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롄 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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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스더'''
'''Dalian Shide'''
'''정식명칭'''
大连实德足球俱乐部
Dalian Shide Football Club
'''구단형태'''
기업구단
'''모기업'''
다롄 스더 그룹
'''창단연도'''
(1) 1955년 (다롄조선소)
(2) 1983 (시민구단 다롄 FC)
(3) 1992 (다롄 완다)
'''해체일'''
2012년 11월 30일
'''연고지'''
랴오닝 성 다롄
'''우승경력'''
1994, 1996-98, 2000-02
, 2005 (총8회)
'''홈구장'''
진저우 경기장 (30,776명 수용)
1. 역사
1.1. 다롄 완다 시절
1.2. 다롄 스더 시절
1.3. 보시라이, 쉬밍의 구속. 그리고 다롄 스더의 파멸.
2. 주요 선수
3. 주요 감독


1. 역사


중국 리그 초창기를 장식한 슈퍼 클럽.

1.1. 다롄 완다 시절


1983년 다롄 FC로 창단한 뒤 그 해 을급리그(2부)에서 우승, 바로 다음해 승강제가 실시된 시즌에도 우승을 차지하며 갑급리그(1부)로 승격한다. 이후에도 승격, 강등을 반복했지만 1992년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첫 메이저 우승컵을 들게 된다. 그 이후 1993년 다롄 화루란 이름으로 1년간 활동하다 1994년 중국 갑급 리그의 프로화에 발맞춰, 완다그룹이 인수하게 되어 다롄 완다로 중국 프로 원년을 맞이했고, '''이후 다롄 완다는 전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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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완다의 엠블럼
완다 그룹은 다롄 지역, 중국 내 최고의 기업이었고, 당연히 막대한 투자와 함께 다롄은 프로 원년 1994시즌, 1996, 1997, 1998 리그 3연패등 5년간 4번의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1995시즌 중반부터 1997년까지 55경기 연속 무패행진을 기록했는데 아시아 최다 경기 무패기록이다. 당연히 중국 내에서도 최다 기록.
다롄 완다는 모기업인 완다 그룹과 왕젠린 회장의 엄청난 자본력으로 갑급리그 초창기의 최강팀이 되었지만, 사실 완다 그룹을 끌어 들인 건 이 당시 다롄시장인 보시라이의 역할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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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의 오른쪽에 있는 선수가 바로 하오하이둥이다.
보시라이는 다롄시장으로 부임하자 마자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많은 깡패들을 잡아 소탕했고, 반부패운동도 벌여 부패 공무원을 추방했다. 거기다가 시의 미관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다롄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미항으로 꼽히게 만들어서 다롄 시민들의 마음을 얻을수 있었다. 거기에 갑급리그 이전에도 축구가 인기가 있었던 다롄의 특성을 잘 알기때문에 완다 그룹 인수전에도 다롄 FC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여기에 왕젠린 회장을 설득해서 완다 그룹을 끌어들였다.
이렇듯 다롄 완다는 중국 갑급리그에서만 그치지 않고 1998년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1]도 하는 등 아시아지역에서도 강자로써 자리매김을 했다.
이 당시 활약한 선수로 리밍, 하오하이둥, 쑨지하이가 있으며 감독은 세르비아 출신 명장 밀로라드 코사노비치였다.
하지만 1999년 9위로 추락하며 체면을 구기고 다롄 완다는 다시 대변혁을 겪는다.

