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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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제4공화국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다. 전두환이 집권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6월 항쟁 직후 6.29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고 "보통 사람"이란 슬로건을 내걸며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대통령 퇴임 후 내란 혐의로 1995년 전두환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반란수괴 등에 관한 판결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4]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전두환과 함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대부분 박탈되었다.[5]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해오고 있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있으며 기본적인 거동을 하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있다.[6] 대통령 취임식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이후 15년 넘게 공식석상과 매스컴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2. 일생
3. 평가
4. 일화
4.1. 회의를 좋아하는 대통령
노태우 정부 시기에 회의를 굉장히 자주 했다고 한다.[7] 당시 군사정부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회의를 강화했으며, 덩달아서 정부 부처에서도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취임하고 얼마 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름부터 '큰(泰) 바보(愚)'니 당신들이 많은 의견을 내 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보좌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서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약간 유사할 수도 있는 증언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두 가지 의견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사안이 있으면 참모들끼리 회의를 해서 결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적지 않은 사안들은 참모나 장관들에게 위임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와는 최소 일주일에 한번씩 청와대에서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당 대표와 매주 만나서 국정현안에 논의하고 대화를 했다.
4.2. 보통 사람 노태우
대통령 선거에 쓰였던 슬로건인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말이 유명하다. 박정희, 전두환처럼 완전 독재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노태우 역시 군부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 그렇게 될 뻔하기도 했다. 대선 당시에도 민주화 열기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에게 많은 부분에서 뒤쳐지고 있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 둘이 서로 욕심이나 부려서 먼저 대통령 하겠다고 단일화 안하고 뻗대고 있던 것과 대선 포스터에 걸렸던 이 문구 하나가 대선판을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노태우에게는 어찌 보면 고마운 수식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노태우 선거 캠프에서는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을 접하고 "아니, '보통 사람'이 무슨 대통령을 해? 이미지가 너무 약한 거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노태우 본인은 "일반 국민들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구"라며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나 이 사람 보통 사람 믿어주세요.'''"
그래서 대선 이후에도 취임식이나 각종 연설이 있을 때마다 상당히 많이 썼으며, 노태우 집권 당시 대한뉴스에서 가끔씩 선행을 베푸는 일반인들을 취재해 '위대한 보통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쓰면서 보도한 적도 있으며 1988 서울 올림픽 성화에 불을 붙인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손기정을 예상했으나 이를 깨고 보통 사람 셋이 점화를 했을 정도로 해당 수식어에 신경을 많이 썼다.[8] 그 때문에 개그맨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마다 이 말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본인도 "앞으로는 나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책적으로도 5공과의 고리를 끊고 상술된 문단에서처럼 회의를 장려한다든지 본인도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 인사들과 잦은 회동을 가지면서 이전에 있던 군사 정권, 권위주의 이미지를 타파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기에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은 노태우와 노태우 정부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게 되었다.
상기한 바와 같이 대통령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써도 된다고 공언했던 것처럼, 그의 슬로건이었던 '보통 사람들'은 당시 풍자 만화가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주로 80년대 말 사회의 일그러진 모순을 고릴라의 모습으로 풍자한 책이었으며, 대표적으로 중간에 다음과 같은 노래 개사가 실려 있다.
'보통 사람'이 프랑스어로 알랭 드 보통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이 두 사람을 엮으려는 사람도 있다.새 나라의 대통령은 보통 사람입니다 / 잘난 사람 없는 나라[9]
'''우리나라 보통 나라'''
4.3. 전두환과의 비교
"전 대통령의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다 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1999년 9월 월간조선에 실린 노태우 육성 회고록 내용
4.3.1. 공통점
- 경상도 출신: 전두환은 경상남도 합천군 태생이고 노태우는 대구광역시 태생이다. 물론 전두환은 태어나기만 합천에서 태어났고 실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은 대구이기에 둘 다 대구 출신으로 볼 수도 있다.
