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회의

 

1. 개요
2. 1차 사비회의
2.1. 배경
2.1.1. 5세기 말~520년대 대가야의 몰락, 나제 동맹 악화
2.1.2. 530년대 신라의 선빵, 안라의 선방
2.1.3. 540년대 백제의 중흥, 가야의 위기
2.2. 회의 개막
3. 1차 사비회의 이후
3.1. 안라의 신라 접근 시도
3.2. 백제의 분노
3.3. 가야연맹 부활 선포
3.4. 안라의 왜국 포섭
3.5. 백제의 임나 재소환
3.5.1. 쩔쩔매는 가야연맹
4. 2차 사비회의
5. 2차 사비회의 이후
5.1. 소강 상태에 들어서다
5.2. 안라의 고구려 접근 시도
5.3. 백제, 목적을 달성하다
6. 관련 문서


1. 개요


541년 4월과 544년 11월 2차례에 걸쳐 열린 백제가야의 국가회담으로 안라회의 이후 1차 사비회의, 2차 사비회의 순으로 백제 - 가야 - 신라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국내 사서인 《삼국사기》등에는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조와 5년(544) 11월 조에만 이하 내용들이 있다.
이를 두고 '임나 부흥회의'나 '임나 재건회의', '임나 복건회의' 등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가치중립적으로 '사비회의'라고 쓴다.[1]
임나(任那)는 가야 일대를 부르는 말로 현재 우리가 쓰는 가야연맹과 비슷한 용도로 쓰였다. 임나(가야연맹)는 그 중 지도국 안라를 지칭하기도 했다. 이하에 쓰이는 가야연맹은 임나, 안라국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2. 1차 사비회의



2.1. 배경



2.1.1. 5세기 말~520년대 대가야의 몰락, 나제 동맹 악화


삼국시대 중반부 들어서, 백제와 신라가 점점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하면서, 그 성장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 사이에 낀 가야 지역의 작은 국가들은 백제와 신라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쌍한(...) 상태였다.
5세기에는 대가야 반파국 주도로 좀 잘 나갔던 적도 있었지만 6세기에는 가야 소국들에 비해 너무 크고 강해진 신라와 백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6세기 중반쯤되면 백제나 신라는 가야 소국들 정도는 국력으로만 따지면 단독으로 가볍게 밀어버릴 수 있을만큼 성장한다.[2]
허나 백제와 신라는 서로 힘을 합쳐야 강력한 고구려에 겨우 대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는 나제동맹으로 결속 되어있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방에 있는 가야를 가지고 서로 싸울 순 없었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가야를 통째로 먹고 한쪽은 뒤처지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두 나라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두 대국의 미묘한 균형 사이에 낀 가야가 위태위태하게 완충지대로 독립을 겨우 유지하는 구도가 되었다. 이는 훗날 대한제국러일전쟁 전까지 러시아와 일본의 힘의 균형 사이에서 유지되던 것이나, 태국이 프랑스와 영국 사이 힘의 균형으로 겨우 독립을 유지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3]
이러한 상황 속에서 513년, 백제가 먼저 모루, 대사, 사타,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의 가야 소국 7국을 멸망시켜버자 나제동맹은 더욱 악화된다.

2.1.2. 530년대 신라의 선빵, 안라의 선방


그렇게 대치하던 중 가야 동쪽, 즉 신라와 가까운 쪽의 '''529년에 탁기탄이, 532년에 금관국이, 538년에 탁순국이 연이어 신라에 편입되었다.''' 변한진한 시절부터 400년간 그럭저럭 나뉘어 유지되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고 이 세 나라 외 나머지 가야권 국가들에게 신라의 노골적 팽창은 심각한 안보위협으로 다가왔다.[4]
신라가 가야에 있는 구례산성에 주둔한 백제 군사를 쫒아내자 백제는 가야 일대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가야 중 함안 안라국은 그 기회를 살려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전에 백제가 설치했던 왜신관의 인원을 친안라 왜인 관료들로 재편성하였다. 이를 안라왜신관(安羅倭臣官)이라고 부른다.[5]
540년에 설치된 안라왜신관의 관료들은 안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왜신 이쿠하노오미, 기비노오미, 카후치노아타히와, 안라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야계 왜인 이나사(移那斯), 마도(麻都) 등이었다.
안라국은 안라왜신관을 이용해 신라의 연락선 역할을 하여 가야 제국이 신라와 백제 사이에 끼었으면서도 자주권을 행사하였고, 그 결과 안라국은 후기 가야연맹의 지도국이 되었다. 진정한 줄타기 외교의 성공이었다. 이후 안라는 연맹 지도국으로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커 역할을 했다.
이 시기 가야연맹은 반파국안라국, 두 국가가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순수 국력은 반파국이 가야에서 가장 강했던 듯하지만, 529년, 결혼동맹 결렬 사건으로 큰 외교적 실패를 저질렀기 때문에 일단 자숙하면서 안라국이 주도하는 외교에 순순히 따라가는 상태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반파국 문서 참조.