1.2. 다롄 스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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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인물 보시라이와 쉬밍(오른쪽)
쉬밍은 1971년 출생한 중국의 기업인으로 불과 20세에 사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그가 세운 스더그룹은 맨 처음 건설업부터 시작해서 스더그룹 급성장의 시작인 PVC사업[2]에 부동산, 보험업, 금융업등 여러 업계로의 진출과 계속된 성공으로 굉장한 사업수완을 보여주며 순식간에 포브스지 선정 중국의 청년 재벌 8위의 자리에 오른다. 이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도 안 넘었다.''' 요즘 말하는 부자집 금수저도 아닌 다롄 교외의 농촌 출신 청년이 맨몸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셈이라 더 놀라운 경우.
그런 쉬밍이 1999년에 뜬금없이 다롄 완다를 사들인다. 물론 여기에는 보시라이의 입김이 들어가있다.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은 보시라이와 멀어지기를 원했었고 보시라이는 그 대체자를 찾던중에 예전부터 자기가 키웠고 덕택에 자기 돈줄역할을 하던 쉬밍을 설득해서 다롄 완다를 8천만 위안에 사들이게했다. 당시 언론들은 "쉬밍은 축알못. 축구 몇경기 보겠다고 8천만 위안짜리 표를 사들인꼴."이란[3] 혹평이 주. 어쨌든 이때부터 다롄 완다는 다롄 스더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다롄 완다시절과 마찬가지로 '''또 다시 전설을 썼다.'''
인수한 첫해인 2000시즌 리그 우승, 2001시즌 갑급리그, FA컵 우승으로 더블, 2002시즌 리그우승으로 또다시 리그 3연패를 기록하고[4]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4강까지 올라가는 등 다시한번 다롄 신화를 쓰고말았다. 물론 이 덕택에 쉬밍과 스더그룹도 엄청난 광고효과를 보고, 이를 이용한 사업확장에도 성공하고 다롄 스더팀도 흑자를 기록한건 덤. 덕분에 쉬밍은 이 기간동안 여러 사업을 벌여놨지만 항상 축구팀을 최우선으로 챙겼다.
이 때 쉬밍이 축구단 운영에 재미가 들렸는지 K리그 부천 SK를 인수한다는 얘기도 돌았지만 경기장이 구단 소유가 안된다는 한국 법률 때문에 관뒀다는 얘기도 있다.[5] 그리고 K리그의 인기가 생각했던 수준이 아니자 실망했다는 말도 있다. 어차피 외국계, 그것도 중국 쪽 자본이 프로스포츠단을 인수해서 운영하는 것에 대해 한국 내 여론이 호의적이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리즈 유나이티드 인수에도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 인수가 성공했다면 리즈는 당장의 위기는 넘겼겠지만 스더 그룹의 이후 행보를 보면 더 참담하게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2004시즌 중국 갑급리그는 오늘날의 중국 슈퍼 리그로 이름을 변경했고, 다롄 스더는 이전 2003년 3위, 2004년 5위로 잠시 소강상태를 맞는다. 그리고 2005시즌 다시 우승을 차지하면서 엠블럼의 별을 8개까지 만들어놓고 이후 '''8성의 다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8번의 우승은 갑급리그 시절까지 포함한 중국 슈퍼 리그 최다 우승 기록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6]
2006시즌-2007시즌 연속 5위로 밀려나고 2008시즌은 14위까지 떨어지며 강등 일보직전까지 가는 침체기가 계속되고[7] 구단주 쉬밍도 축구에대한 흥미를 잃으면서 과거 중국 최강팀이 중위권의 그저 그런 구단으로 전락한다. 이때부터 다롄 스더는 자기 위치를 인정하고 다롄시에 여러 유소년학교를 만드는 등 유소년 육성에 힘을 쏟는걸로 구단 운영 방향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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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시즌 안정환이 다롄 스더로 이적했다. 원래 단기계약이었지만 계약기간동안 엄청난 활약을 보여 2010시즌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이 두 시즌 동안 16골 6도움을 기록했다.[8]
2009시즌에는 8위, 2010시즌에는 박성화 감독을 데려와서 6위까지 올려놨지만[9] 약빨이 1년밖에 안나왔는지 2011시즌에는 12위로 곤두박질치고 시즌 끝나자마자 바로 잘렸다. 그래도 안정환은 2011시즌에도 다롄의 왕이란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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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스더는 선수 생활 말년 3년간 뛴 안정환을 자팀의 레전드로 취급하여 은퇴식까지 열어주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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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시즌. 그동안 바로 아래 갑급리그서 놀고있던 다롄 아얼빈이 슈퍼 리그로 승격하면서 처음으로 다롄 더비가 이루어졌다. 2경기의 결과는 1승 1무로 다롄 스더의 우세로 끝났는데, 순위는 다롄 아얼빈이 5위 다롄 스더는 14위로 끝났다. 전투는 이겼지만 전쟁에서 진 셈.
그러나 이때 다롄 아얼빈에 뒤쳐진 건 사소한 것이었고, 정작 다롄 스더는 시즌 내내 아주 심각한 사건에 휩싸이는데...

