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의왕후

 



'''호칭'''
'''단의왕후(端懿王后)'''
'''시호'''
공효정목단의왕후(恭孝定穆端懿王后)
'''출생지'''
회현동(會賢洞) 우사(寓舍)
'''사망지'''
창덕궁 장춘헌
'''본관'''
청송(靑松)
'''배우자'''
경종(景宗)
'''아버지'''
청은부원군 심호
'''어머니'''
영은부부인 고령 박씨
'''생몰'''
'''기간'''
양력
1686년 7월 11일 ~ 1718년 3월 8일(31세)
음력
1686년 5월 21일 ~ 1718년 2월 7일
'''재위'''
'''기간'''
1696년 ~ 1718년(빈궁)
1. 생애
2. 미디어
3. 여담


1. 생애


세종대왕의 국구[1]인 심온의 12대손이고, 명종의 국구인 심강의 7대손이며, 동서 분당의 원인을 제공한 심충겸의 6대손이다. 심봉서의 손녀이며, 첨정으로 후일 우의정, 영의정 등으로 추증된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이다. 세자빈으로 책봉될 당시 증조부 심권(沈權 : 당시 종4품 부응교)이 생존한 상태[2]로 심권은 서인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1696년에 11살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경종과 가례를 올렸다.
흔히 병약한 왕세자(경종)를 곁에서 극진히 모시다가 급환을 얻어 사망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숙종실록의 기록을 확인하면 오히려 왕세자는 건강한 편이었고 병약한 쪽은 세자빈 심씨였다. 숙환으로 풍질(風疾)[3]을 앓았고, 1701년 9월에는 말이 횡설수설하는 증상이 있어 내의원에서 약을 의논하였다. 앞서 8월에는 병으로 인현왕후의 상사에 예를 갖추지 못했다. 가례 당시에도 극심한 복통을 일으켜 식을 전부 취소해야 한다는 언급이 있었을 만큼 심각한 소동이 있었다.
경종 즉위 2년 전인 1718년 3월 8일(음력 2월 7일)(숙종 44년),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실록의 사망 기사를 보면 사망하던 날 유시(대략 오후 5시 ~ 저녁 7시 사이)에 쓰러졌고, 2경 1점(대략 밤 9시 반 무렵)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서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 '갑자기 졸(猝)'이라는 표현이나, '뜻하지 않은 상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상술되었듯 원래부터 병약한 체질에 앓던 병들로 인해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 왕세자인 경종이 손수 지문을 지었고, 숙종은 며느리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단의(端懿)의 시호를 추서해 단의빈이라 불리게 된다. 처음에 정한 시호는 온의(溫懿)였으나 세자빈의 12대조 심온의 이름을 범한다고 해서 단의로 바꾸었다. 같은 해 어유구의 딸 어씨(선의왕후 어씨)가 14세(만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왕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혜릉(惠陵)[4]에의 능호와 영휘(永徽)의 전호를 받고 단의왕후로 추봉되었다. 후일 영조가 단의왕후에게 공효정목(恭孝定穆)의 휘호를 올렸다. 경종이 급서한 후 단의왕후의 동생 심유현은 경종이 노론 환관들에 의해 유폐당한 뒤 독살되었다고 주장하며 이인좌의 난에 동참하였고 그로 인해 심씨 가문은 몰락하였다.[5]

2. 미디어



3. 여담


상기 심권의 주석에서도 잠깐 이야기되었지만 심봉서의 생부에 대한 이야기거리가 있다.
심봉서의 생부 즉 심권의 형은 심추라는 인물인데 심추의 부인은 조형이라는 인물의 딸이다. 조형에게 형이 있으니 조민이라는 인물이다.
이 조민의 증손자가 바로 영조의 첫째며느리였던 효장세자빈 현빈조씨의 아버지 조문명이다.
즉 심봉서의 생가 쪽으로 족보를 계산하면 단의왕후 심씨와 현빈 조씨와는 법적으로는 시조카(효장세자)의 부인이니 질부에 가깝고, 친정으로 따지면 외가쪽 10촌 항렬이다. 8촌이 넘어가니 남이나 다름없다지만 시댁과 친가 모두 친척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에 의의를 둘만하다.

[1] 왕의 장인[2] 다만 단의왕후의 직계 증조부는 아니다. 심권이 아들이 없어 9살 아래의 조카(심권의 큰형의 차남)을 양자로 들였는데, 바로 그 양자가 단의왕후의 조부 심봉서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심권과 단의왕후는 족보상 증조부-증손녀 관계이나 나이차이는 43세에 불과하다.[3] 중풍 등의 신경 질환. 현대의 뇌졸중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4] 동구릉안에 있는 혜릉이고 지아비인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는 서울 의릉(懿陵)에 동원상하릉 형식으로 묻혀있다.[5] 시발점은 군졸 이천해가 어가를 가로 막고 영조 앞에서 경종이 독살당했다고 운운한 것이였다. 이천해를 무자비하게 고문한 끝에 이천해의 독살 소스가 심유현의 입에서 나왔다고 밝혀졌고, 심유현은 이 일로 곤욕을 치르었다. 다행히 심유현은 외척이여서 처벌을 받지 않고 관직도 제수받았지만, 끝내 영조에게 대항해 이인좌의 난에 참여했다가 실패해 주살된다. 그나마 집안이 좋아 심유현만 처리되는 선에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