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

 


크림 반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반도이면서 북쪽은 우크라이나, 동쪽은 러시아와 맞닿아있다.
러시아어: Крым
우크라이나어: Крим
영어: Crimea
1. 개요
2. 행정
3. 역사
3.1. 고대
3.2. 중세
3.3. 근대
3.4. 소련 시대
3.5. 우크라이나령 시대
3.6. 러시아의 크림 합병
4. 인문, 지리
5. 관광


1. 개요


동유럽에 있으며 흑해, 아조프 해에 면한 반도. 2014년 크림 위기러시아에 편입되어 러시아가 실효 지배 중이지만 일부 친러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여전히 명목상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보고 있다. 중심도시는 가운데쯤에 있는 심페로폴(Симферополь)이며 크림타타르어로는 아크메스지트(Aqmescit, 하얀 모스크)라고 한다. 동양에서는 음차하여 가리미아(哥利米亞) 반도라고 했었다.
이곳의 이름은 영어식인 '크리미아(Crimea)'와 러시아/우크라이나식인 '크림(Крым/Кри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크리미아', '크림' 두 표기를 모두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스페인'과 '에스파냐', '제노아'와 '제노바', '베니스'와 '베네치아', '플로렌스'와 '피렌체'가 모두 혼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
유지방을 가공한 식품인 크림과는 전혀 상관없다. 이 쪽의 스펠링은 Cream으로, 발음만 비슷하지 아예 다른 단어이다.
반도 전역의 면적은 2만 7064 km2로, 한국의 경상도보다 약간 작은 면적이다. 고대에는 그리스인고트족 같은 민족이 거주했고, 중세부터 근대에는 크림 칸국의 영역이었으며 18세기 러시아 제국에 정복된 후 러시아인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해오고 극소수 남아있던 그리스인들과 고트계 주민들은 우룸인으로 동화된 뒤에 러시아인으로 동화되었다. 크림 칸국 시절부터 러시아와 악연이 많던 크림 타타르인들은 대거 추방당했다. 1954년 소련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내부 행정구역 조정으로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편입시켰고,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내부의 경계선이 독립국 국경이 되면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일부가 됐다가 2014년에 투표를 거쳐 다시 러시아로 옮겨갔다.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특별시와 크림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면적은 2만 6100㎢이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235만(2007년 기준)으로, 크림 (자치) 공화국에 197만명이 살고 세바스토폴 특별시에 38만 명이 산다. 수도 심페로폴의 인구는 2013년 기준 36만으로, 세바스토폴과 비등하다.
1945년 얄타 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2. 행정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던 당시에는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특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2014년 크림 위기의 와중에 독립을 선포하면서 크림 반도는 독립국인 '''크림 공화국'''을 선포하고 세바스토폴은 크림 공화국 내의 특별시가 되었다. 러시아의 행정 구역으로 가입하는 조약을 맺으면서 세바스토폴이 빠진 지역이 러시아의 구성 공화국인 크림 공화국이 되고 세바스토폴은 연방시가 되었다. 조약이 비준되면서 러시아는 크림 반도 전체를 크림 연방관구로 지정하고 후에 남부 연방관구에 편입했다.
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합병을 러시아의 '''무력 점령'''으로 간주하며, 2014년 <우크라이나 일시적 점령지에서 인권과 자유 제공에 관한 법> 을 제정, 자국의 영토라고 간주하고 있다.

