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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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노상익(盧相益)
이명
노교리(盧校理)
자 / 호
치삼(致三) / 대눌(大訥)
본관
광주 노씨
생몰
1849년 11월 12일 ~ 1941년 9월 16일
출생지
경상도 김해도호부 생림면 금곡리
(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1]
사망지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무릉리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108실 178호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노상직은 그의 친동생이다.

2. 생애


노상익은 1849년 11월 12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생림면 금곡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서 노필연(盧佖淵)[2]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82년(고종 19) 34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을과 1위 아원(亞元:장원 다음)으로 급제하여#[3] 4월 7일 가주서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이듬해인 1883년 2월 27일이 되어서야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884년 6월 7일 가주서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달 30일 품계가 6품에 올랐다.# 7월 11일에는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고 8월 10일에는 부사직#에 제수되었다.
1892년 5월 2일,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고#, 그해 7월 29일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1894년에는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904년 3월 26일에는 품계가 정3품으로 올랐다.# 1905년 5월 10일 홍문관시강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6월 2일 사직하였다.#[4]
그 후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성립된 후, 일제는 그해 11월 은사금을 여러 인사들에게 나눠줬다. 이때 밀양헌병대 소장이 그를 찾아와 "그대는 많은 사람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므로 천황께서 은총을 내리셨다."며 은사금을 받을 것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는 매국노들이 받아먹는 것이지 망국의 대부(大夫)가 어찌 이에 관여할 것인가. 만약에 다시 강요한다면 죽을 뿐이다."

1911년, 노상익은 서간도의 안동현 접리수(接梨樹) 서구(西溝)[5]로 망명해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다. 그는 안효제, 신백우 등과 함께 접리수에 한인촌을 조성하고 이주 한인들의 권익 보호 및 생활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한국의 영토와 문화와 관련해 다수의 저작을 집필했다. 그가 집필한 저술로는 <통사절요(通史節要)>, <동역고(東域考)>, <동제고략(東制考略)> 등이 있다. 그리고 1913년 11월 한인공교회 창립에 참여해 유림 인사들과 교류했고, 이를 통해 독립의지를 고양하고 민족문화 확립에 노력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지낸 그는 74세 때 "내 나이 이미 80에 가깝고 여기서도 원수의 일본 관헌에게 모욕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선산 아래 내 뼈를 묻겠다"며 고향인 김해로 돌아왔다. 그는 금곡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천산재(天山齋)'를 짓고 그곳에서 두문불출하다 죽기 직전에 밀양군 단장면 무릉리로 이주했고, 1941년 9월 16일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노상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9년 국립서울현충원 108실 178호에 안장되었다.
[1] 광주 노씨 집성촌이다. 울산광역시 교육감 노옥희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이명 노준연(盧浚淵).[3] 독립유공자 서재필민종식도 이 시험에 병과로 급제했다.[4]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되었으므로 노상익의 사직과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5]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지에리슈촌(接梨樹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