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이회창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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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송파구 갑)'''
제15대
홍준표[37]

'''제15대
이회창'''

제16·17대
맹형규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홍성군·예산군)'''
제17대
홍문표

'''제18대
이회창'''

제19~21대
홍문표



'''대한민국 제26대 국무총리
이회창
李會昌 | Lee Hoi-chang
'''
<colbgcolor=#003478> '''출생'''
1935년 6월 2일 (89세)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
(現 황해북도 서흥군 서흥읍)
'''거주'''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 신동아아파트
'''본관'''
전주 이씨 주부공파[1]
'''호'''
경사(徑史)
'''재임기간'''
제26대 국무총리
1993년 12월 17일 ~ 1994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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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 '''부모'''
아버지 이홍규, 어머니 김사순
'''형제자매'''
형 이회정 (1932~ )
누나 이회영 (1929~ )[38]
남동생 이회성, 이회경
'''배우자'''
한인옥
'''자녀'''
아들 이정연, 이수연
딸 이연희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8기)
'''병역'''
[image] 대한민국 공군 대위 만기전역 (군법무관)
'''종교'''
천주교 (세례명: 올라프)[39]
'''신체'''
163cm, 65kg, A형
'''소속 정당'''
[40]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41], '''16''', '''18'''
'''약력'''
대법원 대법관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제15대 감사원장
제26대 국무총리
제15대 국회의원(신한국당 전국구 1번)[42]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
신한국당 총재[43]
제15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제15대 국회의원(서울 송파구 갑)
한나라당 총재[44]
제16대 국회의원(한나라당 전국구 1번)[45]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
자유선진당 총재
제18대 국회의원(충남 홍성군·예산군)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약칭'''
'''昌''', HC[46]

1. 개요
3. 평가
3.1. 남북통일에 대한 발언과 통일 이후 주한미군에 대한 발언
3.2.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과의 전두환 사면에 대한 거래
5. 여담
5.1. 이인제와의 관계
7. 저서
8. 선거 이력
9. 소속 정당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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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법조계에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의 선관위감사원을 확립'''했다.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국회의원, 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 자유선진당 총재 등을 역임하여 김종필, 고건, 이해찬, 정세균과 함께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다.[2] '''한마디로 문과의 경지에 오른 사람'''
1996년 정계에 입문하였고, 2000년대 초반에는 한나라당을 장악했을 정도로 거물 정치인이었던 인물이다.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당선이 굉장히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으나, 결국 전부 낙선하였다.

