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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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 여흥 민씨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민광훈의 아들인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의 딸이다. 은성부부인은 서인의 거두 송준길의 딸이자, 정경세의 외손녀이다. 참고로 은성부부인은 민유중이 첫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한 2번째 정실 부인이다. 사인은 쌍둥이 자매 정성과 정제를 출산한 후 산욕열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은성부부인도 일찍 사망해서 민유중이 또 결혼했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중전이 되었을 당시의 친정어머니는 인현왕후의 계모인 풍창부부인이다. 풍창부부인은 인현왕후보다 8살 연상으로, 희빈 장씨와 동갑이었다. 때문에 각종 사극에서 인현왕후의 친정어머니 역으로 중후하고 인자해 보이는 어머니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인현왕후의 친정어머니가 계모라는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아서 시청자들이 그 어머니를 생모로 알고 넘어가기 일쑤인데, 2002년 KBS에서 방영한 장희빈(김혜수가 장희빈, 박선영이 인현왕후)에서는 친정어머니 스스로 자신이 인현왕후의 계모라고 밝히는 장면이 있다.
숙종의 첫 왕비였던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승하한 이후, 서인 측에서 세력을 잃지 않으려고 왕비로 추대했다. 이로 인해 남인 측과 손을 잡은 희빈 장씨와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인경왕후 김씨 역시 서인 집안 출신으로, 인현왕후와는 먼 친척뻘이다. 훗날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서인 측에서 복위 운동을 벌일 때 배후에서 공작을 벌인 인물이 바로 인경왕후의 친정 조카인 김춘택이다.
희빈 장씨와 함께 사극 속 중요 인물로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매우 익숙한 한국 역사 속 왕비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서인의 거두 동춘당 송준길의 외손녀이며, 남인의 영수 허적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인현왕후의 진외조모인 양천 허씨는 허적의 고모가 된다.
2. 생애
‘예의 바르고 정숙했으며, 출생 시에는 향기가 났다’는 내용을 담은 인현왕후전이나 사씨남정기에서 매우 현숙하고 부덕이 높은 여군자로 묘사하기도 하나, 사실 이건 서인 측 기록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작자 김만중이 인현왕후의 가까운 친척으로, 인현왕후의 폐위와 관련해서 귀양살이도 했음을 감안하면, 책을 근거로 하여 인현왕후가 정말 인품이 뛰어났다고 증명하기는 어렵다.[2] 차라리 다른 기록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게 더 신빙성 있다.[3]
희빈 장씨와는 8살 차이로 인현왕후가 더 어린 나이이다.
2.1. 왕비가 되다
1680년,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천연두를 앓으면서 20살에 요절하였다. 그 다음해인 1681년, 명성왕후의 주도 아래에 인현왕후가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된다. 당시 숙종의 마음이 퇴궁을 당한 장옥정에게 향해 있어, 인현왕후는 숙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4] 시어머니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장옥정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숙종을 본 인현왕후는 "장씨를 다시 궁궐로 들이자"고 제안하였고, 결국 장옥정은 재입궁하게 된다.
2.2. 질투
장옥정을 먼저 들이자고 제안할 만큼 현숙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으나, 장옥정이 재입궁한 이후에는 태도가 완전히 바뀐다. 사실 드라마나 전해지는 야사[5] 와 달리,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를 질투한 기록은 여럿 남아 있다. 숙종의 총애를 받는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영빈 김씨[6] 를 들이도록 하기도 했고, 희빈 장씨의 버릇을 고친다며 아랫사람을 시켜 장옥정에게 종아리를 친 적도 있었다. 정사 기록에서 왕후가 후궁에게 직접 매질하라고 명한 최초의 사례이며, 그만큼 장옥정에 대한 시기가 대단하다는 방증이다. 그 기가 센 원경왕후 민씨나 문정왕후 윤씨조차, 후궁에게 매질하여 훈계한 사례는 정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후궁에게 매질을 가하게 명한 것은, 당시 후궁이였던 희빈 장씨에게 상당한 모욕감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 때 희빈 장씨는 다리에 부종이 생겨 부은 상태였다고 한다. 여러 사극에서는 이런건 다 잘라먹고 희빈 장씨가 숙빈 최씨를 매질한 것만 나온다.