3. 역사



3.1. 고대


크림 반도의 역사는 고대부터 상당히 역동적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의 식민 도시 케르소네소스가 무역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 지역에 식민 활동을 한 그리스인들은 도자기에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담아서 이를 현지인들의 과 교환하는 무역을 하며 평화롭게 교역하였다[1]. 기원전 5세기경 크림 반도 및 케르치 해협 우안 지역에 스키타이계와 그리스계를 중심으로 보스포루스 왕국이 성립되어 번영하였으며 한 때는 폰투스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가 다시 회복되었고 결국에는 로마 제국의 종주권하에 놓이게 되면서 지중해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3.2. 중세


서기 340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로마의 지배권이 상실되었고 370년 훈족의 침입을 받은 이후 명맥이 거의 끊기는 듯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 당시 동로마 제국이 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반도 중북부는 고트족에 이어 볼가 불가르, 그리고 하자르 칸국이 지배하다가 10세기 키예프 공국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동로마의 영향을 받고 동방 정교로 개종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동방 정교를 받아들이고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의 동생인 황녀 안나와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지역이 현재의 세바스토폴 근처인 케르소네소스이며, 이런 까닭에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화되기 이전의 크림 반도는 정교회와 러시아 국민의 성지 역할을 했다. 13세기 무렵에는 멀리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화국에서 카파 항을 식민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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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공국의 붕괴 이후 이 지역 대부분은 킵차크 칸국에 속했으며, 킵차크 칸국이 와해되면서 1430년 크림 칸국이 독립했다. 제노바 공화국과 크림 칸국, 그리고 동로마계 국가인 테오도로 공국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맞섰는데, 1475년,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와 제노바의 식민지를 전부 점령하고 테오도로 공국도 멸하고 크림 칸국도 복속시켜 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8세기, 크림 칸국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 정복하면서 이후 쭉 러시아령이 되었다.
지배층인 칸과 그 일족은 몽골 출신이었지만 피지배인은 튀르크계 부족들로 구성되었고 그것도 얼마 뒤에는 둘이 서로 섞여버려서 크림 칸국은(사실은 시조인 킵차크 칸국부터 이미) 이미 사실상 튀르크계 국가였으며, 오스만 제국 시기 번국으로 지내다보니 오스만 투르크와의 동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오늘날의 크림타타르인의 언어는 터키어와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크림 칸국은 그냥 속국이 아니라 만약에 오스만 제국의 제위가 끊어져 버린다면 크림 칸국의 칸이 오스만 제국의 제위를 잇는 조건이었다(!) 거의 청나라내몽골 수준. 혈통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많이 동화되었다. 노예 납치가 주 산업이었던 크림 타타르인들이 오늘날은 왜 우크라이나인과 외모가 거의 똑같은지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아제르바이잔어와 터키어보다 크림타타르어와 터키어가 더 가까울 지경이니 할 말 다했다. 사실 단순히 거리만 따지면 크림 반도와 오스만 제국 본토가 제법 멀어 보이지만, 흑해 덕분에 서로 접근이 편리했던 영향도 있다. 동로마 제국 시절에도 제국 도시 케르손이 있었고 폴리스 시대에도 흑해를 통해 그리스 문화권과 긴밀히 교류해 왔음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으로 크림 반도와 그리스, 발칸, 소아시아 문화권과 아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냥 타타르어도 같은 튀르크 어군이나 크림 타타르어는 오우즈 어군, 카잔 타타르어 등 나머지 타타르어는 킵차크어군으로 전혀 다르다.

3.3. 근대


그러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흑해 영해상을 통해 접경하게 되고 이 때문에 2번에 걸쳐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으나 여전히 분쟁 지역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부동항 확보를 위한 1차 목표가 바로 크림 반도였다. 당시 제정 러시아가 제국주의 뽕(...)에 거하게 취해 있어서 크림 진출은 부동항이 주 목적이었지만, 크림 반도가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과 동로마가 제대로 개척해 놓은 땅이고, 바로 동로마 제국을 통해서 키예프 공국이 정교회로 개종함으로써 러시아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점[2]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한 진출이었다. 전략적 거점이거니와 역사적 의미까지 있고 제국주의까지 동반되니 눈에 불을 켜고 점령하려 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그리고 영국프랑스서유럽 열강들은 이런 러시아의 남진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다. 또한 직접적 이득이 없던 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 이것이 크림 전쟁이다.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고 러시아는 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해 1856년 파리 조약을 통해 흑해 일대의 통제권을 잃고 남진이 저지되었다.
이 전쟁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영국의 여성 간호사 부대를 창설해 전장에서 간호병으로 활약해 현대전 간호병의 전략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의미에서 크림 전쟁은 근대 전쟁과 현대 전쟁의 경계선을 그은 전쟁이라고 평가한다.