- 일제강점기(1930년대) 태생
- 6.25 참전
-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
- 베트남 전쟁 파병부대 연대장
- 특전사 여단장 경험- 전두환은 1공수특전여단장, 노태우는 9공수특전여단장
- 12.12 군사반란 주도
- 민주정의당 총재
- 철창행과 사면
- 둘 다 젊은 시절 운동 능력이 좋았다. 전두환은 원래 운동 선수(축구 골키퍼) 출신이며, 노태우 역시 생도 시절 체력장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태릉 타잔'이라는 덕담을 들었다고. 전술한 대로 두 사람 다 특전사이므로 몸이 상당한 강골들임을 알 수 있다.
4.3.2. 차이점
- 대통령이 된 이후의, 노태우의 정치 활동의 노선은 보수주의자인 전두환의 노선과는 거의 반대 성향이었다. 대표적인 진보 인사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 토지 개혁이나 북방 정책 등 또한 전임자와의 대표적인 정책상의 차이점으로 꼽힌다. 특히 토지공개념에 중점을 둔 토지 개혁과 그를 바탕으로 한 경제 민주화는 당시 야당 일각에서도 너무 앞서나간다는 우려를 표할 정도로 진보적인 경제정책이었다.
- 전두환은 국회의원을 한 적이 없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적도 없지만 노태우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 전두환은 장관을 한 적이 없다. 반면 노태우는 전두환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 육사 시절 전두환은 공부를 아주 못했으나[10] 노태우는 상당히 우수한 생도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특유의 리더십 덕분에 육사 11기의 리더로 노태우보다 앞서 갔다.
- 관련 부서 및 일부 측근들과 함께 비밀리에 북한과의 정상 회담을 추진하려다 여권 관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한 전두환 정부와 달리, 노태우 정부는 공개적으로 남북이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는 원칙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작성, 강영훈 국무총리의 서명을 넣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 구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맺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에 14억 7천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11] 무기한으로 제공해 당시 큰 파장이 일었지만, 90년대 ~ 현재까지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우리나라의 남북 정책에 대해 직접적으로 강한 태클을 걸지 않았던 건, 이 14억 7천만불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작용한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 추징금 납입에 있어서도, 재산 규모를 축소 발표하고 재산 대부분을 둘째 며느리인 박상아의 명의로 이전했다는 의혹과 더불어 납입을 피한다는 의심을 받아 끊임없이 망신살이 뻗친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사돈인 신동방그룹과의 소송전까지 불사하며 완납하였다.
- 전두환은 와이프부터 해서 동생에 아들에 자국 혐오 논란을 일으킨 손녀딸도 있는 등 가족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지만 노태우의 가족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자녀들이 전부 이혼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노소영의 이혼 소송은 남편이 워낙 유명인인 까닭에... 게다가 남편인 최태원 회장이 불륜을 저질렀으니 노소영은 오히려 피해자였다. 물론 노태우의 자녀들인 노소영과[12] 노재헌도 이혼을 하는 등 살아 생전에 물의를 일으킨 적은 있지만, 노소영의 경우는 이슈가 큰 부친의 구설수에 조용히 묻혔으며, 노재헌 역시 가정사 문제로 치부되어 잠시 화제가 된 것 외에 파장은 크지 않았다. 게다가 노재헌은 2019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기까지 했다.
- 후손의 병역 문제도 대조된다.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은 병역의무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석사장교로 대충 땜빵했지만 노태우의 외손녀 최민정은 병역의무 대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해군 학사장교로 입대해서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이외에도 장남인 노재헌은 5.18 묘지에서 참배까지 했다. #단 노재헌도 석사장교 출신으로 이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할수 없다.
- 전두환은 2018년 현재 나이가 거의 구순에 가까운 고령으로 퇴임한 지 거진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디어에 가끔 이름이 언급되고 상당한 팬들도 존재한다. 노태우는 그에 반해서 김영삼 정권 때 구속 수감 되었다 풀려난 이후 두문불출하며 근황이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나마 들린 소식이 건강 악화로 요양한다는 내용 정도였다. 그리고 전두환에 비하면 김영삼과 더불어 젊은 층에게서는 언급도 거의 되지 않는다.[13] 단지 젊은 층에게서 노무현이 노짱으로 불리면서 노태우가 그 반사 효과로 1대 노짱 혹은 원조 노짱으로 불리는 것 정도뿐이다. 노태우와 노무현이 성씨가 같은 노(盧)씨인 것에서 비롯된 드립. 심지어는 노태우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는 사람들까지 있다.