2.1.3. 540년대 백제의 중흥, 가야의 위기


신라는 진흥왕이 540년에 즉위하여 신라의 급격한 영토확장을 주도하고 있었고, 백제는 성왕사비성 천도 이후 백제의 부흥을 꿈꾸었다.
그러나 아직 전성기가 다 끝나지 않은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차지한 채 북쪽에서 버티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제동맹이 서로 중요한 상태라 양국은 후방 가야 지역을 두고 무력동원을 자제했다.
성왕은 가야를 먹는 것도 좋지만 진정한 목표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 고토 회복이었으므로 신라와 너무 척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즉 무력으로 가야를 다 먹으려 들어 신라의 심기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541년 신라에 화친을 요청해 소강 상태에 들어선다.
한편 신라와 백제의 팽창정책에 두려움을 느껴 대가야 반파국안라국은 신라에 2~3차례에 걸쳐서 멸망한 옛 3개국[6] 부활을 목적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하자 방향을 바꿔 백제에 요청했다. 백제가 이를 받아들여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비슷한 목적으로 열렸지만 수포로 돌아갔던 지난번 안라회의에서는 안라국이 가야권의 대표로 참여하고 나머지 가야국가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이름이 알려진 대부분 가야소국들이 제각기 대표를 뽑아 모여서 백제까지 갔다.

2.2. 회의 개막


  • 백제(百濟)[7] : 성왕 외 다수.
  • 안라(安羅)[8] : 하한기(下旱岐)[9]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외 다수.
  • 가라(加羅)[10] : 상수위(上首位)[11] 고전해(古殿奚) 외 다수.
  • 졸마(卒麻)[12] : 한기(旱岐)의 자손[13] 외 다수.
  • 산반해(散半奚)[14] : 한기(旱岐)의 자손[15] 외 다수.
  • 다라(多羅)[16] :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외 다수.
  • 사이기(斯二岐)[17] : 한기(旱岐)의 자손[18] 외 다수.
  • 자타(子他)[19] : 한기(旱岐) 외 다수.
  • 안라왜신관(安羅倭臣官)[20] : 키비노오미(吉備臣) 외 다수.
541년 4월, 가야 지역 일곱 국가들의 한기(旱岐)와 왕실, 재상들과 안라왜신관 관리가 백제 사비에 모였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기록된 회의 내용엔 온갖 왜곡이 있는데, 대표적인 왜곡은 '이번 회의의 목적은 일본 천황을 편안케 함'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자위용 문구를 배제하면 백제와 가야 7개국간 대화가 보인다.

"무릇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대왕(大王)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교지를 받드는 것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임나의 국경이 신라와 접해있기 때문에 탁순 등이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등이라는 것은 탁기탄(啄己呑), 가라(加羅)를 말한다. 탁순 등의 나라처럼 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2년(541)#