3.4. 소련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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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말의 상황. 사실 이 해만 해도 엄청난 격동이 벌어졌기에 지도가 조금씩 다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러시아 혁명 이후 크림 반도 지역과 그 북부의 오늘날 헤르손(Kherson) 주 지역은 크림타타르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독립했으나, 1921년 소련에 편입되었다. 이 때 헤르손 지역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고, 크림반도만이 소련 내의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Крым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Совет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 되었다.
독일군이 소련에서 얼추 물러난 1944년 5월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나치 점령기 당시에 자행된 민족 차원의 대 소련 반동행위에 대한 보복조치"를 운운하면서 크림 타타르인들을 전원 저 멀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버린다.[3] 사족이지만 이 때 크림반도 전체에 흩어져 있는 20만 명에 달하는 타타르인들을 전부 화물열차편에 잔뜩 쑤셔 넣어서 출발시키기까지 딱 3일 걸렸다고 한다.[4] 기차 안에서만 최소 7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2천 4백여 가구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는데, 그 과정에 굉장히 의심쩍은 구석이 있어서 '''가족끼리 생이별하라고 고의적으로 찢어놓았다'''는 음모론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사람들은 1980년대가 다 돼서야 고향 땅으로 돌아올 권리를 되찾게 된다. 크림 타타르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노래의 뮤직비디오. 우크라이나는 2016년 5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61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위 곡을 출전시켰다.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과 소아시아 모든 나라의 지상파 방송에서 프라임타임에 생중계되는 행사임을 감안해도 현재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반러감정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부분. 우크라이나인들이 크림 타타르족에 대한 인식도 엄청 좋은 건 아니다만... 하지만 현재 크림 타타르인들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줄어 존재감 자체가 줄어들었다. 미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지와 비슷한 셈.. 게다가 남아있는 사람들도 우크라이나인들과 혼혈이 많이 이루어진 관계로 종종 동족 의식을 보일 때도 있다. 전전해와 전해 유로비전 콘테스트에서 러시아 가수들에 대한 야유를 생각해보면 지금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이미지가 매우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림 타타르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끝난 후 이 지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서 누리던 소수민족 자치공화국 지위를 잃고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개 주로 격하당했다가, 19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5] 3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주민은 러시아계 위주인데도 소속은 우크라이나인 모순적인 상태가 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같은 소련 안에서 행정구역을 개편한 것에 불과해 큰 의미가 없는 조정이었지만 소련 해체 이후 소련 내부 경계선이 국경선으로 변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3.5. 우크라이나령 시대


소련이 해체될 무렵이던 1991년 1월, 러시아계 주민들의 요구로 다시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이 되었고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 크림 자치 공화국(우크라이나어: Автономна Республіка Крим, 러시아어: Автономная Республика Крым)이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 워낙 미련이 남아 있었다. 특히 크림 반도에 거주하던 러시아계 주민들은 1992년 독자적인 헌법 제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따로 놀려고 할 정도로 친러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고,[6] 트란스니스트리아같이 러시아군이 개입할 경우 사실상 러시아 통제 아래 독립국으로 분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옛 소련 해군에 속했던 흑해함대 관할 등의 문제를 두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조율 중이던 러시아 정부 측에서는 우크라이나를 크림 반도의 관할 문제로 자극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흑해함대는 1997년 우크라이나 해군과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로 분할되기 전까지 러시아, 우크라이나 공동관할이었다. 무엇보다도 1994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참여한 부다페스트 협약(Budapest memorandum)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영토 주권을 보장'''하기로 했으므로 협약을 부득이 어겨가면서까지 크림 반도를 차지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1997년 우호친선조약을 통해 흑해함대를 양국 해군 관할로 분할하고, 세바스토폴에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는 것이 허락되는 대신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인정했다.

