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익진

 

1. 소개
2. 한산도 대첩
3. 대중매체에서의 학익진
4. 여담
5. 일상에서의 학익진
6. 관련 문서


1. 소개


진법의 일종. 날개를 펴는 모양을 으로 응용하여 만든 것이다. 말 그대로 상대를 원을 그려가면서 둘러싸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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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은 전사에서 기진奇陣으로 유명한 망치와 모루(핀서 클로우)의 전법에서 내려치는 망치를 2개로 하여 우회와 포위를 겹으로 구사하는 방법이다. 한니발 바르카칸나이 전투에서 우수한 기동 기마군 2부대를 이용하고 자신의 백전연마 노장들을 모루로 사용하여 승리를 거뒀던 전법이다. 서양인들은 이를 흔히 이중포위라 부르지만 실은 학익진 기본에 예비군단 2개를 추가로 운용하여 포위진을 완성시킨 형태다. 즉,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월한 기마병의 기동성을 이용한 육상의 진법이란 것이다.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희대의 치트키 때문에 많이 오해를 받지만, 군법시용집이라는 에도시대 때의 군학서에 따르면,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기 적합한 형태로 적보다 많은 군세로 적을 포위하여 섬멸할 때' 쓴다. 아마 이순신이 이 진법을 사용한데에는 화력의 우위가 영향을 주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한산도 전투가 사실 조선측 함대가 조금 숫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견내량으로 그냥 진격하면 발릴 뿐이었겠지만... 또한 이순신 장군이 고안해낸 이순신만의 독특한 전법이라는 오해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며 이미 임진왜란전 일본 전국시대에서도 육전에서 여러번 쓰였던 전법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다케다 신겐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학익진을 펼친 것을 보고 어린진, 즉 쐐기형으로 부대를 편성해 전투력을 일점에 집중하는 해법으로 깨뜨려서 도쿠가와가 똥을 싸고 튀게 한 미카타가하라 전투.[1]
참고로 학익진은 적을 포위할 목적이라 대열이 얇아진다. 그러므로 측면이 뚫리면 적에게 후방이 노출되어 매우 불리해지게 되므로 측면에도 예비대를 일일이 배치해야 한다. 게다가 학익진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전술 훈련과 병사들의 숙련도도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숫자가 많으면서도 정예병력이 있어야 칠 수 있는것. 바로 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풋내기 시절 이것을 모르고 지형도 그다지 좋지 않고 숫자도 우월하지 않은 상태에서 학익진을 썼다가 당대 일본 최고의 무장 다케다 신겐에게 처절하게 패배했다.

2. 한산도 대첩


학익진을 쓴 대표적인 예로 한산도 대첩이 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했다는 말은 학익진을 '''해군에 최초로 적용했다는 것.'''[2] 이 진은 육전에서는 대형을 횡렬로 형성하는 일자진의 형태이다. 해전에서는 단순한 학익진보다는 초승달 형태의 어린학익진(魚鱗鶴翼陣)[3]을 쓰게 되어 있고, 실제로도 이순신은 어린학익진을 사용했다. 다만 그 진법이 학익진과 비슷하므로 모든 사료에서 학익진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한산도 해전의 무대인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해전에 불리한 곳이었다. 조선 수군은 그곳에서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적들을 유인한 뒤, 학익진을 펼쳐 적선을 포위하였다. 왜선은 날개와 같은 진형 안에 갇혀 47척이 격침, 12척이 나포되었으며 수많은 왜병이 실종되거나 익사했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50척의 판옥선이 모두 포위망에 투입된 탓에 전선급 예비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진형이 조금이라도 무너져 후방이 노출된다면 망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던 것. 왜 그런가 하면 판옥선은 평저선. 즉 배 밑바닥이 평평한 탓에 선회력이 우수했고. 화력의 집중을 위하여 한 쪽에 화포를 사용한 후 제자리에서 선회해 그 동안 장전을 마친 반대편의 화포를 사용했다. 즉 학의 날개가 찢겨나가 한 척이라도 포위망을 빠져나가게 된다면 아군의 화력이 분산되고 적군의 화력에 아군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4]
학익진법은 한산도 해전 외에 당항포·안골포·율포 등의 해전에서도 이순신이 즐겨 사용했다.[5]
다만 이순신은 학익진 하나만을 고집한 전술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어린학익진과 팔진기문법(八陣奇門法) 등과 함께 활용하여 전술의 다양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전투진은 지리와 수의 우세한 위치, 또는 그 형세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켜 운용하였다. 즉, 세계적으로 중세시대이던 그 시절에 현대 전투의 상식인 화력을 기반으로 한 포위 및 섬멸작전을 그것도 완벽하게 해상에서 이뤄냈단 것이다. 이렇게 화력을 집중하는 전술을 기용할 때 학익진이 가지는 또 하나의 강점이 있는데 이는 리델 하트의 발언에서 나온다. 리델 하트는 포위 섬멸전에 있어서 중요한 명제를 '최대 횡진이 최대 화력을 보장한다'라고 했는데 해상전과 같은 란체스터 법칙이 적용되는 전투에서는 화력의 집중과 우세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적의 기동을 방해하고 근접전에서의 수적 우위를 보장할 뿐더러 화력의 면에서 제곱 단위로 적용되게할 수 있는 최대효율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함대 기동을 행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양익이 기동성과 충격력을 충분히 가져야 하고, 중군은 모루로서 강한 저지력을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 모순된 능력을 동시에 보이며 압승한 한산도 대첩을 보면 이 수사 영감이 평소에는 인자했지만 전투와 훈련에서는 부하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굴렸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3. 대중매체에서의 학익진