가야 제국의 안건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 백제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
  • 근데 신라가 탁순, 남가라(금관국), 탁기탄을 작살냈다.
  • 백제는 신라의 분노에서 우릴 보호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백제의 답은 이러했다.
  • 근초고왕, 근구수왕 대부터 가야는 백제의 속국이다.
  • 신라의 공격에 대해 백제는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麻鹵), 성방(城方) 갑배매노(甲背昧奴)를 가라에 보내 상황을 파악했다.
  • 신라가 공격한다면 반드시 방어해주겠다.
  • 그리고 탁순, 남가라, 탁기탄이 망한 이유는 신라가 강해서가 아니다. 각자 잘못이 커서 그렇다.
    • 탁기탄은 신라에 지나치게 가까워서 어쩔 수 없었다.
    • 남가라는 약체라서 어쩔 수 없었다.
    • 탁순은 국가가 혼란스러웠고 군주가 신라에 붙었다.
  • 신라는 옛날 고려에게 부탁해 가야 연맹과 백제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는데 어떻게 혼자서 연맹과 백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성왕의 답변은 가야국가들의 기대에는 영 미치지 못했다. 들여다 보면 그저 근초고왕 시절 전성기 백제의 패권 중심으로 가야지역권을 아우르던 그 시절 국제관계로 돌아가자는 주장뿐이었고, 이미 멸망한 금관, 탁기탄, 탁순 3국은 신라가 강성해서가 아니라 자체 내부 분열으로 신라에 내응해서 망했다, 즉 '가야 너네들이 신라에 붙으려 해서 각개격파당하고 이 꼴 났다.'고 은근히 비난했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因斯而觀, 三國之敗, 良有以也. 昔新羅請援於高麗, 而攻擊任那與百濟, 尙不剋之. 新羅安獨滅任那乎.

그리고 이미 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만약 신라가 쳐들어 오면 도와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하사품을 주고 이들을 돌려 보낸 것이다.
백제 성왕이 이런 식으로 나온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신라를 크게 자극하지 않고 북벌 준비를 하며 차차 가야를 흡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둘째, 고구려에게 빼앗긴 고토 한강유역을 되찾으려면 (물론 가야나 왜의 지원도 있으면 좋지만) 한반도 남부의 강국인 신라의 군사력을 포함한 협공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 가야 국가들이 원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직접 멸망한 가야국가들을 복구(=즉 슈퍼파워로서 신라와 직접 충돌하는 것)하는 데에는 무관심했다.

3. 1차 사비회의 이후



3.1. 안라의 신라 접근 시도


541년 7월, 가야 연맹과 지도국 안라는 백제와 정상회담을 개최했음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듣지 못하자, 신라와 다시 접촉했다. 백제와의 회의가 끝난 지 3개월 만에 바로 신라를 찾아갈 정도니 가야 연맹이 미래를 매우 불안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신라에 접촉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고 성왕은 매우 분노했다. 1차 회의에서 백제가 내놓은 말을 싹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태도였기 때문. 백제는 곧바로 전부(前部) 나솔(奈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 선문(宣文), 중부(中部) 나솔 목리미순(木刕眯淳), 기신나솔(紀臣奈率) 미마사(彌麻沙)를 안라로 보내 신라로 간 가야연맹 집사를 소환하려 했다. 또한 안라왜신관의 관료 가후치노아타히(加不至費直),[21] 이나사(移那斯), 마도(麻都)를 심하게 꾸짖었다.(深責罵之)

가을 7월에 백제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와 신라가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前部) 나솔(奈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 선문(宣文), 중부(中部) 나솔 목리미순(木刕眯淳), 기신 나솔 미마사(紀臣奈率彌麻沙)【기신 나솔은 아마 기신(紀臣)이 한(韓)의 부인을 얻어 낳았을 것이다. 백제에 머물러 나솔이 된 사람이다. 그 아버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경우도 모두 이에 준한다.】 등을 안라에 보내 신라에 간 임나집사(任那執事)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우는 것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따로 안라의 일본부의 하내직(河內直)이 신라와 통모하고 있는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서는 "가부직비직(加不至費直), 아현이나사(阿賢移那斯), 좌로마도(佐魯麻都) 등이다."라고 말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2년(541) 7월 #

안라의 행동으로 결국 1차 사비회의는 실패였음이 증명되었다.