3.6. 러시아의 크림 합병


2013년부터 2014년 사이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되고 반러, 친서방 성향의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지원을 당시 러시아에서 추진하고 있던 유라시아경제연합의 관세동맹으로 유도시켜 '''유라시아 연합'''을 보강시키려 하고 있었던 터라, 우크라이나 정부의 정권교체는 곧 '''세력권 이탈'''로 해석했다. 나름대로 우크라이나를 끼어넣으려 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공들이던 프로젝트가 친러정부의 전복으로 전부 '''물거품'''이 된 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에 새로 수립된 민주정부를 인정하고 이후 몇 차례 영향력 행사를 통해 친러 정부의 성립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7], 유로마이단의 경우 워낙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패와 실정'''으로 친러 성향 정치세력이 인심을 잃었던지라, 적어도 러시아가 바라던 '''근시일 내'''에 '''민주적인 방식'''(선거)을 통해 친러 정권이 집권하기는 힘들었다.
이에 러시아는 공산당-지역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한 크림반도 주민들을 자극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당시 공산당이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제1당이 된 적이 있었고[8] 공산당의 세가 약해진 다음에는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지역당이라는 정당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야누코비치도 지역당 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크림 자치정부 및 러시아계 주민들은 2014년 2월 영토 내의 공항을 장악하고 독립 움직임을 보이며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러시아군은 세바스토폴에 주둔 중이던 해군 병력을 이용해 의용대를 빙자한 군사력으로 크림 반도를 점차 장악해 나갔다.
이후 러시아에 의해 장악된 크림 자치공화국은 3월 16일 주민들을 상대로 독립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해 독립 여론을 확인, 3월 17일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해 다음날인 3월 18일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면서 '''사실상 러시아로 편입'''되었다.
한편 미국유럽연합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제를 시작했으며, UN에서는 총회 결의안 68/262호를 통해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9]
일각에서는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정식 인정하거나 혹은 크림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부 일부 지역은 우크라이나에게 반환하고,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케르치, 얄타 등 주요 부동항 도시들이 몰려 있는 남동부 지역은 러시아령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영토 분할을 해서라도 이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당사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방의 정치권 인사들이 이를 받아들이지는 미지수.(실제로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 전 지역들을 모두 우크라이나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반환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거듭 확인했다.
'역사적으로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러시아 연방의 고유 영토' 라는게 러시아측의 입장이나, 이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017년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을 배경으로 한 200루블 신권이 발행되었다.관련 뉴스(러시아어) 크림반도 영유권 주장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 러시아 합병으로 인한 탈주민들을 위한 도시를 건설한다.# 러시아의 크림 합병으로 인해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에 접한 지역이 사실상 국경이 되었다.