다만, 이 매질 사건이 벌어진 데에는 당시 종4품 숙원이었던 희빈 장씨의 부적절한 처신이 있었다. 궁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에, 숙종과 서로 희롱하다가 내전 앞으로 뛰어가서 "저를 살려주십시오." 라고 했던 기록이 있다. 실록에는 ‘내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함이었다’는데, 굳아 인현왕후의 반응을 살피려는게 아니더라도 첩이 본부인에게 가서 "우리 남편이 자꾸 저를 귀찮게 하네요. 저 좀 살려주세요' 한 셈이니, 본부인인 인현왕후 입장에서는 굉장히 무례하고 불쾌한 행동이다. 그러나 질투의 화신이라는 인식이 강한 희빈 장씨가 건방지게 굴었다는 기록은, 정사에서 오직 이 한 가지 뿐이다.[7]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다
결정적으로, 숙종에게 “명성왕후께서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8] 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을 한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있다.[9] 왕후가 왕에게 특별한 이유없이 후궁을 직접 멀리할 것을 종용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과 귀인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궁궐에 있게 되면 경신년에 실각한 사람들에게 당부(黨付)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부인의 투기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선왕과 선후의 말을 꾸며내어 모함할 계책을 세운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숙종이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대뜸 인현왕후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자, 신하들이 당황해서 인현왕후를 옹호한다. "부인이 질투하는 일은 여염집에서도 흔히 있는 일인데, 중전께서도 여염집에서 자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지난 9년을 국모로 있었으니 그런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시라"며 인현왕후를 옹호했다. 서인만 옹호하고 남인은 숙종을 부추겼을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이 때 서인이든 남인이든 한 마음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리 인현왕후가 서인의 입장으로 나온 왕비고 희빈 장씨 덕분에 남인들이 집권했다고 해도, 엄연히 국모인 왕비를 폐출하라는 말을 따르는 것은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며 명분도 없는 일이었다. 되려 숙종이 신하들의 그런 충고를 듣지 않았다.투기하는 것 외에도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선후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逆獄) 후에 불령(不逞)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禍)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하셔도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宣廟)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삼척 동자라도 반드시 듣고 믿지 아니할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21권, 1689년 5월 2일
신하들의 말대로, 이 정도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도 그냥 넘어가 줄 수 있는 정도의 투기였다. 그리고 심각한 투기를 하더라도 삼불거의 원칙으로 아내를 함부로 내칠 수 없었다. 이러한 원칙은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의 명분으로 사용되는데, 인현왕후 민씨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시부모의 상을 같이 지낸 조강지처이기 때문에 지나친 벌이였다는 것이다. 사실 심각한 투기도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너무 투기를 안 해도 문제였다.'''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하면 불충한 부인으로 여겨지기 딱 좋기 때문. 앞서 말한 거창군부인 신씨가 그 주인공으로, 이쪽은 시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마저 '''"중전이 너무 투기를 안 한다"고 혀를 끌끌 찼다.''' 혜경궁 홍씨나 효정옹주 또한 각자 시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여자라면서 투기도 안 하냐고 질책받은 바가 있다. 하지만 신씨나 혜경궁 홍씨의 경우 각각 남편인 연산군과 사도세자에게 제일 많이 총애를 받았고 부부생활도 원만했으므로, 숙종-인현왕후의 관계와 좀 다르기는 하다.
내명부를 관장하는 왕비의 입장으로서도, 희빈 장씨에게만 지나친 애정이 쏠리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중전이 후궁보다 엄연히 더 높은 사람이니, 아랫사람인 희빈 장씨의 방자한 행동을 훈계할 의무 겸 권리 또한 있는 법이다. 위의 사례처럼 희빈이 내전에 들어와 중전의 처지를 비꼬는데, 윗사람이 되어 그걸 질책하지 않는 것 또한 조선시대의 예법상 옳지 못한 일이다.
