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경전)

 




1. 개요
2. 목차
3. 명언
4. 맹자와 맹자학
5. 관련 한자성어
6. 원문(한자)
7.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맹자의 저서. 다만, 저자가 누구인지는 다소 논란이 있다. 보통은 '여러사람이 썼다고 보기에는 문체가 일관되었다는 점', '맹자 사후의 어휘 등이 보인다는 점' 등으로 인해서, 맹자가 주도하여 쓰고 후대에 교정된 부분이 있다고 본다. 사실 이런식의 저자 논란은 고대에 쓰여진 서적 대부분(논어, 대화편, 아리스토텔레스 서적, 성경 등등)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단순한 철학책이 아닌, 엄연한 실용정치 서적이다.[1]
후한대 까지만 하더라도 텍스트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편(篇)만이 나뉘어져 있었고, 또 한대(漢代) 초를 거치면서는 맹자를 가탁한 위작 4편[2]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이것을 후한 말의 조기(趙岐, ? ~ 201년)가 위작 4편을 제외한 7편의 장구(章句)를 나누고 주석을 달아 텍스트를 정립하였다. 이때 조기가 주석을 달지 않은 위작 4편은 점차 잊혀져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 때문에 문헌학자들이 아쉬워 하지만, 맹자는 비교적 일찍 주석작업이 진행되어 통행본 텍스트가 잘 보존된 사례로 꼽힌다. 이 점은 《순자》(荀子)나 《장자》(莊子)와 같은 전국시대 문헌들의 최초 주석이 늦어진 것과 비교[3]해서 가장 특기할만한 부분이다. 《장자》만 봐도 이 작업이 늦어지면서 B급 글쟁이들의 앤솔로지(...)가 되어버려서 전체 33편 중 내편 7편을 제외하면 '장자의 글'인지, '장자의 사상을 담고 있는지' 조차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을 정도[4]니 맹자의 경우은 조기에 의해 탈락된 편이 있긴 해도 다행인 셈.
맹자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텍스트는 3개이다. 먼저 《맹자주소》(孟子注疏)를 들 수 있다. 조기는 장구를 나누면서 주(注)를 달았는데,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송나라 때 손석이 소(疏)를 달아 《맹자소》(孟子疏)를 썼고, 이것이 13경 주소에 포함되어 합본이 되면서 성립된 것이 바로 《맹자주소》. 이것이 주희가 성리학을 집대성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하게 읽힌 텍스트였다. 그 다음으로는 남송 때 주희가 쓴 《맹자집주》를 들 수 있다. 성리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사단(四端)과 성선(性善)에 대한 논리가 바로 이 작업을 통해서 정립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성리학이 관학의 지위을 차지하면서 가장 주된 텍스트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청나라 때 초순(焦循, 1763-1820)이 쓴 《맹자정의》가 있는데, 고증학적인 성과가 반영된 것이다. 그 외에 다산 정약용도 《맹자요의》라는 주석서를 냈는데, 이것은 《논어고금주》 같은 전면적 주석이 아니라 의문나는 부분에 대해서만 주석을 단 것이기 때문에 앞의 세 저작과 비교하기는 어렵다.[5] 우리나라 내에서는 전통적으로 《맹자집주》가 많이 읽혔으며, 지금도 맹자 독해의 기본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어체에다가 매우 축약되어 있는 논어에 비해 생략이 적어서 문장이 매끄럽고, 읽기 쉽다고 인식되기도 하지만, 사실 맹자처럼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한 문헌도 없다. 문장이야 술술 읽히기는 하지만, 뭔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한문 초심자가 공부할 때 논어를 첫 텍스트로 해야 하는지, 맹자를 첫 텍스트로 해야 하는지는 사실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그래도 전통적으로 맹자가 '문리'를 트이는 용도로 자주 선호되기는 했다.[6][7]
춘추시대에 비해 전국시대 들어서면서 언어가 더 정밀해졌다는 말도 있지만, 20세기 말의 고문헌 발굴로 인해서 공자의 손자 자사시대 때 이미 중국문헌이 매우 고차원적으로 작성됐다는 것이 유물로 입증되었다.
사실 주옥같은 명언과 재기 넘치는 명대사(?)도 많아서, 고전은 골치 아프다는 편견을 버리고 읽으면 의외로 재미있는 게 맹자다. 맹자의 말투를 보고 있으면, 왕한테 건방지다고 끔살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독하다(...) 사실 그래서 더 재밌다.

