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민주당

 


'''대한민국 여당'''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

'''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2003.2~2003.9)
'''

열린우리당
(2004.5~2007.2)
[image]
'''새천년민주당'''
'''한문명'''
-千年民主黨
'''영문명'''
Millennium Democratic Party
'''등록 약칭'''
민주당
'''창당일'''
2000년 1월 20일
'''당명 변경'''
2005년 5월 6일 (민주당)
'''해산일'''
2007년 6월 27일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합당)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7 (여의도동)
'''대표'''
한화갑
'''원내대표'''
이낙연
'''대통령'''
김대중 / 15대 (2000.1~2002.5)
노무현 / 16대 (2003.2~2003.9)
'''의석 수'''
'''9석 / 299석'''
'''당 색'''
청록색 (#00AA7B)
'''이념'''
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사회보수주의
신자유주의

'''내부계파:'''
사회자유주의
진보주의
'''정책 연구소'''
국가전략연구소
'''공식 사이트'''

2005년 5월 5일 기준
1. 개요
2. 역사
2.1. 창당
2.2. 제16대 대통령 선거
2.3.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2.4. 분당과 참패
2.5.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3. 역대 지도부
3.1. 총재
3.2. 대표
3.3. 원내대표
4. 역대 선거결과
4.1. 대통령 선거
4.2. 국회의원 선거
4.3. 전국동시지방선거
4.4. 재보궐선거
5. 기타
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복귀를 한 후 1995년에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를 바탕으로, 2000년 1월 20일 16대 총선에 대비해 세력을 확대 개편해 창당한 정당.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승리로 집권 여당 재집권에 성공하나, 2003년 열린우리당과 분열하여 야당이 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인한 17대 총선에서 크게 패배했다.
이후 2005년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었다.
정당법인으로는 자그마치 7년 5개월을 존속하여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가장 오래 존속하였다. 참고로 2위는 7년 4개월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민주한국당이고 3위는 2020년 9월 현재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6년 6개월이며[1],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 5년 7개월의 기록으로 현재 4위이다.
당시 도메인은 'www.minjoo.or.kr'이었다.

2. 역사



2.1. 창당


새정치국민회의16대 총선을 대비해 그간의 세력부족을 해결하고 원내 안정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1999년 하반기부터 신당 창당을 선언하였다.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으로 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직접 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기존의 인물들에 더하여 386세대 민주화운동 인사들, 각계의 전문가 출신 인사들, 지역 정계입문자들, 서영훈 전 KBS 사장과 최영희 전 여성단체협의회장, 김운용 대한체육회장 등의 유명인사들에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과 유삼남 전 해군참모총장을 포함한 군인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여기에 이미 1998년에 국민신당[2]을 흡수하면서 합류해 있던 이인제에게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고 충남 논산-금산 지역구 공천을 주며 충청권 공략을 책임지게 했다. 그만큼 세력 규모에서는 한나라당과 맞먹는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16대 총선에서 석패했다. 김대중이 직접 총재를 맡고[3], 국민신당 세력의 이만섭과 이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를 몰아주었으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일찍 터지면서 되려 정략적이란 반응으로 야당(=보수 한나라당) 표가 결집한 것. 선거 출구조사만 해도 민주당은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봉화-울진 선거구에서 김중권 후보가 19표 차로 낙선하는 등 접전이 벌어진 선거구 11곳 가운데 10곳에서 패하며 115석에 그쳐, 133석의 한나라당에게 제1당을 내줬다. 한나라당은 이로서 여당의 과반을 저지하고 오히려 원내 과반수에서 4석 모자란 거대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회창의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하게 굳혔다.
따지고보면 경북 지역에서 당선자를 낼 뻔 했기도 했고 그 동안 보수텃밭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강원도 의석 9석중 5석을 획득하였으며 그때까지 민주당계 정당의 불모지였던 충청권에서 8석을 얻는 등 선전하며 전국정당으로 자리매김하는 첫발을 떼었지만, 자민련과의 선거공조 무산으로 수도권에서만 한나라당에게 20석을 내준것이 패인이었다. 만약 자민련과 선거연대가 성사되었다면, 새천년민주당은 과반에 근접하고, 자민련은 교섭단체를 꾸릴 수 있었다.[4]
김대중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해질수록 동교동계를 번갈아 선임한 서영훈 - 김중권 - 한광옥 - 한화갑의 대표 체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동교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나서, 이른바 양갑 - 즉 한화갑과 권노갑의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권노갑을 위시로 한 동교동계는 이인제를 대권으로 밀었으나, 한화갑은 이른바 국민참여경선을 통해서 소장파들과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자 하였다. 물론 권노갑은 한화갑에 비해 전면에 나서지 못했는데, 정치사건으로 감옥에 가면서 원외, 당외의 2선으로 밀러났던 탓이 컸다.[5] 그러나 권노갑이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고 해서 이인제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6]