2.3. 폐비가 되다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희빈 장씨와 숙종의 첫 아들인 왕자 윤의 원자 책봉 문제가 불거졌다. 서인 측은 전례가 없는 급한 행동에 당황하여 온건한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숙종에 의해 무시되었고, 송시열이 일이 다 정해진 후에도 강경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숙종은 이를 빌미로 1689년에 기사환국을 일으켰고 조정은 남인들이 차지한다.
폐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탄일문안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국상 기간이라 "중전(인현왕후)의 탄일문안을 생략하라"고 어명을 내렸는데도, 인현왕후가 문안을 받은 사건.[10][11] 이 탄일문안 사건에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김덕원, 그리고 병조판서 민암과 이조판서 심재, 예조판서 민종도 등등의 신하들이 모여서 ‘왕후의 탄일문안은 당연한 예법인데, 이리 진노하는 이유가 뭐냐’는 상소를 올렸다.[12] 결국 인현왕후 역시 폐비가 되어 안국동에 있는 사가로 내쳐진다. '''노론, 소론은 물론, 남인들조차 반대했는데도 결정한 일이다.'''
인현왕후에게 물어진 죄는, '자식이 없는 죄',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13] , ‘투기로 내전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가 있다. 칠거지악 중 3가지나 범했으나 사실 인현왕후가 저지른 죄 정도는 넘어갈 수 있는 죄였다.
인현왕후를 폐위한 후, 숙종은 폐비 민씨의 남겨진 물건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으며, 민씨가 가례를 올릴 때 입었던 장복은 대내에서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 심지어 숙종은 "인현왕후와 가례를 올리는 날에 지진이 있어서 어쩐지 불길했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14]
2.4. 왕비로 복위되다
이후 숙종이 다시 남인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694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숙종은 처음에는 "폐인[15] 을 언급하지 말 것"과 "국본에게 위해를 가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명을 내리나, 번복하여 전비(前妃) 민씨를 덕수궁으로 들일 것을 명한다.
갑술년 4월 12일 민씨가 전비(前妃)의 자격으로 서궁(덕수궁)에 입궁하였다. 처음에는 궁호만 주고 서궁에서 여생을 보낼 것으로 보였으나...
그 날, 예고없이 장씨에게 "대조전(중궁전)을 저녁까지 비우라"는 명이 떨어진다. 인현왕후는 복위된 날 중궁전이 아니라 서궁에서 보냈으며, 이는 민씨를 입궁시킨 목적이 처음에는 복위가 아니였음을 뜻한다.[16]
이런 숙종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조정을 차지했던 소론 신하들은 강력히 반대 의사를 표출한다. "9년[17] 과 6년[18] 이 중한가? 아니면 아들이 있고 없음이 중한가?" 라고 왕세자의 생모인 장옥정이 더 귀하므로 숙종의 명을 따르지 않았으며 당시, 인현왕후의 완벽한 복위를 원하던 노론과 대립한다. 하지만,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이 "자식이 부모[19] 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그릇된 일" 이라고 말하며 소론을 중재했다.
이러하듯, 드라마에서는 희빈 장씨가 죄를 짓고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모함을 받아 폐위되었다는 게 드러나고 겨우 며칠만에 간단히 복위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의 명분은 삼불거의 규범이였는데, 인현왕후는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20] 의 상을 같이 치른 조강지처이므로 폐위의 처분은 가혹하다는 것이다. 삼불거의 규범에서, 쫓겨난 정실부인을 다시 들이면 새로 들인 정실부인은 친정으로 돌려보내거나 첩으로 강등시킨다. 즉, 인현왕후가 무죄라 복위된 것도 아니고, 희빈 장씨가 죄를 지어 강등된 것이 아니라, 국법을 따른 것이였다.
어쨌거나 결국, 인현왕후는 숙종의 갑작스런 결정으로 입궁한 당일에 왕비로 복위되었다. 숙종 실록에 인현왕후가 덕수궁에 입궁하기 전날부터 복위될 때까지의 밀당(?)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숙종이 내려준 옷을 "분에 넘친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숙종이 "그 옷을 안 입고 오면 궁인들에게 중죄를 내린다"고 엄포를 놓자, 결국 입고 왔다. 인현왕후가 입궁했을 때 숙종이 직접 마중을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도 인현왕후는 "내 죄가 너무 크다"고 자책하였다. 숙종이 "부원군과 부부인의 작호를 회복시키겠다"며 계모의 작호를 물으니, "기억 안 난다"고까지 했다.[21] 이 정도면 겸손이 지나치다 못 해 어깃장을 부리는 걸로까지 보인다. 중요한 것은 숙종이 짜증 한 번 안 내고 다 받아줬다는 것. 숙종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니 참은 것으로 보인다.
