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미
1. 개요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개발된 벼 품종. 통일벼라고도 한다.
1960년대 당시 한국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량사정이 나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는 식량사정이 좋지 못한 나라들이 많은데, 61년 한국의 GDP는 세계 64위[1] 에 불과했다. 그런 연유로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난 해결 + 식량자급 문제를 해결하라고 농촌진흥청에 지시를 내렸고, 결국 '잘 자라는 쌀을 만들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러 서울대학교의 생물학자 허문회 교수의 주도로 홍성호 연구사[2] , 김광호 연구사, 박순직 연구사[3] 3명의 밤낮 없는 연구와 노동을 통해 인디카종 쌀과 자포니카종 쌀을 교배해서 새로이 만들어낸 벼 품종이 바로 통일미이다.
단점은 '''맛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쌀 자급자족과 양조산업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통일벼 맛없다고 하는 어르신들 얘기로는 '그래도 안남미보다는 나았지.'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 안남미의 경우 장립종이기 때문에, 한국식 밥짓기로 조리하면 아무래도 푸석푸석해지기 때문인 듯. 재미있게도, 80년대 흉년 때 잠시 수입한 칼로스 쌀이 중립종이어서 일반미보다는 통일미에 가까웠을 텐데, 나름 호평을 받아 "미국 쌀, 주한미군부대 쌀 맛있다"는 소문은 물론 당시 부유층에서는 일부러 캘로즈를 사다먹기도 했었다. 당시 KBS가 이 현상을 취재하고 내린 결론은 칼로스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당 코팅"이 되어 있어 달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정확히는 당시 미제에 대한 환상과 통일벼의 좋지 못한 미질이 합쳐져서 나오던것으로, 2006년 쌀수입으로 캘로즈가 수입되었을때는 너무 안팔려서 캘로즈 재고가 썩어나갈 정도 였다...[4]
요즘은 에스닉푸드가 인기고 태국쌀도 수입하는 세상이니까 의외로 인디카의 특징을 지닌 통일미에 대한 수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의무수입물량으로 들어오는 태국쌀이 있으니 굳이 통일미를 찾아 먹을 사람은 여전히 별로 없을 듯하다. 다만 수확량은 개발 당시나 지금이나 좋기에 수확량 관련으로 벼의 신품종을 만들때 모종 중 하나로 쓰이는 듯 하다.
2. 배경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매년 3%씩 크게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쌀 생산량은 답보를 거듭하면서 쌀 부족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따라서 '잘 자라는 쌀을 만들면 된다'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어서 신품종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마저도 순탄치 않았는데, '''중앙정보부에서''' 이집트에서[5] 나다(Nahada)라는 이름의 볍씨를 비공식적으로(…) 가져와 농촌진흥청에 건네주었다. 이 때 이집트에서는 종자 반출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중앙정보부가 개입해서 종자를 '밀수' 했다. 1965년 시험 재배한 결과, 기존의 벼보다 30% 이상이나 수확이 커서 '기적의 볍씨'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이 쌀은 아랫사람들은 대통령의 이름에서 '희'자를 따와 희농 1호라는 이름을 붙인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자신을 제2의 문익점이라고 으쓱이며 다녔다.[6]
그러나 농촌진흥청이라는 곡물 성장에 필요한 환경 통제가 가능한 장소에서 키웠을 때는 저런 결과가 나왔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 1967년 일반 농가에 보급되고 나니 씨받이조차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희농 1호는 근본적으로 '열대 지방에 맞는 자포니카형'[7] 품종이었으므로 당연히 한국 기후와는 맞을 리가 없었다.
결국 필리핀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휩쓴 녹색혁명의 일환으로 필리핀에 본부를 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적의 쌀' IR-8을 들여와 연구한 결과 1970년대초 통일벼 계통의 신품종 육성에 성공하여 미곡증산의 커다란 실적을 올렸다.
이 인디카/자포니카 잡종은 사실 일본에서도 과거 개발하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실패하고, 인디카/자포니카 잡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허 교수는 이때 일본에서 만들어진 논문들을 구해다가 읽어보고 연구한 끝에 개발에 성공했다고 한다.