2. 일생




3. 평가


이회창은 개혁우파에 가까웠고 실제로 권위주의 세력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 '''앞장섰다'''. 실제로도 김대중, 노무현과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싸우다 아깝게 졌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인기 또한 모자라지 않았다.[3] 당내 정치인이나 당원에 대한 장악력도 대단해서 첫 대선에 지고도 몇 달 뒤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16대 총선 공천에서 이기택, 김윤환 등 거물급들 여럿을 공천탈락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문민정부 당시 감사원장을 맡아 문민정부 초창기 개혁 운동에 큰 몫을 담당했던 인물이었고, 바로 이 성과 덕분에 이회창은 대통령 선거에 나설 만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던 '''포용력이 너무 부족'''했다. 원칙과 정공법을 강조하는 그의 이미지는 3김 정치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국민들에게 신선함을 주었고 지지도의 동력이 되기도 했으나, 양날의 검처럼 작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3김 정치의 청산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김영삼뿐만 아니라 충청권에 기반을 두고 있던 김종필을 배척하였고, 경선을 불복하고 나선 이인제를 붙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런 그의 실책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경선에서 진 이인제를 직접 설득하지 않아 독자 출마를 말리는 데 실패함과 더불어, 3김 정치 청산을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JP가 이끌었던 자민련을 자극해 DJP 연합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이 두 가지는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에 밀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4]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민주-진보진영이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한 반면에 보수우파 진영은 상당히 사분오열 되어 있었다. 김영삼과 박근혜는 이회창을 명시적으로는 지지했지만, 과거 이회창의 3김 정치 청산 주장을 기억하고 있던 김종필을 비롯해서 이회창으로부터 배척 당했던 김윤환, 이한동[5]과 같은 우파 정치인들은 끝내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거나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이회창에게 팽당한 이기택 같은 꼬마 민주당 출신은 아예 노무현을 지지했다.
여기에 더해서 이회창을 대권후보로 만들어 줬던 '''대쪽''' 이미지 역시 아들의 병역 논란으로 인해 국민의 역린을 건드려 무너지게 되며 끝내 대권에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회창의 두 아들의 불법적인 병역기피 의혹은 '''결국 법적으로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되었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설훈, 김대업은 처벌'''받았다. 이회창의 장남의 경우 전혀 검증이나 검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남의 경우 몸무게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신장 조사만 이루어졌고 본인 여부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결은 정확히 설훈 김대업의 사칭과 허위성 판결이고 재판시 허위 판결은 실체적 진실 판결이라기보다는 위법성 인식에 관한 허위성 판결이다.
이회창이 당권을 장악하던 때까지의 한나라당은 수구적인 이미지가 다소 약한, 개혁지향적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노선의 정당이었다.[6] 김영삼을 대체하는 보수우파 정당 내 민주계 라인이었던데다 이회창 본인이 독재정권과 싸웠던 사람이라 빨갱이 몰이나 독재정권 찬양 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박근혜가 입당하고 나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대선에 출마하였던 우파 진영의 인사들과 비교하자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국가관 및 정책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박근혜, 홍준표, 황교안으로 갈수록 점점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나올 정도.(유승민은 일단 논외.)[7] 정치에 민감한 민주당 지지자이나 중도우파~우파 지지자들 사이에서 박근혜가 아니라 이회창 정도의 인물이 대통령이 됐으면 적어도 한나라당 등 보수 정당이 일본 자민당이나 남북전쟁, 링컨 대통령 암살 이후의 미국 공화당이나 19세기의 영국 보수당처럼 계속 장기집권했거나 최소한 보수가 제대로 망가지는 사태는 피할 수도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이에 대해선 보수우파의 치명적이고 영원할 약점인 "차떼기[8]총풍사건[9]과 97년 대선 당시 전두환과의 사면거래 같은 부패 스캔들은 도대체 뭐냐?"는 지적도 있다. 대권후보로서 한 삽질은 역대급으로 컸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회창 본인이 있던 시기의 한나라당은 개혁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당이었다고 하지만, 그 한나라당이 수구화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창에게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회창 본인이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데에는 민정계의 단합과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고, 1998년부터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에 맞서 기존 지지층의 재결합을 위해 본격적으로 민정계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독재정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정치인들을 무작정 내쫓고 탄압하며[10] 반감을 샀었다. 사실 당장 박근혜를 영입하고 공천을 준 사람이 이회창이다. 물론, 박근혜는 그때만 하더라도 당시 좋은 이미지였기에 김대중도 박근혜를 영입하려 애썼고[11], 박근혜가 권위주의 정권 출신을 정계에 다시 데려오는 것을 보고 독재정권에 반감이 있던 이회창이 갈등을 만들긴 했지만.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동진정책이 매우 거셌고 특히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정체성과 무관하게 세력 확장을 위해 민정계, 권위주의 정권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회창 본인이 있을 적에는 이회창의 강력한 당 장악력과 카리스마 및 독재정권에 비판적이던 새로운 민주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한나라당은 건실한 보수우파 정당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패배로 강력한 구심력이었던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한나라당은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당 주도권은 박근혜와 민정, 공화계에게 넘어가고 만다.[12] 남은 민주계 인사들도 차악으로 이명박을 지원했지만 이명박 정부를 겪으며 하나하나 이탈하게 되고[13][14] 박근혜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의외로 2010년대 중후반 시점의 한국에선 생각하기 힘들지만, 보수우파 정당 인물임에도 대선 당시에는 수많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지지선언을 받았다. 심현섭, 강성범[15],박성호, 김대희,[16] 이승철, 설운도, 이용식, 김숙, 홍서범, 조갑경, 변진섭, 박철, 김인문, 심권호, 유남규, 베이비복스(!)[17] 등이 있다. 지금은 유명 좌파 유튜버가 된 김용민이회창을 지지한 전적이 있다. @[18] 어느나라나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 연예계는 진보 성향이 강하고 보수 성향은 왠만한 거물이 아니고서야 갖고 있어도 숨긴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회창이 라이벌이었던 노무현처럼 독재정권에 맞서고 양심을 지키던 법조인이라는 전적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엔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보수 우파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연예인은 이순재, 송해, 최불암 정도의 거물급이거나 김흥국, 이덕화, 김영철처럼 재밌는 이미지로 보수우파 색채를 상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나타나기 힘들다는 걸 고려하다면 그만큼 이회창이 좌파적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우호적인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국정원 같은 공공기관을 악용했지만 김영삼과 이회창은 안기부/국정원을 민주화시켰고 압수수색이 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었다. 2010년대 후반 들어 보수우파 정당의 여러 문제점 속에서 YS-이회창이 계속 재평가되는 이유도 그들이 권위주의/반민주주의에 맞섰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3.1. 남북통일에 대한 발언과 통일 이후 주한미군에 대한 발언


