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폴 대성당
영어: Cathedral Church of Paul the Apostle
프랑스어: Cathédrale Saint-Paul de Londres
공식 홈페이지
영국 런던[1] 에 있는 성공회의 주교좌성당. 이름은 사도 바울을 의미한다. 1711년에 완공된 현존하는 건물은 영국 바로크를 탄생시킨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Sir Christopher Wren) 경이 설계했으며, 지름 34m의 높고 거대한 돔이 유명하다. 성당의 길이도 158.1m로 세계에서 2번째로 긴 대성당이며, 이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가는 길이다.
성공회의 본산 같은 곳이며,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더불어 런던을 대표하는 종교 시설이다.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나 국장과 같은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는 장소이자 위인들의 무덤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주변에는 높이 111m의 이 성당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오늘날까지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규정하고 있다. 남쪽에는 템스 강이 있으며, 강 건너 맞은편에는 새로운 런던의 명물인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있고 둘 사이를 밀레니엄 브릿지가 연결해주고 있다.[2]
한국에서는 성 바오로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제일 처음 세워진 건 604년으로, 몇 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반복했으며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성당이 완성된 것은 1711년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렌의 성당 설계는 정치적/종교적인 압력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 밖에 없었고,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604년 색슨족에 의해 처음으로 성당이 세워졌지만[3] 각각 962년, 1087년, 1136년에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13세기 중엽부터 확장 공사에 들어가 1314년에 건설이 마무리되었으나 1561년 벼락을 맞아 가운데 있던 첨탑이 파괴되었다. 원래는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종교개혁기에 성공회로 넘어왔으며 이 성당은 성공회의 본산으로 기능했다. 청교도 혁명 때는 병사들의 말발굽에 성당 내부가 짓밟히기도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개축되었고, 고딕 성당이지만 바로크 양식의 외형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개축을 해도 너무 낡다보니 성공회의 본산에 걸맞지 않다는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666년에 일어난 런던 대화재[4] 로 큰 손상을 입고 만다.
한편 과학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은 런던에 타버린 수 많은 작은 교회들의 설계를 맡아 빠른 속도로 해결해야만 했다. 대략 45개 이상(!)의 작은 교회들이 렌의 설계로 건축되었으며, 이를 '시티 교회(City churches)'라고 부른다. 원래 과학자였던 렌은 건축은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650년대 정도에 시작하였다. 천문학, 해부학, 지리학, 수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익힌 렌은 경험주의적인 면모가 강했고, 건축가로써도 프랑스에 유학하며 배운 프랑스의 바로크 건축을 받아들이되 영국의 현실과 자신의 이상에 맞춰 다시 재구성을 하려고 하였다. 그 중 건물의 중앙으로 다수의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중앙집중형의 구조와 그 위에 지어질 돔 천장이 가지는 심미성과 기능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시티 교회에 이를 적용하는 실험들을 하였다.
전소된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구성된 왕립 재건위원회는 1669년 7월 30일에 크리스토퍼 렌에게 복구를 맡겼다. 그는 런던 대화재 이전인 1661년에 대성당의 수리를 위한 조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렌은 낙뢰로 파괴된 첨탑 자리에 돔을 얹는 재건축 설계도를 그렸다. 그 때마다 왕과 재건위원회에서는 좀 더 욕심이 생겨 렌에게 더 과감한 요구를 하였고, 결국 찰스 2세는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아예 새 성당을 만들고 싶어했으며 결국 기존의 성당은 모두 철거된다.
렌은 1672년 1673년까지 새로운 성당을 설계하였으며, 그것은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식 평면을 가진 바로크 양식[5] 의 성당이었다. 이는 가톨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안이었다. 그리고 1년과 당시 돈으로 500 파운드[6] 를 들여 길이 6m, 높이 4m 커다란 목제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는 '그레이트 모델(Great model)'이라 불리운다. 돔을 8개의 중앙 아치와 기둥을 사용하여 지탱할려고 하였으며, 이는 돔을 보통 4개의 아치와 벽체로 지탱하는 대륙의 바로크 건축의 관습을 거부한 렌의 독창적인 구조였다. 처음 찰스 2세나 재건위원회에서는 이 설계안에 대해서 찬성하였으나 곧 여론이 바뀌었고,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설계는 거부당한다. 이 모형은 오늘날 세인트 폴 대성당의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다.