1.3. 보시라이, 쉬밍의 구속. 그리고 다롄 스더의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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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받는 쉬밍, 보시라이. 쉬밍은 위의 사진과 너무 비교될 정도로 살이 확 빠졌다.
2012년 3월 중국 슈퍼 리그가 막 시작할때 보시라이가 순식간에 몰락하면서[12] 보시라이의 최대 자금줄이던 쉬밍도 잡혀들어갔고, 스더그룹이 경영난에 빠지며 당연히 다롄 스더에도 위기가 닥치게 되었다. 선수들, 감독 및 코칭스태프에게 월급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13], 성적도 강등권에 들락날락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14] 다롄 스더 프런트는 시즌 내내 팀을 인수할 기업을 찾았지만 이때는 지금처럼 중국내 대기업이나 재벌들이 투자하겠다고 달려들어 돈이 모이는 리그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보시라이 사건이라는 희대의 정치적 스캔들에 연루된 기업의 팀을 인수할 대기업이 없었다. 하다못해 한때 다롄 스더 이전의 모기업이었던 완다그룹 왕젠린 회장한테까지 부탁해 보지만 거절당했다.
그렇게 시즌이 흘러흘러 어떻게든 2012시즌을 끝내놓고 다롄 스더는 14위가 되어 간신히 강등을 모면했지만 여전히 모기업 사정은 안 좋고, 인수하겠다는 기업도 안나온지라 팀 운명이 하루이틀 하다가 드디어 인수기업을 찾았다. 바로 아얼빈그룹이 다롄 스더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아얼빈그룹은 2012년 갑급 리그에서 슈퍼 리그로 승격해서 위에 서술한 다롄 더비를 벌인 다롄 아얼빈의 모기업이다. 당연히 지금까지 중국 슈퍼 리그의 역사를 장식했던 자기들보다 한 수 아래라 여겼던 팀에게 성적으로 뒤쳐진 것도 열받는데 하필 그 팀의 모기업에게 인수라니 빡칠 수 밖에. 다롄 스더 서포터들과 시민들이 합세해 다롄시청과 스더그룹, 아얼빈그룹 빌딩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대로 기운지라 똑같은 반대 입장이던 선수들, 코칭스태프, 프런트들에게 간신히 인수동의를 받아낸다. 하지만 중국축구협회 규정에는 한 기업이 두 개의 축구팀을 운영할 수는 없어서[15] 잠깐 말썽이 있었지만 이것도 다롄 스더가 중국축구협회에 2013시즌부터 중국 슈퍼 리그 참가를 포기한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해결되었다. 이때 다롄 스더에 남아있던 선수들, 코칭스태프는 타팀과 계약하거나 다롄 아얼빈에 들어가는걸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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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시즌 최종전 및 다롄 스더 고별전에서 팬들에게 "13년간 성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롄의 축구는 다시 빛날 것입니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팬들에게 작별인사를 전하는 스더 선수들.
'''결국 이렇게 중국 슈퍼 리그 8회 우승, 중국축구협회 FA컵 3회 우승이란 신화를 쓴 중국 최고의 명문구단은 어처구니없게 사라지고 말았다.'''
여담으로 3년뒤 구속중이던 스더그룹 쉬밍회장도 2015년 12월 옥중에서 사망하게 된다. 예정 석방시한 1년을 남긴 죽음이었다.
이렇게 다롄 아얼빈과의 합병에 반발하는 팬들을 중심으로 다롄 차오웨가 설립된다.

