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로셀리니

 

'''로베르토 로셀리니
Roberto Rossellini
'''
'''국적'''
이탈리아 [image]
'''출생'''
1906년 5월 8일 이탈리아 로마
'''사망'''
1977년 6월 3일 (향년 71세) 이탈리아 로마
'''신장'''
178cm
'''배우자'''
아내 아시아 노리스 (1934년 – 1936년)
아내 마르셀라 드 마치스 (1936년 – 1950년)
아내 잉그리드 버그먼 (1950년 – 1957년)
아내 소날리 센로이 다스굽타 (1957년 – 1977년)
'''자녀'''
아들 마르코 로마노 로셀리니 아들 렌조 로셀리니 아들 레나토 로베르토 기우스토 기우세페 로셀리니 이사벨라 로셀리니 잉그리드 로셀리니 아들 길 로셀리니 라파엘라 로셀리니
'''직업'''
영화감독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작품 목록
5. 수상내역


1. 개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네오리얼리즘의 창시자이자 모던 시네마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2. 생애


190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건설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자주 접하면서 성장했고, 이후 음향 작업 등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그가 데뷔했던 시점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이 이탈리아를 장악했던 무렵이었으며, 이 당시 로셀리니는 활동을 위해 당원증을 발급받았으며, 파시즘 선전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1] 로셀리니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된 것은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즘 정권이 몰락한 이후였다. 파시즘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틈틈이 도둑촬영을 하며 제작한 <무방비도시>[2]로 명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무방비도시>는 비전문 배우의 기용[3], 핸드헬드 등 네오리얼리즘의 특징을 대다수 담고 있던 작품으로, 루키노 비스콘티의 <강박관념>과 더불어 최초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로 손꼽힌다. 로셀리니는 이 작품과 함께 그는 세계적인 유명 감독으로 떠올랐다.
이후 <전화의 저편>과 <독일 영년>으로 대표적인 유럽 영화감독으로 떠오른 후, 로셀리니는 국제적인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당대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배우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이 <전화의 저편>을 보고 매혹되어 로셀리니에게로 달려간 것. 당시 버그만과 로셀리니 모두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후 버그만은 로셀리니와 결혼하고 그의 페르소나가 된다. 로셀리니는 이 시기 <스트롬볼리>, <유로파 51> 등 네오리얼리즘에선 살짝 멀어졌지만 대신 모던 시네마의 시대를 개막하게 된다. 특히나 <이탈리아 여행>은 에릭 로메르장 뤽 고다르 같은 카예 뒤 시네마누벨바그 영화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를 언급하라 하면 항상 언급되는 편이다.
1957년 로셀리니는 여러 트러블로 잉그리드 버그만과 이혼한다. 그는 동해 자와할랄 네루의 초청을 받아 다큐멘터리 <인디아>[4]를 만들고, 1959년엔 <로베레 장군>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로셀리니는 말년에 들어 TV라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텔레비전을 위해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나 <블레즈 파스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로셀리니의 이전 영화와는 다르게 미니멀하고 실험적인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로셀리니의 국제적 명성은 전성기에 비해 많이 사그라들게 된다.[5][6]
로셀리니는 1977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로셀리니와 버그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배우로 유명하다. 또한 로셀리니의 형제인 렌초 로셀리니는 작곡가로서 로셀리니의 여러 영화에 음악을 제공하기도 했다.
대중적으로는 잉그리드 버그만과의 스캔들로 유명한 편이다. 그렇지만 로셀리니가 버그만이 다른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는 것을 막고,[7] 외도까지 저지른 것 때문에 결혼 생활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히치콕이나 브레송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준 감독들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나 장 뤽 고다르가 그를 가장 존경했다고 하며, 마틴 스콜세지[8] 비롯한 후대 감독들 중에도 그의 지지자가 많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태그 갤러거[9] 또한 저명한 로셀리니 지지자로 이름이 높다.

4. 작품 목록


대표작만 나열했다.
  • <무방비도시> (1945)
  • <전화의 저편> (1946)
  • <독일 영년> (1948)[10]
  • <스트롬볼리> (1950)
  •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1950)
  • <살인 기계> (1952)
  • <유로파 51> (1952)
  • <불안> (1954)
  • <이탈리아 여행> (1954)
  • <화형대의 잔 다르크> (1954)
  • <인디아> (1959)
  • <로베레 장군> (1959)
  • <비바 이탈리아> (1961)
  • <바니나 바니니> (1961)
  • <검은 영혼> (1962)
  •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1966)
  • <소크라테스> (1971)
  • <블레즈 파스칼> (1972)
  • <메디치의 시대> (1973)
  • <메시아> (1975)

5. 수상내역


  • 제1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 (1946)
  • 제23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1959)
  • 제23회 베니스영화제 OCIC-상 (1959)

[1] 로셀리니 본인은 이 시기를 흑역사라고 생각했는지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훗날 <무방비도시>에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2] 이 영화의 각본은 또다른 네오리얼리즘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작품이다.[3] <무방비도시>에 주연으로 출연한 안나 마냐니는 훗날 스타 배우로 떠오르고 아카데미상까지 받는다.[4]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이지만 조너선 로젠봄 같은 몇몇 평론가는 로셀리니의 최고작으로 이 작품을 꼽기도 한다.[5] 이 때문인지 로셀리니의 후기작은 DVD 등을 찾기가 많이 어려운 편이다. 그나마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DVD가 나와있다.[6] 이 시기의 로셀리니 영화들은 대중이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진 편이 아니나 태그 갤러거나 정성일 등과 같은 로셀리니 지지자들에게선 후하게 대접받는 편이다.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같은 경우 웨스 앤더슨이 좋아하는 영화기도 하다.[7] 실제로 버그만은 로셀리니와의 결혼 생활 중에는 로셀리니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예외가 있다면 장 르누아르의 <엘레나와 남자들> 정도.[8] 흥미롭게도, 그는 로셀리니의 딸인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결혼하기도 했다.[9] 그는 로셀리니에 대한 두꺼운 전기를 쓰기도 했다.[10]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 <독일 영년>을 묶어 '전쟁 삼부작'이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