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억기

 


[image]
이름
<colbgcolor=white,#2d2f34>이억기(李億祺)
출생
1561년 9월 3일 조선 한성부
사망
1597년 8월 27일 조선 경상도 거제군 칠천도
본관
전주 이씨

경수(景受)
시호
의민(毅愍)
서훈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1]
1. 개요
2. 생애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2. 생애


전주 이씨로 왕실의 먼 친척이다. 정종의 10째 아들인 덕천군(세종대왕과 4촌 관계)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심주군 이연손(沁洲君 李連孫)이다. 무의공 이순신양녕대군의 6대손이고, 선조세종대왕의 6대손이므로 선조, 무의공 이순신은 둘 다 이억기와 14촌 관계이다. 이들 중 나이상으론 이억기가 제일 어리지만 항렬상으로는 저 둘의 할아버지뻘이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서 17세에 사복시(司僕寺)[2]의 내승(內乘)이 되었고, 10대에 이미 무과에 급제했다. 21세에 종3품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로 임명되었으며 이 때 두만강을 넘어온 여진족을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웠다. 26세에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가 되었다.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 때문에 압박 받자 이억기가 이순신 편을 들어 줬다고 한다.
1591년 (선조 24년) 32세 때 순천도호부사 겸 순천진병마첨절제사전영장토포사(順天鎭兵馬僉節制使前營將討捕使)를 거쳐 정3품 당상관인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에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등과 합세하여 당항포·한산도·안골포·부산포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는 큰 활약을 했으며[3] , 그 공적은 이순신 다음으로 여겨진다. 다만 임진왜란 초반의 주요 해전에 참여하지 않아 선무 공신 2등이 되었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戰船)을 이끌고 전라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제주도의 전투 준비를 성원하였다. 또한 한산도의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였다. 또한 연합 함대의 기동 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하였다.[4]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자, 이항복·김명원 등 조정 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무죄를 극구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 명령을 받고,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였다가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하여 원균·충청 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했는데, 총 지휘관인 원균이 부하들 목숨은 내팽개치고 도망갔지만, 이억기와 최호는 도주하지 않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것이다.
젊어서부터 활약한 유능한 귀공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한국 최고의 영웅인 이순신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졸장인 원균의 개성에 막혀 인지도가 거의 없는 편이다.[5] 이건 당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수군의 작전 통제권(주로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을 의논할 때 선조가 이억기는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있는데, 쓸만한 사람이다라고 하니까 체찰사였던 이정형[6]그는 원균만 못 합니다라고 답하는 일생 일대의 굴욕을 겪기도 한다. 또한 이순신의 외모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당시 삼가 현감 고상안도 이억기에 대해서는 "李水使浮虛不實。神不守舍。異日或戰破。或短折.이수사(이억기)는 과장되어 실속이 모자라므로 늘 정신이 다른 곳에 있었다."라고 비판적으로 기록하였다.
2차, 3차 출동 때는 전라 좌수영 병력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병력만 동원했다.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남겨둔 것인데 이는 육군에 파견되거나 서해로 올라오는 것을 막으라는 명령 때문인 듯 하다. 이순신 역시 육군에 병력이 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몇 차례나 장계를 보낸 바가 있다. 이후 4차 출동 때는 40척이 넘는 병력을 보냈고, 그 이후에도 삼도 수군 중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렸다. 그런 것에 비해서 너무 인지도가 낮은 편. 투명라인의 원조격일지도.
병력을 동원하는 문제로 이순신과 대립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후 로 푼 듯 하다. (...)[7] 그 외에도 이순신이 이억기에게 가니까 원균과 같이 있었다는 등 둘의 불화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사후에 선무 공신 2등이 되었고, 병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정조 때 마땅히 시호를 받아야 하는데 전례에서 누락되었다는 지적이 있어 의민(毅愍)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완흥군(完興君)에 추봉되었다.
종친이라서 실력이 있었음에도 견제 받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반론도 있다. 이미 왕위 계승에서 까마득하게 멀고 추존도 되지 못 한 존재감 없는 왕 정종의, 그것도 서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8] 선조가 방계 정도가 아니라 고종 급의 정통성이었더래도 이억기 정도의 사람은 위협이 못된다. 선조가 방계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추측이며 선조가 이억기를 혈통 때문에 위험하게 봤다는 추측은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 기간에 '똑똑한 왕손을 다 죽였다'와 같은 억측으로 보여진다.
대한민국 해군장보고급 잠수함의 마지막 함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최성준이 담당하였다.
2014년 김한민 감독의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칠천량에서 죽은 부하들의 원혼을 보는 장면에서 이순신이 "이 수사...... 최 수사......"라며 울며 말하던 '이 수사'와 '최 수사'는 각각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를 가리킨다. 많은 사람들이 모른채 지나간 대사.

[1] 증 효충장의협력 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 宣武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완흥군(完興君) 행 가선대부(嘉善大夫)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시(諡) 의민공(毅愍公) 이억기.[2] 왕가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부서[3] 그러나 옥포 해전 이전인 5월 1일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으로 모이자는 제안을 했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억기는 6월 4일 사천해전 도중에 참전했다.[4]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5] 이 항목 역시 제법 늦은 2011년 5월 27일에 만들어졌을 정도. 여하간 임진왜란 때의 장수 및 이순신의 부하들보다도 훨씬 늦은 편이다.[6] 연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정암의 형이다.[7] 이건 별로 문제될게 없는게, 이순신은 원균은 물론이고 자신 휘하 부하들도 잘못한게 있으면 바로바로 까는 내용을 난중일기에 남겼다. 당대의 의병장들도 깠다. 워낙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이기에 가능한 부분. 그럼에도 이순신이 욕을 먹지 않는 것은 그 엄격함을 자기 자신에게도 지킨 덕분이다.[8] 정종은 숙종 대에야 비로소 묘호를 받았다. 세종 1년 승하하였을때 받은 시호가 온인 공용 순효 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었는데 명나라에서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받고는 공(恭)자가 두번 들어간다며 공용(恭勇) 두 자를 지워버렸다. 그래서 조선에서 받은 시호가 고작 네 글자였는데 숙종 때에 비로소 묘호와 함께 시호 여덟자를 채우게 된다. 의문 장무 온인 순효 대왕(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