있는 수호신 중 하나의 모습이 그 거한의 모습, 도마 세 판을 들고 있는 것까지 정확히 일치하였다. 보고를 받은 궁예는 '이는 하늘의 계시다'라 여겨 송함홈,백탁,허원 같은 궁내 박사들을 시켜 거울에 적힌 말을 해석하라 명하는데...
'진마'란 '진한'과 '마한'을 뜻하며,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므로 송악을 뜻하는 것이고, 그 뒤에 숨은 ''은 송악 출신의 왕건, '검은 금'은 쇠를 뜻하니 철원이며, 철원에 천도한 궁예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닭'은 계림(鷄林), 즉 신라[30]를 뜻하며, '오리'는 압록강, 즉 북쪽으로 그 세력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철원에 자리잡은 궁예를 피해 송악에 숨어있던 왕건이 곧 일어나 신라와 백제를 손에 넣게 된다는 예언이었다.''' 그러나 죽고 싶지 않고서야 그 미치광이 상태의 궁예에게 이런 내용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으므로, 박사들은 적당히 궁예에게 아부하는 말로 날조하여 보고했다고 한다.

2.5. 최후


정개 5년인 918년 6월, 왕건을 옹립하려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 정변은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이 궁예에게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학자들이 이 해석을 많이 지지하기는 하지만, 고려사에서 왕건이 정변을 성공시킨 후 논공행상을 베풀었을 때 상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의외로 패서 지역의 옛 고구려계 대호족들이 전혀 없고, 정변에 가담한 사람들의 숫자도 터무니없이 적은 점을 알 수 있다.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대호족인 박지윤, 황보제궁, 유천궁이나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후삼국시대 최대의 명장인 평주의 유금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궁예 정권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한 왕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신이였던 최응도, 고경참문 사건에서 왕건의 목숨을 구한 송함홍, 백탁, 허원 같은 궁예의 궁 내부의 왕건 지지 세력도 전혀 보이지 않고, 왕건의 명을 받아 훈요 10조를 받아적은 박술희, 왕건의 주요 세력 기반중 하나인 나주 호족, 그리고 왕건의 처가댁 호족 세력들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사에 의하면 정변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1등 공신과 2등 공신으로 임명된 공신들의 명단은 1등 공신에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이며 2등 공신에 견권, 능식, 염상, 김락, 연주, 마난이 보일 뿐이다. 고려사 환선길 열전을 보면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환선길과 그의 아우 환향식이 왕건을 죽이기 위해 암살모의를 했다. 환선길이 군사 50여명을 거느리고 왕건에게 다가가자 왕건은 태연하게 '''''짐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이 비록 너희들 덕분이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겠느냐.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니가 이럴 수 있다는 말이냐!''''' 라고 소리쳤다. 환선길은 왕건이 복병을 숨겨놓은 것으로 오인해 도주하다가 동생과 더불어 왕건의 추격병들에 의해 사망했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학계에서는 환선길 형제도 왕건의 정변에 가담했지만 곧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반역을 저질렀고, 이후 이 행적으로 인해 공신 명단에서 빠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사 태평 열전을 보면 태평은 궁예 시절부터 왕건을 위해 일했고, 왕건의 정변 때 공을 세웠다고 쓰여 있어 태평도 왕건의 정변의 공신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 고려사 견권 열전을 보아도 청주 출신이지만 왕건을 지지한 사람으로 같은 청주 사람이지만 재경 청주인들인 김근겸, 김관준, 김언규 등을 제거할 것을 왕건에게 권고하지만 왕건은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도운 사람들이라며 거절한 경우가 기록된 것으로 보았을 때 김근겸, 김관준, 김언규도 포함한다면 왕건의 공신 수는 현재까지 확인이 되는 수가 17명 정도로 이 숫자는 조선왕조건국 당시의 개국공신 수인 52명과 세조의 계유정난 정난공신 43명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수이고, 더군다나 박지윤, 황보제궁, 유천궁 같은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대호족들이 명단에 전혀 없는 것을 보아서 실제 이들이 궁예의 숙청을 예견해 선제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부실한 편이다.
오히려 하현강이나 정청주, 조인성 같은 궁예에 호의적인 학자들의 말대로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당연히 존재했지만, 패서 지역 호족들을 등에 업은 궁예의 황후 강씨의 사태가 진압된 후 큰 충격을 받은 궁예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친위세력들을 잘 이용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감시하고 숙청한 관계로 이들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 뿐만이 아니라 기타 왕건을 지지하는 반궁예세력들이 왕건의 정변 때까지 제대로 결집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꽤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장기간의 지나친 폭정으로 인해 민심과 군심, 그리고 신료들의 이반으로 인해 반궁예 세력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철저한 감시와 숙청에도 불구하고 본래 궁예의 지지층이였던, 애초에 대호족들과는 거리가 먼, 복지겸을 제외하면 모두 농민 출신의 전문 군인들이였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의 4기장과 염상, 김락 같은 인물들과 그리고 궁예의 가장 핵심 지지층이였던 청주 지역 출신의 환선길, 환향식, 견권, 김근겸, 김관준, 김언규 등의 청주 세력의 일부가 궁예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을 한데다가 수많은 전쟁으로 단련된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거듭된 전공과 시중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민심과 군심의 지지를 얻은 왕건과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고 관리로서의 실무에 밝고 익숙했던 태평같은 인물을 막지 못하고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각설하고 이후 고려사에 의하면 쿠데타 현장에 빠져나온 궁예가 변장을 한 채 부양 산골현으로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먹던 중, 폭정에 분노한 그 지역 백성에게 발각되어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궁예는 여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동쪽으로 도망친 것으로 나오는데, 양길군에서 독립한 궁예의 첫번째 기반 지역이기도 했던 명주(강원도 영동 지역)의 지배자 김순식은 왕건이 즉위한 이후에도 10년간 왕건을 적대할 만큼 중견 세력 + 친 궁예파였기 때문에 궁예가 도주ᆞ합류에 성공했다면 왕건의 처지는 매우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해 6월 을묘에 기병 장군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비밀히 짜고 밤중에 태조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하였다.

태조는 굳이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오면서 사람을 놓아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왕공이 벌써 의기(義旗)를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분주히 달려와서 함께 참가한 자들이 이루 헤일 수가 없었고 먼저 궁문으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벌써 승리를 얻었으니 내 일은 다 글렀다.”하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그는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부터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 그 후 곧 부양(斧壤)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고려사

한편 궁예의 최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우선 《삼국사기》나 고려사에서는 철원에서 탈출해 산골로 숨었다가 부양(斧壤, 오늘날의 북한 강원도 평강군)에서 배고픈 나머지 보리 이삭을 주워먹던 중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광산이씨소고》에 따르면 궁예가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현 평강(平康) 방면으로 도주하던 중 수풀 속에 숨은 백성들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31] 땅에 이르러 말 위에서 분사하였으나 생시처럼 꼿꼿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왕건이 달려와 조문하나 유해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겁내어 부득이 직립한 채로 입관케 하여 석축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를 만들어 군주의 예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연 1회 향사를 올렸다고 전한다.[32]

3. 궁예는 신라 왕족인가?



3.1. 긍정설



3.1.1. 거병 전의 궁예에겐 족보조작을 할 힘이 없었음


궁예가 고위 신라 왕족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은 여러 가지 기록과 정황 증거가 있다. 궁예는 양길에게서 독립하기 전에 명주에 가서 명주 성주 김순식의 항복을 받았는데, 궁예가 그저 혈통도 알 수 없는, 아니 혈통이나 사칭하는 반란군 수령 나부랭이의 수하일 뿐이었다면 그렇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고대에 흔히 이루어진 왕실의 선대조작은 일단 족보조작을 할 만큼의 재력과 세력을 확보한 후에야 가능했는데 궁예는 신라 말의 가난한 승려 내지 혼세의 비적대장 1에 불과(?)했기에 태봉 건국 전에는 그럴 힘이 없었다. 때문에 확실히 혈통을 조작할 능력이 없었을 때 김순식이 귀부한 것을 보면 궁예는 다른 진골귀족들의 음모로 선조가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숙청당한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 왕의 초상화를 로 베었다는 일화를 비롯해서 신라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궁예는 신라의 지배층에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궁예 자신이 당시 지배층과 모종의 악연이 있으며, 지배층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원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3.1.2. 왕실 족보의 매매·조작을 통한 사칭은 불가능하다