1997년 대선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통일에 대한 반대의견이 50%를 넘는 여론에 따라 국민이 반대해도 통일을 추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국민이 통일을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의 질문에 대해선 현실적이지 못하며 국민들은 당연히 통일을 원한다. 부정적인 견해는 통일이 과연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지 통일후 우리가 겪어야 할 부담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지 통일의 본질적 의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남북통일 이후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지금까지는 단순히 남북대립이나 안보차원에서 미군주둔이나 철수문제를 다뤄왔는데 통일 이후엔 미군주둔의 필요 여부를 정치적 국제관계차원에서 봐야하며 동북아시아 세력균형과 생각해봐야한다. 이 지역 강대국인 미중일의 세력균형속에 중국미군의 주둔을 원할때가 있다."라고 밝혔다. 1997.10. 한겨레신문 이회창 후보 인터뷰

3.2.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과의 전두환 사면에 대한 거래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고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시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이) 대표-全(전) 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 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 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

4. 논란




5. 여담


  • 한나라당 총재를 지내던 2001년, 전주 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 주최 행사에 참여해 한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사
  • 2002년 대선 당시 시장을 찾아가 친서민 유세를 벌였는데, 한 상인에게 흙 묻은 생오이를 건네받고는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다. 인터넷에선 '이회창 흙오이 사건' 이라고 유명해졌으며 "분명히 봤다"라는 증언만 있을 뿐 진귀한 장면을 담은 사진 등 증거가 없어서 '인터넷 3대 미스터리' 로 화자되기도 한다. 이후 흙오이는 선거철만 되면 심심치않게 시장에 등장하는 정치인을 빗대거나, 정황은 알고 목격자도 많은데 찾을 수 없는 자료를 지칭하는 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기사 당시 대선 경쟁과정에 있던 상대당의 대변인의 발언과, 수많은 기사에서 보듯이 카더라 통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날짜와 흙오이를 먹기 직전 사진까지는 발굴되었다. #
  • 2002년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5월 15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를 방문해 일일교사로 강의를 했다. 350여 명의 여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 시작을 농담으로 해서 분위기를 풀어보자고 한말이 ""여러분들을 보니 명랑하고 '빠순이 부대'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당에도 많아요. 지방 돌아다녀보면 오빠부대 많아요. (저는) 오빠가 아니라 '늙빠'지. 늙은 오빠….".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그냥 준비해온 강연을 하고 마쳤다.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요청했으나 얼마뒤 새어 나가서 세상에 공개되었다. 알고보니 정병국 의원이 어린 여학생들 눈높이에 맞춘다고 써줬다고 한다. 이회창은 '10대 나이의 오빠부대'를 뜻하는 말로 썼는데, 학생들은 당연히 '과도한 팬질을 하는 여학생'으로 그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빠순이'라는 단어를 전자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정병국과 이회창 뿐일 것이다. 참고로 빠순이는 '술집에 다니는 여자'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런 의미는 정병국 나이대나 알만한 은어이지, 당시 여고생들이 알 단어는 아니기 때문에 여고생들이 이런 의미로 알아 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노무현에겐 '노사모'가 있었더라면 이회창에겐 '창사랑'이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이회창의 정치 입문과 동시에 천리안·나우누리 등 포털 사이트에 처음 생겼다. 기사 하지만 지지자 연령대가 다소 높은 탓이었는지 노사모만큼의 활동량은 보이지 못했고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노무현 지지세가 강했던 젊은층 사이에서는 '이회충', 이회창 지지자들을 '회충알'이라고 부르면서 비토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존속은 되었는지 17대 대선에서 정계복귀에는 제법 역할을 했다.
  • 지금도 그렇지만 어떠한 사이트를 들어갈 때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창 닫기"라는 버튼이 있다. 그런데 당시 대선 정국 때 보수 언론사들의 사이트의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이 버튼의 문구가 "창 한 번만 띄워주기"로 바뀌었다. 물론 대선이 끝나고 "창 닫기"라는 문구로 돌아왔다.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이회창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미니홈피에 유세문구 중 하나로 킹왕昌!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킹왕짱은 2007~2008년 전후로 인기 좀 있었던 유행어였다.)게다가 이 무렵엔 각 커뮤니티와 젊은층 사이에서 反MB정서가 만연해 있었는데, 이회창은 이명박에 비하면 당시엔 상대적으로 수구적이고 부패적인 색채가 많이 옅어보였고 대쪽 이미지가 돋보여서 이회충이라며 욕을 먹었던 16대 대선에 비하면 젊은층 사이에서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20대는 물론이고 3040대에서도 꽤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19] 그러나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에 대해 전두환과 직거래를 했던 것을 생각해보자.[20][21]