복위된 이후로도 끝까지 아이는 낳지 못했으며,[22] 장희빈의 아들인 왕세자 윤이 인현왕후 아래로 입적된다.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원수의 자식인 왕세자 윤을 친아들 못지 않게 귀여워했으며, 세자도 적모(嫡母)인 인현왕후를 매우 따랐다고 한다. 인현왕후의 오라비인 민진원의 단암만록에서도 인현왕후가 "세자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조석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사모하고 공경함이 사친(장희빈)한테 하는 것보다 낫다"고 표현했다는 점을 봐서는 서로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인현왕후는 복위된 이후로도 깊은 병으로 인해 세자나 왕자들을 돌볼 상태가 아니였다. 다만 경종이 인현왕후의 곁을 지키며 간호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2.5. 죽음
사극에서는 어느 날 쓰러져 약간 앓다가 깔끔하게(...) 유언 남기고 대낮에 승하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실제로는 1년 6개월 이상 처절하게 투병했고 갖은 합병증까지 앓아가며 고통받다가, 한밤중 새벽에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 사인은 종기와 부종의 합병증으로 추정된다.[23]
기록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양쪽 다리가 붓고 통증이 심해 참기도 어려운 상태였으며, 밤이 되면 통증이 더 심해져서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뒤이어 경련 증세가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다리에 경련이 일다가 전신으로 확대되어 의료진까지 놀라게 하는 것이 1달 가량 이어졌다.
환도혈의 종기를 따고도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허리 밑이 곪아서 침으로 종기를 땄는데, 이때 이미 '''손으로 만져보면 근육과 피부가 분리되는 것이 만져지는 상태였다.'''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환자라면 종기를 딴 후 고름이 다 빠지고 새 살이 돋아야 하는데 인현왕후는 회복기로 접어들지 못했고, 1년 가량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오심[24] , 구토, 복통, 설사, 발열이 끊임없이 교대로 나타났고, 당연히 먹는 것도 힘들어서 밥을 줄였으나 기껏 먹은 것도 게워냈다고 한다. 그러다 1701년 7월부터 기력이 쇠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 쉬는 게 힘들어지고, 밤중에 손발이 차디차게 식는 등의 말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소변이 막히고 구강에 부스럼이 생기는 등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갔다.내전이 다리 부위가 붓고 아픈 증상이 있었는데, 오른편이 더욱 심하여 환도 뼈 위 요척(腰脊) 근처에 현저한 부기가 있으므로 약방에서 침을 놓을 것을 계청하고, 제조가 의관을 거느리고 입직(入直)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34권, 1700년 3월 26일
1701년 8월 13일에는 친정 오빠들인 민진후와 민진원을 숙종이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날 밤에는 아예 의식을 잃고 부정맥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더니, 결국 복위 8년 후인 1701년 8월 14일 새벽 2시경, 창경궁 경춘전에서 깊은 통증에 시달리다 별세하였다.
그런데 인현왕후는 자신의 병을 두고 오빠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가 한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명색이 왕후인데도 궁궐 안에서 입지가 좁았다는 뜻일 수 있다. 희빈 장씨항목의 장례관련 내용에서도 알수있지만, 빈으로 사망하였지만 세자의 생모인데다가 이미 왕비로 재위했었던 경력이 있어서 희빈 장씨는 거의 왕비의 준하는 장례 절차를 밟았다. 그렇다면 살아 생전에도 비록 똑같은 정1품 빈이어도 숙빈같은 일반 후궁과는 다른 위세를 가졌을 것이고, 궁 안 사람들도 와병중인 인현왕후보다는 세자의 생모인 희빈에게 줄을 섰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세자의 생모라지만 후궁 처소의 궁녀가 감히 중궁전 창문에 구멍까지 내면서 염탐하는 것이 다른 시절 같으면 허용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25]내가 복위된 뒤, 세자의 사친(왕위를 물려받은 자의 친부모, 희빈 장씨를 의미)을 받들어 올리는 규정을 논하면서 '마땅히 일반 후궁과는 달라야합니다'라고 하니, 그때부터 궁안 사람들이 다 희빈에게 기울어졌다. 원래 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후궁 처소에 속한 궁녀들이 내전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희빈 장씨의 궁녀들이 내전을 수시로 출입하고, 창에 구멍을 내서 동태를 엿보는 등의 잘못을 많이 했다. 나로서는 돌아가는 상황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이렇게 몸이 아프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하는데, 나도 이런 상황이 의심스럽다.