신라 당시는 가문과 혈통만은 엄격하게 따지는 골품제 혈족 사회, 신분 사회였고 상류층조차도 가문의 등급이 철저히 나뉘어졌으며 누가 몇 두품 가문 소속인지 아닌지는 가문 소속 인원들과 족보만 조사해봐도 금방 들통날 게 뻔했던 때였다.[33] 신라 시대의 일개인의 족보조작과 진골 경주 김씨 편입이 마치 조선 후기처럼 그렇게 쉬웠으면, 최치원 등을 비롯한 유능하고 세력있는 6두품들이 그렇게 진골 가문을 사칭하지 못해서 절망하고 좌절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당시 힘있는 각 지방의 호족들도 물론 선대를 조작했을 게 분명하다. 왕건도 그랬지만, 신라 말에 갑자기 각 지방의 호족들로부터 오늘날의 권씨, 이씨, 장씨, 박씨 등 여러 본관별 성씨들이 출현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차마 경주 김씨 진골을 사칭하진 않았다. 작게는 세간의 조롱을 받고 크게는 조정의 어그로를 끌어 역적으로 몰려 토벌될 수 있었기 때문. 그 족보 매매가 횡행한 조선 후기에도 왕실 적통 족보는 절대로 팔릴 리가 없었다. '''왕실에 원본이 있는 족보를 무슨 수로 매매하거나 위조를 한단 말인가?''' 조선 후기에도 그러했는데 신라 왕실에 족보가 없어서 맘대로 사칭이 가능했겠는가? 삼국지의 유비 정도로 서출의 먼 후손 급인 너무 먼 방계라면 황손인지 논란이 생길 수 있는 것이지만 궁예의 입지는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리 왕가의 선대조작이 관행이라 하나, 삼국의 시조들의 이야기는 어디가지나 술작된 신화이고 설화이며, 신라 경주 김씨가 끌어들인 흉노족 투후 김일제나 왕건이 끌어들인 당숙종 갖고는 한나라나 당나라가 이미 망해 자빠진 나라라서 선대조작을 가지고 따질 사람도 없었던 반면 궁예의 시대에는 아직 골품제와 경주 김씨 신라 왕실과 진골귀족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웬 상놈이 왕족을 사칭했다간 천하에 망신살 뻗치면 다행이고 심한 경우 집안이 멸문당하기 딱 좋은 시대였다. 아자개와 견훤이 신라왕실 후손이라는 주장은 수백 년 후에 쓰인 고려시대 책에서나 나오는 것이고 또 백제 부여씨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는 등 후백제 멸망 이후 훨씬 후대에 윤색 술작된 것이 뻔해서 당시 왕실 적통 사칭이 가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애초에 수도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왕실 후손이면 경주 김씨여야지, 굳이 성이 이씨일 리도 없고.
참고로 힘센 놈이 무조건 선대조작을 한다는 주장은 이성계 여진족설 같은 불쏘시개나 뿌리는 혐한들의 개소리이다. 이성계 또한 전주 토박이 전주 이씨 분가 종친들과 만나서 대풍가를 읊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때 전주 이씨도 아니면서 전주 이씨를 사칭하고 장자를 음서로 관직에 진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고대 한반도에서 혈통은 그 자체가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지배층 귀족들까지 여러 두품으로 나누어서 가문별로 철저히 등급을 구별했던 당시에 감히 누군가가 근거도 없이 자기가 진골이라고 사칭했다간 철저히 세인들의 비웃음만 샀을 것이다. 만약 궁예가 신라 왕족을 사칭했다거나 혹은 그의 출신에 대한 의혹이 떠도는 소문 정도로라도 존재했다면 신라 왕실에서 문제를 안삼았을 리가 없고 고려의 사서에도 당연히 언급되었을 것이며 견훤 역시 이걸 빌미 삼아 궁예를 강하게 공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사서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3.2. 부정설



3.2.1. 대체 누구의 아들이란 말인가?


상기 긍정설에서는 '궁예는 그래도 권력에서 밀려난 경주 김씨 누군가의 아들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해석을 인정한다면 의문 하나가 또 남게 된다. '''그러면 궁예는 누구의 아들이며, 왜 (권력에서 물러났을 경주 김씨 아무개가 아닌) 신라 왕의 아들이라고만 전해지고 있는가?'''
궁예는 태생부터 고아로서 원체 혈통을 추적할 만한 근거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진서로 인정받는 사서 정사인 삼국사기 궁예전에도 우리가 흔히 아는 '왕의 아들이었으나 버려졌다'는 모호한 기록만이 전해질 뿐이며, 궁예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 각 왕의 본기에는 궁예의 출생에 대해 일말의 기록조차 적혀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신라의 영토를 무려 2/3나 차지하고 신라를 매우 증오하여 멸도라고 부를 정도의 인물이 정말 신라 왕의 아들이라는 근거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 인물의 아버지 되는 신라왕의 본기에 궁예의 출생 혹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일부라도 실어져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예의 혈통에 대해서 사서에 이를 추적할만한 건덕지가 없다. 따라서 신라 왕자일 것이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긍정설에서는 신라 왕족 출신인 김순식이 귀부한 것을 두고 궁예의 신라 왕자, 혹은 왕족설을 긍정하지만 이것은 꼭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신분이 매우 중시되던 '봉건시대'에도 의외로 신분이 높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의 신분이 낮거나 매우 낮더라도 그 사람의 인격, 능력, 용맹, 카리스마가 워낙에 대단하거나 혹은 장래성이 워낙에 뛰어나다고 판단되고, 또 그의 이런 면들 때문에 매료가 된다면 비록 신분이 높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 그의 밑에 들어가거나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량의 경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전국칠웅 한나라의 재상을 지낸 명문 집안 출신이었고, 본인의 능력도 워낙에 출중했지만, 미천한 농민 출신인 유방의 밑에 들어가 그의 신하로 활약했다. 삼국시대 유엽광무제의 직계 자손이였지만, 환관 집안 출신인 조조의 밑에 들어가 역시 그의 신하로 활약했다. 명책사 장량, 명재상 제갈량과 비교될 정도였던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책사 유기도 강남 한인으로 급제하기 그토록 어렵다는 원나라의 과거에 합격한 엘리트 지식인이었음에도 비천한 농민출신이었던 홍무제를 섬겼다. 비록 궁예가 신라의 왕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김순식과 그의 아버지 허월이 그의 매우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와 혁신적인 사상에 매료되고, 또 그의 장래성이 매우 기대가 되어 명주의 기득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궁예 혈통 긍정론에 따르면 궁예는 진작에 왕실 권력에서 밀려나 사실상 호족 또는 상놈으로 전락해버린 떨거지인데, 그런 떨거지가 왕족이라는 이유로, 그보다 훨씬 더 격이 높고 고위직을 지내는 김순식이 왕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부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3.2.2. 당대 조상 조작의 관행


궁예가 헌안왕이나 경문왕서자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꽤 많다. 일단 저 두 왕이 아니라 신무왕이나 문성왕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순천 김씨, 광산 이씨족보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물론 족보라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과장된 전승과 황당무계한 전설까지 그대로 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유력 호족들은 족보 세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야사인 《삼국유사》 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에 따르면 견훤이 진흥왕현손이라고 써 있는데, 정사인 삼국사기 견훤열전에는 견훤이 상주 출신 농민인 아자개의 아들이라는 말 외엔 신라왕실과의 연계성은 전혀 지적되지 않는다. 고려 왕실도 그저 해서출신 해적이었을 왕건의 조부 작제건당숙종의 후손이라고 뻔한 구라를 쳤는데, 그에 더해서 당 숙종과 결혼했다고 하는 진의라는 여자의 증조부로 '성골 장군' 호경이라는 인물을 제시하기도 했다.[34] 다들 알다시피 성골은 상대 신라에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최상위 계급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왕건도 거슬러 올라 올라 가면 신라 왕이 나온다는 거다. 당연히 그러한 기록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없고, 그냥 세력가들이 자기 혈통을 신라 왕가에 갖다붙이는 게 그 때 트렌드였구나, 하면 되는 것들이다. 궁예의 혈통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궁예의) 아버지가 확실히 누구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헌안왕의 아들이냐, 경문왕의 아들이냐 하는 것은 일부의 학자들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당대의 인물에 관한 출생 기록들이 대부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상대의 하나였던 진훤은 농부의 아들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법흥왕의 후손으로 나와있다. 왕건도 증조부가 당나라 숙종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등, 당시의 가문에 관한 기술들은 인정하기 어렵다.[35]

더군다나 아예 처음부터 고아였던 궁예의 경우처럼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우기는 경우라면? 궁예전의 기록과 같은 일이 실재한 사건이었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왕후나 정식으로 들인 후궁의 아이를 그런 식으로 토스했을 리는 없으니 궁예의 '친모'는 그다지 귀하지 않은 신분의 정부(情婦)일 텐데, 설령 그때까지 살아있어서 증언을 해 준다고 해도 궁예가 한창 내가 누구 아들이오 하고 떠벌리고 다녔을 당시(890년대 - 910년대), 친부로 궁예가 주장한 헌안왕 또는 경문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결정적으로 궁예가 태어났을 즈음에 어느 사가에서 왕의 아이가 태어났고 또 버려졌음이 확인되었다고 해도 이 아이가 그 아이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친모'가 '유모'와 함께, 한쪽 눈을 못 뜨는 갓난 아기를 안은 사진이라도 찍어 두진 않았던 이상 말이다.

(가1)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或云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중략)

그리고 궁예가 왕자라는 사실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에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보아진다. 『삼국사기』 찬자들이 궁예가 헌안왕경문왕 중 누구의 아들인지 확정하지 못했던 것((가1))이나 『삼국사기』 본기에 궁예의 출생에 관한 기사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약 (가1)에 나오는 바와 같은 왕자가 實在하였다고 하더라도 장성한 애꾸눈의 궁예가 과연 그 왕자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제 궁예왕자설은 일정한 목적하에 궁예와 그 측근들이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을까.[36]

물론 동아시아 역사에서 "진짜 그 사람이 니 조상 맞냐"고 정적을 디스하는 일이 종종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전통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고귀한 혈통의 악인'을 상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사 폭군 라인 1번인 하나라황하 치수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든 대우의 후손이었다. 포락지형, 주지육림 등등으로 이것이 폭군이다라는 보여준 상나라는 폭군 걸을 타도한 성탕의 후손이었다. 옛 사람들은 만리장성 건설과 분서갱유로 악명이 자자한 시황제 영정, 대운하고구려 원정으로 수나라를 파국으로 이끈 양제 양광에 대해서도 고귀한 후손이라도 딱히 비난에 거리낌을 두진 않았다. 이렇듯, 조상이 아무리 잘났어도 후손은 얼마든지 못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당대에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념이었다.