  • 08년 국회의원 출마 당시 재산신고 때 무려 채무만 120억 원을 신고한 바 있다. 기사 당시 해명에 따르면 이는 대선 공탁금 등을 환급받지 못한 07년 말 기준이라 그렇고 이후 환급받아 남은 빚은 20억 원 정도였다고. 그 직전인 07년 대선 출마 당시엔 재산이 43억여 원이었고, 공직자로서 마지막으로 재산 신고, 공개를 했던 2011년 말에는(18대 국회 임기 말엽)에는 약 30억 8천만 원 정도의 재산을 신고했다. 기사 위 해명을 믿는다면, 18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재산이 약 50억 증가한 셈이다.
  • 2007년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2002년에는 이효리를 꼽았었다.
  • 2002년 대선 때 모 산부인과 의사가 '이회창 아들처럼 179cm의 키에 45kg의 몸무게를 지닌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내용의 <179cm 45kg 인간 미이라>라는 책을 출간했다가 공직선거법위반죄로 유죄판결(집행유예)을 받은 바 있다.#
  • 롄잔: 대만의 정치인인데, 2등을 여러 번 하는 등 정치적 행보가 이회창과 흡사하다. 항목 참고.
  • 힐러리 클린턴, 리오넬 조스팽, 앨 고어: 셋 다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했지만, 끝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회창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보수 성향의 이회창과는 달리 이 셋은 진보 성향이다.
  • 김종필: 원조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 애당초 김종필 쪽이 먼저다. 국무총리 후 정치, 충청권의 지지를 등에 엎은 것 등 이회창이 김종필을 따라갔다.
  • 이주일 - 이회창과 목소리가 상당히 비슷하다.
  • 가톨릭 신자이고 보수주의자인 것과는 별개로 동성애에 대해선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2001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어준 총수가 '국방부 장관이 동성연애자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국방부 장관이 동성연애를 하는데 군의 전력이 약화가 되지 않는다면 딱히 문제될 것 없지 않느냐'는 답변을 했다. 김어준은 이 답변을 듣고 공적 임무와 사적 자연인 사이의 경계에 대한 기준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는 평을 내렸다. 괜히 이회창이 진보적인 유권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인식이 있던 게 아니었던 셈.
  • 대선 첫 출마인 97년 당시에는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는데 이 시절에도 "사회운동화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으나 현재의 정치인들보다도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주었다.
  • 이회창의 동생인 경제학자 이회성은 2015년 10월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의장으로 선출되어 재임중이다. 이는 한국인이 국제기구의 수장이 된 5번째 사례이다.
  • 이회창의 정치경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박근혜를 정치계에 입문시킨 것이다. 박근혜가 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좋은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흔쾌히 입당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이회창의 1인 지배하에 있다면서 2002년 대선 직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는 뒤통수를 친다.
  •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경기고등학교 졸업생인 점, '재조'법조인[22] 출신인 점, 국무총리를 역임했다는 점, 60대 초반에 총리직을 마치고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는 점, 정치 신인 상태에서 당권을 잡았다는 점, TK 출신이 아닌데도 TK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 보수층에 어필할 신중하고 원칙적이며 안정감 있는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 등 공통점이 많다. 다만 이회창은 금수저 출신이나 황교안은 흙수저 출신(피난민 출신)이라는 점, 이회창이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 신한국당은 집권여당이었으나 황교안이 정계에 입문한 지금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지지도가 높지 않다는 점, 민정계와 민주계 모두의 지지를 받았던 이회창과 달리 황교안은 뚜렷한 당내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 차이점으로 꼽힌다. 기사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으로 이회창은 '원칙과 소신'으로 기존 권위에 도전한 '대쪽 총리'였지만 황교안은 '안정과 순종'으로 기존 권위에 도전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결국 황교안 대표가 2020년 총선에서 180 대 103이라는 보수정당 초유의 참패를 당하고 사퇴하면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워졌다.
  • 한대현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처남이다.