2. 목차


  • 양혜왕(梁惠王)
맹자가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부분으로 상편은 7장, 하편은 16장으로 되었다. 그는 (魏)나라 혜왕(惠王)[8]에게 왕도정치를 실시하라고 조언하고 있는데 왕은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려야 그 즐거움이 오래갈 수 있으며, 왕이라도 잘못하면 왕위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편 전체를 걸쳐 맹자의 왕도론이 잘 드러나고 있다.
  • 공손추(公孫丑)
맹자는 그의 제자인 공손추(公孫丑)와 왕도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패도정치를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가의 의리(義理)를 밝히고 자신의 포부를 나타내었다. 상편은 9장, 하편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저기(反求諸己), 호연지기(浩然之氣), 인화(人和)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이 편에서는 맹자의 유세 족적이 잘 드러나고 있다. 맹자가 가장 희망을 걸었던 제나라 선왕과 맹자의 관계가 점차 틀어지고, 마침내 맹자는 제나라를 떠나게 된다. 이 과정에 관한 일련의 묘사들은 이 편의 백미이다.
  • 등문공(滕文公)
맹자가 등나라 세자와 만나 그에게 성선(性善)의 이치를 가르치고, 요순(堯舜)의 도를 말한다. 후에 정식으로 공公으로 즉위한 세자, 즉 등문공이 맹자에게 여러 가지로 자문을 구하고 그를 초청한다. 상편은 5장, 하편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이 중국 전대륙을 통치하는 천자가 되기 원한다면 먼저 백성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에게는 인륜이 가장 중요하니 이를 저버리면 아무리 훌륭한 행실을 해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 편에서는 농가 학설을 반박하는 맹자의 유명한 심력분업론과 정전론 등 맹자의 경제, 행정 사상이 여럿 드러난다.
  • 이루(離婁)
상편 28장, 하편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본성을 추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맹자는 자신을 바르게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제목의 이루(離婁)는 시력이 대단히 밝은 사람으로, 아무리 감각이 발달해도, 즉 선함과 법이 있어도 컴퍼스와 같은 기준, 즉 선왕의 도를 따르는 것이 없다면 원과 사각형을 반듯하게 그릴 수 없다,즉 바른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비유다. 이 편에는 인간 관계에 관한 말이 많다.
  • 만장(萬章)
상하 편 각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장은 덕이 천도에 합치하면 도를 얻을 것이고, 어질면 천하사람을 얻을 것이라며 인도(仁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민의가 천의라는 사상과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때에 맞게 해야한다는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만장(萬章)은 맹자에게 질문하는 자의 이름으로, 사마천은 공손추와 함께 그를 맹자의 주요 제자로 간주했다. 만장과 여러 이들의 질문을 맹자가 답하는 것으로 구성된 장이다. 주로 상고시대의 설화에 관한 대담이 이루어지며, 선왕, 선현의 도덕성을 부정하는 여러 설화에 대한 반박이 많다. 오늘날 회자되는 순, 우 등의 미담은 맹자가 제시한 반박 내용에 근거한 것이 많다.
맹자와 고자(告子) 가 인성(人性)에 대하여 대화를 한다. 대강 말하면 맹자는 성선설을, 고자는 성무선악설을 설파한다. 고자는 은 왼쪽 비탈로 보내면 왼쪽으로, 오른쪽 비탈로 보내면 오른쪽으로 흐른다며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맹자는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선도 인간의 인성이라고 주장한다. 인의(仁義)는 내적인 것이니 구하면 얻을 수 있고, 구하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상편은 20장, 하편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차히 살지말고 의로운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한다. 왕도가 쇠퇴하는 것은 제후나 대부가 도를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고, 왕이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지 않고 이용만 하는 것은 백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맹자의 인성론은 주로 이 편에 분포하고 있다.
  • 진심(盡心)
백성이 나라에서 가장 귀하고, 학문에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상편 46장, 하편 3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속적인 욕망에 앞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이 군자로서 더 추구해야할 것이며, 성인의 도를 배우는 데에 순서가 있으며 꾸준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목의 진심(盡心)은 "자기의 마음을 다하면"이라는 의미로, 맹자의 편명 중 유일하게 인명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 자신의 성(性)을 안다. 자기의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되는 것이다." 파편적인 내용들이 많아 앞 6편을 편집하고 남은 짜투리(...)들로 구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각 구절이 간략하고 통일된 주제가 없지만 명언명구는 많다. 그래서 맹자의 《논어》라고 불리기도 한다.