3.2.2.1. 족보를 조작한다 하더라도 반발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

상기 옹호론에서는 감히 왕실을 사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지적하고 있다. 이 논리는 물론 매우 타당하다. '''국가의 권위가 나름 유지되고 있는 때'''라면 말이다. 그러나 궁예는 국가의 내적 통치력이 유지되고 있던 시기의 사람이 아니다. 궁예 이전에 이미 기훤이니 양길이니 하는 도적떼들이 신라 땅 상당수를 점유하고 사실상 독립국 행세를 하는데 신라 왕조는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며, 후고구려가 건국되기 8년 전에 이미 견훤이 '참람하게도' 대놓고 왕을 자청하고 백제의 후계자를 자처함에도 신라는 무력하게 이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가 자기가 신라 왕족임을 사칭한다 하더라도 신라에서 이를 반발하기 쉽지가 않다. 당장 삼국지에서도 유표가 중앙정부로 향하는 공물을 끊고, 스스로 천자의 의복을 입고 마치 천자처럼 행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명백한 반역'''이며, 당장 군대를 보내 진압당해도 싼 일이다. 그러나 그 시기의 후한은 황건적의 난, 동탁의 폭정, 헌제이각곽사를 피해 허창으로 거지꼴로 도망가는 등 조정의 권위는 완전히 실추된 상황이었고, 유표의 그런 참람한 행위를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공융이 대놓고 '우리가 저거에 대해 화내봤자 진압할 힘도 없으며 오히려 조정을 더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니 조용히 덮어두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공융의 말대로 아무것도 안(못) 했다.
신라의 상황도 이와 같다. 어차피 궁예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신라는 수많은 군벌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며, 궁예는 그런 개판이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양길의 부하를 거쳐 독립세력의 수장이 된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서 궁예가 '나는 신라 왕자다!' 라고 하더라도, 그 궁예를 진압할 능력이 없는데 괜히 '신라 왕족을 사칭하는 미친놈!'이라고 비난해 봐야 괜히 궁예의 분노를 사서 더 얻어맞기만 할 수 있으니 침묵했다고 보면 해석이 맞는다.
사례를 모어 보면 위 단락에서 언급되었듯 고려태조 왕건 또한 자기가 신라의 성골 호경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고 이것 또한 뻥일 가능성이 큰데, '왕건의 조상 호경'이 뻥인 것과, '궁예의 아버지 경문왕, 또는 헌안왕'은 동일한 수준의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왕가의 지위만 잃었을 뿐 명백히 살아 있는 경주 김씨들이 '왕건의 신라 왕족 사칭'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았다고 해서 왕씨 가문이 경주 김씨의 방계라고 주장하는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궁예를 신라 왕족이라고 믿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다못해 왕건 가문을 '그래도 왕건도 왕실에서 밀려난 경주 김씨의 어딘가의 후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잣대를 궁예에게도 똑같이 대볼 수 있다.

3.2.2.2. 궁예라는 인물의 비합리성

'감히 왕족의 족보를 사칭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이냐?' 라고 하는데, 합리적인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역사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또는 '미친짓', '판을 그르친 오판' 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들의 비합리적 결정등이 넘쳐난다.[37] 그리고 당장 현 구성원이 생존해 있는 왕가를 사칭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전례가 없지 않다. 진승·오광의 난의 주동자인 진승은 스스로 '''장초나라 왕'''을 선포하면서 자기가 항연의 후손이라고 뻥을 쳤다. 심지어 그 시기에 진짜 항연의 후손이었던 항량항우가 명백히 살아 있었는데 말이다. 까고 말해 진승과 궁예는 그렇게 다른 인물도 아니다. 진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땐 진나라가 아직 힘이 있어서 장한이 금세 진압해버렸지만, 궁예는 이미 신라가 막장화되어 아무것도 못 할 시기였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또한 태봉 말년에 궁예가 당대의 이름난 고승인 석총을 때려죽여 불교 교단과 지지자들의 반감을 사는 행위, 스스로의 왕비와 자식들까지 때려죽이며 공포정치를 벌인 행위, 대놓고 미륵불을 자청하며 스스로 사이비 경전을 쓰는 행위 등은 아무리 좋게좋게 보더라도 도무지 '''합리적 행위'''라고 볼 수 없다. 합리적 차원에선 모두 궁예 자신의 지지를 깎아먹고 공포를 느낀 불만계층을 양성하여 결국 왕건의 쿠데타로 귀결된 행위기 때문이다. 이렇게 궁예라는 인물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정신나간 광증을 보인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자기 스스로가 신라 왕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뻥을 쳤다고 보는 것은 개연성이 충분하다.

3.2.3. 궁예설화의 허위성


궁예 출생·성장담의 내적인 구조만 살펴 봐도 궁예 신라 왕자설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서, 궁예가 왕의 아들임을 증언해 주는 인물은 오직 궁예의 어머니[38] 한 명 뿐이다[39]. 그러나 해당 설화에서 어머니는 궁예가 신라 왕자라는 어떠한 물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다음도 이상하다. 궁예가 그런 말을 듣고 한 일은 승려가 되겠다며 집에서 나가 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좀 더 물러나서 보게 되면 더 기막힌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어머니는 그렇게 기른 자식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 기록에서 퇴장한다. 반면에 궁예는 일국의 군주가 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출생담을 세상에 알린 이는 누구라고 봐야 하는가? 당연히 궁예 본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어느 땡중 출신 갱스터 보스가 자기 아빠가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 그 유일한 증인으로 본인과 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람을 내세우는데
  • 그나마도 그 증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람이 본인 한 명뿐이다.
귀하디 귀한 임금의 자녀를 일관 따위가 내치자고 건의하고, 국왕이란 양반이 몇 가지 불길한 징조만으로 아직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갓난아이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은 아무리 고대 사회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가운데 아이가 중오일(重午日) 즉 음력 5월 5일에 태어났으니 불길하다고 하는 것은 맹상군의 고사로서 당대에도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었을텐데 말이다.
만에 하나 궁예가 진짜 신라의 왕자라고 해도 궁예전에 써 있는 어린 시절 얘기는 허구로 보는 게 현명하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주인공의 미래에 대한 복선(태어날 때 나타난 불길한 징조, 비행 청소년이었던 어린 시절), 시점의 전지성(당사자들이 밝히기 꺼렸을, 일관이 경문왕에게 한 경고나 유모가 눈을 찔러서 궁예가 애꾸가 된 사실 등을 기록자가 아는 것), 극적인 전환(왕자가 한 순간에 평민으로 전락함, 정체성을 깨닫게 된 아이가 집을 떠나 세상에 나오게 됨) 등 소설적 기법들이 너무 강하게 드러난다. 위에서 임용한 박사가 지적한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내용이 엉성하며 너무 작위적이라는 것.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케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를 죽여 마땅한 죄를 구하였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인데, 왕이 그를 5월 5일에 났음을 미워하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쳐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진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가 나자 헌안왕이 엄명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여 궁녀가 누각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가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이 잘못 아이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유모가 데려다가 비밀히 길렀는데, 10살이 되자 장난이 몹시 심하므로 유모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은 내가 차마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가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며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군사를 모아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 도둑의 괴수 양길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가령 위의 말이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평생 비밀일 것인데, 그것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刑法) 밖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이겠는가?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의가 귾어졌으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칼질을 하여도 아비를 죽인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서울과 능(陵)을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이 될 것 없거늘 하물며 왕의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란이 되랴마는 고대의 좁은 논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의 초상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만 하여도 궁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안 되었으랴?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도 태조문성(太祖文聖)의 존시(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한 비렁뱅이 중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의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요약하자면
  • 궁예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고아였고 그의 혈통을 증명해줄 그의 가문이나 인물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
  • 혈통이라고 주장하는 대상마저도 제각각일 정도로 대해 혈통상 근거가 불분명함
  • 알려진 기록은 오직 고아인 궁예 자신이 말했을 믿기 힘든 설화적 뻥 뿐임
  • 그런데 궁예가 그렇게 뻥을 친다 하더라도 누가 뭐라 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이었음
  • 또한 궁예라는 인물이 과대망상적이고 광적이었기에 그런 뻥을 칠만한 사람이었음
을 근거로 궁예 신라 왕족설이 허구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3.2.4. 고려 왕조의 날조 가능성


왕건의 고려는 태봉을 무너뜨리고 성립된 왕조이기에 궁예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으니, 자칭 미륵이라고 하는 애꾸눈의 임금이 진짜 신라 왕자가 아니었다면 이를 문제삼지 않았을 리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다. 고려 입장에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궁예가 신라 왕자 출신이어야만 했다.
왜나하면 고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바로 넘어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경주시국으로 전락한 신라를 인수했다고 해서, 신라가 왕건이 세운 나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왕건이 신검을 물리치고 후백제의 영토와 인민을 흡수했다고 해서 그 나라가 고려의 전신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고려의 직접적인 전신은 어디까지나 궁예의 태봉 정권이었다. 그러니 '''고려 입장에서는 태봉이 반드시 정통성 있는 정권이어야만 했다.'''
사마씨의 진나라후한이 무너지고 정립한 삼국 중에 정통으로 인정한 것은 한 왕실의 후손이 세운 촉한이 아니라 자신이 타도한 전 왕조인 조위였다. 조선은 말기의 임금을 가짜로 깎아 내리긴 했어도 고려의 왕씨 왕조 자체를 가짜 왕조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고려 왕조가 스스로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전신인 태봉부터가 정통성을 가진 왕조여야 했고, 그러려면 그 나라의 건국자인 궁예가 신라 왕족이라는 것만한 게 없었다. 고려로서는, 궁예가 내가 경문왕, 헌안왕의 아들이요 하고 떠들고 다녔던 것은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담은 할머니가 신라 왕가 출신인 신성왕후였던 현종의 가계가 대대로 이어지며 많이 덜어졌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고려 초기의 지식인들로서는 꽤나 신경쓰이는 문제였을 것이다. 당대의 금석문에서도 그와 같은 고민의 일단이 드러난다.

于時羅運傾否, 兵火頻起, 弓裔亂紀, 甄萱盗名, 天命有歸, 國朝新造...