- 성격도 차이가 심한데 전두환은 언제나 자기가 선봉으로 서서 가부장적인 웃어른같은 행동을 하며 자기가 직접 발로 뛰고 손으로 만져가며 사람들을 상대하는 스타일이지만 노태우는 그런 거 없이 차분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 좋아하며 약간 히키코모리 기질도 있다.
- 전두환은 경제공부를 꽤나 즐겼고 대통령 재임기간 경제성적도 좋아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노태우는 경제공부에 영 흥미를 붙이지 못했으나 외교분야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고 한다.
- 전두환은 80대가 된 2010년대에도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90세가 다 된 2019년에도 꽤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노태우는 2002년 전립선암 투병을 시작으로 이후 소뇌위축증을 앓으며 아직도 투병 중이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겨우 의사표현만이 가능한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15년 넘게 외부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갈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말까지 있다.
4.3.3. 전두환과의 재회
서술한 대로 전두환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였다. 군인 시절부터 줄곧 인생의 파트너이기도 했지만 대통령 재임 중 '5공 숙청'으로 전두환을 백담사[14] 로 보내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본인이 직접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된 후 말을 듣지 않아 상당히 괘씸했다고 한다. 반면 노태우는 스스로 직선제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체육관 대통령'인 전두환과 쌍으로 엮이는 것에 상당히 불쾌해 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자기도 같이 했으면서 이렇게 배신을 때리냐며 '''대통령이라도 귀 싸대기 맞는다'''며 분노했고[15][16] 노태우는 전두환이 퇴임했으면서도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것에 반발했다. 전두환은 퇴임 직전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정치 기구를 만들고 퇴임 이후 본인이 의장을 맡으려고 했다.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가 정책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노태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17] 또 노태우에게 닥치는 정치적 위기 대다수가 '''5공과의 연결 고리'''에서부터 오는 거라 전두환을 그냥 둘 수가 없었고, 결국 둘 사이의 골은 깊어졌다. 전두환 퇴임 이후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전두환이 백담사로 유폐되고 노태우가 전두환을 멀리하면서 노태우의 집권기간동안 둘은 전혀 만나지 않았다. YS가 집권하면서 5공청산이라는 전 국민적 요구 속에서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을 밀어부치며 둘다 위기감이라는 공통분모하에 1994년 전두환 퇴임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강남 음식점에서 화해의 만찬을 가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구속되어 재판장에서 재회.[18]"역사는 그들의 우정에 돌이킬 수 없는 애증의 골을 심어 놓았다.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악연은 더욱 깊어져 갔던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 마지막 회 中
그리고 20여년만인 2014년 8월 13일 전두환이 노태우의 자택을 방문했다. 당시 노태우는 뇌 질환으로 휠체어로 거동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상당히 나빠져 자택에 갇히다시피 지내면서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전두환은 누워있는 노태우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물었고, 옆에 있던 부인 김옥숙이 "알아보면 눈을 깜박이라"고 말하자 노 전 대통령이 눈을 깜박였다고 한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 근 30년여간 애증이 겹쳤던 묵은 정을 마지막이 되기 전에 미련 없이 풀어내려 했던 듯하다.[19]
5. 여담
- 따로 서예가 스승을 두는 등 노력하면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지만 경매에서는 거의 거래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돈으로 교환되는 가치가 부족하다는 의미. 시장 가격은 80~100만 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전두환의 서예 작품 시장가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수준이다.