3. 명언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그래도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가 불러 들인 재앙으로부터는 살아날 수가 없다.

공손추 상 4 [9]

자기를 굽히면서, 남을 곧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다.

이루 상 [10]

스스로 모질게 구는 자와는 함께 이야기할 것이 못된다.

스스로 돌보지 않는 자와도 함께 일할 것이 못된다.

예의가 아닌 것을 말함은, 스스로 모질게 군다(自暴)라고 한다.

내 자신이 '인(仁)에 살고 의(義)를 따르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돌보지 않는다(自棄)고 말한다.

이루 상 10 [11]

자포자기가 여기서 나옴.

사람을 살피는 것은, 눈동자보다 좋은 것은 없다.

눈동자는 능히 자기의 악(惡)을 가리지 못한다.

마음이 올바르면 곧 그 눈동자가 맑고,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곧 그 눈동자가 흐리게 된다.

그 말을 듣는 것은 그 눈동자를 살펴 보는 것이니, 사람이 어찌 숨길 수가 있겠는가?

이루 상 15 [12]

사람의 병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다

이루 상 23 [13]

사람은 하지 않는 일이 있은 연후라야,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루 하 8 [14]

큰 사람은 말을 함에 신용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행하는 데에 결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직, 의로움(義)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루 하 11 [15]

만장이 물어 말하였다. "감히 교우하는 방법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

맹자께서 대답 하셨다. "나이를 끼어 넣지 말고, 귀함을 끼어 넣지 말고, 형제를 끼어 넣지 말고 사귀어라.

사귀는 것이란, 그 사람의 덕(德)을 벗으로 하는 것이니,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만장 하3 [16]

한 상자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얻으면 살게 되고, 얻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큰 소리로 모욕하면서 주면,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받지 않고

발로 차서 주면, 구걸하는 사람이라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고자 상 10 [17]

무릇 사람이 어찌 감당하지 못한다고 근심하리오!

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자 하2 [18]

사람들은 언제나 과오를 저지른 뒤에야 마음 속에서 곤란했던 바를 고칠 수 있고,

이리저리 생각들을 견주어 보고 난 뒤에야 구하고자 함이 안색으로 드러나며,

소리로 낸 뒤에야 깨닫게 된다.

안으로는 법도있는 가문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대적하는 나라와 외환(外患)이 없다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멸망한다.

그런 후에야, 우환 속에서는 살 수 있으되 안락 속에서는 죽게 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고자 하15 [19]

사람은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부끄러워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진심 상6 [20]

해서는 안 될 것을 하지 않고, 욕심내서는 안 될 것을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진심 상 17 [21]

하고자 함이 있는 사람은 우물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우물 파기를 아홉 길이나 해 내려 갔다고 하여도 샘솟는 데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물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진심 상 29 [22]

그만 두어서는 안 될 곳에서 그만 두어 버리는 사람은, 그만두지 않을 곳이 없을 것이다.