이때부터 신라의 국운이 쇠퇴해서 전쟁이 자주 일어났고 궁예는 기강을 어지럽히며 견훤은 이름을 훔쳤는데, 천명이 다시 돌아오고 나라가 새롭게 만들어져서...

大安寺廣慈大師碑 (950년)

광종 대에 세워진 이 비문에서 찬자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야기하며 그 주범으로 태봉의 궁예와 후백제견훤을 소환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혐의는 같지 않았다. 비문에 따르면 견훤의 잘못은 '이름을 훔친 것'이다. 여기서 '이름'이란 말할 것도 없이 '왕이라는 이름[王號]'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견훤의 죄는 임금을 참칭한 것, 즉 역적질을 한 것이다. 왕을 참칭한 것은 궁예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그러나 비문이 지적한 궁예의 죄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 '기강을 어지럽힌 것', 즉 정치를 잘못한 것이다. 혼군일지언정 역적, 가짜 임금은 아닌 것이다.
고려의 문인으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궁예가 가짜 왕족 출신이라면 그 왕위를 찬탈한 왕건은 뭐가 되나? 그 전에, 신라 영토 2/3를 점유한 궁예가 왕위 계승권 같은 것과 완전히 무관한 한낱 도적떼 두목에 불과했다면, 왕건이 그런 자에게 고개 숙이고 들어간 일은 역적질에 동참한 거밖에 안 된다. 당연히 고려인들은 자기 나라의 창업 군주를 역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사서의 기록들대로 태봉의 임금이 신라에 대해 서라벌을 멸도라고 부르고 그 나라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빠짐 없이 몰살하거나 신라 왕의 초상에 칼질을 하여 흉터를 남기는 등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고려로서는 궁예가 신라 왕자인 것이 정통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더 유리했다. 그렇다면 궁예는 신라 왕자로서 신라를 핍박한 불효, 불충한 인물이 되므로 정변의 명분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중략)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三國史記 卷第五十 列傳 第十)

보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론이 딱 그런 논지다.

4. 폭군 논란


당시 궁예의 폭정 증거는 아래와 같다.
  • 죄 없는 신하와 백성들을 대량 학살
  • 부인 강씨와 두 아들 살해
  • 호족과 공신 세력 숙청
  • 미륵 부처를 사칭하고 사이비 불경들을 지은 사이비 불교 교주 행위
  • 자신의 사이비 불교 교주 행위를 비판한 불교계 인사 숙청 (석총, 형미)
  • 사치와 낭비로 인한 민심 이반
  • 신라계에 대한 철저한 핍박
그러나 현대에는 마냥 폭군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궁예가 부인 강씨과 그 두 아들을 살해한 것은 당시 호족 중에서 궁예의 중앙 집권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강씨의 친정이었고 게다가 궁예만 이런 것도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또한 이들은 강씨와 그녀의 두 아들을 앞세워 순군부를 설치해 호족들의 군권을 약화하려던 궁예의 황권 강화에 저항했다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주장이 있었고 불교 고승들 숙청과 해괴망측한 불경 제작도 당시 교종에 익숙한 불교계에 선종을 전파하려는 갈등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더구나 궁예의 호족과 공신 숙청은 다른 왕조에서도 보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으면 태조 왕건고려를 건국한 뒤 광종이 등극하여 개혁할 때까지 고려 왕실과 조정이 호족과 외척, 공신들로 인한 심각한 혼란에 종묘 사직이 위협받을 정도로 강했던 호족과 공신 문제를 진정시키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궁예의 공신 숙청과 미륵불 자처 행동은 당시 민중이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기득권층과 종교계에 대한 궁예의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만큼 그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위와 같은 주장은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상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궁예의 불경 제작에서 인정되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궁예가 불경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 뿐이다. 그 내용이 정말 민중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에게 일갈하는 간지폭풍의 내용일지, 아니면 궁예 자신을 최고존엄의 미륵불로 신격화하기 위한 헛소리로 가득찬 불쏘시개에 불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둘 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민중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들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절대적인 왕권 강화로 나가는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20세기의 군사, 공산 독재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민중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고, 동시에 자신들의 절대 권력을 강화했듯이.
하지만 애초에 귀족 중심 불교를 타파한다면서 정작 기존 미륵 신앙의 본산인 법상종과 피를 뿌리면서까지 척을 진 시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법상종은 기본적으로 교종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대중 중심이라던 정토종조차 분류상으로는 교종이다. 황제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 종파에 대해 피를 볼 정도의 탄압을 자행했다는 것은 결국 궁예의 교리가 대중적으로 그다지 큰 반향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좋은 사례일 뿐이다.
민간의 궁예 전승들과 신앙을 예로 들어 반박할 수 있지만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궁예의 민간 신앙의 경우 그것이 단군이나 고려강감찬, 공민왕, 최영, 조선단종, 남이, 김덕령 같이 전국적으로 널리, 그리고 많이, 민간에서 신으로 숭배되는 인물이 아닌, 겨우 경기도 안성시 그것도 몇몇 산골 마을들에 한정돼 민간에서 신으로 숭배되고 있어, 이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또 그 과정에서 조카인 단종을 포함해 김종서, 황보인, 정분, 허후 등의 계유정난의 희생자들과 이후 사육신과 그 일행들과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일행 등에게 고문과 학살들을 자행해 백성들에게 매우 큰 미움을 받은 세조가 일부 지방에서는 신으로 숭배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어[40] 이걸 가지고 궁예가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좀 부족하다.
철원 지역의 민간전승의 경우도 궁예에게 좋은 민간 전승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예가 철원에 도읍할 당시의 곤암산 전설이나 또 궁예가 궁예의 황후로 둔갑한 구미호에 홀려 재위 기간에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와, 한 대신이 이 '구미호'의 정체를 눈치채고 이를 잡으려 다리가 3개밖에 없는 전설상의 신비한 개인 삼족구를 구해 구미호를 잡았다는 이야기와 심지어 이 사건 이후 궁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무녀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무당이 18세된 여성의 유방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날마다 인육을 먹었다는, 철저하게 고려의 입장에서 쓰여진 삼국사기 궁예전보다 더한 만행도 구전되어오고 있고, 또 고려말에 우왕창왕공민왕의 아들/손자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손자라는 이야기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조작되고 일어난 '김저의 옥사', '윤이, 이초의 옥사'와 더불어 조선의 양식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은 아무도 믿지 않고 신랄히 비판한 사안이고 또 오늘날의 한국 역사학자들도 조작이라고 보는 공민왕 말기 자제위 사건이 연상되는 궁예가 자신의 아내왕건을 강제로 사통시켰다는 이야기와 또 이후 왕건에게 축출되어 쫓기게 되었을 당시 한탄강의 곰보돌의 전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철원 지역의 민간전승들이 궁예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진술들을 하고 있어 신뢰도가 떨어져 민간의 궁예 신앙과 궁예에 대한 민간전승들을 가지고 무조건 궁예가 폭군이 아니고 비운의 창업개혁군주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그 정도로 민중적이고 혁명적인 교리라면 적어도 궁예에게 우호적이던 철원군 지역에서는 궁예의 교리가 최소한 구전으로라도 전해지는 것이 있을텐데 오늘날 궁예의 경전이나 설법은 단 한 가지도 전해지는 것이 없이 앞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오히려 철원에서 멀리 떨어진 안성시에서 궁예 미륵 신앙이 발견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궁예가 강비과 두 아들을 살해한 목적이 황권 강화를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궁예는 공포 정치를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관심법을 이용한 자의적인 법 집행[41]과 공포 정치로 패서 호족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그 숙청의 와중에 자신의 친위 세력을 육성하는 방법은 고작 청주를 비롯하여 중앙에서 먼 옛 백제계 세력들에 대한 후대 정도였으며 명주의 김순식은 여전히 독립 제후 수준의 권력을 누렸다. 게다가 자신의 후계자들까지 씨를 말려버렸으니[42] 이쯤되면 궁예의 목적이 순수하게 왕권 강화에 있었긴 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정비야 그렇다 쳐도 후계자인 '''적장자들까지 죽여야 할 정도의 위협에 시달리는 궁예 정권이 과연 민중의 지지를 제대로 얻기는 했을지도 의문'''이다. 정당한 어린 태자(혹은 왕)을 살해한 왕 치고 민심이 고운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 폭군 논쟁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이 있는데, 바로 '업적이 있으니' 혹은 '국가를 이룰 정도의 능력을 보이고 추종자들을 모을 수 있었으니', '죽은 후에도 추종자들이 있었으니', 또 '왕조를 창업한 군주'이니 무조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업적 있음 = 무조건 폭군 아님이 아니다'''. 아무리 업적이 있어도 통치의 방식이 폭압적이라면 충분히 폭군의 범주에 들어간다. 한나라 고조, 신라 신문왕, 고려 광종, 명나라 태조, 조선 태종처럼 강력한 숙청을 동반한 급진적 왕권 강화책을 쓰는 군주 모두가 폭군은 아니지만, 이들이 폭군으로 불리지 않거나 재평가를 받는 것은 적어도 민중에 해당되는 피지배층에게는 크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그러한 숙청이 결과적으로 국가의 안정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태조 주원장의 경우, 한고조 유방의 경우와는 달리 지나친 숙청 정책으로 오늘날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가 황제와 명황조의 태조로 있었던 명나라 황조 기간 동안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고, 폭군이라는 많은 비판을 엄연히 받고 있다. 그리고 고려 광종의 경우도 재위 기간 동안에 벌어진 대숙청으로 인해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여기던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가 고려의 황제중 한 명으로 대접받던 고려시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광종 당시에 살았던 신료이자, 문종때의 '해동공자'로 불린 최충과 더불어 고려 전기 최대의 대학자이자 대정치가였던 최승로와 고려 후기와 말기 최고의 대유학자이자, 대정치가였고, 목은 이색의 스승이였던 익제 이제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반면 방금 위에서 언급된 군주들과 달리 딱히 대숙청, 학살 같은 걸 하지 않고 그저 백성들을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가혹하게 부려 먹기만한 수양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폭군이다. 게다가 죽은 후에도 추종자들이 있었으니 무조건 폭군이 아니라는 논리는 혁명 직후에도 몇달동안 세쿠리타트가 저항한 루마니아차우셰스쿠,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 공산정권하에서 직접적인 격하 운동까지 벌어졌는데도 추종자들이 많았던 스탈린[43], 아예 전 인류 공공의 적으로 공인받고도 추종자들이 날뛰는 히틀러문화대혁명을 비롯한 수많은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고도 지금까지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되고 신격화되는 모택동 같은 사례들에 비춰보면 설득력을 잃는다.
그런데 궁예는 매우 직접적으로 민중의 삶에 너무나도 큰 피해를 끼쳤다. 바로 그가 추진한 '''철원 천도''' 때문이다. 애초에 일부에서 제기하는 대로 민본 사상과 애민 정신을 가진 군주였다면 구태여 철원 같은 말도 안 되는 입지에 백성들을 몰아 넣으면서까지 천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수도 건설을 강행하면 물론 호족들이 물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면서 왕권이 반사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징수당하고, 또 호족들과 달리 직접 수도 건설 공사에 동원되어 고통받는 것은 일반 민중들이다. 게다가 철원 천도는 그냥 천도도 아니고, '''이제 막 건설한 송악을 간단히 버리고''' 허허 벌판에 신도시를 지어 강행한, 역사상 보기 드문 사례였다. 스케일의 차이일 뿐이지 '''수양제의 낙양 건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막장 정책이다'''. 당연히 호족을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필연적으로 민간에 대한 수탈과 과중한 부역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44] 종교 탄압 역시 반론의 여지가 없는 폭압정치의 사례다.
궁예가 도주할 때 우호적인 설화가 많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도 철원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 한탄강 수운에 의한 물자 공급이 어려운 철원에서는 값이 급등했는데, 그렇다면 철원에 쌀을 공급했던 철원 근교의 지주나 농민들은 상당한 이익을 보았을 것이며 이들은 궁예에게 호의적이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또한 정변의 수장 왕건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기도 남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양과 평안남도 남부 지역의 옛 고구려 지역의 패서계 호족의 맹주였으며 옛 수도 송악을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니 그가 집권하면 철원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뻔한 이치다. 전근대 관점에서는[45] 도시로서 폐급이라 할만한 입지인 철원이 수도 노릇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궁예라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고, 그 폐급 입지는 궁예의 몰락을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오히려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궁예는 최소한 자신의 절대 권력 수립을 위해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공포 정치를 펴다가 실패한 임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나 그 행동들을 보면 개별적으로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언정 전체적인 틀에서 봤을때는 모순이 발견되는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즉 궁예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아예 정신을 놔버렸다'''[46]'''는 설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이다.''' 공포 정치를 자행한 시점에서 폭군의 요소는 충분하며, 민중의 삶에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친 철원 천도에 이르면 빼도 박도 못하고 폭군이다. 다만 수양제, 해릉양왕, 연산군 급의 톱클래스 폭군이 아니고 다소간 개인적 능력을 재평가할 여지가 있을 뿐이다. 사실 능력으로 폭군 여부를 따지자면 수양제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시절에는 남진 평정에 참여했고 끝끝내 대운하를 완성시키는 등 능력은 꽤 준수했던 사람이니 폭군에서 빠져야 한다. 한 가지 정상참작을 하자면 궁예의 경우는 당시 신라 말기는 급격히 몰락해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궁예 역시 한쪽 눈을 잃었다는 점과 무리한 왕권 전제화에 대해서도 내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될 부분은 참작이 된다.
또 하나 궁예에 대한 변호 논리 중 하나는, 왕조를 개창한 창업 군주는 난세속에서 갖은 고초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에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고, 또 마음이 매우 굳세지는 이유로 폭군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가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중국의 수양제의 경우를 들면, 그는 아버지 수문제와 더불어 사실상 수나라의 창업 황제였지만 제위 등극 후 폭정을 저질러 나라와 수나라 황조와 자신을 망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양제의 경우, 그가 황제로 즉위했을때, 이미 수나라는 통일이 다 된 상태였고, 수양제는 뒤를 이어 수성을 해야할 판국에 되려 폭정과 전쟁을 벌인 통에 처참히 멸망했으나 궁예의 경우는 아직 통일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내전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궁예와 비교되는 인물은 중국의 경우, 진나라 말기의 항우와 남북조 시대의 북조 전진의 황제 부견과 남조 양무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지도자들도 다들 초기에 나름 잘나갔다가 시간이 갈수록 실정을 저질러 끝내 망했던 인물들이라고 보면 된다. 직언을 듣지 않았다는 면에서도 꽤나 비슷했다. 또한 '항우'의 경우는 궁예보다 군사적 재능이 훨씬 탁월했으나, 대신에 궁예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부견의 경우는 궁예가 나주 전투에서 승리해 통일에 근접했던 것과 달리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비수대전에서의 엄청난 실책을 보여 대패해 몰락한 것을 보면 이는 견훤이 고창 전투에서 대패해서 몰락한 것과 비슷해서 부견의 경우는 궁예보단 견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양무제'의 경우가 궁예랑 비슷한 케이스에 근접하는데 둘 다 불교를 혹신했고, 실정을 했을때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다만, 양무제는 항우나 수양제, 궁예 같은 폭정을 저지른 폭군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인자한 성군이었지만 지나친 불교에 대한 혹신과 이로 인한 불교계의 극심한 부패, 그리고 지나치게 어질기만 한 정치로 망한 케이스로 소위 '인자한 창업 암군' 스타일이지, 항우 ,수양제, 궁예 같은 '창업형 폭군' 스타일은 아니였다.
또 비록 당황조의 창업 군주는 아니지만, 원래 황제가 될 처지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황제가 되어 사실상 창업 황제의 성격이 강한, 우리에게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너무나 유명한 당현종의 경우, 정변을 일으켜 당중종의 황후인 위황후와 딸인 안락공주를 제거한 후 제위에 올라 이후 군사를 일으켜 태평공주를 제거해 측천무후 사후,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던 여성권력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이후 재위 전반과 중반까지는 개원의 치로 불리는 눈부신 선정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중 하나를 구가했지만 재위 후반에 초심을 잃고 정사를 멀리하고 양귀비 같은 총비와 간신들에게 놀아나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결국 안록산의 대규모 반란으로 민심을 잃어 아들인 당숙종에게 황위를 빼았기고, 심지어 그 이후 아들인 숙종에게 시해당했다는 의혹까지 강하게 받고 있다.
즉 궁예 같이 초심을 잃어 망한 창업군주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창업 군주는 위에서 이야기된 이유들 때문에 무조건 어질고 유능하고, 절대 무능해지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음을 잘 알 수 있다.[47]

