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 산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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ဗိုလ်ချုပ် အောင်ဆန်း[1] / Bogyoke Aung San(bòdʑoʊʔ àʊɴ sʰáɴ). 1915년 2월 13일 ~ 1947년 7월 19일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이자 미얀마의 국부이다. 존칭인 '보조 아웅 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보조'은 버마어로 '장군'이란 뜻이다. 아웅 산 수 치의 아버지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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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아웅 산의 아내 킨 치(1912.4.16.~ 1988.12.27)
1932년, 양곤대학에 입학하였으며, 4년 뒤인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1940년 영국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 하이난성에서 버마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후 일본의 도움을 받아 버마에 다시 돌아와 영국군과 싸웠다. 일본은 괴뢰정부인 버마국을 세우고 영국보다 더욱 가혹한 통치를 시행하여 버마인을 비롯한 인근 국가에서 동원해온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아웅 산은 30인의 동지와 함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을 결성,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버마인 희생자만 해도 최대로 치면 100만에 달한다. 한술 더떠서 버마 학살의 책임자격으로 있던 인간은 전범재판에서 "버마 정부는 내가 버마 인구문제를 해결하였으니 훈장을 줘도 될것같은데?"라는 적반하장을 시전했다.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고 영국군이 버마를 재점령하자, 아웅 산은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애틀리-아웅 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버마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독립을 맛보기 전인 1947년 7월 19일, 군부 반대파에 의해 관료회의 중 아웅 산의 동생[2]을 포함한 6인의 관료들과 함께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의 암살로 버마의 운명은 독립 이후부터 삐걱댔었고, 이후 버마족카렌, 카친, , 친, 카미, 아라칸, 로힝야족 같은 소수민족들과 이념이 다른 정당간 내전이 끊이지 않게 되며,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혼란한 빈국으로 추락하고 만다. 독립 이후 버마의 굴곡진 역사에서 민족, 종교, 이념을 막론하고 모두가 존경하고 버마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아웅 산의 죽음은 제일 안타까운 순간. 만일 그가 죽지 않고 버마의 초대 대통령이나 혹은 초대 총리가 되었더라면 적어도 지금같은 내전, 쿠데타 등에 시달릴 확률은 적었을 거라는게 확실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웅산은 버마족 출신이었지만 카렌, 샨, 카친 등 소수민족들에게도 관대해서 팡롱 협약이라는 미얀마내 소수종족들의 자치와 권익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었다.
버마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건 물론이거니와 '''버마 통합'''을 실현하려던 인물이었기에, 현 미얀마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군부조차도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그래서 딸인 아웅 산 수 지가 30년 넘게 미얀마 군부에게 대항하며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정권 시기에 겪은 탄압이 '''가택 연금'''으로 끝났던 것.
달리 말하자면 아무리 군부가 이끄는 독재 정권이라 한들 아웅 산의 후손을 함부로 탄압했다가는 '''그날로 정권이 무너질 수 있을만큼''' 아웅 산의 위상 자체가 최고존엄인건데, 심지어 미국의 한 언론인이 미얀마에 취재 목적으로 입국해놓고는 수 지의 자택에 몰래 찾아가 인터뷰를 한게 탄로나서 국외 추방 명령을 받아 공항으로 압송될 때 어느 여경이 '''작은 목소리로 수 지의 안부를 물어봤다고.'''

3. 기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아웅 산 수 지이며, 본래 버마어에는 성이 따로 없지만 영국 유학을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본인의 이름 '수 지'[3] 앞에 붙여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외모도 판박이 수준에 가까울 만큼 닮은 편.
한국에는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김재익 등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관료들이 죽으면서 알려졌다. 미얀마를 방문한 사절단이 외교상 관례에 따라 아웅산의 묘소를 참배하는데 이를 노리고 북한이 테러를 일으킨 것. 묘지는 테러 이후 오랫동안 폐쇄됐다가 최근인 2012년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됐다.[4] 참고로 테러로 목조 건물이 박살난 뒤 돌로 다시 지어서 폭탄 테러 당시의 옛 모습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테러로 희생된 한국인 추모비도 있다. 양곤을 찾으면 99% 방문하는 슈웨다곤 파고다 북문 바로 앞에 있어서 들리기는 쉽다.

[1] 아웅 산의 존칭 '보조 아웅 산'의 버마어 표기.[2] 아웅산 수 지에게는 작은아버지.[3]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수 치'이지만 2013년 한국을 방문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수 지'로 표기하고 있다.[4]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2012년 이 묘소를 참배했는데, 참배가 끝나고 나서야 이를 공개했을 정도로 엄격히 보안에 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