진심 상 44 [23]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다.[24][25][26]
왕이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역시 내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은 하필 이로움(利)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하겠느냐'고 말하시면, 대부(대신)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이 이로울까' 말하며, 선비나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말합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모두가 서로의 이익만을 취하게 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집안이며, 천승의 나라에서 그 왕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안입니다. 만승이 천승을 취하고, 천승이 백승을 취함이 많지 않은게 아니건만은, 진실로 의리를 뒤로 미루고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을 다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무릇 어질면서 부모님을 버린 사람은 없으며, 의로우면서 임금을 뒷전으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의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양혜왕, 상(上)편-
맹자가 "만일 왕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제 힘은 백 균의 무게는 충분히 들 수는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 수 없고, 제 시력은 가을날의 짐승 터럭을 살필 수는 있지만 수레에 실은 땔감 더미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왕께서는 그 말을 인정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왕은 "아닙니다"고 했다.
그러자 맹자가 말했다.[27]
"지금 왕의 은혜가 금수에게 미칠 정도로 충분하면서도 그 공적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유독 무슨 까닭입니까? 그렇게 볼 때 깃털 하나를 들지 않는 것은 힘을 쓰지 않기 때문이고, 수레에 실은 땔감 더미를 보지 않는 것은 '시력'을 쓰지 않기 때문이며, 백성들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실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 못 해서가 아닙니다.'''"[28]
-양혜왕, 상-
맹자가 말했다.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서 항심(恒心)[29]을 지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의 경우는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 그로 인해 항심도 없어집니다. 만일 항심이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에 빠지는 데 이른 이후에 그것을 좇아서 형벌에 처한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밝은 왕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백성들을 몰아서 선한 데로 가게 하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쉽게 됩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여, 풍년에는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죽음에서 자신을 건져 낼 여유조차 없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익히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어진 정치를 시행하려고 하신다면 어째서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오 무(畝) 넓이의 집 둘레에 뽕나무를 심으면 오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 등의 가축을 기름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들을 놓치지 않으면 칠십 세 된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백 무 넓이의 밭을 농사짓는 데에 일손 바쁠 때를 뺴앗지 않으면 여러 식구의 가족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해 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칠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게 하고도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양혜왕, 상-
개와 돼지가 사람의 음식을 먹는데 단속할줄 모르고, 길에 아사자가 있는데 (식량을) 풀 줄을 모르며, 사람이 죽고 나니 말하기를 ‘내가 한 게 아니다. 시절이 그러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사람을 찔러 죽이고 ‘내가 한 게 아니다. 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왕께서 시절을 탓하지 않으시면 천하의 백성이 올 것입니다.
-양혜왕, 상- [30]
만장이 물었다.
"요임금이 천하를 순임금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아니다. 천자라도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다."
(중략)
맹자가 대답했다.
"순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자 모든 신들이 제사를 받아들였으니, 이것이 곧 하늘이 받아들인 것이다. 또 순에게 정사를 맡기자 정사가 잘 되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백성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하늘이 천하를 주고 백성들이 천하를 주는 것이므로 천자가 천하를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만장, 상-
군자에게 세가지 즐거움[31]이 있으니 왕 노릇 따위에 비할소냐
부모님께서 살아계시고 형제가 탈이 없는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봐도 거리낌이 없음이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32]이 셋째 즐거움이다.
-진심(盡心)편- [33]
맹자가 말했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된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제후를 바꾼다. 이미 살진 희생을 마련하고 제물로 바친 곡식이 정결하며 떄에 맞게 제사를 지냈는데도, 가뭄이 들거나 물난리가 나면 사직의 신을 바꾼다."
-진심, 하-
맹자는 왕의 앞에서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기로도 유명하였다. 양혜왕 편부터 그 진가가 드러나는 구절이 많다. 설교만 줄창 늘어놓는 맹자 앞에서 왕이 '난 호색(好色)하여 왕도 실천은 어렵겠슈' 하며 하며 회피하니 맹자는 '왕께서 호색하시되 백성과 더불어 호색하시면 도대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며 받아치고,[34] 왕 앞에서 대놓고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해서 말씀드리지요'하며 면박 비슷하게 말을 시작하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이 전쟁으로 말해보겠다며 왕에게 논변을 펼친 것에서 나온 말이 바로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35]
맹자 관련 고사와 명언 가운데 쓸데없이 맹모삼천지교만 강조해서 학부모 등골을 빼먹는데, 사실 이 뒤에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온 맹자를 보면서 어머니가 옷감을 찢으며 공부를 도중에 그만두는 건 짜던 옷감을 도중에 찢는 것과 같다고 다그치는 장면, 어머니가 병들어 죽음이 가까워오자 아들에게 할 일을 하라고 말하고 어머니 자신은 아들의 짐이 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리는 내용 등등...

