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화

 



'''박성화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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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대한민국'''}}}
{{{-2 62대

'''클럽'''
'''경남 FC'''}}}
{{{-2 6대


'''박성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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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MVP'''
'''1982년'''

'''1983년'''

'''1984년'''
MVP 제정

'''박성화'''
'''(할렐루야 독수리)'''

박창선
(대우 로얄즈)

'''1983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박윤기
FW
이길용
FW
이춘석
FW
김용세
MF
조광래
MF
박창선
DF
'''박성화'''
DF
김철수
DF
장외룡
DF
이강조
GK
조병득
'''198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최순호
FW
이태호
FW
백종철
MF
박창선
MF
허정무
MF
조영증
DF
정용환
DF
박경훈
DF
'''박성화'''
DF
정종수
GK
오연교



<colbgcolor=#093697> '''동래고등학교 축구부'''
''' 이름 '''
'''박성화'''
'''朴成華 | Park Sung-Wha'''

''' 출생 '''
1955년 5월 7일(68세)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78cm
''' 직업 '''
축구선수(센터백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colbgcolor=#093697> ''' 선수 '''
포항제철 축구단(1978~1979)
육군 축구단(1980~1982, 군 복무)
할렐루야 독수리(1983~1985)
포항제철 아톰즈(1986~1987)
''' 지도자 '''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1988~1989)
현대 호랑이(1989~1991 / 코치)
유공 코끼리(1992 / 코치)
유공 코끼리(1992~1994)
포항 스틸러스(1996~2000)
대한민국 U-20 대표팀(2001~2005)
대한민국 대표팀(2003~2004 / 코치)
부산 아이파크(2007)
대한민국 U-23 대표팀(2007~2008)
다롄 스더(2010~2011)
미얀마 대표팀(2011~2013)
미얀마 U-23 대표팀(2012~2013)
경남 FC(2015)
동래고등학교(2018~ )
''' 국가대표 '''
107경기 26골[1]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클럽
2.2. 국가대표
3. 지도자
3.1. 초기
3.2. 포항 스틸러스 감독
3.3.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코치 및 감독대행
3.4. 청소년 대표팀 감독
3.5. 논란의 부산 아이파크 감독
3.6. 올림픽 대표팀 감독
3.7. 다롄 스더, 미얀마 축구 대표팀 감독
3.8. 경남 FC 감독
3.9. 동래고등학교 감독
4.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8년부터 동래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시절



2.1. 클럽


부산 동래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1978년 포항제철 실업 축구단에서 직업 축구선수로 시작하였다. 이후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육군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1983년 할렐루야 독수리에 입단하였고, 팀 창단 원년 우승에 공헌하였고, 초대 MVP를 수상하였다. 할렐루야에서 3시즌 동안 37경기 9골을 기록하였다. 1986년 포항제철 아톰즈로 이적하여 1986년 리그 우승과 1987년 리그 준우승을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포항제철에서 2시즌 동안 32경기에 출장하였고, 1987년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2.2. 국가대표


1975년 성인대표로 발탁된 후 1980년 AFC 아시안컵,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예선, 1984년 AFC 아시안컵 등에 출전하며 103경기 26골을 기록했다. 1979년 6월 16일에 열린 한일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4-1 승리.) 차범근과 더불어서 유이하게 A매치 한일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 하지만 아쉽게도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예선 때는 무릎 연골 부상으로 수술을 받아 국가대표팀에 들지 못했고, 동료들이 월드컵에 나가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3. 지도자



3.1. 초기


은퇴 후 1988년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에서 지휘봉을 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9년 현대 호랑이, 유공 코끼리에서 코치 생활을 했으며, 1992년 김정남 감독의 사퇴 이후 후임으로 3시즌 동안 유공을 지도했다.

3.2. 포항 스틸러스 감독


1996년 포항 스틸러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다. 1996년 FA컵 우승, 아디다스컵 준우승, 1997년 프로스펙스컵 준우승,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 그리고 1998년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 등 수많은 타이틀을 거머쥐며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2000년 여름 들어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다.