5.1. 이인제와의 관계


[image]
'''↓'''
[image]
'''↓'''
[image]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둘의 관계는 3개의 짤방으로 요약 가능하다.'''
15대 대선 당시 이인제는 최연소 노동부 장관에 이어 민선 초대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서 떠오르는 정치인으로서 주가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이는 이회창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적어도 대선 이전까지는 같은 당원으로서 교류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선술한 15대 대선의 과정 속에서 둘은 경쟁하게 되었고 네거티브를 퍼붓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위에도 서술했듯 결과는 둘 다 낙선하여 결국 상처만 남긴 싸움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인제는 '피닉제'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성공적인 철새테크를 탔고, 5년이 지난 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 되어 네임밸류를 밀어붙이며 경선 초창기엔 독보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한나라당 경선을 통과한 이회창과 리턴매치가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이인제는 노무현의 영남을 중심으로 강세를 몰아친 노풍을 이기지 못하여 경선에서 떨어지며 무산되었다. 낙선한 이인제는 탈당하여 자민련으로 갈아타 과거 행적에 대해 거듭 사과한 뒤 이회창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이회창은 낙선했지만...
다시 5년이 흘러 17대 대선 시즌이 되자 새천년민주당[23]으로 돌아간 이인제는 출마를 선언하며 정식후보가 되어 기호 4번을 부여받았다. 초반에는 출신지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10%를 상회하는 무시할 수 없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회창이 출마하면서 판세는 완전히 달라졌다. 상대적으로 네임밸류가 컸던 포스를 몰아붙이며 충청도의 지지기반을 전부 흡수해 버린 것이다. 이로서 이인제의 지지율은 소수점대로 폭삭 무너졌으며, 이회창은 무소속 후보로서 중도층을 어필하며 15.1%의 득표율로 마감한 반면 이인제는 손써보지 못한 채 0.7%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굴욕(?)을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탈당하여 무소속 국회의원 자리를 지낸 이인제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이 이끄는[24][25] 자유선진당에 입당했다.[26] 이로서 껄끄러웠던 관계였던 둘의 사이는 개선되었고 14년 만에 동지로 회복되었다. 어쨌든 이인제로선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생활을 이어갔고 이후 이름을 바꾼 선진통일당 대표로도 활동했다.
이회창은 박근혜 대선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돌아갔고, 이인제도 이끄는 당을 새누리당과 합당시키면서 둘은 새누리당에서 한솥밥을 먹는 신분을 이어갔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인제는 정계활동을 이어나가는 반면에 이회창은 은퇴하며 평당원으로만 지낸다는 것. 악연과 인연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 정말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1997년여당 신한국당에서 민주계의 대표주자로서 대선후보로 달리던 이회창은 2017년에는 유승민 지지를 선언하며 바른정당으로 옮기고, 민주계의 대표주자로서 신당을 창당하여 독자 출마를 감행했던 이인제가 자유한국당에서 대권주자로 달리다 경선 탈락했다. 이후에는 둘 다 정계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데, 이회창은 2012년 이후 사실상 정계 은퇴를 했고 이인제는 충남도지사 낙선과 논산시·계룡시·금산군 경선 탈락으로 정치 인생이 져물어가고 있다.