5. 평가



5.1. 조선시대의 평가


실제로 고려사는 초기에 이제현의 사략과 최승로의 논평을 따르는데 궁예의 폭군설은 사실 조선 왕조 사관의 기록보단 이제현의 논평이 결정타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궁예를 섬겼는데 그처럼 시기가 많고 포악한 임금이 삼한(三韓) 땅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 것은 사실 태조의 공이었다.

고려사이제현 논평

이제현은 아예 3분의 2를 차지한 것을 고려 태조에게 몰빵할 정도로 매우 혹독한 평을 썼다. 그냥 황제에 오를 때 아무 것도 안하고 폭군 놀이만 했다는 것이다. 정작 조선 왕조 사관들이 직접 고려사를 새로 쓴 《동국통감》은 이런 말이 나온다.

궁예는 신라의 유얼(遺孼)로서 종국(宗國)에서 버림을 당하고 치류(緇流, 승려)에 자신을 의탁하였다가, 뭇 도적 가운데서 우뚝 일어나 흑양(黑壤, 철원)을 몰래 점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일컬으면서, 이윽고 삼한(三韓)의 3분의 2를 차지하였습니다.

'''《동국통감》 후고구려 궁예 평'''

이쪽은 《삼국사기》 초기 궁예의 이야기를 대거 차용했는데, 도적치고는 우뚝 일어났다는 것이다. 단순한 초적이나 반란군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조선 왕조 사관들은 왕건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그것이 궁예와 다를 것이 없다는 논평까지 내놓았다.

태봉(泰封)은 스스로 미륵(彌勒)이라 일컬었으나 자신도 보존하지 못하였음을 고려 태조가 눈으로 직접 본 바이니, 귀감(龜鑑)을 삼았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화복(禍福)의 말을 두려워해서 부처 믿기를 이미 돈독히 하였고 부처 받들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다가 못하여 또 그 말을 듣고 글에 써서 자손에게까지 가르쳐 알린단 말입니까?

'''《동국통감》 고려 태조 훈요 10조 평'''

이미 왕건-궁예 대등론을 다름 아닌 조선 왕조가 제기했고, 이미 궁예의 재평가가 조선 왕조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왕건이 조선 왕조 직전 왕조의 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실제로 만부교 사건, 개태사 건립 문제 등등 중간 중간 비판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궁예와 왕건의 엇갈린 평에 의문을 제기했고 왕건도 본시 태봉의 신하라는 말까지 썼다. 결과적으로 궁예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난 많은 이야기들은 불자들보단 오히려 유학자들에게 주로 이야기가 된다.
각설하고 고려 광종 시절 노비안검법과거제에 반발한 원로들 중 궁예를 쫓아낸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는 점에서 궁예 역시 광종처럼 호족들간 기득권 싸움을 치열하게 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대신 광종과 달리 방법을 치밀하게 짠 흔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또 궁예의 경우 광종과 달리 나라가 분열된 시기로 남쪽의 견훤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호족공신들의 대대적인 숙청은 어리석다밖에 할 수 없는 문제이다. 토사구팽으로 유명한 한고조 유방의 경우도 한신,팽월,영포와 같은 지방 제후왕들의 대규모 숙청은 항우와의 대결에서 승리해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 단행한 일이었고, 명태조 주원장의 경우도 공신들의 대규모 숙청은 당연히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 단행했다는 점에서 궁예의 지금 이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오히려 조선 왕조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견훤에 대한 평은 더 안좋아진다. 《삼국유사》에서는 견훤이 이전보다 재평가되나 《동국통감》에선 견훤에 대해 훨씬 더 악평이 쏟아진다.