2. 주요 선수


  • 둥팡줘 (2002-04, 2009-10)
  • 쑨지하이 (1995-2002)
  • 안정환 (2009-11) - 말년에는 팀 리빌딩을 맡은 넬로 빙가다 감독이 노장 안정환을 주전에서 빼긴 했지만, 팀이 몰락해가던 2년간 쏠쏠한 활약을 펼쳤기 대문에, 구단측에서는 안정환의 고별전에서 은퇴식도 열어줄 정도로 안정환을 대접했다. 안정환 본인에게도 험난한 축구인생의 마지막에 굉장한 사랑과 존경을 받고 마음편하게 축구하던 시절이었을것이다. 현재도 다롄 축구팬들은 말년에 잠시 뛴 안정환을 스더의 마지막 레전드로 생각한다.
  • 아드리아노 (2011-12)
  • 전우근 (2009) - 부산 아이파크에서 이적.

3. 주요 감독



[1] 우승팀은 포항 스틸러스.[2] 1990년대 중반 다롄시는 도시 첨단화 사업으로 주택이나 그때까지 건물에서 쓰던 나무 창틀 대신 PVC 창틀을 쓰는 걸 주목하고 있었고 곧 다롄시 조례로 창틀을 교체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에 쉬밍의 스더그룹은 다롄에서 벌어진 건물 창틀 교체, 혹은 새 건물 창틀 설치사업 수주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하며 성장한다. 뭐 창틀 제조 기술이나 품질도 좋고 외국에서까지 찬사도 받았다고 하니 기본 능력은 있던 셈.[3] 쉬밍은 이전까지 축구를 잘 알지도 못했고, 다롄 완다 경기를 보러오긴 했어도 축구때문이 아니라 사업 파트너를 만나기 위한 장소로 쓰거나, 그냥 축구가 인기 많다니까 어쩌다 한번 보러간 수준에 그쳤다.[4] 여담으로 다롄 스더의 2차 3연패기간에서 상하이 선화는 2000, 2001시즌 2연콩을 달성한다.[5] 물론 실제로 한국 법률에 그런 조항은 없지만,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프로스포츠 구단이 경기장을 소유하는 것도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되어 세금이 엄청 나오기 때문에 실제로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항스틸러스 같은 경우처럼 자기 돈으로 구장을 지어놓고는, 정부에 기부채납 한 뒤 다시 임대받아 사용하는 식이다.[6] 그런데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가 2011시즌부터 2017시즌까지 무려 리그 7연패를 달성하며 순식간에 리그우승 2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래서 신기록은 시간문제라고 보는게 중국 축구계의 분위기. 다롄 챠오웨의 다롄 스더 역사 계승 문제도 다롄 챠오웨가 2019시즌을 앞두고 해체되는 바람에 가능성이 높아졌다.[7] 이것도 2008시즌 도중 리웨이펑 징계사태로 우한 광구가 리그를 자진포기함에 따라 자동강등 처리가 되어서 면한거다.[8] 공격수가 아니라 미드필더로 기록한 것. 2010시즌에는 10골로 득점 4위까지 올랐었다.[9] 이 시즌에는 그야말로 안정환이 팀 전체를 하드캐리했다. 한때 리그 3위까지 오르며 모처럼 챔피언스리그 진출과 우승까지 노려봤지만 막판 안정환이 상대 태클에 부상을 당해 경기를 쉬면서 덩달아 무너져 내린것.[10] 여담으로 안정환은 다롄 스더에 있던 이 시기를 프로데뷔시절과 더불어 제일 마음 편하고 즐겁게 축구했던 기간으로 생각하고있다.[11] 왼쪽부터 큰딸 안리원, 배우자 이혜원, 안정환, 막내아들 안리환.[12] 자세한 내용은 보시라이 항목 참조.[13] 이 시즌 다롄 스더에서 뛰었던 아드리아노, 박동혁은 훗날 이때 밀린 몇달치 월급을 지금도 못받았다고 얘기했었다.[14] 중후반에 잠깐 힘을내서 7위까지 올라갔지만 이것도 중하위권 승점차가 거의 없다시피해서 한번만 이겨도 바로 3계단 오르는 등 난장판이라 그렇다.[15] 승부조작 우려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