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윈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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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윈(ne win, 1911년 5월 24일 ~ 2002년 12월 5일). 중국계 화교 집안 출신이다.
미얀마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독재자로, 아웅 산 및 우 누와 함께 '30인의 동지' 주축 멤버였으나, 미얀마를 고립된 빈곤국가로 만든 장본인으로도 평가받는다.
2. 생애
1911년 미얀마의 수도 랑군에서 북쪽으로 320km 떨어진 빠웅데일(Paungdale) 지방의 슈 마웅(Shu Maung)에서 태어났다. 고등교육을 받은 중국계 화교 집안 출신이었다.
1929년 랑군 대학에 입학해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 2년간 생물학을 공부하였으나, 1931년 시험에 떨어지고 제적처분을 받았다. 이후 훗날 미얀마의 국부가 되는 아웅 산 그리고 우누[1] 가 활동하던 민족주의단체 버마인협회(Dobama Asiayone)에 가입하였다. 1941년에 버마인협회 내의 사회주의 분파의 일원이 되었고, 이른바 독립운동의 중요 멤버인 30명의 동지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후에 아웅산과 함께 버마독립군(BIA)를 결성하였다. 1942년 초 일본군과 버마독립군은 영국군을 몰아내고 버마에 입성하게 되는데, 이 때 네윈은 영국군의 저항선 뒤에서 레지스탕스를 조직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1949년 2월 1일부터는 미얀마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어서 군을 이끌게 된다.
네윈은 1958년 10월 28일 우 누 총리로부터 내각의 총리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이 때 AFPFL이 두 파당으로 나뉘고, 우 누는 간신히 의회의 불신임 안을 막아낸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네윈은 ‘네윈 임시내각’이라고 불린 기간에 정권을 복원시켰고, 1960년 2월 6일에 치뤄진 총선거에 승리한 우 누에게 1960년 4월 4일에 권력을 이양하게 하게 된다.
그러나 우 누 정부에게 권력을 맡기고 고작 2년도 되지 않은 1962년 3월 2일 네윈은 쿠데타를 일으켜 미얀마의 권력을 잡게 되었고, 이 쿠데타는 미얀마 군부가 무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군부독재가 펼쳐지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미얀마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첫 시작이었다.[2] 쿠데타를 성공한 네 윈은 연방혁명위원회(URC)의 최고의장에 취임하고 스스로 총리가 되었다. 또한 네윈은 '''“의회민주주의는 버마에 맞지 않는다”''' '''“새로운 정부는 헌법을 유예하고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반발하는 시위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랑군 대학에서 1962년 7월 시위가 발생했지만 군대가 출동하며 강경 진압에 나서 진압했으며, 시위를 하는 군중에 실탄을 발포하거나 학생연합빌딩을 폐쇄하기도 했다. 한 번은 오후 8시 쯤에 전국라디오 방송을 통해 5분 동안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만일 이런 시위가 나에 대한 도전이라면,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답해 주겠다”고 거의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2년 7월 31일 네 윈은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을 돌아다녔는데 왜 돌아다녔는지는 말이 많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네 윈이 자신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겠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후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1964년까지 미얀마 전국의 모든 대학이 2년 동안 폐쇄되었다.
먼저 그는 반외세주의 이념을 내세워 버마족을 우대하고 소수민족을 더 차별시켰으며, 친일/친영분자를 색출해내 숙청하고 외국과 교류를 멀리한다고 선언했다.
또 경제를 국유화시키고 외국자본의 진출을 막아 경제적 자급자족정책을 추구했지만 이것은 미얀마 경제를 세계경제에서 고립시킨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지하경제와 암시장이 활성화되었고 밀수가 횡행하며 경제가 점점 나락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미얀마 경제는 이러한 암시장이 사실상 미얀마의 실제 경제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리하여 경제적 문제와 폭압정치로 미얀마의 지식인과 기술자, 그리고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화교 및 인도인 상인들이 미얀마를 탈출했다.