2.2.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 4월 27일 서울 경선에서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최종후보로 선출된 후 8개월간 민주당은 갈등의 극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노무현이 한나라당이회창에게 앞서나가는 듯 했으나, 한일 월드컵 기간에 치러진 제3회 지방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장담한 수도권과 부산에서 참패를 하면서 노무현의 입지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내 비노 세력은 정몽준과 연합, 단일화를 시도하게 된다. 이는 정몽준과 연대하여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청와대의 의지도 있었으나, 이미 감정적 앙금은 커진 상태였다. 이에 노무현은 당의 움직임에 대해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은 만장일치로 노무현을 후보로 유지시킨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여당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열풍을 타고 대선 유력 후보로 떠오른 정몽준에게 밀리며 노무현은 3위로 주저앉고, 민주당에서는 다시 후보 교체와 노무현 후보 반대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거기에 8.8 재보선까지 민주당이 참패하며 노무현과 민주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바닥을 기어가게 된다.
9월 정몽준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통합21를 창당한 뒤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단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1월에는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 일명 '''후단협'''으로 불리는 의원들이 민주당을 집단 탈당하기에 이르렀고 노무현 후보 흔들기가 계속된다. 그러자 노무현은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화 작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국민참여운동본부'라는 이름의 대선 캠프를 만들었으며, 11월 25일 여론조사를 통해 노무현이 정몽준을 1.5%차로 이기고 최종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단일화 효과에 따라 이회창을 5% 이상의 격차로 넉넉하게 따돌렸으며 막판 보수표 결집으로 접전까지 왔지만 역전당할 수준까지는 오지 않았다. 비록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위기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순위가 역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7]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48.9%의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극적으로 당선된다.

2.3.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신당 창당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당이 가진 정통성은 그대로 갖고 갈 것입니다. 민주당 정체성을 배반하고 훼손한 일이 없습니다. 정당하게 제시된 노선, 정통성에 근거한 것을 다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 2003년 6월 2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100일 차 기자회견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되자 갈등은 잦아드는 듯 했다. 2003년 초순만 해도 이른바 허니문 기간이었다. 구 당권파, 즉 비주류가 대통령에게 소외 받는다고 불만을 표하는 수준이었고, 대통령이 당내 화합을 다독이는 상황에서 당내 인사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하는 등 봉합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해 하순에 와서는 당 내 친노 세력과 대통령의 드라이브로 당내 쇄신 논쟁이 점차 불거졌고, 계파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김대중 정권과 관련된 대북송금 특검이 터지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 세력 중 일부까지 신당 창당에 반대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대표적인 경우가 추미애 의원과 조순형 의원.
운명의 날은 2003년 9월 4일이었다.[8] 정대철 당 대표 등이 합의를 계획했으나, 결국 타결 직전 단계에서 박상천/권노갑 등의 동교동 노장파에서 "이념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당무회의 육탄 저지에 나서면서 합의는 무산되었다.[9]
2003년 9월 21일, 정대철 대표를 포함한 37명의 의원이 '국민참여 통합신당(가칭)'을 구성하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뒤이은 9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을 공식 탈당했다. 명분은 국정 운영 전념이었지만, 이미 대통령이 당 내 에서 대북송금사건 이후 호남과 동교동계 의원들에게 큰 비판을 받고 있던 실정이어서 선택의 폭은 좁았다. 또한 친노 인사들도 이미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기 위해 선도 탈당한 상황이었기에, 분당은 현실이었다.[10][12][14]
새천년민주당은 노 대통령이 희대의 배신을 했다며 강력하게 비난 성명을 냈고, 한나라당은 신당으로 빨리 가라며 합류를 재촉했다. 잔류 민주당은 구주류의 박상천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고 뒤이은 11월 전당대회에서 조순형 대표를 선출하면서 재정비에 나섰다.

