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비티

 


1. 개요
2. 상세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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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Richard Beatty, 1st Earl Beatty GCB, OM, GCVO, DSO, PC (1871.1.17 ~ 1936.3.11)

1. 개요


영국 해군제독. 최종계급은 해군 원수.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도거 뱅크 해전, 유틀란트 해전에서 제1순양전함 전대를 지휘했다.

2. 상세


1910년에 39세의 나이로 해군 소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는 호레이쇼 넬슨 이후 가장 빠르게 진급한 것이다.
1913년 3월 1일 제1순양전함 전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라이온급 순양전함 라이온을 기함으로 사용하였다. 순양전함 전대는 로사이스를 모항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에 벌어진 도거 뱅크 해전에서 비티는 히퍼가 지휘하는 독일 함대를 27노트의 속력으로 추격했다. 문제는 비티가 지휘하는 제1순양전함 전대는 신형 순양전함인 라이온급 순양전함과 HMS 타이거로 구성된 반면 무어 소장이 지휘하는 제2순양전함 전대는 HMS 뉴질랜드와 HMS 인도미터블이라는 구식 순양전함으로 27노트를 달릴 수 없었고 조금씩 뒤쳐졌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자 선두에 있던 기함 라이온이 후미의 독일 장갑순양함 블뤼허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다른 함정들이 포격할 거리에 들어오자 비티는 각 함정은 상대를 공격하게 했는데 여기서 타이거가 잘못 판단하여 본래대로라면 몰트케를 공격해야 하는데 라이온과 같이 선두의 자이틀리츠를 포격했다. 반면 독일 함대의 공격은 선두의 라이온에 집중되었고 자이틀리츠를 대파시키나 라이온 역시 집중공격을 받아서 큰 피해를 입고 속력이 떨어졌다. 결국 비티는 무어 소장에게 지휘를 맡기면서 적을 섬멸시킬 의도로 적과의 거리를 좁혀서 교전하라는 신호를 보내려고 했다.[1] 그러나 코드 북에는 해당 신호가 없었고 대신 적에 더 접근하라는 신호를 보냈다.[2] 그러나 라이온이 여기저기 손상되었는데다가 명령을 받은 장교의 실수로 무어 소장에게는 북동쪽의 적을 추격하라고 전달되었고 그 자리에 하필(...) 블뤼허가 있었기에 화력이 블뤼허에 집중되었다. 비티는 기함을 프린세스 로열로 옮기지만 이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다음이었다.
1916년에 벌어진 유틀란트 해전에서 비티가 지휘하는 제1순양전함 전대는 독일의 주력함대를 유인하기 위해서 출항했다. 본래라면 순양전함 전대에 배속되어 있던 제5전함 전대[3]가 같이 움직여야 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함 전대가 비티의 신호를 알아보지 못하는 바람에 뒤쳐졌다. 전함전대가 뒤쳐졌으나 서둘러 히퍼 제독의 정찰함대를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독일 함대와 교전을 벌였다. 이때 비티는 사격 배분을 잘못하는 바람에 6:5로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사격 배분에 실수를 저질러서 독일 순양전함 1척이 전혀 공격받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교전이 시작된지 몇분 지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기함 라이온이 피탄되었고 곧이어 HMS 인디페티거블이 탄약고 유폭으로 격침, 20여분뒤 HMS 퀸 메리 또한 탄약고 유폭으로 격침되는 피해를 입었고 궁지에 몰렸다. 그때 뒤쳐졌던 전함전대가 합류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고 독일 주력함대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젤리코가 지휘하는 주력함대쪽으로 유인했다. 이때 비티의 지시가 전함전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전함전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조금 늦게 북상했다.[4] 이후 젤리코는 비티에게 독일 함대의 위치를 파악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비티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못했다. 이후 비티는 젤리코의 뒤를 이어 대함대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종전시까지 독일 제국의 대양함대를 가둬두는데 성공했다.
1919년 10월 18일 비티는 제1해군경이 되었다. 이 무렵 비티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관여하였다. 1924년에 노동당이 집권했을때 비티가 사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자리를 지켰다. 1927년 7월에 퇴역하였으며 7년 9개월이라는 최장기 해군참모총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퇴역 이후 레스터셔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1935년에 젤리코가 사망하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하였으며[5] 이듬해인 1936년에 사망하였다. 비티는 자신을 아내 곁에 묻어달라고 하였으나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기타


  • 본래는 킹 조지 5세급 전함의 5번함에 비티의 이름이 붙을 예정이었으나 하우로 교체당했다. 이 교체는 유틀란트 해전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윈스턴 처칠이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개명된 시기에 처칠이 해군장관이었으므로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다만 처칠이 주로 불만을 표한 것은 젤리코였는데 비티까지 개명당한 것은 조금 의아한 부분.
  • 트라팔가 광장에 비티의 흉상이 있으며 그 옆에는 젤리코 제독의 흉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 사진을 검색해보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정모를 비뚜름하게 쓰고 찍은 것들이 꽤 있다. 제일 유명한 사진은 함상에서 찍은 것으로 좌우반전된 것도 많이 퍼져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지는 않더라도 항상 정모는 비뚤게 쓰고 있다. 그것이 초상화든 사진이든 말이다.
[1] Engage the enemy more closely.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사용했던 명령이라고 한다.[2] Keep nearer to the enemy[3]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4척으로 편성. 지휘관은 에반 토마스 제독.[4] 이 신호 미스는 나중에 비티와 토마스간에 책임을 두고 격렬한 공방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두번째 신호 미스의 경우 토마스 제독이 비티의 움직임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어야 한다는 견해가 좀 더 일반적이다.[5] 의사에게 "내가 젤리코의 장례식에 불참하면 해군이 내게 뭐라고 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참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