6. 이회창계




7. 저서


2017년- 이회창 회고록 1권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34978817&orderClick=SPY
2017년- 이회창 회고록 2권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34978824&orderClick=JAj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783,730 (34.52%)'''
'''당선 (1번)'''
'''초선'''[27]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9,935,718 (38.74%)
낙선 (2위)

1999
6월 재보궐선거(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송파 갑
'''42,901 (61.47%)'''
'''당선 (1위)'''
'''초선'''
[28][29]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7,365,359 (38.85%)'''
'''당선 (1번)'''
'''재선'''[30]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1,443,297 (46.58%)
낙선 (2위)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3,559,963 (15.07%)
낙선 (3위)
[31][32]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홍성·예산

'''49,908 (60.99%)'''
'''당선 (1위)'''
'''3선'''
'''역대 선거 벽보'''
<^|1> {{{#!wiki style="margin: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1999년 6월 재보궐 (서울 송파구 갑)
16대 대선
17대 대선

18대 총선 [[홍성군·예산군|{{{#000000,#fff (충남 홍성군·예산군)
]]

}}}}}}}}}
  •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승을 기록하였으나, 그와 대조적으로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패를 기록하였다.[33]

9.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8 - 1996
정계 입문

1996 - 1997
입당

1997 - 2007
합당[34]

2007 - 2008
17대 대선 출마를 위한 탈당

2008 - 2011
창당

2011 - 2012
합당[35]

2012
탈당

2012 - 2017
복당
정계 은퇴

2017
바른정당 합류를 위한 탈당

2017 - 2018
입당

2018
합당[36]