네 윈 정부가 추진하던 자립 경제정책 중에는 외국인들을 쫓아내고, 외국인들이 3일 이상은 체류하지 못하게 막는 정책까지 있었는데, 이 정책 때문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미얀마 정부는 1972년 이후에는 외국인 체류를 1주일로 완화하는 정책을 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였고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는 정책이였다. 정권이 망하기 3년전에는 화폐 개혁을 벌여서 15, 35, 75 키야트 지폐를 만들더니 사용정지 시키고 45, 90 키야트짜리 화폐를 찍어냈다. 그 개념이 엄청나게 아스트랄한지라 미얀마 경제는 곧바로 혼란에 빠졌다. 결국 1987년 버마는 유엔으로부터 '세계 최빈국'으로 지정되었고, 이듬해 8888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8888 항쟁이 엄청나게 격렬해지자 그는 우 산유 대통령과 함께 1988년 7월 23일 당 의장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사임하기 직전에 한 연설을 국회에서 꽤나 공격적인 말투로 했다. 네 윈은 '''"만약 시위가 계속된다면 군대를 부를 수도 있으며 나는 확신하는데, 만약 군대가 발포한다면 허공을 향해 쏘지는 않을 것이며, 정확하게 사람을 겨냥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후임 셰인 르 윈 집권 후 실제로 미얀마 군부는 시위대에 총을 쏘아 수많은 사람들이 사살되거나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는데 그 숫자가 무려 3000명에 달했다. 또한 1988년 8월 8일부터 12일까지 미얀마 전국에서 군부에 의해서 미얀마인들이 사살당해서 네윈의 사임 연설이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서방 언론에 보도돼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1988년 9월 18일,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 의장인 소 마웅 장군이 권력을 잡아 계속해서 시위대를 탄압했고 결국 8888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가 물러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네윈이 실권을 잃고 허무하게 자택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원복의 가로세로 세계사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나오지만 현재 나오는 주장들을 보면 그가 사퇴를 한 이후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다가 2002년 3월 4일 네윈의 사위인 예 자우 윈(Aye Zaw Win)에 의한 계획된 군부의 쿠데타 음모가 있었는데, 이 쿠데타에는 그의 딸인 산다르 윈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네 윈과 산다르 윈은 2002년 9월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사위인 예 자우 윈과 그의 세 자녀들은 국가전복혐의로 사형이 언도되었지만 사형은 집행되지 않고 있으며, 미얀마 랑군에 있는 인세인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고 확인된다.
가택연금을 당한 네윈은 2002년 12월 5일 양곤에 있는 그의 호수주변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버마 언론과 군부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부고기사는 일부 버마어로 된 관변언론에서만 볼 수 있었을 뿐으로 통제되었다고 한다. 또한 네윈에게 국장은 치뤄지지 않았으며 네 윈의 정권 밑에서 일했던 관료들이나 대학 동료들이 급하게 만들어진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전부였으며 고작 30명 정도의 인원이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네 윈의 딸인 산드라 윈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가택연금이 해제되었고 그녀는 장례식을 마친 후 라잉 강(Hlaing River)에 네 윈의 화장된 재를 뿌렸다.
3. 기타
- 네윈의 출생일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어느 책에서는 네 윈이 1911년 5월 24일에 태어났다고 적혀 있으며, 마웅마웅 박사는 그의 저서 ‘버마와 네윈 장군’이란 책에서 네 윈의 출생일을 1911년 5월 14일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 정작 버마어로 쓰인 ’30인의 동지’라는 책에서는 네 윈의 생일을 1910년 7월 10일 적혀 있어서 현재까지도 헷갈린다고 한다.
- 네 윈은 하이난섬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그는 슈 마웅(Shu Maung)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실 네윈은 자신의 행운의 숫자를 9라고 믿었는데[3] 네윈은 8의 값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도 그에 맞춰 슈 마웅(Shu Maung)이라고 지었지만, 이게 군인에게 좋지 않다고 해서 이름을 네 윈으로 바꿨다고 한다.
- 퇴임한 후에도 배후에서 계속 군부와 정치에 간섭해서 네 윈은 미국에 의해 비판당하기도 했고, 세계에서 가장 질이 나쁜 독재자 순위에 오른 적도 있다.
- 네윈은 자신이 암살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또는 매스컴을 싫어해서 평생 미얀마 국민들 앞에 서는 공개석상에는 고작 2번 정도만 나왔다고 한다.
- 미얀마의 독립영웅인 아웅산과 비주류파로 분류되는 네 윈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 네윈은 여자관계가 복잡해 6번이나 결혼했는데 같은 여성 2명과 재혼을 반복하기도 했다고 한다.
- 이상우 기자는 <신동아> 1992년 6월호 기사에서 전두환이 1983년 당시 버마를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해외순방지로 삼은 이유로 '네윈의 섭정통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했다. 실제로 이즈음 전두환은 '88년 평화적 정권교체 연구'를 은밀히 진행하는 등, 퇴임 후 후계자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계속 유지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버마 순방을 강행했다가...
그녀는 이러한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사업가가 되어 미얀마의 호텔 체인과 병원, 통신, 나이트클럽까지 운영하며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러나 네윈이 물러나고 1990년대 말 남편과 아들 3형제의 쿠데타 모의가 탄로나고,[4] 2002년 네윈이 사망하면서 산다윈은 가택연금 상태로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봉쇄되었다. 이후 산다르 윈은 아웅산 수치처럼 랑군 시내 호숫가 자택에서 6년간 연금된 뒤 2008년에 풀려났다. 이러한 악행 때문에 산다르 윈은 ‘세계 최악의 독재자의 딸’로 불렸다. 기사
[1] 1907~1995. 미얀마의 전 총리이자 1대 대통령이다.[2] 이 쿠데타는 세계 언론에서는 피의 혁명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3] 실제로, 미얀마 사람들은 9를 가장 좋아하는데 숫자 9는 어떤 수를 곱하더라도 그 결과의 합은 반드시 9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4] 이들은 사병 조직을 양성해 훈련시켜 왔으며 30여 명의 경호원을 선발 1인 당 매월 50,000 챳 이상의 급료를 지급하고, 점성술사 한 명을 자문역 겸 고문으로 추대, 점성술사의 지시대로 행동해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