3.2. 백제의 분노


같은 달 성왕은 가야연맹에 선언문을 날렸다. 흠명기 기록 링크된 기사의 전문이 그 선언문인데 이하는 요약이다.[22]
  • 옛 내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이 한기(旱岐)들과 형제(兄弟)의 식을 맺었다. 그러므로 난 너희를 자제(子弟)로 여겼고 너흰 나를 부형(父兄)으로 모셨다.
  • 그래서 우린 참 사이가 좋았는데 요샌 그렇지가 않다. 이건 내 잘못이니 고치겠다.
  • 신라가 무너뜨린 탁순, 남가라, 탁기탄 삼국을 다시 복구해 가야연맹에 돌려주겠다.[23]
  • 신라가 쓰레기임은 아는 사실 아니냐, 요새 벌이랑 뱀이 자꾸 나온다는데 그게 다 니들이 신라에 붙을려고 해서 그럼.
  • 땅이랑 백성들 지키고 싶음 내 말을 들어라.
협박과 달래기를 동시에 사용했다. 백제와 가야연맹의 역사를 강조하며 가야연맹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또한 안라왜신관의 관리에게도 선언문을 보내 신라를 믿지 말라고 맹비난했다. # 하지만 일본서기를 보면 실제 문서 내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고쳐 놓아서 원문의 내용은 대충 파악이 되지만 원 문서의 어조는 알 수가 없다.

3.3. 가야연맹 부활 선포


(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기신(紀臣) 나솔(奈率) 미마사(彌麻沙), 중부(中部) 나솔(奈率) 기련(己連)을 보내서 하한(下韓)의 임나의 정무를 아뢰고 아울러 표를 올렸다.

《일본서기》 흠명기 3년(542) 7월 #

542년 7월, 1차 회의로부터 1년 뒤에 백제는 황급히 '가야연맹이 백제의 도움으로 회복됐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신라가 먹은 금관, 탁순, 탁기탄 3국이 실제로 부활한 것은 아니니 말뿐인 선언이었고 신라에 앞서서 먼저 가야연맹을 차지하겠다는 흑심이 너무 티가 났기에 여전히 복잡한 정치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3.4. 안라의 왜국 포섭


543년 11월, 왜국은 안라왜신관을 통해 임나 안, 가야연맹 안에 주둔한 백제의 군령, 성주들을 내보내라고 전언한다. 일본서기는 천황이 명령하여 백제의 군령, 성주가 있는 지역을 안라왜신관, 즉 임나일본부에 소속시키라 했다고 전한다. 일본서기 특유의 자위질이 두드러진다.
이는 당연히 일본서기의 역사왜곡이고, 실제론 가야연맹 및 안라가 안라왜신관을 매수해 자주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백제의 가야연맹 부활 선포는 너무 앞섰고 부실하여 가야연맹이 크게 반발했지만, 성왕은 이런 소식을 듣고도 무시했다. 되려 백제는 안라왜신관의 관리 가후치노아타히(加不至費直), 이나사(移那斯), 마도(麻都)를 내쫓기로 정했다.
이때부터 안라왜신관을 두고 백제 vs 가야연맹의 알력 다툼이 시작됐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안라왜신관(임나일본부)은 백제가 가야연맹(임나)을 지배하기 편하도록 만든 기구였다. 당시 왜는 백제 멀티였으니 백제는 자신이 지배하는 가야연맹 지역에도 왜를 연결해 백제 - 왜 - 가야 구도의 삼국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즉, 신라의 눈치가 보여 대놓고 백제의 거수기를 만들기 어려우니깐, 친왜파를 심어놓아 내부로부터 장악을 시도하여 백제가 유리한 지분을 형성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신라였다. 고구려가 강해지고 신라도 강해지면서 가야가 슬슬 위의 삼국동맹 구도에서 이탈할려는 조짐을 보였고 결국 안라왜신관까지 역으로 먹어치운 것이다.[24] 백제는 분노하여 왜국에게 안라왜신관을 교체하라 했으나 왜 또한 고구려와 신라를 의식하기 시작했기에 예전과 같이 고분고분 백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3.5. 백제의 임나 재소환


가야연맹은 비록 백제에 한번 반항했으나 계속 백제를 거부할만한 국력이 없었다.
543년 12월 성왕은 가야연맹의 반항을 누르기 위한 안건을 주제로 회의를 주제하였고 상좌평(上佐平)[25] 사택기루(沙宅己婁), 중좌평(中佐平) 목리마나(木刕麻那), 하좌평(下佐平) 목윤귀(木尹貴), 덕솔(德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덕솔(德率) 동성도천(東城道天), 덕솔(德率) 목리미순(木刕眯淳), 덕솔(德率) 국수다(國雖多), 나솔 연비선나(奈率 燕比善那) 등과의 회의에서 나온 결론은 다시 국가회의를 열자는 것이었다. 다시 가야연맹 군주들을 소집해 완전히 백제 쪽으로 넘어오게 하려는 의도였다. 백제는 결국 가야연맹을 재소환하였다.