2.4. 분당과 참패


새천년민주당은 탈당파가 창당한 열린우리당과 기존의 새천년민주당으로 쪼개졌고, 양 세력은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분당 시점(2003년 9월)에는 새천년민주당이 제2당으로 의석수가 더 많았다.[15] 열린우리당은 개혁국민정당 출신 의원 2명[16]과 한나라당에서 고작 '독수리 오형제'라는 5명의 의원[17]만 추가 편입했을 뿐, 초유의 제3당 여당이었다.
문제는 대통령의 행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계속 여당에 우호적인 발언을 했고, 선관위에 지적을 받기도 했다.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였다. 탄핵 발의 자체를 민주당 조순형 대표 체제에서 주도했고, 한나라당이 동조했으며, 자민련이 막판에 끼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은 국회에서는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으나, 결국 헌재 기각으로 끝났다.
새천년민주당은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수를 둔 댓가로 2004년 17대 총선때는 겨우 9석 의석을 갖는데 그쳤다. 그나마도 전국구 4석을 포함한 결과. 조순형 전 대표가 험지인 대구에 출마하고, 추미애 비상대책위원장이 삼보일배 같은 반성행보를 보였지만, 일절 반영되지 않았다. 탄핵도 탄핵이지만, 총선 와중에도 공천권을 두고 구주류와 신주류가 선관위까지 가서 서로 싸우며 자기가 공천권 행사하는 게 맞다고 쟁투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으니 9석이나 얻은 게 용할 지경(…).
끝으로 새천년민주당 세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들을 지지해주리라 믿었지만 김 대통령은 탄핵을 저지른 그들에게 크게 실망하여 오히려 열린우리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결국 호남에서도 박살이 났던 것이다.[18]

2.5.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image]
제17대 총선 이후 전남권(광주+전남) 지역정당으로 전락해 별볼일 없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정통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2005년 5월 6일,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다. # 당시 사진
이후 역사는 민주당(2005년) 문서 참조. 다만 흥미로운 건, 새천년민주당보다는 당명 개정 직후의 민주당이 당세가 조금이나마 나았다. 물론 회광반조였지만.
법인으로서의 민주당은 2007년 6월 27일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김한길계 의원들(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해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창당을 하면서 7년 5개월만에 끝났다. 그러나 중도통합민주당은 불과 2개월이 안된 8월 13일, 김한길계의 탈당으로 도로 민주당(2007년)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실제적인 새천년민주당의 끝은 2008년 2월 17일 민주당이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면서 통합민주당으로 거듭났을 때였다. 창당 만 8년 28일만이었다.

3. 역대 지도부




3.1. 총재


  • 초대: 김대중 (2000.1.20.~2001.11.8.)[19]
  • 권한대행: 한광옥 (2001.11.12.~2001.12.3.)[20]

3.2. 대표


  • 지명직 대표최고위원[22]
    • 초대: 서영훈 (2000.1.20.~2000.8.30.)
    • 2대: 서영훈 (2000.8.30.~2000.12.19.)[21]
    • 3대: 김중권 (2000.12.20.~2001.11.8.)
    • 4대: 한광옥 (2001.11.9.~2002.4.26.)
  • 선출직 대표최고위원
    • 5대: 한화갑 (2000.4.29.~2003.2.22.)[23]
    • 6대: 정대철 (2003.2.23.~2003.9.21.)[24]
    • 7대: 박상천 (2003.9.22.~2003.11.27.)[25]
    • 8대: 조순형 (2003.11.28.~2004.4.16.)[26]
  • 비상대책위원장
    • 임시 한화갑 (2004.4.19.~2004.4.26.)[27]
  • 대표
    • 9대: 한화갑 (2004.4.27.~2005.2.3.)
    • 10대: 한화갑 (2005.2.3.~2005.5.6.)[28]
저 중에서 한화갑, 한광옥은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 박근혜를 지지하였다.[29] 한편 조순형은 한나라당의 총재였던 이회창과 손을 잡고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18대 의원[30]을 지냈으며,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에 합당될 무렵에 탈당했다.[31]

3.3. 원내대표




4. 역대 선거결과



4.1. 대통령 선거


'''연도'''
'''선거명'''
'''후보자'''
'''득표수 (득표율)'''
'''결과'''
2002년
16대
노무현
12,014,277 (48.9%)
'''당선'''

4.2.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2000년
16대
96 / 227 (42.3%)
19 / 46 (41.3%)
115 / 273 (42.1%)
원내 2당
2004년
17대
5 / 243 (2.0%)
4 / 56
9 / 299 (7.1%)
원내 4당

