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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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별명은 프레스턴의 배관공.
2. 선수 생활
2.1. 초기 선수 생활
피니의 고향집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홈구장 딥데일 바로 건너편이었다. 아버지 알프레도는 배관공 일을 하였는데 아들이 어린 시절 체구가 작고[3] 몸이 약했던터라 자신의 노하우를 가르쳐 배관공 일을 이어받기를 바랐다. 하지만 당시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뛰던 전설적인 포워드 알렉스 제임스를 보면서 피니도 동네의 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축구 선수를 꿈꾸었다.
17세의 나이에 피니는 꿈에 그리던 고향팀 프레스턴 노스 엔드와 계약을 따낼 기회가 왔지만, 아버지는 그런 피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버지 역시 축구가 거친 운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처럼 축구 시장이 크지도 않았던 터라 몸이 약한 아들이 그런 거친 운동을 생업으로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 여기서 피니는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축구 선수의 길에 들어갔지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2.2. 제2차 세계대전
피니가 계약을 따낸 것은 어린 시절이었지만, 모든 영국의 정식 리그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취소되었다.[4]
축구 선수로서의 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전쟁 초기의 피니는 아버지와 함께 배관공 일을 하고 틈틈이 임시 리그에 참여하여 젊은 재능으로서 자신을 알렸다. 1942년에는 영국군 왕실 기갑 부대에 배치되어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이후에는 몽고메리 원수가 이끄는 8군의 일원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복무하며 스튜어트 전차를 몰았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얻은 휴가 도중 친선 경기를 하면서 이집트의 배우 오마 샤리프와 축구 시합을 하기도 했다고..
2.3. 전후 커리어 그리고 대표팀.
전쟁이 끝난 이후 피니는 1946년에서부터 제대로 리그에서 활약하였다. 1946년 8월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데뷔했고, 비슷한 시기에 국가대표팀에도 데뷔하였다. 이 당시 받았던 돈은 14파운드. 수입이 적다고 느꼈던 피니는 전후에 배관공으로도 투잡을 뛰었고, 덕분에 프레스턴의 배관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5]
국가대표팀에서의 첫 경기 상대는 북아일랜드. 잉글랜드는 북아일랜드를 7:2로 크게 이겼고, 피니는 이 경기를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날이라 회고하곤 했다.
첫 두 시즌에는 열심히 뛰었지만 운이 나쁘게도 피니는 1948-49 시즌의 절반은 부상으로 날려먹게 되었다. 피니가 못 나오는 동안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성적은 말 그대로 급전직하했고 최종전에서 리버풀을 꺾기는 했지만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피니는 고향팀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고 소속팀은 강등되었지만 대표팀의 소집은 계속되었다. 피니는 1950년 월드컵에 잉글랜드를 진출시킨 주역이 되었고, 월드컵 직전인 5월 14일에 리스본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친선 경기에서는 혼자 4골을 집어넣는 원맨쇼를 펼쳐보이며 5:3의 승리를 이끌어내었다.[6]
브라질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일원으로 건너간 피니는 3경기에 모두 출전하였지만, 미국에게 당한 의외의 패배를 막지 못했고 스페인과의 최종전에서도 패배하며 조별 예선 탈락이라는 참담한 성적표와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1950년은 게다가 팀의 승격도 실패한 피니에게는 되는 일이 없던 한 해였다.
하지만 이듬해 절치부심하여 14경기 연승이라는 기록과 함께 소속팀을 승격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이 당시 피니는 13골을 넣으면서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 다음 2년이 피니에게는 가장 우승에 근접했던 해였다. 특히 1952-53년 시즌이 그러했는데 아스날과 승점이 54점으로 같음에도 불구하고[7] 골득실에서 밀려[8] 준우승에 머물고 만다. 그리고 1954년에는 FA컵 결승에 올라갔지만 웨스트 브롬위치에게 3:2로 패배했다. 그것도 후반 42분에 결승골을 먹힌 것. 피니는 이 경기를 커리어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경기로 평했다.