4. 맹자와 맹자학


『맹자』에 대한 연구는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양한시대(兩漢時代) 조기(趙岐)가 『맹자장구』를 지어 상술한 『맹자』 7편을 각기 상, 하로 나누어 14편으로 편집하였다. 이후 당송시대에 이르러 『맹자』를 경전으로 승격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맹자』는 경전으로 승격되는 데 성공하고 십삼경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에 『맹자』의 주석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36]
청나라 시대 『맹자』 연구는 날로 정밀하고 세밀해져 맹학(孟學)이 의리(義理)·고거(考據)·사장(辭章) 여러 방면을 포함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이 다양하여 결산하고 거울로 삼을만한 곳이 적지 않다. 건륭제·가경제 시기에 『맹자』의 집일(輯佚)·교감(校勘) 작업 달성은 더욱이 흥성기에 도달하여 예전 사람의 성취를 적지 않게 초월하여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최술의 『맹자사실록(孟子事實錄)』이 시대의 역작을 얻었다. 이 이후 초순의 『맹자정의(孟子精義)』(30권)은 전 시대 사람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흡수하여 더욱더 많은 학자들의 학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5. 관련 한자성어


오십보백보, 농단, 호연지기, 대장부, 자포자기, 필부지용, 중과부적, 삼락#s-1 등의 말이 맹자에서 유래된 말이며, 생활, 학교 등 일상용어 중에도 맹자에서 온 말이 있다. 그러나 요즘엔 어째 그 자신의 사상보다 교육열을 나타낸 맹모삼천지교, 맹모단기지교만 두드러진 것 같다. 해당 문서 참조.

6. 원문(한자)