다만 정황상, 종교적인 면이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되고 있다. 후속 설계의 구조가 영국 교회의 전통적인 양식인 고딕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교는 성공회였지만 가톨릭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톨릭과는 정서적인 유대감이 있었고, 오히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대립하고 있던 개신교와 거리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가 중시하는 교회의 구조인 중앙집중형 교회 구조가 가졌던,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 평면을 사제들이 거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가톨릭도 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되었던 역사가 있다. 물론 이 성당도 결국 종교적인 이유로 그리스 십자가 평면을 버리고 긴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가 변경되었긴 하다. 그러나 많은 가톨릭 성당의 건축가들은 여전히 공간적인 매력 때문에 그리스 십자가 성당을 건설하고 있었다. 하지만 렌이 마주한 영국 성공회의 사제들은 그리스 십자가는 개신교의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실망했을 것이 분명한 렌은 하는 수 없이 기존의 설계를 백지화시키고 영국 교회의 전통인 높은 첨탑과 긴 라틴 십자가 평면을 가진 고딕 분위기의 설계인 '워런트 설계(Warrant design)'을 1675년에 제출하였으며, 승인 받았다. 이것은 불타기 전의 성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이 설계는 원형 첨탑과 152m 긴 라틴 십자가형 평면(장당식)[7] 이라는 고딕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낮은 돔과 8개의 중앙 아치와 기둥을 가지고 최소한의 중앙집중형 공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면 등의 외형은 바로크 양식을 혼용하였다. 또한 고딕식 성당의 중요 요소였던 플라잉 버트레스를 싫어했던 렌이 쓰지 않았고 천장의 높이는 옛 세인트 폴 대성당보다 낮아졌다.
그런데 돔은 문제가 안되었는지 렌은 곧 첨탑을 다시 거대한 돔으로 바꾸고, 내부 천장을 리브 볼트에서 작은 돔형 천장의 연속으로 바꾸는 등 이전 그레이트 모델의 요소를 추가한, '최종 설계'(Definitive design) 안을 같은 1675년에 제출하였는데, 이건 또 승인받게 된다(...). 이후 렌은 10년 동안 이 설계로 공사를 진행되게 된다.
이후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가 즉위한다. 이 왕은 가톨릭교도였지만 종교적 관용과 왕의 권위 상승을 위해 이 성당의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고, 재건위원회를 갈아치우고 재정을 확충해주었다. 넉넉한 재정 덕분에 렌은 기존 성당 설계안에서 돔을 더 높이고, 서쪽 정면에는 쌍 첨탑을 올렸으며, 성당의 2층에는 가림벽을 세워 가려놓아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외형으로 바꾼 '개정된 설계(Revised design)'를 제출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존 성당의 고딕적 분위기를 다 제거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2층 가림벽 안에 구조적인 이유로 플라잉 버트레스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안은 제임스 2세가 가톨릭 교도라 이에 거부감이 없었는지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제임스 2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예혁명으로 쫓겨났지만, 재건위원회가 갈려서 그런지 이후에도 렌은 이 설계로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다만 정작 돔을 건축하는게 쉽지 않았다. 원래 중앙에 거대한 돔을 세우지 않는 설계로 시작한 건물이었으며, 렌이 거대한 돔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에 벽돌만으로 돔을 만들면 그 무게가 건물에 많은 무리를 줄 것으로 보였다. 10년의 세월 동안 이미 많은 부분이 지어진 상황이라 아랫 건물의 설계를 크게 바꿀 수는 없었고, 위에 있는 돔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목조 구조를 혼용하여 가볍게 만든 3중 구조의 돔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돔의 외형은 원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그것과 비슷했지만, 최종적인 외형은 브라만테가 설계한 작은 신전인 '성 베드로 템피에토'를 본따 만든 듯한 외형이 되었다.
1675년에 첫 번째 돌이 놓여지고 나서 1708년에 마지막 돌이 얹혀졌고, 영국 의회는 171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대성당 건설이 마무리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공사에 들어간 비용은 1716년 집계로 109만 5556 파운드에 달했다.