3.5.1. 쩔쩔매는 가야연맹


일본서기는 백제가 재소환한 주체가 안라왜신관, 즉 임나일본부라고 해놓았지만 이는 당연히도 거짓이고 실제론 가야연맹이 주체이고 안라왜신관은 곁다리였을 것이다.
  • 543년 12월, 백제가 처음 소환을 시작했다. 가야연맹은 이듬해 1월에 보자고 미뤘다.
  • 544년 1월, 다시 부르자 제사를 지낼 날짜라며 미뤘다.
  • 갈은 달, 결국 강제로 불러 냈지만 다들 지위, 급이 낮은 관리만 보내 제대로 합의할 수가 없었다.
  • 544년 2월, 화난 백제는 사신을 두루 보내며 당장 가야 각국의 고위층이 직접 오라고 성냈다.
  • 544년 2월 백제는 내쫓기로 결정한 안라왜신관 관료들을 소환해 온갖 비난을 퍼부은 뒤 왜국으로 보냈다.[26]
  • 544년 2월, 결국 왜국이 항복하고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 544년 3월, 백제는 우선 급한 대로 왜국과 합의를 먼저 했다. 백제는 기존 안라왜신관 관료를 바꾸라고 요청했으나 왜국은 백제와 안라 사이에 끼여 별다른 답을 해주지 못했다. 안라는 끝까지 자립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7]
  • 544년 10월, 백제의 외교관들이 왜국에서 돌아왔다. 결국 안라의 승리였다.

4. 2차 사비회의


  • 백제(百濟)[28] : 성왕 외 다수.
  • 안라(安羅)[29] : 하한기(下旱岐)[30]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외 다수.[31]
  • 가라(加羅)[32] : 상수위(上首位)[33] 고전해(古殿奚) 외 다수.
  • 졸마(卒麻)[34] : 한기(旱岐) 외 다수.[35]
  • 산반해(散半奚)[36] : 한기(旱岐)의 아들[37] 외 다수.
  • 다라(多羅)[38] : 이수위(二首位)[39] 흘건지(訖乾智) 외 다수.
  • 사이기(斯二岐)[40] : 한기(旱岐) 외 다수.[41]
  • 자타(子他)[42] : 한기(旱岐) 외 다수.
  • 구차(久嵯)[43] : 한기(旱岐) 외 다수.[44]
  • 안라왜신관(安羅倭臣官) : 키비노오미(吉備臣) 외 다수.
544년 11월 가야 8국과 왜신관이 백제 사비에 다시 모였다.
2차 땐 구성원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구차국(久嵯國)이 새롭게 참가하였고 졸마와 사이기국 한기(旱岐)가 직접 왔다. 지도국 안라는 급이 낮은 하한기(下旱岐) 두 명만 보내 반감을 표시했다.
백제는 가야연맹에게 다른 선택을 제안했다. 이하는 성왕의 발언 요약이다.
  • 임나지국(任那之國)은 우리 백제에게 대대로 자제(子弟)의 약(約)을 맺었다.
  • 안라왜신관의 인기미(印岐彌)가 제멋대로 굴어 신라에 붙으려 했다. 이는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니다.[45]
  • 신라는 쓰레기다. 믿을 수 없는 나라다. 다시 백제와 친하게 지내며 형제(兄弟)처럼 지내자.
  • 듣자하니 신라와 안라 사이엔 대강수(大江水)[46]가 있어 요해(要害)의 땅이라 한다.
    • 첫 번째로 낙동강에 성 여섯 개를 쌓아 신라로부터 보호해주겠다.
    • 두 번째로 왜국 군사 3000명과 백제 군사, 군령, 성주를 두어 지켜 주겠다. 비용은 전부 백제가 부담한다.
    • 세 번째로 안라왜신관에 있는 가야계 왜인을 모두 일본으로 내보낸다.
백제 성왕은 이 회의에서 임나(가야연맹) 보호를 위해 '신라와 안라의 경계지역인 함안 동북쪽의 낙동강변에 6성을 쌓고 왜 병사 3천과 백제군을 주둔하는 대신 비용도 백제가 대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백제의 군령, 성주를 내보낼 수 없는 것들은 가야와 왜의 교류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보낼 수 없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리고 '일부 왜신관을 왜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임나 건립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둥 이야기하며 가야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 백제는 임나(가야연맹)를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아예 먹어치우려는 속셈이었다.
가야연맹은 이런 공격적인 제안에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도국인 안라, 가라의 군주에게 물어보겠다고 한 뒤 해산하였다. 일본서기 원문을 따르자면:

이는 천재일회의 시기이니, 깊게 고민하지 않고 계획할 수는 없습니다.

此誠千載一會之期, 可不深思而熟計歟.

《일본서기》 흠명기 5년(544)

결국 서로간 불화만 드러내고 끝나버린 것이다.

5. 2차 사비회의 이후



5.1. 소강 상태에 들어서다


545년 3월과 5월엔 왜국과 백제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9월엔 백제는 가야연맹에 중국 남조 양나라의 보물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47]
546년 1월 백제와 왜는 사신을 교류했다. 왜는 백제에게 말 70필, 배 10척을 선물했다. 6월, 7월에 또 교류했다.[48]

5.2. 안라의 고구려 접근 시도


백제는 고구려와 계속 전쟁을 벌였다. 547년 4월 백제는 왜로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왜는 상당히 고민한 듯하다. 앞서 말했듯 왜는 더이상 고구려와 신라를 무시하고 백제만 따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백제는 왜 뿐만 아니라 신라, 가야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548년 1월에 고구려-예(濊)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았다. 신라가 군사 3천 명을 지원했고 결국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독성산성 전투 문서 참조.
백제가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은 그달에 왜는 결국 백제 사신을 돌려 보내며 군사를 보내겠다고 동의하였다.
근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백제가 고구려와 싸우며 포로를 잡아 추궁했더니 '안라와 왜신관이 고구려에 백제 정벌을 권했다.'고 한 것이다.
백제는 사실확인을 위해 3번이나 안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로 오게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548년 4월, 백제는 왜국에도 사신을 보내 추궁한다. 왜국은 자기가 시킨 일이 아니고 자신들도 몰랐다고 강조했다. 백제는 왜국을 믿지 못하겠으니 군사를 보내지 말라고 요구하고 왜는 받아들였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5.3. 백제, 목적을 달성하다


이 해에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중병(衆)과 두 나라의 병사(二國兵, 신라와 가야)를 직접 통솔하여 고려(高麗)를 토벌하니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했다. 또 진군하여 한강 이북(平壤)[49]

을 치니 무릇 6군(六郡)의 땅이다.[50] 그리하여 고지(故地)를 수복했다.

是歲 百濟 聖明王 親率衆 及 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일본서기》 흠명기 12년(551)

성왕은 한강 유역 수복전쟁을 시작하고 백제군뿐만 아니라 이국병(二國兵), 즉 신라와 임나의 군사들도 이끌었다. 일본서기는 주석으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둘 중 신라야 북벌해서 얻는 영토라는 보상이 있으니까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지만 가야는 자신들과 아무 상관없는 북방의 전쟁에 반강제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는 결국 가야가 백제의 무리한 요구도 들어야 할 수밖에 없는, 종속국으로 전락해버린 정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백제의 짧은 성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구려를 물리친 이후 백제와 신라가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두 나라 간에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백제에 대승을 거두면서, 백제라는 후원자가 사라진[51] 가야 소국들은 완전히 무방비하게 신라 앞마당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한 것이었다. 결국 관산성 전투 이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562년 이사부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이 대가야를 정복하면서 모든 가야는 신라에 합병당한다.