통일벼의 개발은 학문적으로도 세계 벼 육종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일본 농학자들이 1920년대 벼를 인디카와 자포니카라는 2갈래로 분류한 이래, 두 아종(亞種)을 교배하면 불임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IRRI에서 개발한 키 작은 다수확 인디카 품종을 한국에 도입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허문회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우선 교배한 뒤 그것을 다시 다른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여 안정된 품종을 만드는 전략을 시도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해 얻은 종자는 마치 노새와 같이 씨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중 일부 불임이 아닌 종자를 다시 인디카와 교배하여 번식력을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66년 봄에는 IRRI의 유명 품종들과 비슷하게 키는 작고 이삭이 크지만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통일벼를 개발해 내는 데 성공했다. 허문회가 IRRI에서 난쟁이 자포니카를 교배하고자 했을 때에도 연구소의 일본인 동료들은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문회는 포기하지 않고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교배 조합을 시험한 결과 전 세계의 벼 육종가들이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렇게 수백 가지의 교배 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줄기의 길이를 결정하는 유전자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벼의 유전 연구에 이정표를 세웠다.
농촌진흥청장에 취임한 김인환은 허문회가 개발한 품종을 적극적으로 육성할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1970년 말에는 유망 개체들이 엄선되어 통일이라는 품종명을 받고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통일벼는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들과 비교할 때 평균 30% 이상 높은 수확량을 올려 당국자들을 들뜨게 했다. 특히 박정희는 통일벼가 찰기가 없어 인기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무기명으로 이루어진 국무위원 시식회에서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적고 맛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서둘러 보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통일벼는 1973년부터 재배 면적을 급속도로 늘려 나갔다. 1970년대 중반이면 통일벼는 물론 통일벼를 바탕으로 그 형질을 개량한 후계 품종들이 여럿 선을 보였다. “유신”, “조생통일”, “통일찰”, “밀양21호”, “밀양23호” 등이 다양한 지형과 기후에 맞춰 개발되어 1977년 무렵이면 전국 논의 대부분이 통일형 품종으로 채워지기에 이르렀다. 1977년에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하고,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3. 문제점
그렇게 만들어진 통일미는 인디카종과 자포니카종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양새와 성질은 자포니카종이지만 생산량은 인디카종 못지 않게 높았다. 실제로 지금껏 재배하던 쌀을 모두 통일미로 바꾸니까 생산량은 무려 40%나 늘어났다고.
하지만 상기했듯이 인디카종의 특성이 섞여 있는 탓에 미질(米質)에 문제가 있어 '''맛이 거의 인디카종이었다.''' 한중일 동북아 지역에서 주로 먹는 자포니카종의 맛이 아니었기 때문에 흔한 일반미 아키바레(秋晴, 추청벼)와는 생판 다른 맛이 나니 인기가 그만큼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보리밥맛이 통일쌀보다 낫다”는 유행어가 돌만큼 통일벼의 미질은 크게 떨어졌다. [8]
그래서 농민들은 통일벼 재배에 냉담했다. 사실 농민들의 통일벼 외면에는 이런 점 외에도 여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 전국으로 확대 보급된 통일벼가 정부의 기대와 달리 일부 지역에서 심각한 실패를 기록한데다, 오랫동안 속고만 살아온 농민들이 정부 정책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맛뿐만 아니라 통일벼가 지닌 단점도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통일벼는 아무리 한국 온대기후에서 클 수 있게 개량했다지만 여전히 냉해에 약한 편이라 물못자리가 아니라 비닐터널이 필요해 자재비가 그만큼 상승했고, 생육기간이 긴 만생종인 특성상 일찍 심어야 하기 때문에 밀과 보리의 이모작도 불가능했고, 볏짚이 짧고 맥살이 없어서 당시 농민 기준으로 농한기의 부수입원이었던 가마니나 새끼줄을 꼴 수도 없었다. 이는 이문구의 소설 '우리 동네 리 씨'에도 나와 있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녹색혁명 유전자라 불리는 sd1 유전자는 키를 작게만들며 분얼의 수를 증가시켜 함께 이삭의 수를 증가시켰다. sd1 유전자를 벼 육종에 이용하기 전까지 재배하던 벼 품종들은 큰 단점이 있었다. 생산량의 증가를 위해 비료를 주면 줄기가 과도하게 길어져 이삭이 익어감과 동시에 쓰러져 버리거나, 약한 태풍에도 견디지 못하고 논바닥에 쳐박혀 버리는 것이었다. (sd1 유전자를 품종 육성에 도입하기 이전에는 장마가 지나가면 사람이 논을 돌아다니며 쓰러진 벼들을 세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통일벼가 당시 품종들에 비해 3~40% 이상의 수확량 증가를 달성한 것은 sd1이 유도하는 단간 특성이 크게 작용을 했다. 하지만, 작아진 키는 필연적으로 짧아진 줄기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짚풀로 생필품을 만들던 당시에는 단점으로 작용 했다.리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농촌 지도소 강사들이 그들에게 백일기도를 드린다 해도 신품종으로 바꿀 사람은 대농 몇 사람에 불과하리라고 그는 믿었다.
