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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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노상직(盧相稷)

치팔(致八)

소눌(小訥)
본관
광주 노씨
생몰
1855년 11월 21일 ~ 1931년 3월 24일
출생지
경상도 김해도호부 생림면 금곡리
(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1]
사망지
경상남도 마산부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노상익은 그의 친형이다.

2. 생애


노상직은 1855년 11월 21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생림면 금곡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서 노필연(盧佖淵)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노호연(盧滈淵)에게 입양되었다. <소눌편년(小訥編年)에 따르면, 노상직은 5살 때 <효경(孝經)>을 배웠고 7살 때 <소미통감(少微痛鑑)>을 읽었으며, 10살 때는 부친으로부터 중용대학을 배웠고, 11살 때는 논어맹자를 읽었으며, 12살 때 <시전(詩傳)>, 13세 때에 주역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17살 때 하과(夏課)에 참석했고, 21살 때 대구와 거창의 도회(都會)에 참가했으며, 26살 때는 한성시(漢城試), 28세에는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하고, 29살 때는 응제(應製)에 응하여 급분(給分)을 받는 등, 유학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또한 그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1886년 허전이 별세할 때까지 수시로 찾아가 배움을 이어갔다. 허전이 사망한 후엔 허전의 아들인 허운(許運)과 함께 성재문집 초고인 용어(庸語)와 연보를 정리하고 허전의 행장을 찬술하기도 했다.
1879년 선대의 세거지인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 국동으로 이주한 노상직은 그곳에 추원재(追遠齋)를 세우고 1883년 학도들을 모아 하과를 실시했다. 하지만 1885년 부친이 사망하고 이듬해 스승 허전과 모친을 함께 잃자, 그는 강학을 중단하고 3년상을 치렀다. 이후 1888년 극기재(克己齋)를 열어 학도들을 교육하고 교육용 서적인 <훈몽첩(訓蒙帖)>을 저술했으며, 추원재와 극기재를 오가며 강학 활동을 했고 창녕과 밀양 등지에서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교육했다. 이러한 강학 활동은 1910년 한일병합 후 중단되었다. 그의 친형 노상익은 일제로부터 은사금을 수여받자 단호히 거부했다가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고 이듬해 10월 만주로 망명했다. 노상직 역시 한달 뒤에 형을 따라 가솔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912년 형 노상익에게 양자로 보냈던 장남 노식용(盧寔容)이 만주 안동현에서 사망하자, 그는 아들을 만주에서 장사지낸 뒤 밀양군 단장면 무릉리 노곡동으로 귀향했다. 이후 그는 1914년 자암서당을 건립하고 강학을 재개했다. 또한 그는 선현들의 저서를 간행하는 데에 힘을 쏟기로 하고 자암서당에 전심각(傳心閣)을 따로 두고 서책을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간행작업에 큰 보람을 느끼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方冊中傳千古心 서책 가운데 천고의 마음을 전하나니

老年咀嚼味增深 노년이 되어 되씹으니 맛이 더욱 깊어지네.

卻愁世降言湮久 세월이 흐르면 말마저 사라지는 것을 근심하여

日以鋟書作己任 날마다 책 새기는 걸 내 책임으로 삼았네.

그러던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발하자, 노상직은 김창숙, 곽종석, 장석영 등이 작성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이 일로 밀양 헌병대에게 체포된 그는 며칠간 취조를 받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 후 1926년 자암서당을 중수한 뒤 계속해서 저술 작업과 강학 활동 및 서책 간행작업에 매진하다 1931년 3월 24일 마산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노상직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광주 노씨 집성촌이다. 울산광역시 교육감 노옥희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