피니는 리그 일정을 마치고 이번에는 스위스에 가서 월드컵을 치렀다. 이번에는 조별 예선을 통과하여 8강에 갔지만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 여기에서 피니는 월드컵 첫 골을 넣었지만 수비진이 우루과이의 화력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4:2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의 프레스턴 노스 엔드는 다시 힘을 내었고, 여기에는 피니의 포워드로의 보직 변경이 있었다. 피니는 포워드로 활약하면서 26골이라는 커리어 최다 득점을 기록했지만 프레스턴 노스 엔드는 1957-58 시즌에 다시 준우승(...)을 차지했다.
피니는 36살의 나이로 1958년 월드컵에 다시 출전하였고 첫 경기인 소련전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레프 야신을 상대로 페널티 킥 득점까지 올리며 2:2의 무승부를 이끌어냈다.[9] 하지만 결국 피니는 이 부상 덕분에 경기에 더 이상 나서지 못했고, 잉글랜드는 소련에게 플레이오프에서 1:0으로 패배. 결국 그렇게 피니의 월드컵 도전은 막을 내렸다.
피니는 1958-59 시즌을 맞으며 다시 프레스턴에서 힘을 내었고, 부상을 참고 뛰면서 시즌 초에는 상위권에서 경쟁을 했지만, 중반에 피니가 다른 곳에 또 부상을 당하여 아예 경기에 나오지 못하자 그대로 다시 순위가 미끄러지며 13위로 리그를 마무리 지었다. 결국 피니는 다음 시즌에 고질적인 사타구니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하여 38살의 나이로 은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레스턴 노스엔드는 피니가 은퇴하자마자 다음 시즌인 1960-61 시즌에 바로 강등 당했고, 5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직 프리미어리그에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2.4. 이후
북아일랜드 클럽인 디스틸러리에서 은퇴한 피니에게 한 경기만 뛰어달라는 요청을 했고, 피니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무대가 유러피안 컵이었고, 상대는 당시 유럽 최강팀이자 전년도 대회 준우승팀인 포르투갈의 벤피카였다. 디스틸러리는 피니와 함께 벤피카를 상대로 3:3으로 비기는 선전을 했다. 그리고 이 경기가 피니의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 출전 기록이다.
은퇴 후에는 배관공으로 일하는 동시에 언론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편, 프레스턴 클럽이 쇠락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마지막 영광의 순간을 함께해 준 레전드를 기리는 의미로 참 많은 기념 행사를 가져주었다. 홈 구장 어디서나 피니의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고, 그 구장의 주소까지 톰 피니 웨이로 바꿀 정도면...
영국 정부에서도 그를 잊지 않아 1961년에는 4등급 훈장 OBE를, 1992년에는 3등급 훈장 CBE를 서훈한 데 이어 1998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서임했다. 따라서 1998년부터 그의 이름 앞에 Sir가 붙는다.[10]
그의 동상은 프레스턴에 있는 축구 국립 박물관에 있는데 이는 톰 피니의 가장 유명한 사진[11] 을 모델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아예 동상 옆에 분수를 세워 놓아 더욱 생동감있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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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1세로 별세하였다. 피니의 타계 이후 잉글랜드 풋볼 리그는 기존에 시상하던 공로상의 이름을 '톰 피니 경 상'으로 바꿔 시상하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프레스턴에서 태어나고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모든 선수 생활을 한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역대 최고의 선수. 현재까지 187골로 클럽 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원래 왼발잡이였으나 양발잡이가 되기 위해 오른발 사용을 위해 크게 노력하였고, 그 결과 라이트 윙에서도 뛸 수 있을 정도로 오른발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빠른 스피드와 정확한 크로스, 강력한 슈팅을 양발로 날릴 수 있는 능력에 키는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헤딩도 평균 이상이었던지라 동시대의 다른 윙어들에 비해 압도적인 득점 기록을 가질 수 있었다.[12] 스탠리 매튜스의 경우는 생전에 그를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펠레, 조지 베스트, 디에고 마라도나 등과 비교하기도 했다.