- 박정희의 친위 세력이면서 12.12 반란까지 주동한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그는 전두환과 다르게 학창 시절에도 그렇고, 육사 시절, 박정희 시절에도 상당히 지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육사에서 영어교사까지 한 적이 있으니... 특히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1년 형이면서 친구이자 전우이기까지 한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다시피 쫓아내고, 대표적인 정적 중 하나였던 김영삼, 김대중을 포섭하려 했으며, 김영삼과 연합해서 3당 합당을 한 것과, 대통령 시절에도 김영삼을 포함한 여러 인재들을 불러서 주요 현안에 대해서 자주 토론한 행보도 그렇고, 그가 남긴 업적도 은근히 많은 데다, 아들인 노재헌도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는 상당히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등, 앞에서 서술한 상당히 흥미로운 행적으로 인해 재평가하자는 의견이 매우 많이 보이는 대통령이다. 현재는 노태우 자체도 상당히 좋은 대통령이었다고 재평가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났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죽을 때까지 매우 싫어하던 김영삼도 이런 행적 때문인지 노태우는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받은 시기인 1996년 방영된 SBS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펀치펀치'에는 '배워서 남주나' 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전두환 역으로 출연하던 박용식과 함께 역시 노태우 역으로 출연했던 김기섭이 캐스팅되었다. 여기서 김기섭의 친구야~ 라는 유행어는 당시에 대 히트였다. 덕분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 흔히 '친구야'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둘 다 MBC드라마 출신이라는 게 아이러니. 더 아이러니하게 SBS의 코리아게이트에서 전두환을 맡았던 정종준도 여기 출연했다.
- 물태우라는 별명이 있고,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보면 서인석이 연기하는 노태우의 유한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고 한다. 극중에는 '물태우 물태우 하니까 진짜로 물인 줄 아나?'라고 투덜거리는 장면도 있다고. 하지만 당시 사회가 이전의 군정 잔재가 남아있는 시절이었던 걸 감안하면, 대통령에게 물태우라는 별명이 "공공연히" 사용된 노태우 정부 시절은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국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20] 노태우 이전까지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것은 범죄였지만, 노태우는 ‘나를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고 허용하며 진일보한 것이다. 물이라는 수식어를 굳이 나쁘게 볼 필요는 없는 부분.
- 21세기에 들어서는 항상 전두환 다음이라는 이력서 때문에 일각에서는 콩태우라 부르기도 한다.
- 영어를 매우 잘했다. 그의 영어 실력 덕분에 한때 영어 교관을 했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다.
- 운동을 잘했다. 하지만 스포츠 자체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테니스 정도만 하는 수준이었다. 축구나 야구에 복싱에까지도 관심이 많았던 전두환과 대조되는 부분. 그래서 역시 정치인이자 체육계 인사였던 민관식이 생전 회고록에서 둘을 비교하면서 은근슬쩍 노태우를 폄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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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에는 암 투병 중이고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2015년 11월 22일 KBS 뉴스가 밝혔다. 같은 날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직접 가지 못하고 아들 노재헌을 대신 보냈다. 빈소를 찾아간 노재헌은 고인의 아들인 김현철을 만났는데...
- 노태우가 장교였던 시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노태우와 차지철에게 권유해서 박정희와 그 가족들, 차지철과 노태우가 휴가를 같이 갔었는데 차지철이 물에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자, 박정희가 '물이 무섭냐'고 묻자, 차지철이 '저희 어머님이 물에 들어가지 마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물에 들어가지 않았었다고 회고했다.(출처: 노태우 회고록)
- 부모님 중 한 분이 대통령 취임 당시에 생존해 있던 대통령이기도 하다. 노태우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10~1999) 여사는 생전에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지켜본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김영삼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옹과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여사. 이후 김태향 여사는 아들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6년 뒤인 1999년 4월 5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는 선거운동을 했는데 어디서 섭외했는지 여자 어린이를 안고 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그 여자 어린이는 1980~1981년 생 정도로 추측된다.#
- 취임 직후인 1988년 어린이날 청와대 행사에서 어떤 어린이가 '대통령 아저씨'라는 호칭을 쓰면서 질문을 했는데, 답변을 하려고 했다가 갑자기 좋아하면서 "내가 대통령 아저씨로 보여요? 기분이 좋구만. 할아버지보다 아저씨가 나은데?"라는 말을 했다. 사실 저 때 나이가 만 55세였기 때문에 아저씨로 호칭할 수도 있긴 했지만[21][22] 아무래도 겉모습이라든지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할아버지로도 부를 수 있었으므로 본인이 흡족해한 듯 하다. 당시 보도 영상. (2분 45초)
-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미남인 인물로도 손꼽혔으며,[23] 실제 당시를 살던 어르신들 사이에서 부처님 상이라면서 노태우를 뽑은 사례도 존재한다는 얘기가 돌곤 한다.[24] 위의 전 대통령들과 차이라면 특이하게 젊었을 때보다도 중년에서 초로기의 인물이 더 좋다는 거다.[25] 때문에 자녀 노소영과 노재헌 또한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물려받았다.
