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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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holas Ray'''
(1911. 8. 7 - 1979. 6. 16)

연극(그리피스)이 있었고, 시(무르나우)가 있었고, 회화(로셀리니)가 있었고, 무용(에이젠슈타인)이 있었고, 음악(르누아르)이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도 있을 터이다. 영화는 곧 니콜라스 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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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뤽 고다르[1]

1. 개요
2. 설명
3. 기타
4. 연출작 일람


1. 개요


미국의 영화 감독. 1911년 생으로 50년대에 활발히 활약했다. 1949년 <그들은 밤에 산다>를 내놓으며 감독 데뷔, 데뷔작부터 단번에 명감독 라인에 입성, 이후 작품들로 느와르 장르의 대가가 되지만 당대 감독들이 으레 그렇듯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아카데미 후보로도 몇번 지명 못 받았다.

2. 설명


어린 시절에는 라크로스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자라났다. 레이는 어린 시절부터 술이나 약물에 손을 대던 불량 학생이었으며 성적도 그닥 좋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 연극 활동을 하다가 RKO 영화사에 의해 픽업되어 1947년 <그들은 밤에 산다>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주로 누아르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 1955년에는 제임스 딘을 주연으로 하여 시네마스코프 비율의 영화인 <이유 없는 반항>을 만들었으며, 이는 레이의 대표작이 되었다.
1960년대 즈음 레이의 고질적인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자 그는 결국 <북경의 55일> 촬영 중 해고된다. 그 뒤 무직으로 생활하다가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강의하게 되고, 점차 재기하게 된다. 이 시기 레이는 빔 벤더스의 <미국인 친구>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제자들의 조력을 통해 신작으로 실험 영화인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 없어>를 감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속된 건강 악화 때문에 레이는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 없어>의 편집을 미처 끝내지 못하였고[2],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이던 빔 벤더스와 함께 찍은 <물 위의 번개>를 마지막으로 하고, 레이는 1979년 사망하였다.

3. 기타


오슨 웰스, 앨프리드 히치콕 등과 함께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감독들 가운데 하나이다. 카예 뒤 시네마의 '작가정책'의 주된 수혜자였으며, 특히 장 뤽 고다르프랑수아 트뤼포 등이 그를 존경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비슷한 시대의 거장 영화감독인 조지프 로지[3]와는 같은 라크로스 출신이며,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4] 그렇지만 딱히 친분은 없던 걸로 알려져 있다.
당대에는 공개적인 양성애자로 유명했다. <이유 없는 반항>의 촬영 중에는 주연인 제임스 딘, 나탈리 우드, 살 미네오 모두와 염문이 돌았을 정도.
장 뤽 고다르는 니콜라스 레이의 비터 빅토리에 관한 글에서 '영화는 곧 니콜라스 레이다'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헐리우드 인사들 사이에서도 최악의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2살 어린 여배우 글로리아 그레험과 두 번째 결혼을 해서 아들(?) 티모시 레이를 낳았지만 4년만에 이혼을 하게 되는 데, 이혼사유가 글로리아가 전처 소생인 큰아들 앤터니 레이(당시 15세!)와 불륜관계인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글로리아는 니콜라스 레이와 이혼한 지 8년 후, 앤터니 레이와 결혼해서 그의 두 아들을 낳았다. 의모와 의붓아들의 결혼생활은 14년 뒤 이혼을 하지만, 티모시 레이에게 글로리아는 엄마이자 형수가 되고, 앤터니는 형인 동시에 의붓 아버지가 되는 셈. (더군다나, 앤터니가 티모시의 친아버지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 헐리우드 사상 전후무후한 스캔들이다.

4. 연출작 일람


[1] 출처[2] 엄밀히 말하자면 재편집을 완료하지 못한 것이다. 일차적인 편집본은 레이 생전에 완성되었었지만 그는 해당 편집본에 불만족을 표했고, 영화는 오랜 기간 재편집을 거쳤다.[3] <하인> 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4] 레이는 불량아였지만 로지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