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풍
1. 魯豊
박정희정부 시절 개발된 통일미계 벼의 품종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 쌀증산정책을 펴며 연구하던 중 개발되었다. 이름은 1977년 박정희가 농림수산부에 새로운 벼품종에 연구한 사람의 이름을 붙일것을 지시하여 익산(당시 이리)의 호남작물시험장장 박노풍의 이름을 땄다. 당시 1단보(300평, 10아르와 비슷)에 450kg의 벼가 생산이 됐는데 노풍벼는 750kg이나 생산이 되었다. 이 수치는 오늘날의 벼품종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보급 이전에는 이리 327호라고 불렀다. 1978년 하필이면 보급된해에 바로 도열병이 격발하여 피해가 있었다. 한편 같은 통일계품종으로 영남작물시험장에서 개발된 밀양29호는 시험장장 박래경의 이름을 따 내경벼로 1977년 보급되었는데 1978년 통일계 벼의 도열병 피해에 내경벼도 노풍벼에 버금가는 피해를 내어, 연구자·과학자에 명예를 주려던 박정희의 계획대신 희대의 불명예를 안겼다. 노풍 파동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당시 호남작물시험장장이던 박노풍씨는 이리327호(노풍벼)가 도열병에 약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시험재배를 먼저 할 것을 상급기관에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고 밝혔다.
참고로 박정희가 사망한 다음해인 1980년에는 농민들이 도열병에 강한 품종을 재배하였는데 하필 냉해에 취약한 관계로 역사상 최악의 흉작을 보게 되었다.
2. 盧風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 노무현의 지지율이 폭등하는 바람을 가리킨 말이다.
16대 대선 당시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이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었고,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는 확실한 대항마가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지지율이 가장 높던 이인제도 이회창과 가상대결 여론조사를 해 보면 지는 걸로 나왔다. 그런데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선출 경선이 시작된 후, 노무현 vs 이회창 양자 구도에서 노무현의 지지율이 앞선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결과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 이회창을 이길 사람은 노무현 뿐이라는 심리가 작용함과 동시에 경선 과정에서 노사모가 급성장하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등 노무현 돌풍을 일으켜 PK출신인 노무현이 광주에서의 압도적 1위를 시작으로 호남에서 승리를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고, 유력 경선 후보였던 이인제를 경선에서 누르고 대권후보가 되었다. 때마침 2002 월드컵과 거리응원 열풍은 젊은층의 적극적 사회참여를 부추겼고 대한축구협회 회장 정몽준이 노무현과 후보단일화를 하면서 노풍은 월드컵 열기까지 흡수하였다. 정몽준이 단일화 파기를 선언하는 등 곡절도 있었으나 온라인을 통한 빠른 이슈전파와 투표독려 활동으로 결국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되게 만들었다.
즉 노풍을 있게 한 주요 3요소는 '''민주당 지지층의 전략적 투표+월드컵 열풍+온라인 공론장의 활성화'''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의 지지율 폭등은 결국 열린우리당을 창당시켰고, 지금도 더불어민주당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과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친노 계파가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