- 삼김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은 모두 전두환은 싫어하였지만, 노태우에게는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다. 자신들을 거칠게 탄압한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그들의 정치 규제들을 풀어주었고 웬만해선 건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정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삼김을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여기고, 만남을 자주가지며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려고 노력했다. 결정적으로 삼김 중 김대중을 제외한 나머지 2명과 힘을 합쳤다.
-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과 힘을 합치고 화해를 하려고 노력을 한 반면 전두환에 대해서는 백담사에 짱박아 놓는 선에서 끝났다. 사실 박정희 정권 삼대장(전두환, 노태우, 차지철)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성격을 가진 노태우였으며 문민 정권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어느정도 노력은 했으나 문제는 노태우 본인이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일, 그것도 전두환에 이어 2인자라는 점, 사적으로도 전두환의 친구라는 점 때문에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자신도 공범이기 때문에 군부독재정권을 완전히 척결하면 본인도 척결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군부독재정권을 본격적으로 척결하기 시작한 것은 문민정부에서의 일이다.
- 2017년 현재, 구글에서 노태우를 검색해 보면 자동 완성으로 뜬금없게도 노태우 수영복이 뜬다. 이는 그의 이름을 딴 별명으로 불리는 NTW-20 때문이다.
- 2019년 7월 현재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 부정선거를 모의했다는 의혹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 노태우부터 이명박까지는 2월 25일 19년 7월 현재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 부정선거를 모의했다는 의혹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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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방송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서인석이 노태우 역을 맡았다. 외모는 그다지 닮지 않았지만[26] 전두환을 능가하는 책사를 잘 표현했으며, 특히 '즌 장군'으로 대표되는 특유의 말투와 목소리는 가히 도플갱어 수준이었다. 배우 서인석이 태조 왕건의 견훤, 무인시대의 이의방, 정도전의 최영 같은 호방하고 거친 무인 연기로 유명하지만, 5공화국의 노태우는 서인석이 그와 정반대의 딸랑딸랑거리는 역할의 연기도 잘 한다는것을 보여준 배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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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거 이력
8. 소속 정당
9. 각종 타이틀
-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임기말 집권당 탈당 대통령[30]
- 제6공화국 최초의 대통령
- 헌정 사상 처음으로 검찰조사를 받은 대통령[31]
- 대한민국 대통령중 임기 후에 모친상을 당한 대통령[34]
- 제6공화국 최연소 대통령(취임당시 만 55세로 2020년 현재까지 6공화국 최연소 대통령이다.)
10. 저서
-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 을유문화사, 1987년 11월 1일 #
- <노태우 회고록 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조선뉴스프레스, 2011년 8월 8일 #
- <노태우 회고록 하: 전환기의 대전략>, 조선뉴스프레스, 2011년 8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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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상북도에서는 대부분의 시군이 1988년 이전까지 읍, 면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리가 아닌 동을 썼다. 다만 상주시, 문경시, 경주시, 봉화군과 1963년 강원도에서 이관된 울진군은 1988년 이전에도 읍면의 하위 행정구역에 리를 썼다.[2] 전두환과 이웃사촌이다.[3] 8차 개헌으로 인해 12대부터 취임 선서의 시작 문구는 "국헌을 준수하고"에서 "헌법을 준수하고"로 변경되었다. 즉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이기 때문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바뀐 취임 선서는 전두환이 처음으로 읽었다.[4]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 확정되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음.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5]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제7조: 전직 대통령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제6조 제4항 제1호에 따른 예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에 따른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아니한다. ②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6] 2000년대 후반부터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있을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역대 대통령들의 영결식에 불참했다.