게다가 팀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였다. 한 예로 1952년 이탈리아의 US 팔레르모가 피니에게 꽂혀 만 파운드의 이적료와 함께 자동차와 집, 그리고 당시의 잉글랜드 리그의 최대 임금 상한선을 뛰어 넘는 돈을 제시했지만 피니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프레스턴을 떠나기 싫고 팀이 좋다는 것.
지금까지 플레이했던 가장 위대한 선수. 심지어 오버코트를 착용했을 지라도 어떤 팀, 어느 시합에서든 위대할 수 있다.
- 빌 샹클리
토미만큼 괜찮은거 같아요. 다만 지금은 토미가 거의 60살이지만...
- 빌 샹클리(1970년대 후반에 당시의 최고 스타들과 톰 피니를 비교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
4. 사생활
피니는 1945년 엘시와 결혼하여 아들 브라이언(1947년 생)과 딸 바바라(1950년 생), 두 아이를 두었다. 엘시와는 2004년에 그녀가 치매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하였다. 피니는 대단한 애처가였는데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10년 간 아내를 크게 그리워했고, 아내가 치매로 인해 사망한 후 그의 이름을 딴 알츠하이머 환자를 위한 재단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5. 수상
5.1. 클럽[13]
- 풋볼 리그 디비전 1 준우승 2회: 1952–53, 1957–58
- 풋볼 리그 디비전 2 우승 1회: 1950-51
- FA컵 준우승 1회: 1954
5.2. 개인
- FWA 올해의 선수 2회: 1953–54, 1956–57
[1] 공격수로서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 가능했다. 주 포지션은 원래 아웃사이드 라이트였으나, 국가대표팀에서는 스탠리 매튜스의 존재로 인해 아웃사이드 레프트나 인사이드 포워드 위치에서 활약했다.[2] 피니는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만 뛴 원 클럽맨이기 때문에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3] 14살 때 키가 145cm에 불과했다[4] 덕분에 피니가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은 것은 1946년부터였고, 그 이전의 7년은 제대로 커리어를 쌓을 수 없었다.[5] 이 당시 프레스턴 노스 엔드가 그리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지 못했고 튀는 선수도 없었던 관계로 다른 팀 선수들에게는 배관공과 10명의 떨거지(drip)라는 멸칭도 종종 들었다. [6] 이것이 피니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해트 트릭이다[7] 당시에는 승리 팀에 승점이 2점이 주어진지라 지금과 비교하면 많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 당시 프레스턴 노스 엔드와 아스날은 전적까지 완전히 같았다![8] 아스날은 +33, 프레스턴 노스 엔드는 +25[9] 이게 꽤 대단한 건데 왜 그런지 알고 싶다면 야신 항목으로 들어가서 야신의 페널티 킥 방어율을 보자.[10] Sir라 불리는 축구인들 모두가 Knight Bachelor를 받은 사람들이다. CBE나 그 밑 등급만으로는 Sir 칭호가 붙지 않는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11] 1956년 물에 젖은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수비수 두 명을 제끼는 장면이다[12] 동시대에 비슷한 기록을 가진 윙어는 헝가리의 졸탄 치보르 정도에 불과하고 피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스탠리 매튜스조차 득점 기록에서는 크게 딸린다. 역대로 뒤져봐도 그보다 골 기록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윙어는 브라질의 자이르지뉴와 독일의 헬무트 란 정도에 불과하다. 헬무트 란은 7살 차이라 완전히 동시대라고 말하기는 약간 애매하긴 하다[13] 피니는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만 뛴 원 클럽맨이기 때문에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