3.3.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코치 및 감독대행


2001년 대한민국 U-20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02년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부임하자 수석코치로 선임되어 청소년팀 감독과 대표팀 수석코치를 겸직하였다.[2] 이후 코엘류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되자 감독대행을 맡아 후임 감독인 조 본프레레 감독이 선임되기 전까지 4경기[3]를 지휘하였다. 그 후 국가대표팀 감독대행직을 사직하였고, 청소년팀 감독직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아래는 대표팀 감독대행으로서의 전적
일시
장소
상대팀
경기 결과
스코어
득점자
구분
2004. 4. 28.
대한민국, 인천
파라과이
''''''
0:0
-
친선 경기
2004. 6. 2.
대한민국, 서울
터키
''''''
0:1
-
2004. 6. 5.
대한민국, 대구
''''''
2:1
유상철, 김은중
2004. 6. 9.
대한민국, 대전
베트남
''''''
2:0
안정환, 김두현
2006 FIFA 월드컵 독일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3.4. 청소년 대표팀 감독


'''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조영증호 '''

''' 박성화호(U-20) '''

''' 조동현호 '''
2003년 U-20 월드컵에서 미국, 파라과이, 독일과 함께 F조에 편성되었다. 1차전에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독일을 맞아 51분 이호진, 70분 이종민의 골을 앞세워 2-0으로 승리하였다. 이후 2차전 파라과이전에서 0-1로 패했고, 3차전 미국전에서도 0-2로 패했지만 16강은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전에서 0-2로 뒤지자 선수들이 아예 대놓고 볼을 뒤로 돌렸다. 조 3위만 해도 16강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기에 관중들은 이 짜고치는 담합 경기를 보고 야유를 퍼부었다. 그렇게 16강에서 만난 팀이 하필 일본이었다. 이 39분 선제골을 넣으며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에 이어 무난히 이기고, 8강에 진출하는 듯 싶었으나 82분 사카타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연장에 돌입하였고, 105분에 또 사카타에게 골을 먹히며 1-2로 패하면서 16강에서 탈락하였다. 이 패배 이후 "세계의 벽은 높았다"는 역사에 남을 인터뷰를 남겼다.#
이후 2004년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다시 한번 우승하며 2005년 U-20 월드컵에 진출하였다. 이번에는 브라질, 나이지리아, 스위스와 F조에 속했다. 1차전 스위스를 맞아 신영록이 25분 선제골을 넣었으나 불과 3분만에 안티치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33분 폰란텐에게 역전 골을 허용하며 1-2로 패하였다. 2차전 나이지리아전은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18분 아부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0-1로 끌려갔고, 시간은 계속 흘러 지는 듯 하였다. 그런데 89분이 되어 박주영이 동점골을 넣었고, 3분뒤 백지훈이 역전골을 넣으며 2-1로 승리하였다. 2차전을 이기며 16강 진출에 희망을 가졌으나 3차전에서 브라질에게 0-2로 패하면서 또다시 조3위로 내려앉았다. 각 조 3위간 순위결정에서 6개조에서 5위를 차지하며 이번에는 16강 진출에도 실패하였다. 이 실패로 박성화 감독은 청대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한편 이 무렵 축구협회에 수비전술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 재미없고 뻥축구 스타일의 무전술 축구를 한다고 비판하던 축구팬들의 비판적인 시각, 편견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어서 놀라게 했다.(...) 칼럼만 읽어보면 이론적으로는 정말 명장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 비슷한 경우로 야구계에선 허구연이 있고 동종업계엔 게리 네빌이 있다. [박성화 칼럼] "수비전술에 대해 논한다"① [박성화 칼럼] “수비전술에 대해 논한다”②

3.5. 논란의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07년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축구협회에서 핌 베어백 감독의 사퇴 후 비어 있던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해오면서 올림픽 대표팀 연령대에 해당되는 선수들을 많이 알고 있는 그가 제일 적합하다는 판단을 하여 제의를 해오자 부산 아이파크 감독이 된지 2주도 되지 않았는데 그만두고 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과정에 대하여 많은 축구 팬들은 비판을 하였다.[4]