천도(天道)는 되돌려주기를 좋아합니다.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은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하였고, 안경서(安慶緖)·사조의(史朝義)는 아들로서 아비를 배반하였으니, 그 인과에 따른 대갚음이 또한 명명백백하지 않습니까? 견훤은 시골에서 일어나 참람된 칭호를 몰래 차지하여 자기 나라 보기를 원수와 같이 흘겨보고 씹어대며 으르렁거리기를 멈추지 않다가, 하루 아침에 포석정(鮑石亭)에 들어가 흉악한 반역을 크게 자행하여 자녀(子女)와 보배로운 물건들을 죄다 빼앗아 갔으니, 천지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견훤이 이미 뜻을 이루게 되어서는 교만하고 포악함이 날로 심하여 이웃 나라를 침범하고 백성들을 몹시 괴롭혔으며, 수 십 년 동안이나 전쟁을 일삼고 재앙을 일으켜 죄악을 천지에 가득 쌓았으니, 하늘이 노하고 사람들이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부자 사이에 사랑하고 미워함이 고르지 못하여 소장(蕭墻)의 환란을 빚어내게 되었으며, 마침내 몸을 숨기고 떠돌아다니다가 울분 끝에 죽게 되었으니, 생각컨대 이러한 아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식이 있게 됨은 가법(家法)에서 유래된 바 오랜 것입니다.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방탕한 사람에게 화를 주어 되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천도를 어찌 피하겠습니까?

'''《동국통감》 고려 태조 견훤 논평'''

동국통감》에선 뭇도적에 3분의 2를 고려 태조인 왕건이 아닌 궁예가 했다는 논평과 달리 여긴 아예 견훤을 반역자로 몰았고 좋은 평이 단 한 개도 없다. 아예 팔공산 전투의 승리를 묻어버리면서 했던 논평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이야기보다 평이 더 안 좋다.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일컬었다는 궁예의 평과는 달리 견훤은 시골에서 일어나 참람된 칭호를 몰래 차지했다고 했다.
즉,《동국통감》 사관들이 보여준 조선 왕조 사관의 평은 왕건궁예 > 견훤이다.
철원 일대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궁예 왕은 쫓기어 삼방 골짜기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만한 곳이 없겠느냐?"고 물었으나, 스님이 말하기를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궁예 세력이 간단히 붕괴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철원 지방에서는 궁예가 강을 건나 도망갈 때 한탄했다면서 한탄강이란 이름이 붙었다거나 궁예가 군대를 이끌고 왕건의 군대와 대결하거나 산에 은거해서 싸웠다거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 안내까지 해줬다는 민간 전설도 있다. 실제로 궁예 사후 청주에서 잇달아 반 왕건 반란이 일어났고, 열렬한 궁예 지지자였던 명주의 김순식은 무려 10년이 넘도록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았을 정도였던 걸로 볼때 왕건의 쿠데타는 전체적인 지지를 받은 게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왕건의 고려 건국 후 일어난 반란들은 모두 친궁예 세력이였다는 점은 분명히 유념할 필요가 있는 사실이라 하겠다. 청주는 두말할 것도 없이 궁예 정권하에서 궁예의 가장 큰 친위세력이였고, 또 '명주'의 김순식은 애초에 자발적으로 궁예에게 '명주'를 넘긴 인물이고, 이후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에도 10년을 저항하면서 굴복하지 않을 정도로 역시 궁예에 충성하는 사람이였고, 왕건의 고려 건국후 후백제로 넘어간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공직의 경우도 모두 백제계 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공직의 경우 비록 백제계였지만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백제전문연구자중 한 명이고 견훤과 같은 문경시가 고향인 관계로 열렬한 견훤팬인 이도학씨가 쓴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에서도 나왔듯이 궁예는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는 과정에서 남쪽의 백제 지역과 신라 지역도 장악하면서 고구려 부흥의 기치만을 내걸어서는 백제와 신라 지역 호족들과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국명'을 바꾸었고, 또 패서 지역 고구려계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국명을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옛 백제계인 청주인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켰고, 또 청주인들을 중용해 관리에 임명한 만큼 정략적으로 청주인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백제계 주민들을 우대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왕건이 나라를 건국한 후 국호를 '고려'라 하고 패서 지역의 옛 고구려계 호족들을 중시하자, 이에 불만과 불안을 느껴 대거 '고려'에서 이탈했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또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을 중시했다고 해서 백제계와 신라계 사람들을 소홀히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왕건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왕건의 삼한통일을 예견한 도선의 경우 출생지가 옛 백제계인 전남 영암 출신이고, 왕건 다음의 고려 2대 황제로 등극한 혜종의 경우, 출생지가 옛 백제계 지역인 나주이고, 당연히 혜종의 어머니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옛 백제계 출신인 장화황후 오씨이고, 또 왕건의 훈요10조를 받아 적고, 이후 왕건이 사망시에 뒷일을 부탁한 박술희의 경우도 충남 당진군 면천면 출신으로 고려 시대에는 혜성군으로 불린 옛 백제계 출신이고, 왕건을 황제로 추대한 1등 공신 출신이고, 팔공산 전투에서 자신을 희생해 왕건을 살린 신숭겸의 경우도 옛 백제계인 전남 곡성 출신이고, 우리나라 봉건시대 최고의 점술과 예지력을 가진 신료인 최지몽도 도선대사와 마찬가지로 전남 영암 출신이였고, 고려 3대, 4대 황제인 정종광종을 낳은 신명순성왕후의 경우도 충주 출신의 옛 백제계 호족 유긍달의 딸이였다.
그리고 왕건은 혼인정책에서도 당연히 백제계와 신라계 호족들의 딸들도 고구려계 호족들의 딸들과 마찬가지로 아내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때 백제계 지역 호족들의 반란들이나 대규모 이탈은 기우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왕건의 고려 건국 직후 청주시 지역의 잇다른 반란과 나주시 지역과 충주시 지역을 제외한 백제계 호족들의 대거 이탈은 어쨌든 이들이 궁예 정권 시절 궁예에게 각별한 대접을 받았던 관계로 왕건의 고려 건국 직후 자신들이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해 왕건에게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로 투항해서 왕건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탄강 이야기의 경우,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크다는 의미의 순우리말 한, 여울 탄(灘)의 '큰 여울이 있는 강'이라는 뜻이다.

5.2. 현대의 평가 및 밈화


궁예가 꽤 능력있는 지도자이자 임금이었던 것만큼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특히 일개 떠돌이 승려라는 보잘 것 없는 신분에서 출발해 양길의 휘하에 들어갈 적에는 이미 그의 심복이 되어 장수로 이름을 떨쳤던 것을 보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 자체는 꽤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성공한 반란 이후에는, 으레 구 지배 체제에 대한 격하와 깎아내림이 뒤따르지만 왕건이 등극한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궁예는 "대왕 전주(大王前主)"[48]라고 일컬어지며 선각사 대사비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궁예를 추종한 잔존 세력의 비중이 왕건의 고려 정권 핵심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크기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초기까지도 궁예의 영향력이 꽤나 남아있었다라는 추론의 반증이 된다.
한편 내용이 얼마나 헛소리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경전 20권을 손수 쓰고 직접 공공연히 강설했다고 하니까, 적어도 그럴 듯한 글을 한문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필력은 물론 불교 관련 지식 역시 매우 풍부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궁예가 작성한 이 경전이 비판 받은 것이 궁예는 아미타계였으며 석총은 지장계파[49]였기 때문이라는 설 역시 존재한다. 석총은 궁예의 경전을 불쏘시개라고 깠던 가장 대표적인 승려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한국사학자들 대부분은 궁예가 독자적으로 지은 불교 경전은 궁예 자신의 황권 강화를 위한 '사이비 경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현대 한국 인터넷 상에선 궁예에 대한 인지도가 높으며, 이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묘사한 궁예 때문이다. 대머리애꾸눈의 조합에, 드라마에서 묘사된 궁예의 똘끼와 광기, 그리고 배우의 신들린듯한 연기가 시너지를 내면서 역대급 캐릭터가 탄생했기 때문.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사가트 같기도 하고 궁예의 초상이 이렇다 보니 낙서하기 굉장히 좋은 인상이다. 이 때문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 대선에 출마한 김길수 후보의 선거홍보사진에 괜히 애꾸 안대를 그려넣고 궁예라고 이름도 바꾸는 낙서를 자행하는 일이 잦았다.

