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전 고분군
1. 개요
경남 합천군 쌍책면에 소재하는 삼국시대 고분군. 옛 가야의 소국 다라국의 수장묘군으로 추정한다. 그러니까 지배층의 묘역. 1988년에 사적 제326호로 지정되었다.
2. 조사 내용
봉분의 규모가 평범해서 별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1980~90년대에 들어서 경상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시작한 뒤 관심을 모았다.
옥전 고분군에는 (다른 특정 정치체의 무덤이라 추정하는 고분군들에 비해서) 위세품류가 유독 많이 부장되었고,[1] 특히 이런 위세품류의 계통이 다양하단 점이 중요하다. 발굴된 이식(귀걸이)는 거의 대부분이 대가야 계통이고, 환두대도도 삼국시대 단위고분군들 중 가장 많이 나왔으며 계통도 다양했다. 환두대도란 유물이 원래 계통이 다양하다는 특징을 넘어가더라도, 여러 계통의 환두대도 유물들이 대량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다라국으로 상정하는) 옥전 정치체가 백제나 범가야권, 신라와 교류를 많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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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M3호분은 구역 내의 석곽묘를 채용하고 환두대도가 4자루나 출토된 고총급[2] 대형분이다. 용봉문이 2자루, 단봉문이 1자루, 그냥 고리만 있는 환두대도 총 4자루가 확인되었다.[3] 제작지의 문제가 다소 복잡하겠지만[4] M3호분 환두대도들은 제작공정이 세밀하고 대가야 금공품에서 보이는 기법들을 사용했으므로 대가야에서 제작한 물건이라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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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라 백제 권역 밖인데도 백제식 금동관모나[5] 흔히 출자형(出字形) 금동관으로 불리는 신라식 금동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발굴된 갑주류는 고구려와, 마구류는 왜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어느 정도 괜찮게 보존된 찰갑이 출토되면 고구렵 갑주 운운이 흔히 나오지만, f자형 판비 같은 왜계 마구들은 다라국이 왜와도 교류했음을 가늠케 한다. 심지어 옥전 고분군에서는 서역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수입한 로만 글라스 유리잔도 나왔을 정도다. 로마 유리잔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선 이미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등 여럿 나왔지만 가야권에서는 옥전 고분군이 유일하다.
이처럼 다종다양한 위세품류를 부장하였지만 토기 유물군의 양상이 대가야와 유사하여 대가야, 반파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분명 옥전 고분군의 형성시기 즈음하여는 대가야의 영향력이 두드러지지만, 상술했듯이 대가야 이외의 다른 세력과도 교류한 물증이 나오므로 어느 정도 독자성이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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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유자이기[6] 라고 불리는 철기가 부장되었음이 특징이다. 그 형태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나온 유자이기와 거의 같지만, 투창의 장식이나 새 모양 장식 부분이 약간 다르다. 사진 왼쪽 유자이기가 옥전 고분군, 오른쪽 유자이기가 함안 말이산 고분군 발굴품이다. 두 고분군 모두 위계가 비교적 높은 고분에서만 이런 유자이기가 출토되었다. 옥전 고분군 조영세력, 즉 다라국이 대가야에 온전히 종속된 세력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이다.
가야권 유적, 그 가운데서도 수장급의 고총 고분군 중에서는 비교적 일찍 발굴을 실시한 데다가 출토유물도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연구성과가 많이 쌓였고 대략적인 경향성도 분석되었다. 특히 위세품류가 풍부하여 삼국시대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고, 특히 역사고고학적으로는 교차편년을 가능하게 해주어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여타의 가야나 가야권 유적들의 추이가 그렇듯이 끝끝내는 신라가 점령하여 재운영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특히 6세기쯤에는 신라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는데, 한편으로는 신라가 다라국을 영향권으로 끌어들임이 대가야를 잡으려는 포석이라고 보는 연구사즐도 있다.
참고로 옥전 고분군의 동쪽에는 옥전토성이 있는데, 2015년에 들어서 일부 구간을 조사하였다. 옥전토성은 아마도 궁성이었던 듯한데, 가야권에서 궁성과 고총 고분군간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례이다. 비슷한 사례는 아라가야나 금관가야, 대가야 정도. 이러한 유적들의 특징은 가야권에서 다라국의 정치사회적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3. 여담
각 가야를 대표하는 왕들의 무덤군으로써 고령의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 김해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추진 중(#출처)이다. 지자체장들의 업적 쌓기와 관련한 문제가 많아 순조롭진 않으나 아무튼 진행 중이다.
옥전 고분군에서 조사된 고분들은 대체로 M자가 붙는다. 봉토분(Mound)이란 뜻으로 M자를 붙였는데, 옥전 고분군의 또 다른 시그니처이기도 하다. 참고로 다른 유적, 고분군에도 이렇게 고분 호수를 획정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부산 연산동이라던지...
여담으로 보고서가 굉장히 강렬하다.
4.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합천 옥전 고분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합천옥전고분군
- 고고학사전 : 옥전 고분
-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 합천 옥전 고분군
- 대한민국 구석구석 : 합천 옥전 고분군
- 두산백과 : 합천 옥전 고분군
5. 사적 제326호
낙동강의 한 지류인 황강변 구릉에 있는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의 가야고분군이다. 고분은 1,000여 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20∼30m의 지름을 가진 18기의 고분이 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덧널무덤(목곽묘),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구덩계 앞트임식 돌방무덤(수혈계 횡구식 석실묘),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 조사되었다. 무덤 안에서는 토기류, 철제무기류, 갑옷마구류, 장신구류 등이 많이 나왔다.
귀고리와 목걸이의 화려한 장식과 세공기술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M2호분에서는 2,000여개가 넘는 구슬이 발견되었고, 구슬을 직접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옥마저석이 발견되었다. 23호분에서 출토된 관모는 맨 윗부분에 금동봉이 있어 국내에는 예가 없는 희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무기류 중 둥근 고리 큰칼(환두대도)이 출토되었다. 특히 M3호에서는 최고 지배자의 상징인 용봉무늬와 봉황무늬, 용무늬가 새겨진 둥근 고리 큰칼이 4자루 출토 되었는데, 한 무덤에서 이렇게 많은 양이 발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35호분에서는 고식을 따른 상감장식이 된 것이 나와 환두대도의 기원 파악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투구는 총 13점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A호분에서 나온 것은 전체를 금동제로 만들어 화려하게 한 것으로 평안북도 총오리 산성의 고구려 투구와 연관시켜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갑옷은 최고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5벌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68호분에서 발견된 철판 갑옷은 복천동 고분군외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희귀한 갑옷으로, 같은 시기인 5세기 전반 일본의 갑옷과 함께 고대 갑옷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말투구는 동아시아에서는 복천동고분 1점과 일본에서 발견된 2점만이 확인되었으나, 옥전고분군에서 5점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각 지역의 최고 수장급 고분에서만 출토되는 기꽂이가 M3호분에서 2점이 출토되어 고구려 문화의 전파와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M3호분에서는 관 아래에 130여 개의 도끼(주조철부)를 깔았으며, 28호분에서는 칼을 관 아래에 깔아 무덤 주인의 부와 권위를 나타내는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옥전고분군은 최고 수장급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유물이 거의 망라되어 있는 가야 지배자의 무덤으로, 용봉환두대도나 철제갑옷, 금동장투구, 철제말투구에서 가야문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이들은 고구려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삼국시대 정세와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