4. 인문, 지리


지형적으로 반도이지만 사실상 이나 월경지와 다름 없는 위상이다.
마치 6.25 전쟁 이전 한국령이었던 옹진반도와 비슷한데, 크림 자치 공화국을 기준으로 한 우크라이나 본토와의 경계는 10km가 안 되고, 그나마도 중간에 5km짜리 호수가 있다. 이름은 프리오브라젠카(preobrazhenka). 좁은 지협으로 본토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었고 오히려 끝부분이 넓게 퍼져있다는 점에서 우리네 고흥군이나 그리스펠로폰네소스 반도와도 비슷하다. 사실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경계보다 남쪽에 건천에 가까운 운하가 있으므로 기능적으로는 섬이라고 할 수도 있다.
러시아 본토와는 육로 연결은 되어 있지 않고 무조건 흑해, 아조프 해를 건너야 했지만 2018년 크림 대교개통되어 러시아에서도 육로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주행해 건넜다.
얄타 회담이 열렸던 얄타(Ялта)시가 이곳 남부의 흑해와 맞닿은 도시이다. 인구 13.5만 러시아의 소치와 함께 유명한 흑해의 여름 휴양지로, 소설가인 안톤 체호프1899년부터 1904년까지 이곳에 살기도 하였다. 알룹카(Алупка) 역시 유명한 크림 반도의 휴양지이다. 그래서 유로마이단 초기엔 크림 위기가 경쟁 관광지인 소치를 띄우고 크림을 엿먹이려 한다는 일부 우크라이나 정치인의 주장도 있었다. 과거엔 관광객의 대다수가 우크라이나에서 왔기 때문에 큰 타격이 에상되었지만 푸틴이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나서는 공무원들을 크림반도로 휴가보내고 있기 때문에(...) 생각만큼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크림 반도를 한국에서 제주도 가듯 가까운 휴양지로 선호하기 때문에 관광수입면에선 크림 위기 그 때만 잠깐 움찔했지 곧 정상화되어 거의 피해가 없는 상태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지속적으로 침체되고 있는 양상이고 무엇보다 물가가 꽤 올라서 그렇게 큰 재미를 본것도 아니기는 하다. 인프라 수준같은것은 많이 나아졌기는 했지만 물가오른것을 감안하면 평타 정도의 수준.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유럽권에서 숨겨진 포도주 명산지이다. 러시아 마트를 가보면 러시아 국내산(Россия)과 크림 반도산(Крым)이 따로 진열되있다. 참고로 러시아 사람들은 조지아(Грузия)산을 제일 으뜸으로 친다.
2014년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점령과 러시아 귀속 선언 이후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향한 모든 자원의 공급을 중단하면서 크람반도에 물이 말랐다.한글영문기사 다만 하술했듯이 러시아에서 인프라 공사를 해주었기 때문에 큰 불편함은 없다.

5. 관광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자연, 바다와 해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사까지 많은 역사 유적 등으로 과거 우크라이나를 넘어 동유럽 전체에서 꽤 알려진 휴양 관광지이다. 과거 우크라이나를 여행한 외국인들에게는 키예프, 리비우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3대 관광 지역으로 꼽혀왔으며 오데사와 더불어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이기도 했다. 분쟁으로 잠깐 시끌하긴 했지만 2018년 현재는 한국인이 관광하는 데 직접적인 제한은 하나도 없다. 다만 당연히 지금은 크림 반도에 들어가려면 국제공항이 있음에도 대러제재로 국제노선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러시아 본토를 거쳐 출입해야 하며 화폐는 당연히 우크라이나 흐리브냐가 아닌 러시아 루블이 통용되고, 서방의 제재로 인해 국제 신용카드체크카드(비자카드, 마스터카드 등), 그리고 해외 로밍(러시아 유심 제외)의 사용이 불가능하니 사전에 러시아 루블화 현금이나 동전, 러시아산 신용카드를 지참하고 가야 한다.
국내 모 여성 잡지가 크림 반도 투어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크림 반도의 유명 관광지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
우크라이나 정부에서는 크림 반도를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통일부 허가 없이 임의로 북한에 방문하면 형사처벌 받는 것과 유사하게 사전에 자신들에게 승인을 얻지 않고 러시아를 통해 크림 반도에 입국한 기록을 확인한 경우 이유 불문 불법으로 추후 3년간 우크라이나 입국을 전면 금지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크림 지역 신문, 방송, SNS 등을 뒤져서 인터뷰나 사진 등을 통해 크림 반도 출입을 잡아내고 있음을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에서 경고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크림반도는 2016년 이래로 2024-12-06 00:29:42 현재까지 여행경보제도 3단계인 철수권고다. 다만 다른 철수권고 지역처럼 아주 위험한 상태는 전혀 아닌데 정치적 이유로 그렇게 지정한 사례에 가깝다. 한국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러시아가 통치하고 있다는 점까지 더해져 사고가 생길 때 주우크라이나 영사관이나 대사관의 도움을 받기 어려우니 이곳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유의하자. 호주는 2018년 8월 기준 여행금지, 미국은 여행경계 단계이다.
다만 크림반도 현지인들은 우크라이나에 있을때보다 치안이나 인프라 수준이 더 나아졌다고 말하고 있다.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러시아 정부에서 크림 대교를 건설하고 낙후된 인프라 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해주었으며 치안인력도 늘렸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만큼 안전하다는 건 아니고 흔한 동유럽 관광지의 치안 수준 정도다. 대신 우크라이나의 법규 대신 러시아 법규를 적용하고 치안인력이 크게 늘어나면서 사는것이 더 까다로워졌고 물가도 꽤 올랐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정부를 여전히 싫어하기는 하지만 러시아 정부라고 해서 무조건 환영해준다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다.
러시아의 크림 병합에 따른 러시아에 대한 서방 경제 제재로 크림 반도에서 맥도날드는 철수하였다. 버거킹KFC도 없다. 대신 이곳만의 햄버거 체인이 있어서 간단히 식사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닌 편이다. 당연히 크림반도에는 스타벅스도 없다.

