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교전
1. 개요
만화이자 웹툰인 《용비불패》와 웹툰《고수》 세계관의 대표적인 사건. 중원에서 흔히들 '마교'라 불리는 집단인 아수라혈교가 중원 무림으로 쳐들어와 무림인들과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난다. 무림맹은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대연합을 결성해 총력전을 펼쳤으며 이 전쟁은 이후 무림에서 '대마교전'이라 명명된다. 한자로는 아마도 '對魔敎戰'일것으로 추정.
2. 상세
2.1. 전쟁 암시
이 전쟁이 예고됐던 것은 용비불패 19권에서 마교의 3대 주교인 '광혈대마'에 의해서이다. 금화경~황금성 관련 사태 당시, 마교의 8대 주교인 잔월대마가 구휘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광혈대마는 현재양과의 대화에서 "본교의 중원 출정이 10년 정도는 미뤄질테니...!"라는 대사로 약 10년 뒤 전쟁을 암시했다.
2.2. 전쟁 발발
그리고 결국 교주와 휘하의 7명의 주교들을 필두로 중원 무림에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는데 그 시기는 고수 시점으로 부터 약 50년 전[1] 으로 추정되나, 용비불패 시점을 기준으로는 불분명하다. 광혈대마의 예고대로 10년 뒤에 쳐들어왔는지, 아니면 실제로는 예고보다 빠르게, 용비불패 시리즈 이후 얼마 안 돼 쳐들어왔는지 작중에서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 '약 10년'의 유무에 따라 고수의 시기가 용비불패로부터 약 50년 후인지 약 60년 후인지 달라지고, 구무림 인물들의 나이가 약 10살 차이로 달라진다.
2.2.1. 용비불패 시기로부터 10년 뒤라는 의견
아무리 마교라 할지라도 10년 뒤를 예고해 놓고 얍삽하게 훨씬 빨리 기습해오지는 않았을것이라는 의견.[2] 사실, 광혈대마가 10년 뒤를 예고 한 대사때문에 많은 독자들은 당연히 대마교전은 약 10년 뒤에 일어났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쪽이 많았다.
2.2.2. 용비불패 시리즈 이후 얼마 안 된 시기일 것이라는 의견
일단 애초에 10년 뒤라는 것도, 용비불패 19권에서 광혈대마가 10년 뒤를 넌지시 언급했을 당시, 현재양이 "10년 뒤를 기약하는 선전포고로군"이라 하자, 광혈대마는 "단지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허언일수도 있지만"이라 대답하기도 했다. 즉 그 예고를 했던 말 자체부터 100% 확신이 아닌, 다소 두리뭉실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약 10년'이 정확한 소리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또 다른 근거는 대마교전에 참전했던 인물들에 대한 묘사다. 우선 고수 2부 52화에 있는데 홍예몽 앞에 엎드린 친파천문 무림인들이 그녀를 두고 '빙옥선제라면 적어도 칠순은 넘겼을 텐데...?'라고 의심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용비불패 시절 홍예몽의 나이는 20세~20대 초반[3] 으로 추정되는데, 고수 시점에서 '팔순'이 아니라 '칠순'이라는 단어를 새삼 언급한다는 것은 약 60년 후가 아닌, 약 50년후일 확률이 크다는 의견이다. 이후 조금씩 묘사된 대마교전 당시의 모습을 보면 용비나 구휘 모두 용비불패 시절의 외모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4]
또 하나는 마교의 주교가 그대로 7명이라는 것도 문제다. 마교는 교주 밑으로 분명 8명의 주교가 있었고 그중 한명인 잔월대마가 죽으며 한자리가 공석으로 비게 되었다. 그런데 마교측에서 10년동안 이 한자리를 공석으로 하고 쳐들어왔다는 것도 약간 의아한 부분이다. 물론 도저히 그 인원을 채울만한 인재가 없었다고 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중원을 상대로 한다면서 10년동안 주교 빈자리 하나 채울만큼 인재풀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큰 문제다. 당장 중원에는 열두존자급 재능이 꽤 있는 마당에.....