리가 알기에도 그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관리자들에게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속아 살아왔으므로, 이제는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 거였다. 낮은 정치, 높은 행정, 도시 경제가 속이고, 심지어는 가장 정직해야 할 학교 교육마저도 그들을 속였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모두 빚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시세가 수시로 변하는 쌀을 얻어 썼으므로, 갚을 때에도 현물로 갚아야만 유리한 거였다. 얻어 쓴 쌀은 계 쌀과 마찬가지로 진작 품질 좋기로 이름난 아키바레 쌀이었다. 따라서 같은 품질의 쌀로 갚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었다. 농민들이 통일 계통의 벼를 꺼리는 이유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면역성이 약해 병충해가 빈발하는 것도 큰 흠이었지만, 볏짚이 짧고 맥살이 없어 가마니나 새끼를 꼬지 못하므로 고공품 생산에 의한 농한기의 유일한 부수입이 없어지던 것이다.
소가 싫어하니 여물로도 쓸 수 없고, 천상 군불 때어 재나 받든가 그냥 퇴비감으로 싸 놓고 썩히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는 모두 1970년대의 사정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식량증산을 위해 이모작과 혼분식 장려 운동에 목숨걸던 그 때와 달리 요즘은 이모작은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논이 많고, 볏짚 가마니는 쓰지도 않으며, 태풍에 덜 쓰러지기 때문에 키 작은(=볏짚이 짧은) 품종이 개발되기도 했고, 볏짚은 사일리지(발효사료)를 만들기 때문에 언급된 성질은 크게 상관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대상과 관련한 여러가지 단점 탓에 소비자에게 외면받아서 당연히 일반미에 비해 가격도 쌀 수밖에 없었다. 당시 통일벼의 가격은 심하면 일반미의 절반 가격 정도로, 농민들이 이전과 같은 수익을 얻으려면 일반미의 2배 이상의 수확을 올려야 했던 것이다.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인 것이다. 게다가 그런 주제에 냉해와 병충해에 더럽게 약해서 비닐하우스까지 필요로 하니 그에 따른 비용과 필요 노동력은 천정부지. 농민들 입장에서는 일은 더하고 값은 덜 받게 되니 이걸 좋아할래야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통일벼 개발에 참여했던 농학자들은 처음부터 이런 문제들을 지적했지만 유신 시절 정부가 관심가지는 사업이었기에 당연히 다 묵살되었다.
4. 정부 정책
아직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일차적 목표는 맛이 없더라도 충분히 먹이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질보다 양'''이 우선순위였던 정부에게 미질과 농민들의 고충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입장 차이 때문에 통일벼 재배를 둘러싸고 정부와 농민 사이에 힘 겨루기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래도 초기엔 각종 홍보와 선전으로 통일벼 키우기를 장려했지만, 통일벼 자체가 가진 문제로 큰 효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농민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작전상황실까지 마련해 놓고 이른바 '통일벼 행정'을 실시했다. 집집마다 할당된 목표치가 정해졌고, 각 마을 회관에는 증산 목표량이 큼지막하게 나붙었다. 심지어 책임생산제를 시행해, 마을 회관 벽에 목표달성 그래프를 그린 벽보가 붙여지기까지 했다. [9]
1973년부터는 다수확농가에 대한 시상이 실시되어, 쌀의 계약증산제도를 시행해 목표를 달성한 마을에 대해서는 30만원부터 1백만원까지[10] 시상금을 주는 등 상금을 걸고 군과 면에서 증산왕을 뽑았다. 가을이 되면 공무원들이 일일이 들판을 누비며 벼 알을 세고 단위 면적당 소출량을 파악했다. 통일벼 행정도 강화하여 공무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농가를 돌며 통일벼를 재배하라고 강요해 들판에서는 공무원들과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놓고 논쟁과 몸싸움을 벌이는 진풍경들이 연출됐다. 심지어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면장이 직접 모판을 갈아엎거나, 볍씨 담근 통에 약을 쳐서 싹이 안 나게 하는 일들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소설가 이문구의 작품 관촌수필에도 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당시 상황은 거의 전쟁에 가까울 정도였다. 지금은 꿈도 꿀 수 없지만, 공무원이 농민과 드잡이는 기본이고 주먹질까지 하는 정도였으니(...). 담배와 함께 갑질이 유명했던 것이 통일벼다.
