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국

 


1. 개요
1.1. 문헌
2. 주요 유적
3. 유래


1. 개요



다라국(多羅國)은 삼국시대 전반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었던 가야계열 소국으로 알려져 있다. 다라국이라는 이름은 중국 측 기록인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등장한다. 가야권을 주도했던 나라인 김해의 금관국나 함안의 안라국, 경상북도 고령의 반파국보다는 인지도가 낮지만, 발굴된 유물을 토대로 가야계열의 여러 소국 중 평균 이상의 위상을 가진 국가였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합천 옥전 고분군은 4세기 초부터 6세기 중엽까지의 다라국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서기 한반도 관계 기사에는 가야 제국의 주요 구성국으로 등장한다.[1][2] 여기서 다라국은 사비회의에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라는 사람을 파견하는 등[3] 당시 신라와 백제 틈바구니에 끼인 정세 속에서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의 정복전쟁에 의해 멸망하였다.
중심 고분군으로 여겨지는 옥전 고분군의 양상도 비록 금관국, 반파국 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분의 규모와 유물의 질이 상당한 수준이다.
KBS 역사스페셜 129화 '황금칼의 나라, 제 7의 다라국'(2001년 9월 8일)에서 다룬 적이 있다.[4]

1.1. 문헌


  • 369년 백제 근초고왕의 가라7국 평정 기사에 언급
  • 541년 1차 사비회의에 하한이 이타 를 내보냄
  • 544년 2차 사비회의에 상수위 흘건지 를 내보냄
  • 562년 1월 신라가 임나관가를 소멸시키면서 멸망

2. 주요 유적


1985년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의 야산에서 고대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위치는 쌍책면 성산리의 옥전(玉田)이라고 불리는 언덕으로, 이곳에는 1000여 기가 넘는 고분이 밀집해 있다. 옥전(구슬밭)은 과거에도 유물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작은 구슬같은 것들이 간혹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image]
옥전에서 발견되는 구슬은 위 이미지와 같이 평범한 유리구슬이 아닌 곡옥이다. 이미지 파일 출처는 합천박물관. 이외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는 로만 글라스 잔도 발굴된 바 있다.
경상대학교 주관으로 1985년부터 시작된 고분 발굴 조사는 이후 5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11기의 유구와 약 1000여 기의 고분이 드러났다. 유적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가야인들의 생활상 등이 면밀히 조사되었다. 이후 발견된 것까지 더하면 고분은 115기에 이른다.
[image]
[image]
[image]
[image]
이미지 출처는 합천박물관.
최초 발견 시 학계는 그다지 놀랄 것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처음에는 굽다리그릇과 같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낙동강의 지류에 위치한 옥전 고분군의 특성을 감안할 때 전형적인 가야 고분으로 추측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옥등, 옥구슬, 옥귀걸이, 용과 봉황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황금으로 만든 용봉문 환두대도 등이 발굴되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세련된 세공품은 물론이고 권력을 상징하는 금관, 군사력을 의미하는 철제 판갑옷과 마갑까지 발굴되어 다라국의 유물은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3. 유래


다라국의 유래는 명확히 이야기하기 어렵다. 다라국은 옥전 고분군 발굴 이후 본격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고고학적 성과가 있었지만 문헌적 증거는 빈약하기 때문에 다라국에 대한 여러 주장이 나오는 상황이다.
옥전 고분군을 조성한 주체를 일본서기에 기록된 다라국으로 비정한 것은 현재의 합천군 쌍책면에 다라리(多羅里)라는 명칭에서 기인한다. 땅의 모양이 반달과 닮아 대량(大良), 대야(大耶)등으로도 전해지던 지명이 달내(다라)로 이어진 것으로 전한다.
삼국사기를 따라 다라국을 신라본기의 파사왕조에 등장하는 다벌국(多伐國)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 시각에 의하면 다벌국은 현재 대구의 남쪽 덕곡면 일대는 물론 남서쪽의 쌍책면을 모두 포함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견은 다벌국이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達句火)이라고 본다.
전 고려대 최재석(崔在錫) 교수는[5] 일본 규슈에 위치한 아리아케우미 연안의 다량촌(多良村, 타라무라)과 인근의 다량산(多良山, 타라산) 일대를 다라국으로 비정했다. 그의 주장은 규슈의 다라국과 경상남도 합천의 다라국은 동일한 권력층이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반도 사람의 일본 도래설 혹은 왜의 한반도 지배설로 해석될 수 있다. 가야 제국과 왜, 혹은 임나와의 정치적 관계에 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1] 신공기 포함, 주로 언급되고 있는 가야 제국(諸國)은 다음과 같다. 가라(대가야), 안라(아라가야), 고자(소가야), 탁순(현 창원시 일대), 비자벌(창녕과 현풍, 신공기 기사에만 언급됨)을 포함한 다라국(합천).[2] 그 외로 언급되는 소국이나 대가야의 지방으로 남원, 임실 일대로 비정되는 기문, 경남 의령 부림면 혹은 합천 삼가면, 혹은 의령읍 일대로 비정되는 산반해(...), 합천 저포리 수몰지구로 추정되는 사이기국, 진주시 일대로 추정되는 걸찬국 등이 있다.[3] 한기는 간, 간지 등 당시 신라-가야권 군주의 칭호의 이표기로, 아래 하 자가 붙어 6세기 당시 다라국의 2인자격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 일부 블로그 등에서는 127화라고 잘못 표기했다.[5] 자세한 내용은 그가 출판한 '한국고대사회사연구'와 '한국고대사회사방법론'의 두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