완공된 세인트 폴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이 즐비한 영국에서 성공회의 본산인데도 돔을 얹은 희귀한 성당이 되었다. 이 성당은 고딕 양식의 평면을 가진 하부 위에 바로크 양식의 돔과 외형이 결합된 절충적 건축물이 되었다. 다만 이 건물이 고딕-바로크의 절충적인 구조라고는 하지만 긴 길이의 라틴 십자가형 평면을 제외하면 겉으로 보여지는 형태는 바로크 양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중앙 크로싱을 누르는 압도적인 원형 돔의 비율은 렌이 가졌던 원안의 정신이 반영된 것을 엿볼 수 있으며, 정면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 정면에는 그리스 신전 풍의 기둥들과 삼각형 박공 지붕의 단정한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좌우에 건설된 쌍 탑의 화려한 형태는 엄격한 고전적 질서와 화려함을 동시에 추구한 바로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결국 고딕적인 구조는 숨어있게 되었다. 지면에서 본 세인트 폴 대성당의 모습은 바로크 양식이지만 가림막인 2층의 가짜벽에서 창문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실제 창문이 아닌 조각이다. 플라잉 버트레스를 추한 형상으로 보았던 렌은 가짜벽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이를 가리려 한 것이다.[8]
크리스토퍼 렌은 성당을 설계하면서 오락가락하는 왕실과 교회의 직위 높은 돌대가리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압력을 견뎌내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9] 그래서 그런 그가 이후 엄청나게 장수한 것(91세)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한 사람도 많았던듯. 참고로 성 베드로 성당에 참여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이처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끔찍하게 고생하고도 신기하게 장수한 경우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단 한사람의 건축가의 책임 아래 건립된 대성당이라 할 수 있는데, 크리스토퍼 렌이 장수한 덕에 공사의 설계부터 완공까지 '''살아서''' 직접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한 세기 뒤, 오귀스트 드 몽페랑이 성 이사악 대성당을 설계해 40년 동안 공사한 끝에 완성함으로써 렌의 뒤를 이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풍경으로써 화폭에 즐겨 담기기도 했다. 이 성당은 BT타워가 지어진 1962년까지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돔의 외형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면밀히 연구한 것을 기초로 벽돌 조적조의 돔을 올리기로 결정했으나 돔의 무게가 문제가 되었다. 돔이 생각보다 무거워서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드럼이 붕괴될 것을 예측한 렌은 프랑스의 앵발리드처럼 벽돌조의 내부 돔 위에 목조 돔을 올리는 것을 연구해야만 했다.
결국 렌은 가벼운 3중 구조의 돔을 완성하는데, 돔의 내부에는 낮은 벽돌조 돔이 아래에 위치해 있고 그리고 그 위에 세운 채광탑을 지탱하기 위한 벽돌조의 끝이 둥근 원추형의 볼트를 만들었고, 그 위에 채광용 랜턴을 올린다음 옆에는 목조 트러스를 세워 외부 돔의 형상을 만들고 납으로 마감하여 방수처리했다. 드럼과 돔의 크기도 '개정된 설계' 시절보다는 살짝 줄어들었다.
끝이 둥근 원추형의 볼트를 돔에 활용한 것은 렌의 독특한 작품이었는데, 여기에는 렌의 친구의 도움이 있었다. 현미경을 개량해 복합현미경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화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로버트 훅이 참여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양 끝이 고정된 쇠사슬을 아래로 늘어뜨리면 쇠사슬 자체의 무게에 의해 현수선을 그리게 되는데, 이때 아래로 늘어진 쇠사슬을 그대로 뒤집으면 현수선이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되는 안정된 구조란 것을 발견해 렌에게 조언한 것. 다만 이 당시에는 이 현수선의 수학적 수치를 측정하는 것이 어려웠고, 수학자였던 렌은 $$y=x^{3}$$ 방정식의 그래프에서 수치를 따왔다. 이는 이상적인 현수선의 수치에 근접한 것이었지만 정확한 방정식은 후대에 발견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템피에토'를 닮은, 드럼의 열주가 인상적인 이 성당의 돔의 형태는 다른 영국 바로크 건축물들의 돔의 외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 형태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 한편 프랑스의 자크 제르맹 수플로의 설계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팡테옹은 돔의 3중 구조나 고딕과 바로크가 혼재된 점에서 이 성당과 많은 비슷한 점이 있는데, 정확한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돔 아래에 있는 회랑은 작은 소리라도 원형의 벽을 타고 30여m 너머의 반대편까지 전달된다고 하며, '속삭임의 회랑(Whispering gallery)'이라고 부른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서쪽 정면 페디먼트는 조각가 프랜시스 버드(Francis Bird, 1667~1731)가 조각한 '사도 바오로의 개종'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페디먼트 꼭대기에는 바오로의 조각상이, 페디먼트 좌우 끝부분에는 각각 베드로와 대 야고보의 조각상이 놓여져 있다. 정면 좌우의 종탑에는 4대 복음사가의 조각상이 배치되었다. 왼쪽 종탑에는 마태오와 천사 및 마르코와 사자가, 오른쪽 종탑에는 루카와 황소 및 요한과 독수리가 있다.