이 때문에 재래종 볍씨가 담긴 독을 안방에 앉히고 볍씨를 틔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공무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심어졌다. 심지어 담당 공무원들이 강력한 상부지시를 따르기 위해 재배면적확보에 집착하다 보니 신품종 종자를 외상으로 공급해 수확기에 풍작을 이루지 못한 경우 종자대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하는 등 통일벼 보급을 둘러싸고 심한 홍역을 앓았다.
이런 행정의 기억 때문에, 정부미(초기에는 통일미를 뜻했다)는 맛없다, 정부에서 보급하는 종자는 맛없는 품종이다, 맛있는 건 경기도에 보급하고 영호남에는 맛없는 걸 보급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래서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에서 종자를 직접 들여다 자기 논에 파종하는 농민들이 있었다. 후자에 대해서 농진청은 억울해했는데, 외국 품종을 들여오더라도 가장 먼저 수원의 시험장에서 재배하면서 한국 환경에 맞게 개량해 종자를 양산해야 했고, 그런 다음에 남부지방의 기후에 맞게 개량한 품종을 해당 지역에서 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5. 결과
1976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쌀 자급에 성공했다. 수확량은 3,621만석이었다. 자급 달성을 자축하기라도 하듯, 박정희 대통령은 이 해 11월 쌀 소비 억제 정책의 키워드와 다름없었던 무미일을 폐지했다.
이후로도 풍년은 계속돼 1977년엔 쌀 생산량이 4천만석을 돌파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쌀 대풍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은 이 해 12월 4천만석 돌파 기념탑을 세웠으며, 농촌진흥청을 방문해서는 쌀 자급 달성의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녹색혁명 성취'라는 휘호를 남겼다.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하고,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쌀이 남아돌자 박 대통령은 쌀 막걸리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만인 1977년 12월 쌀 막걸리 제조를 허가했다. 쌀 막걸리의 등장은 그 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인들은 쌀의 자급자족 성공으로 보릿고개나 혼분식 장려 운동, 무미일, 절미운동 같은 단어들을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해 놓고, 가장 먼저 그동안 한이 맺혀 있던 흰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데 소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맛이 좋은지 나쁜지 따질 겨를도 없이 뭐든 먹어야 하는 시대였다 보니까, 통일미는 꾸준하게 재배되었다.
6. 쇠퇴
통일벼는 냉해에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1980년 최악의 냉해로 통일벼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1980년은 쌀 생산량이 30% 감소한 최악의 흉년이었다. 1981년 통일벼 강제 정책이 폐기되었고 식량난이 대강 해결된 1980년대가 되자 '''맛이 없어서''' 통일미는 당연히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쌀 농사는 1977년 풍년 이후 1980년에는 냉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해마다 풍년이 들자 쌀이 남아돌아 쌀 증산이 아닌 감산 요구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나오기 시작했다. 1991년을 끝으로 통일미의 정부 수매도 종료되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더 이상 재배되지 않고 있다. 대신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 같은 곳에서 서산벼 등의 이름으로 종자를 따로 보관은 하고 있는 듯 하다. 식량안보목적의 다수확 품종 자체의 연구는 통일벼를 심지 않게 된 뒤로도 계속됐고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가 되면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주식에서 쌀 비율이 줄어들면서, 쌀 자급은 했는데 식량수입 의존도가 오히려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통일벼 강제정책이 폐기되자 통일벼는 84년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2000년대부터 태국 요리, 베트남 요리 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인디카쌀에 대한 수요가 조금씩 늘고 있지만, 어차피 의무수입 물량으로 커버 가능한 정도고 통일벼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 아웃 오브 안중.
통일벼는 벼도열병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이 병은 한 번 제대로 걸리면 그 해 농사는 끝장인 대신 같은 벼도열병이라도 자신의 균주, 그러니까 특성에 따라 자신이 감염시킬 수 있는 벼의 품종이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11] 여태껏 한국에서 토종 내지 일본 도입종들만 괴롭히고 놀던 토종 벼도열병 입장에서 전혀 새로운 유전자를 잔뜩 품고 나타난 통일벼는 굉장히 생소해서 쉽게 공략법을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몇 년 동안 병충해 없이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몇 년 동안 벼도열병 측에서 무수히 많은 돌연변이를 찍어낸 결과 일부 균주가 마침내 통일벼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하필 통일벼들이 전 국토에 쫙 깔려 있었으니 한꺼번에 몽땅... 그래서 1978년 도열병 타격을 받았다.