2018 -
탈당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국회의원 지역구 및 정당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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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부공 24세손, 시조 41세손 '會'자 항렬.[2] 김종필, 이해찬, 정세균의 경우엔 총리+당직 혹은 총리+국회의장 직을 지냈을 뿐이라 3부는 물론 5부 요인인 중앙선관위원장, 문민정부의 첫 감사원장까지 지낸 이회창의 역임직은 전무후무하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감사원장으로서의 이회창은 역사상 한 획을 그었다. (중앙선관위원장도 6공화국 최초의 위원장.)[3] 고작 1.6%, 2.3% 차이로 낙선하였다.[4]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40만 표차로 이회창을 이겼는데, 여기에는 DJP 연합으로 인한 충청권에서의 우세와 이인제가 500만 표를 들고 나간 것이 크게 작용했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김대중이 이회창을 이기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5] 단독출마를 한다.[6] 지역 기반으로 보자면 TK와 PK 모두 해당한다. 권위주의, 민주화 세력이라는 구분은 지역기반이 아니므로 TK, PK 구분과 연계시켜 분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7] 참고로 유승민은 이회창이 발탁한 인물이며, 유승민은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이회창의 지근거리에서 정책개발 및 연설문 작성 등을 도왔던 인물이다. 이회창은 제19대 대선에서 유승민 지지를 선언하며 바른정당에 입당하기도 했다.[8] 이회창을 위시한 한나라 당의 선거 캠프에서 선거 자금을 차째로 뇌물로 받은 것이 드러난 사건. 허나, 상대 후보였던 노무현도 불법자금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차떼기의 스케일이 너무 컸다.[9]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에다 무력 시위를 할 것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낸 게 드러난 사건[10] 그 결과 각각 공화계와 민정계의 리더 노릇을 했던 김종필박태준은 김영삼에게 토사구팽 당한 뒤에 김대중 지지를 선언하며 일명 '''DJT 연합'''을 결성, 후임인 이회창의 한나라당을 공격하기에 이른다.[11] 김대중과 박근혜는 과거가 껄끄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사이가 어느정도 화목했다. 실제로 동교동계 상당수가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을 정도'''였다.[12] 두번째 대선패배 이후, 즉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의 대표가 순서대로 최병렬-박근혜-강재섭이다. MB는 이런 당내의 열세를 민선 3기 서울시정의 성과를 통한 당 바깥의 일반 시민의 지지로써 대선 경선 여론조사에서 뒤집은 것이다.[13] 이명박 또한 민정계와 공화계에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14] 일부는 나중에 문재인을 지지하게 된다.[15] 현재 강성범은 조국 수호 집회에 참석했을 만큼 친민주당 성향의 인물이다.[16] 심현섭이 주도한 이 흐름에 김철호·이병진·황승환·이태식·김숙·김미진 등이 참석했다. #[17] 물론 베이비복스는 항목에서도 보듯이 소속사 DR뮤직에 의해 동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18] 본인은 20대에 보수당 지지자였으면서, 이명박 지지하는 20대를 개새끼라 폄훼하는 내로남불을 시전하였다. [19] 아이러니한 것은 60대 이상에서 가장 적은 지지율을 보였다.[20] 단 이때는 이인제, 김대중, 이회창 라인업의 유력 대선 후보 모두가 전두환의 사면을 공약으로 걸었었고 맨처음에 전두환 사면을 정부에 건의한 것은 신한국당의 김윤환등 민정계인사들이 신한국당 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가며 tk 정체세력들의 공약인 전두환 사면을 이회창에게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21]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5839_19482.html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최종 판결후 사면 문제 제기[22] 판사+검사.[23] 당시에는 열린우리당과 갈라진 뒤로 주요인사가 전부 빠져나가 지리멸렬해진 상태였다.[24] 입당한 2011년 당시에는 이회창은 이미 총재직에서 물러난 상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지만...[25] 자유선진당국민중심연합과 합당할 때 동시에 합류했다.[26] 참고로 이인제는 자민련과 자유선진당과 합당한 국민중심당에 잠시 몸담갔던 시절이 있었다.[27] 1997년 11월 의원직 사퇴 (대선출마)[28] 전임자 홍준표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29] 15대 국회의 보궐선거이다. 따라서, 15대 총선 당선과 99년 상반기 보궐선거는 '''똑같은 15대 국회의 선거이므로 국회의원 당선증이 두 장이더라도 의원 선수는 하나만 올라간다.''' 유사한 사례로 유승민 의원이 있다.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후 비례대표 사표를 내고 대구 동구 을 재보선에서 당선되었는데, 똑같은 17대 국회의 선거들이므로 의원 당선증이 두 장이더라도 의원선수는 하나만 올라간다. 실제로 유 의원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5번 당선'''되었으나 이 사유로 '''4선 의원'''으로 취급된다.[30] 2002년 11월 의원직 사퇴 (대선출마)[31] 국민중심당과 선거연대[32] 민주화 이후 무소속 대선후보 중 역대 최대 득표율[33] 다만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1.6%, 2.3%로 접전이였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소속 최고 득표율과 동시에 15%를 넘겼다.[34]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35]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36] 국민의당과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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