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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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감독. 세계 최초의 FIFA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며 잉글랜드의 위대한 수비수들 중 한 명이자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역대 최고의 수비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유년 시절 중앙 공격수로 축구를 시작하였다.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축구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울버햄튼 원더러스 FC에서 구단의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다. 결국 14살의 어린 나이에 라이트는 울버햄튼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당시 감독이었던 프랭크 버클리는 라이트의 실력이 최고 수준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으나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2.2. 클럽 경력
라이트는 15살의 나이에 노츠 카운티를 상대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이가 어려 전선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1943년 이후로는 후방에서 체력 훈련 교관으로 복무했다.
1946년, 종전 후 첫 시즌이 시작되었을 때 라이트는 라이트 하프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다. 1947 시즌 종료 후, 전임 주장 스탄 쿨리스가 은퇴하자 울버햄튼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1949년에는 FA컵 결승에서 레스터 시티 FC를 3-1로 꺾고 첫 우승 트로피를 드는 데 성공했다. 1952년에는 기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명실상부 잉글랜드 최고의 수비수이자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 라이트는 이 시기 센터 하프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이 때부터 라이트의 은퇴 시점까지가 울버햄튼의 최고 전성기였다. 당시 울버햄튼은 통산 3회의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1959년, 35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20년 간의 커리어를 마무리 지었다.[4]
2.3. 국가대표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라이트도 1946년 A매치에 데뷔하였다. 1948년 라이트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고,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에도 출전하였다. 하지만 기세 좋게 브라질로 건너갔던 잉글랜드는 미국에게 일격을 당하는 등 계속되는 굴욕 끝에 결국 예선에서 탈락했다.
게다가 라이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위상은 날로 떨어지기만 했는데, 헝가리에게 3-6으로 참패한 일명 '웸블리 참사'의 한 켠을 장식하기도 했고[5] 설욕을 위해 건너간 부다페스트에서는 아예 1-7로 박살 나기도 했다.
잉글랜드는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 떨어진 축구 종가의 자존심 회복을 목표로 내세우며 1954년 월드컵에 출전하였고, 이번에는 예선 통과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8강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였고, 잉글랜드는 우루과이에게 2-4로 패하며 월드컵에서 또 다시 쓸쓸히 퇴장하고 만다.
1958년 월드컵에서는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잉글랜드를 이끌고 스웨덴에 갔다. 브라질과 소련 등의 강호들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소련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고 이번에도 예선 탈락을 피하지 못했다.
국제 대회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의 끝없는 추락과 다르게 한 줄기 빛이 된 소식이 있었다. 1959년 빌리 라이트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우게 되었는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로 100번째 A매치에 출장하게 된 것이다.
1959년 6월,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시기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대표 커리어도 끝났다.
2.4. 은퇴 후
은퇴 후 아스날 FC에서 4년 간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1965-66 시즌 14위로 시즌을 마쳤고, 결국 경질당하면서 불명예스럽게 아스날을 떠났다. 이후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는데, 1970년 월드컵 때에는 ITV에서 휴 존스 캐스터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원래 결승전까지 중계할 예정이었지만, 잉글랜드가 8강에서 탈락하자 바비 무어가 라이트 대신 해설위원을 맡게 되었고 결승전까지 무어가 해설을 했다. 이후에도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에는 파산 위기에 직면한 울버햄튼의 임원으로 복귀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리고 1994년 9월 3일, 위암으로 작고하였다.[6]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키는 173cm로 일반인 기준으로도 작았지만 강력한 태클과 승부욕으로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제압했다.[7] 또한, 게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서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 강점을 보였다. 리더십도 뛰어나서 대표팀과 클럽에서 주장으로 활약했고, A매치 105경기 중 90경기를 주장으로 출전하였는데 아직까지도 바비 무어와 더불어 잉글랜드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한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몸 관리도 뛰어나서 경기에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던 비결도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잉글랜드 대표팀의 모든 소집에서 3차례밖에 빠진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클럽에서도 14년 동안 31차례 정도밖에 빠지지 않았을 정도로 엄청난 철강왕급 내구성을 자랑했다.
4. 수상[8]
4.1. 클럽
- 프리미어 리그 우승: 1953-54, 1957-58, 1958-59
-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 1949-50, 1954-55
- FA컵 우승: 1949
- FA컵 준우승: 1939
-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1949, 1954, 1959
- FA 커뮤니티 실드 준우승: 1958
4.2. 개인
- FWA 올해의 선수: 1951-52
- 발롱도르 2위: 1957
- 울버햄튼 명예의 전당: 2009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대영제국 훈장 4등급: 1959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1998
- 월드스포츠 1950년~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1] 빌리 라이트는 울버햄튼 원클럽맨이므로 팀명 기입은 생략했다.[2] [image][3] 좌측의 트로피는 잉글랜드 1부 리그 트로피이고 우측은 FA 컵 트로피이다.[4] 물론, 전쟁 때문에 6년 동안 축구를 하지 못했기에 실제 커리어는 14~15년 정도였다.[5] 이 때 페렌츠 푸스카스가 축구 역사상 최초의 드래그 백을 사용해 라이트를 무너뜨리고 골을 넣었다.[6] 일부 기사에서는 췌장암이라고도 한다.[7] 특히 축구선수, 그 중에서도 중앙 수비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8] 빌리 라이트는 울버햄튼 원클럽맨이므로 팀명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