4.3. 전국동시지방선거


'''연도'''
'''선거명'''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2002년
3회
4/16 (25.0%)
49/232 (21.1%)
143 / 680 (21.0%)
[32]

4.4. 재보궐선거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2000년 1월

0 / 2

2000년 6월

1 / 7
9 / 32
0 / 57[33]
2000년 10월

0 / 2
2 / 9
0 / 37[34]
2001년 4월

0 / 7
1 / 6
0 / 14[35]
2001년 10월
0 / 3

2002년 8월
2 / 13

2002년 12월
0 / 1

0 / 1
0 / 3
0 / 4[36]
2003년 4월
0 / 3

0 / 2
0 / 4
0 / 23[37]
2003년 10월

0 / 4
1 / 9
0 / 66[38]
2004년 6월

1 / 4
1 / 19
2 / 38
0 / 53[39]
2004년 10월

2 / 5
1 / 7
0 / 35[40]
2005년 4월
0 / 6

1 / 7
1 / 10
0 / 21[41]

5. 기타



5.1. e-민주양


국내 정당 최초로 사이버 캐릭터를 만들어 마스코트로 활용한 정당이다. 자세한 사항은 e-민주양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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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민주당

[1] 법적으로 같은 정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창당일인 2014년 3월 26일 기준. 2015년 12월 28일 더불어민주당이라는 당명으로서는 4년 9개월.[2] 이만섭 의장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으로 가서 이인제 계파와 같이 행동했다.[3] 이 당시엔 대통령이 총재를 맡는 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4] 충청은 자민련이, 나머지는 새천년민주당이 담당함을 가정한 단순 득표율 합산. 다만 1998년 지방선거에서 당선자를 낼뻔했다가 선거공조 무산으로 한나라당에게 당선자를 내준 곳임을 감안해야 하기는 한다.[5] 대선 경선 초기 레이스에서 김근태가 권노갑에게 정치자금 받은 것을 고백하면서 권노갑의 세가 약해졌다는 분석도 있다.[6] 이 때만 해도 이인제는 부동의 여권 차기 대권주자라는 정치 거물로, 이인제가 피닉제라고 평가받게 된 것은 훨씬 후인 2008년의 일이다.[7] 당시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면 출구조사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로는 오전에는 장노년층들이 많이 투표했기 때문에 이회창 후보가 소수점 차이로 노무현을 앞섰지만, 오후에 젊은층들이 몰려오면서 뒤집었다.[8] 이 날의 육탄갈등 도중 난닝구라는 멸칭이 생겼다.[9] 만약 합의가 성사되었다면 새천년민주당이란 이름은 재창당의 형식으로 명칭이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국민회의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넘어간 선례처럼, 무난한 세확장이 가능한 재창당 안이 엎어진 건 2002년 대선 당시 분란의 연장선에서 바라봐야한다. 이미 후보 재신임, 친노와 비노 한번씩 찔러보았던 외부 세력과 재창당 등의 모든 시나리오가 실패로 돌아간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재창당은 결국 의원 공천권의 문제가 되는데, 지분의 문제에서 친노와 비노는 합의가 불가능했다. '공천학살'이란 뒷말이 나올지언정 한 쪽이 온전히 승리하기엔 힘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구당 위원장의 지위가 보장되는 시기였는데, 이들이 자리를 내놓지 않는 상황에서 경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더불어 제2의 '호남맹주'를 노리는 구 동교동계 거물들과 아예 '호남정당'의 이미지를 표백, 제거하려고 하는 친노의 입장이 일치할 리 없었다.[10] 노무현 대통령은 사실 처음엔 100석에 육박하는 여당을 버리고 분당을 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반대를 하진 않아왔고,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이 궤도에 오르게 되면서 '내 의견만 고집할 수 없다'며 탈당하게 된 것. 열린우리당 합당을 후일로 미룬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훗날 노무현은 자신이 창당한 것이나 다름 없는 열린우리당 역시 탈당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탈당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쫓겨난 것이란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열린우리당 붕괴 와중에 창당 주역인 신기남 의원이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창당도 처음엔 반대하지 않았는가'라며 정당의 운명은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근거에 이 건을 가져다 썼다는 점이다. # 친노이자 열린우리당 중심의 통합을 주장했던 신기남 조차도 열린우리당이 '노무현당'은 아니었다고 토로한 것이다.[11] 물론 야당 분열인 국민회의 창당과 여당 분열인 열린우리당 창당은 그 파괴력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집권 여당의 분열의 선례 역시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제2공화국에서 절대 다수당이 된 민주당이 장면 내각으로 집권한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에 친화적인 구파의 신민당으로 분열한 사례가 대표적이고, 그나마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의 분열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이후 새누리당에서 탈당해 교섭단체로 구성된 바른정당은 임기 말의 특수한 상황이므로 논외이고, 민주자유당에서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차린 김종필의 경우엔 애당초 민자당이 3당 합당으로 탄생 된 정당이며, 김종필의 원래 신민주공화당 지분이 있었기 때문에 분당이라고 볼 수 없어서 논외.