한문 원문 및 국문 번역
한문 원문 및 영문 번역

7. 매체에서의 등장


  • 냠냠OK 작가의 만화에 수회 인용되었다.
[1] 상당히 현실적인 부분들이 많다. 한 왕이 맹자에게 '우리나라 너무 약하고 주변에 강국이 많아요 어떡하죠 징징'을 시전하자 맹자는 쿨시크하게 '답이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2] 성선변(性善辯), 문설(文說), 효경(孝經), 위정(為政) 등이다.[3] 순자는 당나라 때 양경에 의해서, 장자는 서진 때 곽상에 의해서 최초 주석이 이루어졌다. 경전의 최초 주석작업은 단순히 자구를 풀이하는 것을 넘어서서 편장을 나누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른 시기에 이루어질 경우, 텍스트의 변개가 적다.[4] 엄밀히 말해 장자가 '내편, 외편, 잡편'의 괴랄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도 결국 텍스트 정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너도나도 장자의 이름을 가탁해 글을 쓴 것들이 제대로 구분되지 못해서 생긴 현상이다.[5] 그래도 등문공장구 정전장의 내용이 실은 2장이 합쳐진 것이라는 주장과 같은 참신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6] 그래서 나온 소리가 '맹자를 3천번(혹은 3백번) 읽으면 탁하고 문리가 트인다.'는 전설이다.(...)[7] 또한 문장적 특징으로 인한 선호를 차치하더라도, 그 내용상, '배우고 때맞추어 익히니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전-혀 공감되지 않는(...) 학업 권장 발언에서부터 시작하는 《논어》와는 달리, 《맹자》는 1장부터 '''"왕께서는 하필 이익에 대해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라는 발언으로 '''왕의 명치를 가격하면서'''(...) 시작하는지라 학생들이 보다 흥미를 느낄 수 있으므로 역시 《맹자》가 선호되는 편. [8] 梁나라의 군주가 아니다! 진(秦)나라의 압박을 피하고자 수도를 대량()으로 천도했기에 혜왕으로 불리게 되었다.[9] 天作孼猶可違(천작얼유가위) 自作孼不可活(자작얼불가활)[10] 枉己者(왕기자) 未有能直人者也(미유능직인자야)[11] 自暴者不可與有言也(자포자불가여유언야) 自棄者不可與有爲也(자기자불가여유위야) 言非禮義(언비례의) 謂之自暴也(위지자포야) 吾身不能居仁由義(오신불능거인유의) 謂之自棄也(위지자기야)[12] 存乎人者(존호인자) 莫良於眸子(막량어모자) 眸子不能掩其惡(모자불능엄기악) 胸中正則眸子瞭焉(흉중정즉모자료언) 胸中不正則眸子眊焉(흉중부정즉모자모언) 聽其言也(청기언야) 觀其眸子(관기모자) 人焉廋哉(인언수재)[13] 人之患在好爲人師(인지환재호위인사)[14] 人有不爲也而後(인유불위야이후) 可以有爲(가이유위)[15] 大人者言不必信(대인자언불필신) 行不必果(행불필과) 惟義所在(유의소재)[16] 萬章問曰(만장문왈) 敢問友(감문우) 孟子曰(맹자왈) 不挾長(불협장) 不挾貴(불협귀) 不挾兄弟而友(불협형제이우) 友也者(우야자) 友其德也(우기덕야) 不可以有挾也(불가이유협야)[17] 一簞食一豆羹(일단사일두갱) 得之則生(득지즉생) 弗得則死(불득즉사) 嘑爾而與之(호이이여지) 行道之人弗受(행도지인불수) 蹴爾而與之(축이이여지) 乞人不屑也(걸인불설야) 萬鍾則不辯禮義而受之(만종즉불변례의이수지)[18] 夫人(부인) 豈以不勝爲患哉(기이불승위환재) 弗爲耳(불위이)[19] 人恒過然後(인항과연후) 能改(능개) 困於心(곤어심) 衡於慮然後(형어려연후) 作徵於色(작징어색) 發於聲而後喩(발어성이후유) 入則無法家拂士(입즉무법가불사) 出則無敵國外患者(출즉무적국외환자) 國恒亡(국항망) 然後(연후) 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지생어우환이사어안락야)[20] 人不可以無恥(인불가이무치) 無恥之恥(무치지치) 無恥矣(무치의)[21] 無爲其所不爲(무위기소불위) 無欲其所不欲(무욕기소불욕)[22] 有爲者辟若掘井(유위자비약굴정) 掘井九軔(굴정구인) 而不及泉(이불급천) 猶爲棄井也(유위기정야)[23] 於不可已而已者(어불가이이이자) 無所不已(무소불이)[24] 맹자의 1장 1편. 한 마디로 첫 페이지이기 때문에 유명세가 높다. 이게 얼마나 널리 퍼졌냐면 김시습의 시에도 흥부전에도 심지어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보이는 오광대나 들놀음에서 대사로까지 등장한다. 흥부전 -박통 속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맹자 견양혜왕하신데,왕왈수불원천리이래하시니,역장유이이오국호이까. 마상에 봉한식하니, 도중에 송모춘을, 가련 놀보 망하니, 불견상전인가." 