6. 후일담


재미있게도, 궁예의 시대에는 자칭 미륵이었던 것이 어느 새인가 안성시에서 진짜 미륵으로 둔갑하여 고려 시대부터 지금까지 안성의 마을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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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경기도 안성의 궁예 미륵. *
또한 순천 김씨광산 이씨는 가문의 시조가 궁예의 후손이라고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다만 순천 김씨에서는 궁예가 신라 왕실 족보를 끌어쓴게 와전되었을 뿐 궁예와 순천 김씨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시조 김총과 궁예와의 관계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몇군데 있기도 하고.[50] 특히 순천 김씨는 그 유명한 김종서를 배출한 가문이다. 한 가지 더 아이러니한 건 김종서와 광산 이씨의 이선제는 고려사 편찬에 일익을 담당한 사람들이란 거다. 이게 사실이면 두 사람은 조상을 비하하는 사서 편찬에 관여한 셈. 이는 궁예가 어찌 되었든 신라의 왕족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 왕실과 집안의 혈통을 연관짓기 위함일 가능성도 있다.
경주 김씨의 경우는 대체로 《삼국사기김부식의 논평을 따라 신라 왕족과 경주 김씨의 한 사람으로 논하지만 결말은 폭군으로 본다. 본시 초기는 좋았으나 어릴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 말기에 이상하져 망했다고 한다.
철원 지방에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처음 옮겼을 때 눈에 보이는 돌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을 보고 왕조의 몰락을 직감했다는 설화[51]가 있다. 현무암 지대인 철원의 자연 지리적 특징과 태봉의 역사가 결합된 설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지역에서는 종종 "곰보 돌"로 부르는 모양이다.
이 외에도 어떤 사건에 대한 근거없는 추측 행위를 두고 궁예질이라는 표현이 온라인 상에서 쓰이고 있다. 궁예질을 줄여서 그냥 '궁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궁예주의' 이런 식이다.
최남선이 있는 풍악기유라는 책에 오늘날의 북한 강원도 세포군인 삼방협에 그의 왕릉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한 것은 기사 참조 *
태조 왕건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어린이들이 괜히 멀쩡한 스님 사진에 애꾸 안대를 그려대며 궁예라고 불렀고 이는 스트리트 파이터 2에도 영향을 끼쳐 똑같이 대머리에 애꾸눈사가트의 별명이 궁예가 되기도 했다.
농담 삼아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중2병 지도자라는 말도 듣는다. 애꾸눈이라거나 버려진 신라의 왕족이자 관심법이라는 '이능력'을 쓸 수 있다는 '설정', 기존의 사회체제에 반기를 들었고, 말년에는 타락한 행적 등 오늘날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중2병의 특징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그만큼 궁예라는 기묘한 인물이라는 얘기겠지만.

7. 창작물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역사 학습 만화 및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는 황제가 되고나서도 머리를 빡빡 민 모습으로 표현하는 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간혹, 황제가 되고 난 이후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모습으로 묘사되는 작품도 드물게 있다. 또한 맹꽁이 서당이나 Why 시리즈[52] 등 일부 학습만화에서처럼 마르고 비열해보이는 인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처럼 근엄차고 진지한 모습으로 나올 때도 있다. 태조 왕건이 아니더라도 궁예가 어떤 인물인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요즈음에는 상단의 대사가 재조명된 영향으로 태조 왕건에서 배우 김영철이 연기한 버전이 특히 부각되고 있는 중이다.

7.1. 태조 왕건




7.2. 영화


워낙 옛날 일이라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궁예가 등장하는 영화는 종종 있었다. 궁예가 등장하는 최초의 영상물은 1959년에 제작된 영화 <왕자 미륵>으로, 신라 말기에 궁예가 어지러운 난세를 평정하고 태봉을 건국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당대의 스타였던 방수일과 도금봉이 주연을 맡았다. 다만 작중에서는 궁예라는 이름 대신에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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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작인 영화 <태조 왕건>에서도 등장하는데, 작중에서는 간신배 및 간신배와 간통을 하던 왕비의 꾀임에 놀아나다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주인공인 왕건은 궁예를 죽인 간신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고려를 건국한다.

7.3. 천년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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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커스텀 플레이시 고려군. 고려 미션에서는 역사대로 왕건의 반란 뒤 죽는다. 미륵염화술이라는 사이오닉 스톰 비슷한 불기술을 날린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7.4.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


미션 모드에서 왕건이 독립하면서 3파전 구도로 흘러가다 왕건, 견훤을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한다.

7.5. 영걸전 시리즈


후고구려의 초대 왕.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변란을 피해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후의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 투신하여 세력을 키워 자립하였으나, 양길을 물리치고 후고구려를 건국했으나 폭정에 지친 신하들의 내란으로 죽임을 당한다. - 열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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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신성대왕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일러스트는 태조 왕건의 김영철을 다분히 의식한 듯. 병과는 무인계. 유저들은 궁예가 나온다면 마왕계 병종이어야 하지 않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능력치는 무력 88, 지력 45, 통솔 86, 민첩 84, 행운 85. 본래 플레이어블로 등장할 예정이었다가 제작진이 한국사 고대무장이 출시되면 능력치 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결국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다.
데이터상의 장수 특성은 방해계 책략 강화/상태이상 공격으로 굉장히 좋지 않았다. 이렇게 나와봤자 위연이나 우영 같은 성능이 더 좋은 무인계 장수에 밀려서 섬멸전이나 경쟁전 등 여러 콘텐츠에서 고인 확정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건 극초창기에 이득규 개발자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고 만약 정식 등장했다면 항우 때 그랬던 것처럼[53] 좋은 전용 특성으로 바뀌어 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7.6. 기타 소설


신채호는 '일목대왕[54]의 철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는 자주적인 일목 대왕과 부패한 권신들간의 대립을 다루었다고 한다.
김성한소설 '왕건'에서는 원래 이름은 '돌'이었으나, 동네사람들이 애꾸인 돌이를 꾸애라고 놀리다 결국 이름이 궁예가 되었다고 묘사된다. 궁예라는 이름이 멸칭이다보니 소설에선 궁예를 선종이라고 칭한다. 여기서는 왕비 강씨를 그냥 죽이지 않고 달군 쇠로 강비의 을 찔러 '''입으로 나오게 한다.''' 하지만 이게 원래 궁예의 모습은 아니고, 궁예가 사냥을 하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후 인간이 달라졌다는 식으로 묘사되며, 이는 태조 왕건에서 이 내용을 차용해 궁예가 머리를 다친 까닭을 암살 시도로 바꿨다.
머리를 다친 뒤에도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면 사리에 맞게 판단한다. 머리를 다치기 전의 궁예는 난세를 평정할 자질이 있는 비범한 영웅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다. 작중에서 왕건의 생각을 빌려 궁예가 사람과 전쟁 모두를 다룰 줄 아는 군주였고, 그가 죽은 후 사람을 다루는 재능은 자신(왕건)이, 전쟁을 다루는 재능은 견훤이 각각 가져갔다고 하여 사실상 궁예를 후삼국기 최고의 인걸로 묘사했다. 간신 은부를 총애하는 등 가끔 엇나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를 다치기 전에는 뛰어난 군주였던 것으로 묘사된다. 미륵도 원래 선종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머리를 다친 후 정신줄을 놓으면서 자칭 미륵을 하게 된 것.
강비는 왕건의 어린 시절 첫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던 사이지만 정략 결혼(선종이 강비를 요구했다)으로 궁예에게 간 것으로 나온다. 역시 태조 왕건에서도 보이는 장면. 다만 드라마상에서는 민간 전승에서 빌려온 설정이라고 나온다. 강비가 죽기 전에는 비록 사랑하는 이를 뺏은 사람일지언정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난세를 헤칠 영웅이었기에 왕건이 선종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의형대의 아녀자 학살[55]및 강비와 태자들의 끔찍한 죽음이 발생하고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결국 왕건은 정변을 일으킨다.
궁예가 정신병에 걸리고, 강비가 원래 왕건의 첫사랑이었으며, 선종이 왕건과는 어린시절부터 알던사이였다던가 하는 등 태조 왕건과 이 소설간의 유사한 부분이 있다. 물론 큰 틀만 비슷할뿐 전개와 캐릭터성 등은 완전히 다르다. 궁예의 광증 묘사도 서로 큰 차이가 있는데, 이 소설의 궁예는 광기를 부릴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으며, 이 때 뭔 짓을 했는지 기억도 제대로 못하는 심신미약자로 묘사된다. 반대로 태조 왕건의 궁예는 판단 능력은 있긴하지만 그 기준이 일반인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또한 인물의 성향 자체가 폭력적으로 변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56]'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기존의 인식과 달리 용감하고 정의로우며 카리스마 있는 영웅이지만, 자신과 시대의 한계를 못 이겨 몰락해가는 비운의 인물이다.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태봉의 역대 국왕'''
신라 51대 진성여왕/고려 건국

'''1대 미륵불 궁예'''