이렇게 아주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정부는 이후 수십 가지의 품종을 지역별로 적당히 나누어 심도록 계도하고 있다. 한 품종이 망하더라도 나머지 품종들은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여 나라 전체의 농사가 망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7. 기타
비슷한 시기 북한의 김일성도 통일벼의 증산에 자극받아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이는 데 주력하여 80년대 초반 이북도 한때 단위면적당 생산량에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성공에 지나치게 고취된 나머지 굳이 설명 안해도 그 결과는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햇볕정책 당시에 한국에서 통일벼 종자 지원을 제안하자, 북한 측에서 '''"아...그거 우리도 종자 슬쩍 해서 키워봤는데 우리 쪽에선 별로 안 자람."'''...이라고 해서 취소되었다고 한다. 사실 북한은 이미 남한에서 개발한 우량 종자를 훔치는 목적으로 간첩을 보냈다가 붙잡힌 전적이 있다.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 게다가 통일미는 한때 전국에 쫙 깔렸던 데다가, 농촌 지역에서 상당 기간 애물단지 취급되다 보니 종자를 훔쳐가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자라지 않은 이유야 북한은 위도가 더 높은 만큼 날씨도 평균적으로 더 추웠을 것이고...
2012년에 포스코의 지원으로 마다가스카르에 시험 재배를 했는데, 생산량이 기존에 쓰던 종자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식 모내기 기법이나 농기구도 전파했다. 그 동네야 한국보다 따뜻하니 통일미의 단점인 냉해에 약하다는 점도 큰 문제가 아니고, 거기다 그 동네 사람들은 입맛이 인디카 계통의 쌀을 좋아해서[12] 밥맛 없다는 소리도 안 나온다고... 시험 재배 이후 종자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이후 농촌진흥청에서 '한-아프리카 농식품기술협력협의체'[13] 를 구성해 말라위, 말리 등에도 통일벼를 개량한 3개 품종이 등록되고 아프리카에도 국가품종시험 대상으로 확산되는 중.
쌀을 주식으로 먹는 세네갈에도 현지어 '이스리'를 육성하는 데에 통일벼 계열 '밀양 23호'가 모본으로 사용되었다. 현지에서 원래 재배되던 품종인 '사헬'보다 더 비싸게 팔리고 있다.농촌진흥청 블로그
8. 관련 문서
[1] 당시엔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거의 꼴찌에 가까운 순위이다.[2] 전 중앙종묘(주) 대표이사 사장[3] 전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교수[4] 사실 70,80년도에도 그냥 돈좀 있다던 사람들이나 캘로즈를 사다 먹었지, 진짜 부유층들은 아키바레(추청)만 찾아먹거나, 일본에서 알음알음 들여온 고시히카리 혹은 그에 뒤지지 않던 사사니시키 쌀만 찾아 먹었었다.[5] 이집트에서도 쌀을 먹는다. 쿠사리 참조.[6] 사실 이런 식으로 좋은 벼 종자를 대량재배하여 수확량을 늘리려는 정부 차원의 정책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문종 때 이징석이 오십일만에 수확이 가능한 벼에 대해 보고하며 백성들이 잘 쓰지 않아 종자가 적으니 나라 차원에서 보급에 나서자는 주장을 했고 문종도 이를 받아들였고 세조 때에는 노삼이라는 사람이 당도종이라는 품종을 중국에서 들여와 세조에게 바쳤는데 이는 바닷가 근처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품종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 뒤의 얘기는 없는 것으로 보아 통일벼처럼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7] 이집트산이라고 꼭 인디카인 건 아니다.[8]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꾸준히 재배되던 재래벼들을 대신해 일본벼들을 도입하기 이전까지 한반도에는 인디카형, 열대자포니카형, 온대자포니카형, 심지어는 인도의 향미 바스마티와 같은 아로마틱형 까지, 다양한 벼가 생산 및 소비되고 있었다. #[9] 박정희 시기 성공한 정책들은 절대다수가 시장경제의 발상에서는 나올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이런 정책들의 원조는 이오시프 스탈린 시기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고, 이걸 만주국의 만철조사부에 소속된 공산주의 경제학자들이 만주국에 맞게 최적화해서 만주국의 공업화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이런 통제경제체제는 전후 일본과 한국의 경제 관료들과 학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10] 참고로 1973년 기준으로 30만원 정도면 직급이나 지역, 직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1년치 봉급 되는 금액이니 결코 적은 금액이라 할수없다. [11] 비유를 하자면, 셰퍼드와 진돗개는 분명히 같은 개이고 스코티시 폴드와 샴고양이는 분명히 같은 고양이지만 셰퍼드는 스코티시 폴드만 때릴 수 있고 진돗개는 샴고양이만 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뭔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분야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12] 마다가스카르의 주 민족은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을 건너 도래한 사람들이다.[13] Korea-Africa Food and Agriculture Cooperation Initi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