예상보다 빨라진 중원 침공 역시 고수 내에서 밝혀진 사실, 즉 죽어가던 옥천비가 단의 힘을 빌려 부활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설득력있는 이유가 생긴다. 즉 원래 10년 뒤라는 것은 옥천비를 회복시키기까지 짐작되는 기간이었으나, 단을 얻은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옥천비가 부활하는데 성공했고 그만큼 중원 침공도 빨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여러가지 정황에서 추측해보면 용비불패 시리즈와 대마교전 사이의 약 10년의 텀은 거의 없어지게 되는게 자연스럽고, 용비불패와 고수 사이에는 약 51년[5]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2.3. 전쟁의 전개
대마교전의 전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작중 드러난게 매우 적다. 어느 지역에서 처음 발발했으며, 전쟁 기간은 어느 정도였고, 어떻게 전개되어 어떤식으로 마무리 되었는지 등등 모두 작중에 언급되지 않았다.
그나마 작중 밝혀진 것은 고수 1부 78화에서 사패천의 회상 독백으로 묘사된 내용으로, 마교측 선봉장은 '무극신마'[6] 였으며 이에 맞서 무림연합측은 열두존자의 삼존 중 한명인 암존 독수마황 사패천이 출전하였다. 무공 수위만으로만 보자면 무림 최고라 불리던 사패천이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펼친 최강 절기 폭렬대천에 밀린 무극신마는 사망했고, 무림연합 세력의 사기를 높였다. 하지만 사패천의 회상에 의하면 전투의 혼란을 틈타 열두존자중 두명이 그에게 사적인 원한을 갚고자 은밀히 도발해왔고, 사패천은 그 둘 마저 죽이고 만다. 이에 분노한 아군의 홍예몽, 용비, 구휘가 차례대로 사패천을 공격했고, 그 3명과 싸우며 도주하는 과정에서 혈맥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사패천은 이후 모습을 감춘다.[7]
2부 103화에 따르면 용비, 구휘는 수라마제 옥천비와 교전을 벌였지만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서로 물러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작중 묘사된 전쟁중의 이야기이고, 이외에는 아직까지 대마교전에 대한 어떠한 전개내용도 상세히 밝혀진게 없다.
3. 대마교전 이후~고수 사이의 역사
전쟁은 중원 무림 연합의 승리로 끝났지만, 참전 인원의 8할 이상이 희생됨으로써 회복불능의 상처만 남긴 처참한 승리였다.[8] 참전 인원 중, 살아남은 이들 또한 '다툼뿐인 무림계에 대한 염증'과 '죽은 동료 등에 대한 애도'등의 이유로 무림에 등을 돌리고 떠나갔고 무림 전력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대마교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소문파의 잔류세력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파 연맹이 결성되었는데, 이것이 고수 시기의 무림맹(신 무림맹)이다.[9][10]
이후 신 무림맹은 빠른 양적 세력 확장을 위해 정파와 사파의 경계선에 있던 '풍진방'등의 중립 성향 문파들까지 대거 영입했고[11] 그렇게 조금씩 안정을 찾는듯 했으나, 재건을 시작한지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남방을 거점으로 한 사파세력인 파천신군의 파천문에 정벌을 당한다.[12] 3년의 짧은 기간에 무림 천하 대부분을 정복하기에 이른 파천신군의 파천문 아래 무림맹의 중립성향 문파중 절반 이상이 배신하고 제발로 파천문을 찾아가 충성을 맹세했으며, 배신자들은 파천문이 내분으로 몰락한 이후 그 잔당들과 함께 응징된다.
이 사건 이후, 무림맹(신무림맹) 내에서는 풍진방처럼 무림맹 내에 남아있던 중도 출신 문파들을 차별하고 노골적으로 홀대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렇게 각자의 앙금을 남긴채 고수시기에 이른다.