한의학에서는 옹저를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 되면 반드시 옹저나 정창이 생긴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런 옹저가 생긴다’고 설명한다.[26] 화농을 2개 다 땄는데도 고름이 멈추지 않고 새살이 돋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체의 면역력과 회복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현대의 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고관절 부위에서 화농성 관절염이 생겼고, 이것이 뇌수막염으로 번져 경련 증상이 생겼으며, 점차 복부로 퍼져 복통, 구토, 설사 등을 동반하는 복막염이 되고, 끝내 심장으로 퍼져 심내막염이 되어 호흡 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27]
숙종은 그녀의 능을 조성하면서 인현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으며, 실제로 승하한 후 그 곁에 묻혔다. 일반적으론 원비인 인경왕후와 묻히는 게 원칙이지만 숙종이 그러기를 바랬다.[28] 다른 왕들도 반드시 지키지 않은 원칙이기도 했다. 이후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무덤도 바로 옆에 지었는데 이를 명릉이라고 하여,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중 하나이다. 이 능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인원 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이다.
3. 여러가지
3.1. 소설의 주인공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한 궁중 소설 인현왕후전[29] 에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의 초상화에 화살을 쏘아 저주했으며, 이로 인해서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내용이 존재한다. 실록에서는 희빈이 처소 뒷편에 신당을 차려놓고 왕후를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3.2. 죽음에 관한 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인현왕후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의견은 과거에는 나름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며, 실제로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은 원인이 되기도 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저주를 했는지는 둘째치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저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폐비가 되었을 때 했던 몸 고생 마음 고생의 후유증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을 듯하다. 실제로 현대 의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보았을 때 폐비 시절의 힘든 생활 때문에 결핵성 질환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그 후로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것으로 본다.
인현왕후는 사가 시절에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자책하면서 식사를 거르는 등 건강을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신분제 사회에서 폐서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죽느니만 못한 취급이었다. 폐비는 중죄인 취급이라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거나 좋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고 밖을 나다니는 일조차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선례를 보면 폐서인이 된 뒤 곧 사약 등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도 대단히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궁궐에서 간혹 의복과 음식을 보내주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미움을 받은 폐서인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을 다들 꺼려했음이 공공연한 사실이라 험한 음식만 먹었다. 또한 임금에게 버림받고 친정이 자신 때문에 화를 입었다며 죄인으로 자처해서, 안 그래도 스스로를 보살피기 힘든 환경에서 더더욱 자기를 챙기지 않아서 건강이 악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질투나 분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항상 온후했다"고 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제때 감정 표출을 해야 장신건강에 좋은데 인현왕후는 감정 표출을 제대로 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쌓기만 했다는 것과 같다. ‘부종과 등창으로 고생했다’고 실록에 쓰여있는데, 대체로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고 늘 누워있거나 하여 악화된 듯하다. 왕비로 복위한 뒤에도 희빈 장씨와의 대립이라든가 환국이라든가 하는 문제들이 산적하여 있었으니, 몸도 마음도 편했을 리는 없다.