  •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임진왜란 1592: 학익진을 보고 특징과 약점을 바로 파악한 뒤 중앙 돌파를 시도하는, 고증에 조금 더 부합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모습이 나온다.[6] 불멸의 이순신에서 학익진을 묘사한 대사에서는 "하! 학익진이라! 저런 병략의 기본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학익진은 아군의 숫자가 적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때 쓰는 진형이거늘! 고작 20척으로 70여척인 내 함대를 감싸겠단 말이냐? 게다가 학익진의 생명은 측면이거늘 측면을 비워두고 학익진을 폈다 하겠는가?" 라는 대사를 한다. 극중에서 일본군의 수군 운영 패턴에 기반한 판단으로, 조선군이 불리한 체격으로 학익진을 시도하는 무모함을 보인다고 판단하여 비꼬는 것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소규모 함대로만 작은 반월형 포위진을 짜서 와키자카를 방심시킨 후에 매복시켰던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의 함대가 양쪽에서 튀어나와 전라좌수영 군과 연결되어 적의 측면까지 원천 포위해 버리는 분진합격(分陣合擊) 식의 전술로 묘사하였다. 조선 수군의 1차 포격이 끝난 뒤 포의 재장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용하여 신속히 돌파하여 학익진의 날개를 찢는 반격을 시도했지만, 선체 회전이 가능한 판옥선의 특징을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숙달한 조선 수군의 2차 포격이 이어지며 와키자카의 함대를 갈아버린 것으로 전투 묘사를 마쳤다.

4. 여담


박명수가 아주 좋아하는 단골 멘트다.

5. 일상에서의 학익진


좌측과 우측의 구분 없이 양쪽을 모두 한쪽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보행 방식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려는 다른 보행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민폐 보행에 속하는데 이를 학익진으로 부른다. 특히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에서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우측보행을 권장한지 10년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의 보행 에티켓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이를 의식해서인지 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에서도 와키자카가 이순신의 학익진을 바로 알아보고 측면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뒤이어 양옆에서 원균, 이억기의 함대가 나타나 와키자카의 함대를 완전하게 싸먹었기 때문에 대패한다[2] 사실 다른 나라들에도 해전에서 학익진을 활용한 듯한 기록들은 있다. 한 예로 백강 전투에서도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돌진해오던 왜군을 끌어와 좌우로 포위한후 포위섬멸한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다만 이순신은 자신이 의도한대로 학익진을 펼친 것인데, 다른 기록들에선 의도한것인지 우연에 의한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3] 어린학익진은 물고기의 비늘이 벌려진 것 같은 대형과, 학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은 진형을 말한다. 어린은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있는 진형이며, 이를 첨자찰(尖字札)이라고도 한다.[4] 쉽게 말해서, 이순신은 조선군의 화포가 가진 우수한 사거리와 화력, 판옥선의 선회능력과 요새 수준의 견고함, 그리고 자신이 길러낸 조선 수군의 단합력을 믿고 후방 방어를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5]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언제나 최선의 상황에서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화력을 투사할 방도를 찾으려고 했고, 그것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학익진이다.[6] 임진왜란을 다룬 창작물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비롯한 일본군 장수들이 '저게 대체 무슨 진형이냐?'라고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는 식으로 놀라는 것은 사실상 고증오류에 가까운데, 육지냐 바다냐는 다르지만 학익진이란 진형 자체를 모를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 위에서 함대로 학익진을 펴다니,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 라는 식의 탄식이 더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