4. 작중 세계관에서의 의의
결론적으로 대마교전은 단순히 마교와 무림연합의 싸움으로만 끝난게 아닌, 중원 무림 전체의 판도와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계기가 된 큰 사건이었다. 대마교전으로 인해 중원 무림의 전체적인 전력이 용비불패 시절 강력했던 '구 무림'에서 이후 '신 무림'으로 극하락했고, 그로 인해 신 무림맹이 출범한지 20년도 안 돼 파천문에 손쉽게 정벌 당해 불과 3년 만에 무림맹 전멸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파천문의 득세와 몰락이 후속작인 고수 스토리의 기반이 되기도 한 만큼, 이 연쇄 작용의 시작인 대마교전은 이 세계관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5. 기타
고수 연재 시기중, 이 전쟁의 공식 명칭이 작중에 아직 언급되지 않던 시절에는 독자들이 임의로 '마교대전'[13] , '정마대전'[14] 등으로 이름을 붙이거나 '마교와의 전쟁' 등으로 풀어서 쓰곤 했지만, 고수 2부 52화에서 백마곡의 호법이자 장로인 당간이 "50년 전 중원무림의 명운을 걸고 벌어졌던 대마교전"이라는 대사를 함으로써, 해당 전쟁이 무림에서 '대마교전'이라 불린다는게 밝혀졌다.[15]
[1] 고수 2부 52화에서 당간의 대사. 그런데 그보다 앞선 1부 42화에서 도겸의 숙부는 풍진방이 정파로 편입된것이 40년이 채 되지 않았고, 그 무렵 대마교전이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어서 이것이 설정 충돌인지, 오타인지는 불명.[2] 하지만 더 빨리 쳐들어 왔다 해도, 이미 무림맹에서 마교의 움직임에 대비를 하고 있다는 언급이 있었기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을것이다.[3] 용비나 홍예몽 둘 다 작중 내내 타인들로부터 '약관의 나이'라고 언급되니 많이 쳐줘도 20대 초반.[4] 특히 원래 노안일 가능성이 있는 구휘는 그렇다쳐도, 대마교전이 10년 뒤라면 용비 역시 서른줄에 접어들었을텐데 수염 하나 없이 멀끔한 모습으로 묘사된다[5] 또는 그 뒤로 1~3년정도 후라 해도 52~54년 정도[6] 큰 전쟁에서 선봉장으로 출전했다는 점과 '신마(神魔)'라는 특유의 별호로 보아, 3대 주교인 광혈대마보다 서열이 높은 1대 또는 2대 주교로 추측된다.[7] 이 사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과 의견은 문서 참고.[8] 전쟁 후 50년이나 지난 '고수'시점에서도 구 무림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을 보인 신 무림맹을 보면 작중 '회복불능'이라고까지 표현 했던 단어가 과언이 아니었다는것을 말해준다.[9] 이들의 힘은 과거 구 무림에 비해 형편없이 약한 수준이었다. 대마교전때 무림 정예 전력의 대부분이 희생됐고, 생존자들마저 무림을 떠난뒤, 남은 군소(群小)문파들이 모여 다시 세운것이니 당연한 일.[10] 신무림맹이 대마교전 끝나고 얼마후에 세워졌는지 확실히 밝혀진 내용은 없으나, 권력이란 공백을 남겨둔채 오래가는 법이 없으므로 대마교전 참전자들이 무림을 떠난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11] 고수 1부 42화에서 도겸의 숙부가 하는 말을 보면 풍진방이 신무림맹에 가입한지 40년이 채 안된다고 했으므로 대략 40년이라고 보면, 대마교전 이후 신무림맹이 들어서고 약 10년쯤 뒤에 풍진방이 가입했다는 계산이 나온다.[12] 아무리 중립 성향 문파들까지 끌어들여 세력을 넓혔다 해도 애초에 대마교전 이후 남아있던 약체들의 모임이었다.[13] 마교의 큰 싸움이라는 뜻이 되는데, 마치 마교에서 벌어진 내전같은 의미가 되므로 이 전쟁을 제대로 설명해줄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14] 무림 연합측은 정파만 있던게 아니므로 역시 이 전쟁을 제대로 상징할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15] 독자들이 임의로 지어 부르던 '마교대전'과 흡사한 명칭이라 아직도 마교대전이라 잘못 부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사실 한자로 추측해 보면 마교대전은 '魔敎大戰', 대마교전은 '對魔敎戰'. 이렇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