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컨 에드워즈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뛰어났다. 내가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 유일한 선수였다.''' - 보비 찰튼[3]
'''던컨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량이 있습니다. 최전방에 있으면 그는 헤딩을 할 것이고, 하프백(미드필더) 자리에선 패스를 하겠죠, 상대 팀에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으면, 그는 바로 수비수로 변해서 마크를 할 겁니다. 우리 팀원들은 그의 플레이를 보고 스스로를 애송이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 톰 피니
1. 소개
1936년 10월 1일 생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 활약한 영국의 축구선수. 버스비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맨유유스 선수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재능이였으며 만 21세의 나이에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어간 재능 있는 선수였지만 불과 몇 달 뒤 뮌헨 참사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보름 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대로 된 경기 영상도 없고 활약상은 물론이거니와 플레이 스타일이 어떤지도 알 수 없지만, 당대의 수많은 영국의 레전드들이 남긴 평가만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재능이었음을 짐작 가능하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펠레, 마라도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거라는 평가까지 받는 선수이다.
이 시대에는 장신으로 취급받는 180대의 신장에 빠른 스피드, 강한 체력[5] , 양발 개인기, 뛰어난 수비력과 창의적인 패스 능력, 넓은 시야와 뛰어난 득점 감각까지 두루두루 갖춘 멀티플레이였다. 그야 말로 시대와 국가[6] 를 잘못 타고난 천재.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공식 경기가 200여 경기에 달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신임을 받았고 또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특히나 주목할 부분은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수비수였음에도 당시에 200경기 동안 20골 이상을 넣은 것인데, 수비 전술이 그렇게 잘 짜여있지 않고 절대적으로 공격에 치중했던 시기에 수비수가 이 정도 스텟을 쌓는 것은 거의 신기에 가까운 일이다.[7]
공격형 미드필더, 공격수로 뛰었던 바비 찰튼이 재능 면에서 부러워했다는 것을 보면 동 포지션이 아님에도 그러한 열등감을 느낄만큼 축구에 대한 능력 자체가 뛰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쟁쟁한 공격수, 미드필더들을 제치고 발롱도르 3위에 선 것 또한 놀라운 성과다.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평가들을 뒷받침해줄 그의 플레이가 남지 않은 것이다.
2. 이야깃거리
- 월드컵을 들어올린 잉글랜드의 캡틴 바비 무어가 유스팀 시절에 가장 존경하던 선수가 바로 던컨 에드워즈였다. 둘은 포지션, 등번호가 똑같다. 무어는 포백 포지션이 보편화된 이후에는 좀 더 수비적인 역할을 맡아 센터백 포지션에 정착했다.
- 바비 찰튼이 현재 맨유에서 뛰는 수비수 필 존스랑 던컨 에드워즈와의 생김새가 닮았다고 인터뷰에서 얘기한적이 있다.
- 금욕주의자로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아 당시 맨유의 수석코치 지미 머피 코치는 때묻지 않은 순둥이 소년처럼 여겼다. 실제 성격도 꽤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는 듯. 여가로 낚시와 카드 게임, 영화 감상을 좋아했다.
- 버스비의 아이들로 대표되는 당시 영국 축구 아이돌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본인은 거기에 신경쓰지 않고 꺼리김없이 살았다. 어릴때 쓰던 사투리도 고치지 않았고, 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활보하기도 했다[8] . 맨유에서 데뷰하고 훗날 리즈 유나이티드의 레전드가 된 조니 자일스는 던컨과 첫 만남에서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인기 스타 선수라서 금새 눈에 띌 줄 알았는데, 그냥 수수한 차림으로 구석에서 사과나 씹어먹고 있더라고. 조니 자일스가 보기엔 던컨은 세상의 평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고 한다.#
- 위에 언급되어 있듯 당시 기준으로 체격이 걸출해서 Big Dunc 혹은 Tank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즉흥적인 전술로 던컨을 잘 활용한 맷 버스비와 달리, 지미 머피 코치는 그를 전술에 맞춰 활용하려 했다. 던컨이 유소년 팀에 있을때 선수들이 너무 던컨에게 의존하는 경기를 하자 "쟤(던컨)한테 너무 패스하지 마라"고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은 첼시와 중요한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바로 태세전환하며 "무조건 던컨에게 공을 줘!"라고 외쳤다고(...). 이후 던컨은 무려 10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고 한다[9] . 그리고 그 경기에서 승리했다.#
- 1998년에 마이클 오웬이 데뷔하기 전까지 가장 어린 잉글랜드 국가대표 데뷔 기록을 갖고 있었다.
- 일부 개념없는 라이벌팀 팬덤들에 의해 고인드립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던컨 에드워즈가 manure가 되었다는 악질적인 고인드립이 그것이다. 이것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강성으로 유명한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팬들이 시작했다고 한다.
3. 관련 문서
[1] 센터 하프. 수비형 미드필더 혹은 센터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필드를 누볐으며, 가끔씩 골키퍼까지 소화했을 정도로 다재다능했던 선수이다.[2]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고 때때로 중앙수비수로 출전하던 선수가 이 정도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최고의 레전드이자 발롱도르 위너[4] 영국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초대 발롱도르 위너[5] 이 시절 선수들은 흡연과 음주를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던컨은 금욕주의자라서 담배와 술을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6] 당시 영국은 축구 종가일 뿐, 축구 강국이라고 자처하긴 힘들었다. 본국에서 조차 축구는 제 1순위 인기 스포츠가 아니라 3순위에 불과했고, 전술은 30년 전 MW전술이 여전히 사용될 정도로 정체되어 있었다. 축구 인프라나 환경도 나쁘다 보니 소위 말하는 뻥축이 성행했고, 창조적인 플레이나 세련된 전술은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맷 버스비나 빌 섕클리 감독과 같은 이들이 명장으로 칭송받은 것도 그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좋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고, 파탄난 팀을 반석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7] 오버래핑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 스스로 그런 플레이를 했을 정도로 창조적인 플레이를 했던 천재였다. 맷 버스비 감독도 대단한 게, 경기 중에 항상 즉흥적으로 공수 라인을 조정하여 던컨이 프리롤로 활개 칠 수 있게 해주었다.[8] 다만 당시 규정상 자전거 라이트를 안 켜서 벌금을 냈다고 한다.[9] 손흥민이 2019-2020시즌 번리전에서 골을 넣을때 70미터가 넘는 드리블을 하면서 제친 선수가 8명이다. 이보다 더 많았다면 단순히 역습으로 재낀게 아니라, 지공 상황에서 상대편 수비수를 갖고 놀았다고 봐야 한다. 다만 던컨의 이 기록은 프로에서 한 게 아니라 유소년 팀에 있을때 했던 거라 격은 떨어지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