[7] 총리실에 근무했던 정두언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언급되었다.[8] 이 문제는 원래 손기정이 예정되어있으나 손기정 선수가 너무 열성적으로 성화봉송을 연습힌 나머지... '''그만 개막식 2일전 밤에 기자들에게 들켜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순서를 바꿨다.[9] 별난 사람 없는 나라 or 별딴 사람 없는 나라 버전도 존재. '별'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군인 출신들이 정치를 하지 않는 나라'를 은유한 것으로도 보인다.[10] 언제까지나 그쪽 기준이었지 학창시절엔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육해공사는 엘리트 집단이기에.[11] 이 외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도 우리 돈 10억원에 달하는 정치자금을 제공, (예상 못한 자금제공에) 고르바초프가 당황해 하더라는 일화가 95년 비자금 파동 당시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12]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당시 한국 내외 여러 은행 구좌에 돈을 분산해놓은게 탄로나 구설수에 올랐다. 계좌 각각의 액수가 아닌, 총액한도를 문제삼는 규정에 걸려 탈이 난 것.[13] 박정희와 노무현은 말할 것도 없고 전두환의 경우에도 젊은 층에게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김대중도 그렇고 심지어 거의 60~70년 전 대통령인 이승만의 경우에도 상당히 자주 이야기되는것에 비해 노태우와 김영삼은 윤보선, 최규하만큼은 아니라도 언급이 거의 안 된다. 그리고 미디어 매체도 노태우 시기만 다룬 인기 작품은 없다. 그나마 응답하라 1988과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가 있지만 전 시기인 5공의 연장으로 보여는 정도이며 5공 같은 경우 시대의 색깔이 확실해 동명의 드라마를 비롯하여 관련 작품이 많이 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노태우 정권 시기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편.[14] 당시에는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 그야말로 문명과 단절된 곳이었다[15] 정치적으로 여태 있던 비리를 폭로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전두환의 참석을 막았다. 국민 감정을 고려한 선택이지만 본인의 노력과 지원으로 이룬 올림픽 개최에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 불편했을 듯.[16] 노태우는 전두환에게는 '''친구'''였다. 그런 이유로 쿠데타도 노태우와 함께 주동했다. 그리고 친구라는 이유로 전두환 입장에선 자기 사람 챙긴답시고 핵심 요직인 내무부 장관 임명, 그리고 끝으로는 대통령 후보 공천까지 줬는데 자신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행동을 취하자 격분해버린 것.[17]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 40회에 나오는 두 사람의 연기로 잘 드러난다. 전두환이 득의양양하게 노태우에게 자신이 정치에 관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을 듣고 똥씹은 표정이 되는 것을 애써 참는 노태우의 모습을 이덕화, 서인석 두 배우가 기가막히게 표현해냈다.[18] 2005년 MBC에서 방영된 제5공화국의 마지막 화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두 사람이 검사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전두환은 '''친구라도 너무 가깝게 두고 요직을 주면 언젠가 뒤통수를 칠 것이다.'''란 걸 강조했고 노태우는 '''정치적 위기 때 전임자 격하, 언론 장악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안되면 자리 물려주고 도망가라.'''라고 했다. 이 가상 일화는 노태우는 "청와대에 있었을 적 저걸 그대로 실천했으나 마지막을 실천하지 못해 지금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했을 수도 있다.[19] 비슷하게 김영삼 전 대통령도 2009년 여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여 애증을 풀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미 김대중 대통령이 의식을 찾지 못하던 상태여서 화해를 이루진 못했다. 대신 국장이 끝난 이후 동교동 출신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였다고.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동교동계 의원들도 조문을 하는 등 양김의 복잡한 인연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20] 노태우 정권 당시의 유화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사례로 당시 서울대 학생회에서 공공연히 내걸었던 '광주학살의 원흉 노태우를 찢어죽이자' 현수막이 있다. 물론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학생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류 언론들이 조장하며, 안기부의 공안정국 국면을 돕는 일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유인물 몇 장만 배포해도 극심한 탄압에 시달려야 했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수위가 매우 높은 비판조차 일단은 용인되었던 것. 즉 군사반란세력의 수괴로써 권력범죄를 자행했고, 자행하던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던 상황이었으나, 일단 비판 자체는 가능해진 것이다.