다만 이 성당이 바로크식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실내 장식 등에 있어서는 바로크식에 비해 다소 수수한 편. 유럽의 대륙국가,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우 바로크 양식의 장식은 회화, 조각, 공간이 일체화된 화려함을 보이는 반면 영국의 경우 다소 수수하고 절제된 경향을 보여준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장식 역시 화려하긴 하지만, 다른 바로크 양식의 성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장식이 절제된 느낌을 주는 편.
성당 내부는 호화스러운 장식으로 그린링 기번스(Grinling Gibbons, 1648.4.4~1721.8.3)의 목세공과 제임스 쏜힐 경(Sir James Thornhill, 1675/1676.7.25~1734.5.4)이 돔에 그린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로 된 벽화로 마무리되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격화되어 런던 대공습이 시작된지 114일째가 되던 1940년 12월 29일, 독일 공군의 폭격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도 엄습해 그 주변에만 29발의 폭탄이 떨어졌다. 이 중 단 하나만이 대성당의 돔을 뚫고 떨어졌지만 다행히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방대가 목숨을 걸고 그 폭탄을 치우는데 성공했다.[10] 주변 건물들이 폭격으로 무너져 화염에 휩싸이고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대성당만이 포연 속에서 굳건하게 버텼는데, 데일리 메일의 사진작가 허버트 메이슨이 회사 옥상에서 바로 이 장면을 촬영했다.
이전부터 런던의 명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세인트 폴 대성당은 이 사진으로 인해 단순한 명소를 뛰어넘어 대공습에도 무너지지 않는, 영국인이 가진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근데 왜 대공습때 한번만 폭격에 맞았냐면, 조종실력이 미숙한 독일군들이 방향 기준점으로 삼을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
여담으로 일본의 히메지 성도 비슷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내부에는 무덤과 수많은 기념비로 가득하다. 재건된 이곳에 제일 먼저 매장된 사람은 1723년 2월 25일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대성당의 설계자인 크리스토퍼 렌 경인데, 렌의 석곽묘가 있는 지하실의 벽면에는 아들이 쓴 라틴어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이후 필립 시드니(1586), 호레이쇼 넬슨(1806), 아서 웰즐리(1853), 로버트 네이피어(1890), 프레더릭 로버츠(1914), 윈스턴 처칠(1965)의 국장이 여기서 거행되었으며 2013년에 세상을 떠난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도 국장에 준하는 규모로 거행되었다. 1981년 7월 29일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1897년 6월 22일과 2012년 6월 5일에는 각각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 기념 감사성찬례가 열렸다.
안장된 인물들은 사망일을 기준으로 정리.
프랑스어: Cathédrale Saint-Paul de Londres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영국 런던[1] 에 있는 성공회의 주교좌성당. 이름은 사도 바울을 의미한다. 1711년에 완공된 현존하는 건물은 영국 바로크를 탄생시킨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Sir Christopher Wren) 경이 설계했으며, 지름 34m의 높고 거대한 돔이 유명하다. 성당의 길이도 158.1m로 세계에서 2번째로 긴 대성당이며, 이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가는 길이다.
성공회의 본산 같은 곳이며,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더불어 런던을 대표하는 종교 시설이다.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나 국장과 같은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는 장소이자 위인들의 무덤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주변에는 높이 111m의 이 성당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오늘날까지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규정하고 있다. 남쪽에는 템스 강이 있으며, 강 건너 맞은편에는 새로운 런던의 명물인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있고 둘 사이를 밀레니엄 브릿지가 연결해주고 있다.[2]
한국에서는 성 바오로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2. 역사
제일 처음 세워진 건 604년으로, 몇 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반복했으며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성당이 완성된 것은 1711년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렌의 성당 설계는 정치적/종교적인 압력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 밖에 없었고,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2.1. 과거의 대성당
604년 색슨족에 의해 처음으로 성당이 세워졌지만[3] 각각 962년, 1087년, 1136년에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13세기 중엽부터 확장 공사에 들어가 1314년에 건설이 마무리되었으나 1561년 벼락을 맞아 가운데 있던 첨탑이 파괴되었다. 원래는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종교개혁기에 성공회로 넘어왔으며 이 성당은 성공회의 본산으로 기능했다. 청교도 혁명 때는 병사들의 말발굽에 성당 내부가 짓밟히기도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개축되었고, 고딕 성당이지만 바로크 양식의 외형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개축을 해도 너무 낡다보니 성공회의 본산에 걸맞지 않다는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666년에 일어난 런던 대화재[4] 로 큰 손상을 입고 만다.