6. 관련 문서



[1] 참고자료: "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 권1, p221[2] 이 시기가 되면 금관가야조차 일개 소국으로 전락하며 신라와 백제에 독자적으로 버틸 수 있는 가야는 후기가야연맹 22국 중 대가야아라가야 정도뿐이다.[3] 일본서기 등에는 당시 가야에는 영향력이 센 세력의 병력이 가야 내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백제 성왕은 531년 안라국 지역에 걸탁성(乞乇城)을 쌓고 영향력을 행사했다.[4] 앞서 백제에 멸망한 모루, 대사, 사타 등은 일개 소국이었기에 정말 큰 위기로 간주되진 않았지만 금관가야와 탁순국은 후기 가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라였기에 그 피해는 더 컸다고 볼 수 있다.[5] 안라왜신관의 오래된 명칭이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임나일본부이다.[6] 금관국, 탁순국, 탁기탄[7] 양대 강국이자 주최국[8] 오늘날 함안군[9] 중국식으론 부왕(副王) 정도의 작위 혹 관등.[10] 대가야 반파국으로 오늘날 고령군[11] 중국식으론 재상 정도의 직위 혹 관등.[12] 오늘날 함양군[13] 군주의 자식, 즉 졸마국 왕실의 일원.[14] 오늘날 합천군 초계[15] 산반해국 왕실의 일원을 뜻한다.[16] 오늘날 합천군[17] 오늘날 부림[18] 사이기국 왕실의 일원.[19] 오늘날 진주시[20] 임나일본부의 다른 이름[21] 가랍직기갑배(加臘直岐甲背: 카라후지키카우하이)의 후손[22] 일본서기는 이 선언문에도 아득바득 자위용 문구를 삽입했다. 걸러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23] 백제도 가야들이 신라 쪽에 붙는 쪽으로 진행될까봐 다급했음을 알려준다. 가야연맹이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것. 물론 진짜로 그리 해줄지는 모르지만.[24] 당시 안라왜신관의 고위 관료 중 하나는 가야 출신 왜인이며 다른 관료는 가야 여인과 결혼하여 가야에 정착하는 등 가야와 왜의 결착이 매우 강했다.[25] 문주왕도 왕자 시절 이 관등이었다.[26] 일본서기 원문을 보면 백제가 정말 화가 났음을 알 수 있다.[27] 2차 사비회의 이후 참조.[28] 양대 강국이자 주최국[29] 오늘날 함안군[30] 중국식으론 부왕(副王) 정도의 작위 혹 관등.[31] 2차 땐 하한기 두 명만 옴.[32] 대가야 반파국으로 오늘날 고령군[33] 중국식으론 재상 정도의 직위 혹 관등.[34] 오늘날 함양군[35] 2차 땐 군주가 직접 옴.[36] 오늘날 합천군 초계[37] 산반해국의 왕자인 듯 하다.[38] 오늘날 합천군[39] 하한기와 이수위 중 어느 쪽이 더 격이 높은지는 미상이다. 하지만 한기는 임금의 명칭임을 감안하면 하한기는 거의 한기에 버금가는 2인자격 지위일테고 이수위가 격이 더 낮을 가능성이 높다.[40] 오늘날 부림[41] 2차 땐 군주가 직접 옴.[42] 오늘날 진주시[43] 오늘날 고성군 고자국[44] 신규 참가.[45] 안라가 신라에 붙으려 했음을 왜국의 탓으로 돌렸다. 안라를 탓하지 않겠다는 뜻이다.[46] 낙동강을 의미한다.[47] 일본서기엔 덤으로 같은 달 백제가 장육불상을 지었다고 하고 이 해 고구려에서 추군과 세군 간 내전이 일어났다고 한다.[48] 이 해에 고구려에선 내전이 겨우 끝나고 추군이 이겼다. 양원왕 문서 참조.[49] 원문은 평양이라 했는데, 고구려 수도 평양이 아니라 한강 이북 남평양을 말한다.[50] 총 여섯 군현을 뺏었다는 뜻.[51] 관산성 이후에도 가야 쪽으로 약간의 지원군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미 관산성에서 워낙 큰 피해를 입어서인지 규모도 작았고 결국 신라군에 버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