태봉 멸망/고려 건국
초대 고려 태조
[1] 왕건에게 밀려나서 묘호와 시호가 없다. 다만 재위 시절의 자칭만 있다.[2] 국호가 마진이었을 때 사용하였다.[3]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꾸면서 사용하였다.[4] 국호가 태봉이었을 때 사용하였다. 참고로 후백제견훤이 사용한 연호 정개와는 한자가 다르다.[5] 신라 왕족 출신이 맞는 경우.[6] 여담으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문성왕의 사촌 동생인 김예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이 인물이 궁예와 동일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항목 참조.[7] 왕건견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성씨 사용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고려.[8] 중국 10대 왕조 중 하나인 남당의 역사를 기록한 남당서(南唐書)의 기록. 이름의 표기는 躬乂로 다르지만 왕건 즉위기사에 등장하므로 몰락할 때까지 대외적으로 고씨를 칭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당대 중국인들이 고구려=고려를 같은 국가로 생각하여 궁예를 고씨(高氏)로 인식한 것에 불과하다.[9] 보통 강비로 알려져 있다.[10] 고려사에 의하면 상인 왕창근이 궁예에게 고경참문(古鏡讖文)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거울을 바쳤다.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극을 암시하는 명문이다. 이 내용을 토대로 궁예를 축(丑)년생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참고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과 동갑내기인 867년생으로 설정했다.[11] 음력 6월 14일, 쿠데타가 일어난 뒤 도망가다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 죽었다고 한다.[12] 양력 7월 24일[13] 오늘날의 정신건강의학으로 볼 때, 왕위에 오르면서 편집성 성격장애와 같은 정신병이 발병하였고 망상, 환각, 의심 등의 행동 이상이 악화되면서 무자비한 폭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평화신문 (2015.09.13) : (아! 어쩌나) 310. 현대판 궁예[14] 당시 단오날에 아기가 태어난 것은 매우 불길한 일이라 여겼다고 한다. 맹상군 항목 참조.[15] 신생아에서 비정상적으로 이가 빨리 나는 것은 비교적 드물지만, '''출생 시 치아가 이미 존재하는 선천치 (natal teeth)'''와 출생 후 1개월 이내에 나는 신생치 (neonatal teeth)가 있다. 즉 선천치는 영유아시기의 치아 문제 중 하나일 뿐 불길함과는 당연히 전혀 관계가 없다. 아주대 치과병원 (2012.02.09)[16] 이 점 때문에 궁예는 애꾸눈인 인물들 중 가장 어릴 때 애꾸가 된 사례로 기록.[17] 또는 흥교사라는 얘기도 있다. 세달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의 배경이기도 했지만 후삼국시대 이후 어느 시점에 폐사돼 사라졌는데,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2012년 영월군에서 세달사터를 발견했으나, 그 외에 경기도 개풍군, 경상북도 영주시 등지에 있었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일부러 왕건과 궁예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개풍군 설을 채택했다.[18] 누구한테 받은 게 아니다. 《삼국사기》 궁예전 원문에 '''自號'''善宗이라고 되어 있다.[19] 산가지 4개를 떨어트려 그것이 王자를 그렸다거나, 왕 자가 씌어진 자갈을 떨어뜨렸다는 버전도 있다.[20] 궁예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세달사가 있는 곳이다. 일종의 금의환향?[21] 신라 38대 원성왕과의 왕위계승전에서 패한 뒤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 명주에 내려가 '명주군왕'(溟州郡王)을 자처했다.[22] 김주원 이후 그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내전 규모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고,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도 반란을 일으키다가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김주원의 자손들은 명주를 통치하고 있었다.[23] 후고구려라는 명칭은 먼저의 고려김부식이 살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궁예가 살던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다.[24] 마하를 큰 나라로, 진단을 동방으로 해석하면 동방의 큰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 태조 왕건에서 채택한 가장 유명한 설이다.[25] 훗날 고려 왕조는 이 궁예에 대한 반동으로 성립된 나라기 때문에 일단 국호에 있어서는 객관성을 일부 포기하더라도 삼국 중 하나인 고려라는 이름을 선택했지만, 과거 통일신라 정권이 만든 삼한일통 논리를 계승해서 삼국 통일 의식을 포괄하기 위해 애썼다. 그 흔적은 국가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나 또다른 시각에서 작성된 삼국유사에서도 공통적으로 신라가 일단 삼한을 통일했음을 인정하고, 그것이 도중에 무너지자 고려가 다시 삼한을 통일했다는 논조에서 찾을 수 있다.[26] 공교롭게도, 강력한 중앙 집권으로부터 기반하는 엄격한 법치를 이상향으로 삼던 진시황도 수덕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한다.[27] 참고로 석총은 일개 승려 A 수준이 아니라 당대 미륵 신앙의 총본산인 법상종의 이름 높은 고승이었다.[28] 상기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이 내용을 차용해 궁예가 석가모니를 '''자신의 자리를 훔친 도적'''이라고 손수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궁예 역을 맡은 배우 김영철은 훗날 같은 작가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 역을 맡게 되는데, 말년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불상 앞에 절을 올리는 장면과 오버랩된다.[29] 한탄강이 남한에 몇 군데 없는 래프팅(급류타기)의 명소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폭포와 절벽으로 이루어진 구간도 많는데, 그러면 수상 운송은 못 한다. 게다가 내륙이라 추워서 얼음이 일찍 얼고 늦게 풀린다.[30] 영남지역이 아니라 통일신라의 영역, 즉 후백제를 포함한 후삼국 전체를 의미한다.[31] 삼방협이라는 지명으로 유명한 곳. 오늘날의 북한 강원도 세포군이다.[32] 어느쪽으로 보나 백성들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확인되는데 이는 센고쿠 시대에서 패전한 다이묘 및 병사들을 사냥하러 다닌 '''패망한 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추격해오는 적이 아닌 전황을 관망하던 일반 백성이다'''라는 일본 농민들의 사례를 떠올리게 되는 사례다.[33] 덧붙여 위서 환단고기에서는 궁예가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근거는 없다.'''[34] 여기서 더 웃긴 점은, 고려 왕실이 자기 조상이라 말한 당나라 황실도, '''자기들이 노자의 후손이라고 뻥을 쳤다는 것'''이다. 당나라 황실의 성은 이씨였는데, '노자'로 알려진 전설상의 인물도 이씨라고 알려져서이다.[35] 추만호, 「궁예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역사와 역사교육》 제2호, 1997.[36] 趙仁成, 弓裔의 出生과 成長, 《東亞硏究》 제17집, 1989.[37] 가령 우리는 산 위에 진을 쳐서 가정 전투를 말아먹고, 또 촉의 북벌 자체를 망쳐버린 마속의 행위가 비합리적임은 다 안다. 그러나 그런 비합리적인 일을 마속이 실제로 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38] 유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궁예는 이 사람에게 출생의 비밀을 들은 후에도 '''어머니'''라고 부른다. 애초에 궁예의 어머니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장보고의 딸 역시 신라 기준으로는 평민이었으므로 별도의 유모를 고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지 의문이다.[39] 일단 이 여기까지는 유리명왕의 것을 차용한 것으로 생각된다.[40] 이에 비해 단종단군, 공민왕과 더불어 우리나라 역대 왕조시대의 군주들중 민간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많이 신으로 숭배되는 임금이라는걸 감안하면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누굴 지지했는지 잘 알 수 있다.[41] 자의적 법 집행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암살이나 역모와 같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적어도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경감시킬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무고를 입증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적어도 누군가의 제보 -그것이 참소이든 아니든- 나 그간의 행적과 같은 나름의 증거라도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인 숙청 방식인데 관심법에 의한 숙청은 그야말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권력층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스트레스는 비할바가 못 된다.[42] 단편적으로만 기록이 남은 막내아들 '순백'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심지어 후사야 다시 보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비가 죽은 915년 궁예의 나이는 이미 46세다(869년설을 따를 경우. 857년설의 경우 58세) 갓난아기를 후계자로 육성시킬 궁예의 수명 자체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성숙한정비 소생의 아들 둘을 죽여버린 것이다. 적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점에서 태자를 핍박하긴 했지만 끝내 죽이진 않은 광종과 비교된다.[43] 심지어 2021년 오늘날 러시아에서도 스탈린은 러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3위 안에 들어갈 만큼 추앙을 받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이 비록 잔인하고 난폭하기는 했으나,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물리쳐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둘로 나눠 지배했던 초강대국이었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44] 수백년 후인 조선시대 말기, 흥선대원군경복궁 재건의 경우 처음에야 지배층의 헌금이 주였지만 결국에는 당백전과 도성 통행세 등 갖은 무리수로 이어졌다. 도시도 아니고 그저 궁궐이었는데도 말이다.[45] 현대의 관점으로 볼때도 철원은 도시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지 오래다. 다만 이건 휴전선이 통과하는 문제로 생긴 일이라고 봐야한다. 1940년대만 하여도 38선 이북 강원도에서 도시기능을 수행하는 곳은 철원 한 곳 뿐이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로동당 강원도당도 철원에 있었다.[46] 납득할 수 없는 궁예의 이상성격에 드라마는 흥미를 더해가지만, 불행히도 이런 궁예의 이상성격은 편집성 인격장애 (타인의 행동이 악의에 찬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등 불신과 의심을 일삼는 인격장애) 의 한 단면이다. 국민일보 (2001.05.22.) : (정석환의 상담 칼럼) '궁예같은 남편의 폭언·폭력·의처증 두려워' 中에서.[47]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수 있는데 3세계의 독재자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의 영웅이었으나 나라가 독립하고 독립운동이란 명분으로 권력을 잡은뒤 독재자로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장 한국 현대사만 봐도 이승만, 김일성은 당대 독립운동의 아이콘이었지만 둘다 철저하게 독재를 했다.[48] 즉 당시 국왕('''대왕''')인 왕건 즉위 이'''전'''의 군'''주'''라는 의미.[49] 석총의 경우, 드라마 태조왕건에서는 법상종의 고승으로 나온다.[50] 김총은 후백제의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항목 참조.[51] 정확히는 백성들이 물러나라고 난리치자 "한탄강가의 돌에 좀이 슬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다음날 한탄강 주변에 가 봤더니 진짜로 돌에 좀이 슬어 있었고, 이것을 궁예에게 보여주며 물러나라고 하자 궁예가 "내 운수가 다했구나"라며 탄식하며 성을 버리고 나갔다는 이야기.[52] 여기서 등장한 궁예는 상술된 것처럼 즉위 후에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나오는 케이스.[53] 항우는 정식출시 이전 원래 데이터에서는 기마공격 강화 무시, 일기당천이었다.[54] 말 그대로 외눈(一目)대왕.[55] 간신 은부가 정신나간 궁예을 조종해 명을 내렸고, 의형대 병사(사실상 은부의 부하들)들이 궁중 감옥에 갖혀있던 젊은 여성들을 끌어다 윤간한 뒤 달군 쇠몽둥이로 음부를 지져 잔혹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상황을 확인하러온 신숭겸은 의형대를 모조리 포박했고, 사태를 목격한 순찰대원들의 증언을 듣자 분노한 부하들은 의형대 병사들을 모조리 척살해버린다.[56] 제목과 달리 마의태자는 소설의 후반부에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얽혀 잠깐만 나오고, 실제 주인공은 궁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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