3.6. 올림픽 대표팀 감독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베어벡호(U-23) '''

''' 박성화호(U-23) '''

''' 홍명보호(U-23) '''
2008 베이징 올림픽 예선에서 우즈벡, 바레인, 시리아와 한 조가 되었다. 여기서 예선 1위을 해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초반 3경기에선 모두 이기며 잘 나갔지만 바레인이 나머지 경기를 이기며 바짝 쫓아왔고, 시리아 원정과 우즈벡 원정에서 무득점으로 비겨 결국 마지막 홈 경기 바레인과의 경기는 지는 쪽이 끝장이 나는 단두대 매치로 벌어졌다. 여기서도 또 '''0-0 무승부'''. 한국은 12점, 바레인은 11점, '''단 1점 차이'''로 어렵게 본선에 진출했다. 사실 바레인이 시리아와 원정에서 이겨놓고 홈에서 비겼기에 망정이었지 만약 그 경기도 잡았으면 무조건 바레인에게 이겼어야 본선에 진출하고 비겨도 승점에서 뒤져(이렇게 되면 바레인이 승점 13점, 한국이 12점) 무패로 탈락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본선엔 진출했지만 이렇게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축구팬들이 크게 실망하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성용의 그 유명한 '''답답하면 너희들이 뛰어보던지''' 사건이 터졌다. 본선에서는 이탈리아, 카메룬, 온두라스와 D조에 편성되게 되었다. 1차전 카메룬과의 경기는 박주영이 선제골을 넣었으나 지키지 못하고 1-1로 비겼다. 2차전인 이탈리아전에서 0-3으로 패하며 8강 진출에 암울한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3차전에서 김동진의 골로 0-1로 이겼지만[5] 2승 1무인 이탈리아, 1승 2무인 카메룬에 밀려 조3위를 차지하였고, 8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탈락 이후 올림픽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실제로 올림픽 직후인 2008년 9월 요르단과의 국가대표팀 평가전은 상대가 주목할만한 팀이 아니란 점을 감안해도 서울에 있는 상암구장에서 하는데도 6만 이상의 수용규모에 불과 16,533명만 찾아 비어 있는 관중석이 굉장히 많았다. 이후 북한과의 중립지역 경기에서 1-1로 비기고 박지성이 주장을 맡은 아랍 에미리트와의 경기에서 4-1로 승리하며 분위기를 쇄신한 2008년 10월 이전까지는, 최종예선에서 사우디와 이란에게 밀리며 한국 축구가 망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가 가득했다. 이로 인하여 박성화 감독 본인도 한동안 한국 축구계에서 활동하기 힘들어졌다.

3.7. 다롄 스더, 미얀마 축구 대표팀 감독


2010년 다롄 스더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하였고, 2011년 물러났다. 이후 미얀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2012년부터는 미얀마 22세 이하 대표팀도 함께 지휘하였다. 2013년 12월 어이없는 실수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미얀마에서 열린 27회 동남아시안게임에서 2승1무 승점 7점 골득실 +5을 기록하며 조2위에 있었다. 조3위 인도네시아는 1승1무1패 승점 4점 골득실 -2를 기록하였고, 이변이 없는한 조2위로 4강 진출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경기인 두팀간의 맞대결이 남았다. FIFA 대회는 승점이 같을 경우 골득실이 우선시 하지만 이 대회는 유로 대회처럼 승자승이 골득실보다 우선시하는 대회었다. 박성화 감독은 이 부분을 착각하였다. 그러니까,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참가한 대회를 '''규칙도 몰랐다'''는 뜻이다![6] 크게 지지만 않으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주력선수들을 엔트리에서 뺐고, 이는 경기결과에서도 드러나 0-1로 패하게 된 것이다. 박성화 감독 혼자만 4강 진출이 확정된 것으로 기뻐하였고, 미얀마의 축구팬과 관계자들은 분노하며 소요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박성화 감독은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3.8. 경남 FC 감독