3.3. 상징적인 존재
서인, 특히 노론 측에서 희빈 장씨를 천하의 악녀로, 인현왕후를 궁극의 성녀로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현숙한 국모로서 당대에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장씨 남매와 남인들이 권세가 하늘을 찔러 백성들의 사정이 궁핍해질 때 그에 대항하는 상징이 되었기에 더욱 그러한 듯하다. 야사에 의하면, 인현왕후가 궁궐에서 내쳐질 때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며 울었다고 하며, 그 유명한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가사의 민요가 폐출되었던 시기에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30] 그래서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머물던 사가를 지나갈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여기엔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내리는 총애에 과한 면이 있었다는 점도 있다. 사례로 희빈 장씨를 위한 전각을 지을 때 나라 사정이 좋지 못하여 신하들이 반대했는데도, 상당히 호화스럽게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31] 상황이 이러하니, 백성들 사이에서 “여자 때문에 왕이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올 만도 했다.
이 때문에 희빈 장씨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선 항상 궁극의 천사표 캐릭터로 나왔지만, 현대에는 대중들에게 다소 식상해져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 희빈 장씨가 주인공인 연극에서는 궁극의 흑막, 지독한 위선자로 나오기까지 한다.[32] 한 마디로 빠가 지나친 까로 돌아온 셈.
3.4. 보드 게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보드 게임을 고안해 낸 왕비이다.''' 인현왕후가 고안한 보드 게임은 규문수지여행지도(閨問須知女行之圖).[33] 이 게임은 인현왕후가 폐출되어 사가에 있을 때 외로움을 달래고자 어린 조카딸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아이와 놀아주려고 만들어낸 놀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남자아이들이 즐기던 보드 게임인 승경도를 여성 버전으로 컨버전한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 승경도가 조선 시대판 인생 게임으로 조선조의 관직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이라면, 이 게임의 말판에는 당시 여성들의 덕목이나 조선과 중국 역사에 남은 열녀, 효녀, 악녀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승경도가 말이 사약에 가면 게임 오버인 것에 반해, 이 게임에서는 말이 '''정난정'''에 이르면 '금수(짐승)' 칸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 게임 오버된다. 또한 승경도에서는 궤장이나 도원수에 이르면 승리하는데, 이 게임에서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34] 에 이르면 승리한다.
3.5. 친정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 민진원은 훗날 노론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가 되어, 신임옥사로 인해 사대신이 모두 처형되어 무주공산이 된 노론의 수장 자리를 차지한다. 민진원은 한때 여동생이 폐위되고 집안이 몰락한 것에 소론에게 한이 맺혔는지, 영조 재위 초반까지 매우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소론과 개싸움(...)을 벌였다. 영조는 민진원을 불러 소론 수장 이광좌와 손까지 잡게 하며 화해를 중재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영조도 설득에 실패했고, 영조 12년에 노론 강경파이자 공동 수장이었던 정호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인현왕후의 친정 일족은 조선 말기에 다시 왕비를 배출해내며 일족이 세도를 누리는데, 바로 '''명성황후 민씨''' 및 민씨 척족이 그들이다. 특히 명성황후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 종손이자 큰오빠 민진후의 현손인 민치록의 딸로, '''종갓집''' 출신이다. 또한 둘째 오빠 민진원의 후손이 민영익과 순명효황후 민씨이고, 남동생 민진영의 자손이 민승호, 민겸호, 그리고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남매이다.[35] 그리고 그녀의 큰아버지인 민정중의 후손이 바로 남연군의 부인이며 흥선대원군의 어머니가 되는 군부인 민씨이다.
인현왕후의 전임이었던 인경왕후와는 아주 묘하게 연결되는데 인경왕후의 5대조인 김계휘의 동생인 김은휘라는 인물이 있는데 김은휘의 딸[36] 이 송이창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37] 이 민유중과 결혼한다. 여기서 태어난 딸이 바로 인현왕후이다. 인현왕후의 외외가가 광산 김씨인 것이다.
촌수로 따지면 인현왕후는 인경왕후의 할머니뻘에 해당된다.[38]
4. 대중매체에서
사극에서 장희빈이 팜므파탈 이미지의 여배우를 캐스팅한다면, 인현왕후는 대체적으로 단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여배우들이 맡았다.
- 조미령[39] : 1961년 영화 <장희빈>
- 태현실 : 1968년 영화 <요화 장희빈>
- 이혜숙 : 1982년 MBC 드라마 <여인열전> 중 제1화 <장희빈>
- 박순애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백년 - 인현왕후>
- 홍수현 :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