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갈라져 나온 이인제의 국민신당 역시 소규모 탈당이므로 논외이다.[12] 사실 자신이 주류인 당을 탈당하고 신당을 창당하는 행보는 이미 선례가 있었다. 바로 전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의 일이다. 주류가 당권을 얻을 수 없거나, 힘겹게 얻더라도 비주류와 함께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고육지책으로서의 공통점이 있다. 다만 국민회의 창당의 경우, 뒤이은 총선에서 예상보다 훨씬 적은 의석을 얻었다는 점에서 큰 승리를 얻은 열린우리당 창당과 차이가 있다. 반면 대선의 경우, 국민회의는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열린우리당은 재보궐과 지선에서 참패를 거듭하다가 기어이 대선까지 패하고 만다. 달리 말하면, 열린우리당의 창당 자체가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파행이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11][13] 물론 15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전 의원 등은 '통추'를 조직하여 결국 국민회의에 입당했다.[14] 다만 국민회의 창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은,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둔 양김 분열 이래 갈라져있던 영호남 민주세력을 다시 한번 분열시켰다는 점에서는 책임을 면키 어려웠다. 꼬마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을 창당하고[13], 새천년민주당 출신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이 훗날 2012년의 정통민주당을 거쳐 친박으로 넘어간 것은 분열이 낳은 가장 나쁜 유산이기도 했다. 게다가 민주당은 자그마치 국민회의 창당 20년, 열린우리당 창당 13년 만에 더불어민주당국민의 당으로 다시 한번 분열하였다. 그리고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을 거쳐 민생당이 0석을 얻으며 21대 총선에서 사라져 분열이 일단락 될 때까지 4년의 세월이 걸렸다. 사실상 1992년 14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 2008년 18대 총선 3회를 제외하고는 13/15/17/19/20/21대까지 6회의 총선이 크든 작든 민주당의 분열로 치러졌는데, 이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가장 막장으로 치달으며 앙금도 가장 컸던 사건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였다.[15] 다만 지역구(전국구 19석 제외)로 한하자면 열린우리당 쪽이 더 많았다.[16] 유시민, 김원웅.[17]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18] 이때의 전설 같이 회자된 이야기가 손석희 아나운서와 연관된 "그러면 (탄핵을) 안 하면 될 것 아닙니까?". 문서 참조.[19] 당시 대통령직과 겸임. 2001년 재보궐선거 패배로 사퇴[20] 총재직 폐지[21]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가면서 당 대표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했으며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22] 총재가 임명[23]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당 대표직 사퇴[24] 한화갑 사퇴로 승계,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해 사퇴[25] 정대철 사퇴로 승계[26] 17대 총선 패배로 사퇴[27] 대표로 추대[28] 2005년 5월 6일, 민주당(2005년)으로 당명 변경[29] 다만 한화갑은 지지만 했을 뿐 실제 입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지지를 철회하긴 했다. 한광옥은 한 술 더 떠서 친박계로 변했고, '''박근혜의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다'''. 친박으로 변신한 동교동계로는 잠깐 친노(!)이기도 했던 김경재 의원도 있는데, 자유총연맹 회장을 지내며 극우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자기가 젊어서 한 일이 있는지 김대중 대통령 기념 사업을 벌이는 등 희한한 행보를 보였다. [30] 비례대표, 당시 7선[31] 조순형의 경우엔 깨끗한 정치라는 이념에 동조하여 제3지대 신당으로서 자유선진당에 참여한 것이며, 새누리당에 합당을 이후로 탈당한 것이므로 변절이라고 보긴 어렵다. 다만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생환하여 2005년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였으나, 돌연 입당한 이인제의 조직에도 밀려 대선 경선에서 중도 사퇴 후 탈당하여 자유선진당으로 간 행보가 괴해 보이는 것은 사실.[3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3]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4]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5]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7]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8]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9]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40]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41]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