[21] 물론 1960년대까지는 일찍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1980년대 기준으로 50대 정도면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가 될 나이이기는 했고, 빠르면 40대 정도에 손자, 손녀를 보는 경우도 아직은 적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다만 영상을 보면 MC부터 대놓고 아저씨라고 불렀다.[22] 1990년대까지만 해도 40대 나이에도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들을만한 외모의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아무래도 찾기 힘들겠지만 당시만 해도 60대 이상이면 허리가 90도로 꼬부라져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어르신들이 꽤 많았다.[23] 키가 178cm#로, 사실 1930년대 생 치고는 키가 훤칠한 편이고 너무 몸이 옆으로 벌어지거나 골격 전체가 큰 것도 아닌 날씬한 체형이라 외모적으로 어필한 측면도 상당히 있으며, 기본적인 표정이 웃는 상이라 이미지에서 호감을 준 측면도 크다. 대통령 이전과 이후 촬영된 사진들만 봐도 전두환, 김영삼보다 확실히 크며, 김종필보다도 약간 크다. 근데 사실 오히려 노태우는 유전자에 비해 못 큰 편이라고 하는데, 요절한 노태우의 아버지 노병수는 키가 190에 가까운 장신이였다고 한다. 사실 젊은 시절 외모는 김대중, 김영삼이 더 낫다고도 할 수 있다. 김대중도 나이가 들어서도 무난한 외모였고, 김영삼은 민주화 운동으로 고생을 많이 했고 60대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미남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사실 그도 젊었을 때는 외모가 준수했던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양김은 87년 대선 즈음엔 이미 모두 60대 노인들이었으니...[24] 흔히 노태우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등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다뤄지는 요소 중 하나가 '준수한 외모' 이다. 정치인을 신념이나 재능, 정책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한다는 것이 좀 웃기게 보이기는 하지만... 현대와 같이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호감가는 외모가 정치인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였던 것. 긴단히 말해, 정치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창구 자체가 현재보다 훨씬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인 만큼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정치홍보물인 선거 포스터등에 멋있게 나와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호감이 상당했던 것이다.[25] 다만, 노동자 출신 시인으로 유명한 박노해 같은 이는 "화이트칼라들은 노태우의 외모가 호감형이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저렇게 간사해보이고 기분나쁜 얼굴이 또 없다! 사람의 외모를 두고서도 계급적 입장이 이렇게나 다르다!"라고 맹렬하게 디스했다. 기본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을 혐오했던 박노해가 아무 말로 노태우를 디스한 것이기는 하지만... 육체 노동자의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던 당대에도 별로 고생 없이 산 것처럼 탱탱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호감가는 외모로 받아들여지고 거친 환경과 고된 노동에 시달려 거칠고 까맣게 타고 주름도 많은 외모는 '초라하고 거칠어 보인다' 고 받아들여지던 세태에 대한 풍자로 보기도 하니, 참고하여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26] 오히려 김영삼과 비슷한 분위기의 외모에 가깝다.[27] 1987년 12월 20일 사퇴 (대통령선거 출마)[28] 역대 대선 최저득표율 당선.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3당합당)[29]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30] 후임 대통령들까지 쭉 이어지다 이명박 대통령때서야 깨지게 된다. 다만, 후임 대통령들과 탈당 사유는 다르다. 당시 김대중을 비롯해서 범야권 진영에서 선거를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중립 내각 구성을 요구했는데, 노태우가 이를 받아들여서 현승종을 중립내각의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자신 역시도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것이다. 다시 말해, 후임 대통령들 같은 경우 임기 말 레임덕으로 여당의 대권후보를 중심으로 탈당 요구를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31] 이후 전두환, 노무현, 박근혜, 이명박 순이다.[32] 당선 당시 득표율은 36.6%. 이후에 당선된 김영삼은 42.0, 김대중이 40.3%로 40%는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적은 득표율이다. 이는 야권이 3김으로 분열되면서 표가 분산된 것에 따른 영향이 크다. 만약, 3김이 단일후보를 내세웠으면, 노태우는 역대 대통령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운이 많이 따랐던 선거.[33] 참고로 가장 많은 득표율은 박근혜의 51.6%이다.[34] 한편 재임중 모친상을 당한 대통령은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또 한편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