놀보가 듣고 하는 말이, "어디 그게 박 속이냐, 정녕한 서당이지. 귀글은 당음(唐音)인데, 강포(江浦)가 놀보 되고, 낙교(洛橋)가 상전되니, 그것은 웬일인고."-. 동래야류 연희본 -'이전에는 대들보 양자를 씨더니 많은 남이 정간목에 다 듈어가고 맹자(孟子)가 견양혜왕(見梁惠王) 자자(子字)를 씨오.'-[25] 그런데 '孟子見梁惠王' 구절을 맹자견양혜왕이라 읽는것이 워낙 보편화되어서 그렇지, 사실 맹자'현'양혜왕으로 읽어야 옳다. 맹자는 양나라의 혜왕이 예물로써 자신을 초청하자 선비 내지 현자의 예로써 그에 응한 것이니, 곧 왕을 '알현(謁見)'한 것이다. ...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 《맹자》라는 서적 자체가 왕이라고 해서 특별히 예우하여 기록하고 그러지는 않는다. 그냥 맹자가 만나는 사람마다 다 見을 쓰고 있으니, 그냥 "맹자께서 A를 만나셨다"라는 일반적 상황 진술 이상은 아닌 것. 당장 1장 2편에서도, 양혜왕이 '''개인 정원에서 놀다가''' 맹자랑 만나는, 알현으로 보기 힘든 상황인데 그냥 孟子見梁惠王이라 쓰고 있다. 또한, '위혜왕(魏惠王)'이 아닌 '양혜왕(梁惠王)'이라 기록한 것 자체가 예우 따위 집어치우겠다는 소리다. 손빈을 기용한 제나라에게 패퇴하고 국토가 오그라든 뒤 대량(大梁) 땅으로 도망치듯 천도하였기에 위나라는 양나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거의 멸칭이다(...) 만약 선조가 왜란을 당하여 신의주로 피난 갔다고 해서 대대손손 '조선 국왕'이 아닌 '신의주 국왕'이라 불리고, 이승만이 한국전쟁을 당하여 부산으로 피난 갔다고 해서 대대손손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부산 대통령'이라 불린다면 얼마나 모욕적이겠는가? 위혜왕은 2000년 넘게 현재진행형으로다가 그런 식으로 불리는 중이다(...)[26] 다만 아직 성읍국가 전통이 남았기에 당대인은 멸칭이라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다. 실례로 우리가 은나라라고 알고 있는 국가의 정식 국호는 원래 상나라였다. 은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멸망 당시 수도의 지명이 은(殷)이었기 때문. 그 전 박(亳), 비(庇), 엄(奄) 등에 천도했을 시기에는 박나라, 비나라, 엄나라라고 불린 사례가 있으며, 현대에도 마이너하나마 박 시대, 비 시대, 엄 시대하는 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당장 위나라의 전신격인 진나라 역시 수도를 익(翼)에 두던 시기 익나라라고 불린 적이 있다. 예외적인 사례가 초나라인데, 수도를 천도한 기록이 제법 되는데도 국호의 별칭이 없다. 영(郢) 시대가 워낙 길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태생이 이민족이라 그런지는 불명.[27] 이 왕(제나라 선왕)은 도살되려는 소가 불쌍해서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였다.[28] 이 부분의 원문이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도 나왔던 '불위야 비불능야(不爲也 非不能也)'. 정도전 역을 맡았던 배우 조재현은 드라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사로 꼽기도 했다.[29] 흔들림 없는 도덕적인 마음.[30] 狗彘食人食而不知檢, 涂有餓莩而不知發; 人死, 則曰: 『非我也, 歲也.』 是何異於刺人而殺之, 曰: 『非我也, 兵也!』 王無罪歲, 斯天下之民至焉.[31] 이른바 군자삼락[32] 교육학에서는 이것을 교육(敎育)이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본다.[33]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在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34] 王曰, 寡人有疾, 寡人好貨. 對曰, 昔者公劉好貨 詩云, 乃積乃倉, 乃裹餱糧, 于橐于囊. 思戢用光. 弓矢斯張, 干戈戚揚, 爰方啓行. 故居者有積倉, 行者有裹糧也, 然後可以爰方啓行. 王如好貨, 與百姓同之, 於王何有.[35] 孟子對曰, 王好戰, 請以戰喩. 塡然鼓之, 兵刃旣接, 棄甲曳兵而走. 或百步而後止, 或五十步而後止. 以五十步笑百步, 則何如? 曰, 不可, 直不百步耳, 是亦走也. 曰, 王如知此, 則無望民之多於隣國也.[36] 손석의 『맹자음의』와 주희의 『맹자집주』가 이 무렵에 완성되었으며 명나라 때에는 『사서고』, 『사서경학고』, 『사서인물고』가 차례로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