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제1차 세계 대전의 첫 해전이자, 이후 카이저마리네가 도거 뱅크 해전을 일으키는 계기'''
1. 개요
1.1. 영국과 독일의 건함 경쟁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부터 영국과 독일은 치열한 해군력 건설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의 앨프리드 새이어 머핸의 저서 「해군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에 심취한 빌헬름 2세는 그간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제해권에 타격을 가해 독일의 해양력을 널리 떨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고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Alfred von Tirpitz) 제독을 기용해 1898년 신형 주력전함의 대량 건조를 내용으로 하는 함대 건설법을 마련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티르피츠는 1900년, 1904년, 1906년, 1908년 및 1912년에도 꾸준히 건함계획을 보완해 추진했다. 그는 영국 해군의 건함 동향을 살펴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건조를 서둘렀고, 이어 영국에서 새롭게 순양전함을 개발하자 곧바로 신예 순양함 건조에 착수해 1909년에는 독일 최초의 순양전함을 진수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자신들을 바짝 추격하는 독일에 영국은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은 제해권의 확보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그 어느 나라보다 해군력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원래 영국이 취해 온 해군정책은 2국 표준주의 (Two - Power - Standard)로, 이는 주력함 세력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영국이 제2위 해군력과 제3위 해군력을 가진 국가들의 세력의 합보다 강한 함대를 보유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을 필두로 한 주변국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된 영국은 기존의 2국 표준주의를 포기하고 제2위 해군국의 2배의 해군력을 유지한다는 2배주의 (Two Keels to One Standard) 정책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해군력에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영국 내에서의 반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과감하게 영국 해군력 건설을 주도한 인물이 피셔 (J. Fisher) 제독이었다. 제독은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과감하게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영국 해군은 도태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 하에 피셔 제독은 전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최초로 건조하도록 추진 하였으며, 이전의 장갑순양함을 무력화 할 만한 능력을 가진 12인치 주포 8문에 26노트의 속력을 내는 순양전함을 출현시켰다.
대전 발발 직전인 1914년 7월 양국의 함대 세력은 다음과 같았다.
1.2. 양국의 작전계획
독일은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은 1914년 8월 28일, 독일의 북해 연안에 있는 섬 헬리골란트 근해에서 발생하였다. 헬리골란트는 독일 해군의 북해방면 수상함 기지였던 빌헬름스하펜의 출입항 항로 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해군은 영국군에 의한 빌헬름스하펜의 봉쇄를 우려해 야간 초계를 위해 출항하는 구축함들을 헬리골란트 섬 근해까지 경순양함을 이용해 호송 후 다음날 새벽에 다시 모항으로 인솔하는 규칙적인 초계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는 서로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영국과 독일 사이에 부설한 대량의 기뢰로 출입항 항로가 제한된 독일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군의 입장에서는 기뢰 때문에 작전 반경이 다소 제한되었지만, 독일 해군의 항로를 대략적으로 예측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해리치를 모항으로한 제 8잠수함대의 사령관이었던 로저 키스(Roger keyes) 제독은 독일의 규칙적인 초계활동을 지속적으로 관측하고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독일의 초계함대를 차단해 습격할 계획을 입안하였다.
2. 사전 준비
'''영국 해군'''
'''독일 해군'''
이 계획은 잠수함을 미끼로 독일 초계함대를 헬리골란트 섬 서쪽으로 유인한 후, 북쪽 해상에 매복해있던 순양함대가 그 후방을 차단해 독일군의 초계함대를 격멸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독일에 가까운 영국 해군기지였던 해리치에서 잠수함 3척, 리처드 타이어휫(Richard Tyrewhitt) 제독이 지휘하는 해리치군 순양함대의 순양함 2척과 구축함 33척이 동원되었다. 또한 제1순양전함 전대의 사령관 데이비드 비티(David Beatty) 제독이 순양전함 5대를 지원하였으며, 당시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의 명령으로 해군성에서 윌리엄 굿이너프(William E. Goodenough) 제독에게 6척의 경순양함을 이끌고 참전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영국 해군성의 실수로 굿이너프 제독과 비티 제독이 이 계획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지 못해 이후 작전 수행 중 키스 제독과 타이어휫 제독의 함대가 이들과 교전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영국군과는 대조적으로 독일군은 일상적으로 헬리골란트 부근을 초계하는 구축함 19척과 2척의 경순양함이 있을 뿐이었으며, 비상시 동원 가능한 예비 전력은 동쪽과 남쪽의 해상에 경순양함 4척이 전부였다. 물론 빌헬름스하펜이 독일의 수상함 기지인 만큼 50마일 떨어진 야데부젠(Jadebusen)만 내에는 순양전함으로 이루어진 지원세력이 존재했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에 만 내의 조석 문제로 재빠른 지원이 어려웠다.