[1] 일조량이 많지만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은 그리스 지역의 특성상 밀 농사보다는 포도나 올리브 농사를 주로 지었다. 그리고 이 올리브와 포도를 가공하여 만든 포도주와 올리브유가 고대 그리스 상인들의 주 상품이었던 것. 반면 흑토 지대와 인접한 크림 반도 일대에서는 밀농사가 성행하였기에 고대부터 무역이 활발했던 것이다.[2] 당장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연 블라디미르 대공이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처음 세례를 받은 곳이 바로 크림 반도의 헤르소네소스(오늘날의 세바스토폴)였다. 이 때문에 크림 반도는 제정 시절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 성지 역할을 하였다.[3] 이들 대부분을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버렸는데 이 강제 이주 때문에 크림 칸국 멸망 이후 고향을 떠나 정착한 터키와 고향인 크림 반도를 제외하면 크림 타타르가 제일 많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우즈베키스탄이다.[4] 이 강제이주를 주도한 사람은 바로 스탈린의 심복 라브렌티 베리야였는데 강제이주 2달 후 타타르인의 강제이주를 완료했다고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보고했더니 그 직후 아라바트 사주 지역을 실수로 빼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베리야는 이들을 실어보낼 기차편을 구하는 대신 아직 아라바트 사주에 남아있던 타타르인 수백명을 배에 모조리 실은 후 '''배를 침몰시켜 아조프 해에 수장시켜 버렸다.'''[5] 165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학정에 맞서 카자크 대봉기를 일으킨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러시아에게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신종을 맹세한 조약으로 이 조약 직후 러시아가 참전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몰락하는 계기가 된 대홍수의 스케일이 훨씬 커지게 된다.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이후 러시아가 수백년 만에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손을 뻗치게 된 계기가 된 조약이다.[6] 실제로 우크라이나 독립투표 당시에도 크림반도는 찬성률이 50% 중반 수준으로 타 지역들이 독립 찬성률이 80%~90%대를 기록한것에 비한것에 비하면 매우 낮은것이었다. 그나마 당시에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이 나온것은 이 당시가 되면 소련이 8월 쿠데타 이후로 완전히 무력화된데다가 우크라이나가 분리독립하게 되면 서구권처럼 잘살게 될것이라는 기대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로 10년 가까이 초인플레이션과 지하경제 창궐 등 경제난에 허덕이게 되며 정치성향 자체가 완전히 친러로 굳혀졌다.[7] 실제로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정권에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8] 물론 정권창출에는 실패했다.[9]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