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키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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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키아인의 공격으로부터 요새를 방어 중인 로마군
1. 개요
로마 제국이 다키아 왕국을 공격, 합병한 전쟁이다.
처음 다키아 침공으로부터 패배했던 방어전과 반발로 일어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의 전쟁과 트라야누스 황제가 주도한 제1, 2차 다키아 전쟁으로 나뉜다.
본디 AD 85년에 다키아는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로마는 그에 맞서 선전했지만, AD 89년에 일어난 반란 사건에 집중하기 위해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데케발루스와 휴전하게 되었고 다키아는 수명이 더 연장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다키아의 왕 데케발루스는 자신의 권력을 굳게 다졌다.
그러나 AD 101년 트라야누스가 몸소 대군을 이끌고 다키아를 공격했다. 이것이 '''제1차 다키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로마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다키아의 수도인 사르미제게투사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듬해인 102년 데케발루스는 로마 점령군 주둔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트라야누스의 로마군이 주둔해있는 동안 다키아에는 트라야누스 다리가 건설된다.
105년에 데케발루스는 점령군을 무찌르고 모이시아를 침략한다. 이것이 '''제2차 다키아 전쟁'''이며 트라야누스가 이듬해 다시 한번 수도를 공략하자 데케발루스는 자살했으며, 서기 107년에 다키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다키아는 도나우 강 북부의 영역인데, 지금의 루마니아와 체코 근처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두 차례 친정을 떠나 다키아 왕국을 박살내고 다키아를 점령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 이래의 국경 정책에 반(反)하는 것으로, 라인 강-도나우 강-옛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 밖을 벗어나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의 언어는 라틴어와 흡사하며[1] , 루마니아라는 이름부터가 로마인의 나라라는 뜻의 '로므니아'에서 온 것이다.
다키아 전쟁은 제정 로마의 팍스 로마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이루어진 전쟁이다. 덕분에 로마군의 형태 역시 다국적군의 양상을 보였다. 유명한 하프 플레이트를 걸치고 사각형의 스쿠툼을 장비한 로마군과 아시아의 궁수, 게르만 전사들 등등 로마군의 구성은 다양했다.
단, 실제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다키아 지역의 전쟁기념비에 묘사된 로마군은 기존의 로리카 하마타(사슬 갑옷)을 장비하고 있다. 오히려 트라야누스 원주에 나타나는 로마군의 무장 상태는 로마군=로리카 세그먼타타에(하프 플레이트)/동맹군=로리카 하마타로 일괄적으로 도배되어 있어서, 로마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 유물 발굴량도 제정시기를 통틀어도 로리카 하마타가 압도적이다(물론 세그먼타타가 안 쓰였다는 건 아니다).
총 동원전력은 1차 전쟁 때 15만, 2차 전쟁 때 20만에 달한다. 이는 단일 전쟁에서 로마가 투입한 최대 전력에 가깝다.
로마가 이런 대군을 한 나라를 치는 데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시기 주변의 정세가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파르티아는 로마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게르만족은 그들의 내분으로 로마의 국경을 넘볼 상황이 아니였다. 게르만족은 이때 로마와 인접하여 어느 정도 문명화된 게르만족이 로마와 멀리 떨어져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던 게르만족의 침략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5현제 시대 이후 3세기엔 이들 문명화된 게르만족들이 야만화된 게르만족들에게 합병된 뒤라 로마는 라인, 도나우 강 전역에 걸쳐 게르만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당시 로마 군단병은 징집된 병력이 아닌 직업군인들이었고 대단히 정예화된 병력들이었으므로 이들을 동원하기 위해선 각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던 각 군단의 기지에서 병력을 빼내야 했다. 로마의 국경은 엄청나게 길었고 로마의 병력은 이 국경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구성되었으므로[2] 대군을 동원하려면 국경의 방어력이 상당히 약화되는 것을 각오하여야 했다. 트라야누스 치하에선 국경을 위협하는 세력이 없었으므로 20여만을 한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사치는 게르만족의 침략이 거세지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한 이후엔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는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쟁기>라는 책을 썼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으며 관련 사료조차 전무하다. 대신에 트라야누스 원주에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이 조각되어 있어서 이걸로 전쟁의 진행상황을 추리 가능하다.
트라야누스가 직접 지휘한 다키아 전쟁의 양상은 과거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소탕했던 것과 비슷하였다. 즉 다키아족의 보급로를 차단한 뒤 단단하게 요새를 지으면서 다키아족을 한 곳으로 서서히 쓸어 모은 뒤에 일망타진 하는 방식이었다. 폼페이우스는 5년의 기한을 받고 단지 40일 만에 해치웠는데 트라야누스도 그에 못지않은 솜씨로 각 1차, 2차 다키아 전쟁을 각각 1년 만에 마무리 짓는다. (1차 다키아 전쟁 101-102, 2차 다키아 전쟁 105-106). 비록 대군을 동원했다고는 하나 이렇게 상대 세력을 단기간에 소멸시키는 것은 상당한 군사적 재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예로 훗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 족인 마르코마니와 퀴아디 부족을 상대로 대군을 동원하고도 우왕좌왕하면서 14년간 전쟁을 질질 끌었고 결국 진지에서 자연사하였는데 이를 본다면 대군을 효율적으로 지휘하여 단기간에 적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 수 있다. 트라야누스가 훗날 파르티아를 공격했을 때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어 일 년 만에 파르티아 수도를 점령하고 멸망 직전으로 몰아세웠었는데 이를 본다면 트라야누스는 대군을 동원하여 단기간에 전쟁을 마무리짓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다키아와 전쟁 중, 로마 군단병은 다키아인의 무기인 팔크스(Falx, 언월도형 무기)나 롬파이아(Rhomphaia)에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2차 다키아 전쟁에서는 노출되는 오른손에 방어구를 추가하고 다리에 그리브를 장비하기도 했다. 이것이 로마 군단병이 기동력보다 방어력을 우선시한 거의 유일한 사례다.
참고로 트라야누스는 군사적으로 천부적 재능을 가진 인물로, 다키아 외에 파르티아 왕국을 로마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파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 파르티아 원정은 결국 페르시아 토착민들의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불러와(파르티아의 지배계층은 아프가니스탄 고원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가 파르티아를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가 있다. 후일담이지만, 로마에게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보다 훨씬 더 강한 적이었다. 마찬가지로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무너뜨린 것도 결국 다키아가 견제해주던 게르만족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게르만족이 팽창하여 발생하는 3세기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
이를 전술적 승리가 전략적 실책을 만회해주지 못한다는 좋은 예이자, 강대국의 팽창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축이 있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다키아 전쟁, 파르티아 전쟁, 3세기의 위기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발흥 사이에는 거의 10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 아무리 게르만족이 야만족이었다고는 하나 100년 동안 발전이 없을 리가 없고 파르티아의 영토가 고대 페르시아인의 영토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페르시아의 발흥은 언젠가 충분히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즉 다키아 왕국의 존재와 무관하게 게르만족의 발전은 계속됐을 수도 있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발흥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