3. 해전의 경과
전투는 1914년 8월 28일 새벽, 키스 제독의 영국 잠수함 3척이 헬리골란트 서쪽 해상에서 부상해 독일 구축함을 유인하며 시작되었다. 일상적인 작전을 계속하던 독일 초계함대가 해상에서 갑자기 나타난 물체를 식별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자 북쪽 해상에 매복중이던 타이어휫 제독의 순양함대가 이를 급습해 그 후방을 차단했다. 이 기습으로 앞장섰던 독일의 구축함 1척이 격침되었고, 이어 독일의 경순양함 2척이 돌격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격퇴되었다.
독일 초계함대와 영국 해군이 교전을 벌인다는 소식이 각각 빌헬름스하펜과 해리치에 전달되어 양군 모두 얼마 후 지원세력이 도착하였다. 영국 측은 굿이너프 제독과 비티 제독의 함대가 지원하였으나, 현장에 나가 있는 키스 제독과 타이어휫 제독에게 사전 통보가 안되어 있기도 하였으며 짙은 해무로 육안으로는 피아 식별도 불가해 서로에게 오인사격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편 독일은 헬리골란트 동쪽과 남쪽의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4척의 경순양함이 증원되어 굿이너프 제독의 함대와 맞붙었는데, 이들은 이후 북서쪽 방면에서 증원된 비티 제독의 강력한 순양함대에게 압도되었다. 결국 양측의 지원세력까지 맞붙은 이 접전에서 독일은 3척의 경순양함을 잃게 되었다.
이런 치열한 접전 속에서 생존한 독일 순양함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대파되어 전장을 이탈하였다. 이후 이들을 지원하려 야데부젠 만에서 순양전함 세력이 출발하였으나, 이들은 조석 문제로 야데부젠 만을 통과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지원이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전투는 벌이지 못하고 독일 함정들을 호위해 돌아오기만 하였다.
4. 결과와 영향
결국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영국 해군이 35명이 사망하는 경미한 피해만을 입은 반면에 독일 해군은 구축함 1척, 경순양함 3척이 격침되었고 400여 명이 포로, 700여 명이 사망하는 일방적인 패배를 안고 퇴각하게 되었다. 이때 독일측 기함인 콜베르크급 경순양함 쾰른(SMS Cöln)이 침몰하고 해군 소장 레베레히트 마스(Lebrecht Maaß) 제독이 전사했다.
헬리골란트에서의 승리로 이후 영국 해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된 반면, 패배를 겪은 독일 해군은 황제의 허락 없이는 함정의 출항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는 독일 해군의 위기 상황에 대한 반응 속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헬리골란트 근해에서 패배한 독일 해군은 근방 해역에 기뢰를 부설하고 잠수함과 초계함을 증원 배치하여 방어를 두텁게 하였다. 이러한 독일 해군의 조치에 영국 해군이 빌헬름스하펜을 공격하는 것은 더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패배는 독일 해군이 이후 적극적으로 영국의 북해 연안지역을 공격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실제로 헬리골란트의 패배를 갚기 위해 도거 뱅크 해전을 통해 영국 해군과 다시 맞붙게 된다. 그리고 1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은 이곳에서 한번 더 붙게 되는데... 자세한 것은 2차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을 참조하길 바란다.
[1] 훗날 이 사람의 이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릭스마리네의 1934년형 구축함 1번함 Z1에게 계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