2014년 12월 26일 경남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2015 시즌 충주 험멜, 안산 경찰청과 꼴지다툼을하며 경남 팬들에게 실컷 까이는중. 그러다 같은 해 11월 13일 경질 통보를 받으며 남은 경기를 치르고 물러나게 되었다. 후임은 그 유명한 김종부.
하지만 경남의 부진한 성적은 단지 박성화 감독만의 지도력 문제만이 아니라 구단 운영진 측의 제대로 된 지원 부재 탓이라는 말이 종종 나왔고[7] 그 우려대로 성적이 좋지 않자 박성화 감독 측에서 이미 스스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날 준비를 하며 잔여연봉에 대한 합의서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구단에서 일방적으로 경질했으며 구단에서 마련해준 집을 11월 안으로 비우라는 등 매몰차게 대우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더 충격적인 주장을 했는데 시즌 중 승리수당 지급을 일방적으로 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팀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한 외국인 선수 스토야노비치의 수당 옵션인 시즌 10골 보너스를 주지 않으려고 9골째 넣자 더 이상 출장을 못하게 하고 내보냈다고 폭로를 하며 법적 싸움도 불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실제로 스토야노비치는 정말로 10월 중순을 마지막으로 팀에서 나간 상태여서 경남 FC는 축구계에서 비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3.9. 동래고등학교 감독


이후 부산으로 이사해 축구교실 운영에만 전념하며 야인으로 지내다 2018년 3월, 자신의 모교인 동래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4. 이야깃거리


2007년 AFC 아시안컵 당시 엑스포츠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09년 FIFA U-20 월드컵 당시에는 SBS에서 해설을 맡았다.
원래 1979년 9월 14일에 열린 박스컵 바레인전에서 20초만에 득점하면서 대한민국 A매치 최단시간 득점 기록을 갖고 있었지만, 2020년 11월 17일에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카타르와의 친선 경기에서 황희찬이 불과 16초만에 득점하면서 기록이 갱신되며 역대 최단 시간 득점자 순위에서 2위로 밀려났다.
임성택 선수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1] FIFA 공식 기록은 101경기 출전이다.[2] 이 당시 최강희 코치와 함께 대놓고 코엘류 감독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듯 월권을 행사해서 국가대표팀을 개판으로 만들어 놨다.[3] 그 중에는 베트남과의 월드컵 예선전이 한 경기 포함되어 있었다.[4] 이에 대해선 자기 의지가 아니라 축구협회에서 사실상 결정해 두고 답정너 스타일로 오라고 압력을 넣고 강권해서 마지 못해 갔다는 주장도 있다. ‘박성화호’ 후다닥 출범 왜?… 박감독도 “내 의지 아니다” 박성화 감독과 대표팀 코치를 같이 했던 최강희 감독도 훗날인 2011년에 축구협회의 강권에 가까운 설득으로 전북 감독을 그만두고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부임한지 단 2주만에 부산 감독을 그만두고 떠나는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음은 명백하다.[5] 이기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골 결정력에서 답답한 모습을 보이며 경기를 시청하던 한국 축구팬들과 국민들의 혈압을 올라가게 만들었다. 이미 카메룬을 이기지 못하고 이탈리아에게 크게 진 상황에서 8강 진출 실패는 사실상 확정적이었다. 한편 같은 시간 벌어진 이탈리아와 카메룬의 경기는 서로 안정적으로 8강으로 가는 길을 추구하며 설렁설렁 경기하며 사이 좋게 올라갔다. 그리고 설령 기적적으로 올라갔어도 8강 상대는 브라질이라.(...)[6] 여기에 대해서는 미얀마 축구관계자에서 박성화를 반대하는 인사가 일부러 규정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거나 잘못 알려주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있다. 하지만 감독 스스로가 자세한 규정을 알았으면 이런 일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설령 홈에서 주전들을 빼고 져도 올라간다고 해도 미얀마 축구팬들 입장에선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7] 사실 2014 시즌에 강등된 후 해체설까지 나돌다가 간신히 해체는 면했지만 긴축을 하는 등 지원부재와 부진한 성적은 어느 정도 예견된 거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