한편 과학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은 런던에 타버린 수 많은 작은 교회들의 설계를 맡아 빠른 속도로 해결해야만 했다. 대략 45개 이상(!)의 작은 교회들이 렌의 설계로 건축되었으며, 이를 '시티 교회(City churches)'라고 부른다. 원래 과학자였던 렌은 건축은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650년대 정도에 시작하였다. 천문학, 해부학, 지리학, 수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익힌 렌은 경험주의적인 면모가 강했고, 건축가로써도 프랑스에 유학하며 배운 프랑스의 바로크 건축을 받아들이되 영국의 현실과 자신의 이상에 맞춰 다시 재구성을 하려고 하였다. 그 중 건물의 중앙으로 다수의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중앙집중형의 구조와 그 위에 지어질 돔 천장이 가지는 심미성과 기능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시티 교회에 이를 적용하는 실험들을 하였다.
2.2. 현재의 대성당
전소된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구성된 왕립 재건위원회는 1669년 7월 30일에 크리스토퍼 렌에게 복구를 맡겼다. 그는 런던 대화재 이전인 1661년에 대성당의 수리를 위한 조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렌은 낙뢰로 파괴된 첨탑 자리에 돔을 얹는 재건축 설계도를 그렸다. 그 때마다 왕과 재건위원회에서는 좀 더 욕심이 생겨 렌에게 더 과감한 요구를 하였고, 결국 찰스 2세는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아예 새 성당을 만들고 싶어했으며 결국 기존의 성당은 모두 철거된다.
렌은 1672년 1673년까지 새로운 성당을 설계하였으며, 그것은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식 평면을 가진 바로크 양식[5] 의 성당이었다. 이는 가톨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안이었다. 그리고 1년과 당시 돈으로 500 파운드[6] 를 들여 길이 6m, 높이 4m 커다란 목제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는 '그레이트 모델(Great model)'이라 불리운다. 돔을 8개의 중앙 아치와 기둥을 사용하여 지탱할려고 하였으며, 이는 돔을 보통 4개의 아치와 벽체로 지탱하는 대륙의 바로크 건축의 관습을 거부한 렌의 독창적인 구조였다. 처음 찰스 2세나 재건위원회에서는 이 설계안에 대해서 찬성하였으나 곧 여론이 바뀌었고,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설계는 거부당한다. 이 모형은 오늘날 세인트 폴 대성당의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다.
다만 정황상, 종교적인 면이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되고 있다. 후속 설계의 구조가 영국 교회의 전통적인 양식인 고딕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교는 성공회였지만 가톨릭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톨릭과는 정서적인 유대감이 있었고, 오히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대립하고 있던 개신교와 거리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가 중시하는 교회의 구조인 중앙집중형 교회 구조가 가졌던,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 평면을 사제들이 거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가톨릭도 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거대한 돔과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되었던 역사가 있다. 물론 이 성당도 결국 종교적인 이유로 그리스 십자가 평면을 버리고 긴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가 변경되었긴 하다. 그러나 많은 가톨릭 성당의 건축가들은 여전히 공간적인 매력 때문에 그리스 십자가 성당을 건설하고 있었다. 하지만 렌이 마주한 영국 성공회의 사제들은 그리스 십자가는 개신교의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실망했을 것이 분명한 렌은 하는 수 없이 기존의 설계를 백지화시키고 영국 교회의 전통인 높은 첨탑과 긴 라틴 십자가 평면을 가진 고딕 분위기의 설계인 '워런트 설계(Warrant design)'을 1675년에 제출하였으며, 승인 받았다. 이것은 불타기 전의 성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이 설계는 원형 첨탑과 152m 긴 라틴 십자가형 평면(장당식)[7] 이라는 고딕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낮은 돔과 8개의 중앙 아치와 기둥을 가지고 최소한의 중앙집중형 공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면 등의 외형은 바로크 양식을 혼용하였다. 또한 고딕식 성당의 중요 요소였던 플라잉 버트레스를 싫어했던 렌이 쓰지 않았고 천장의 높이는 옛 세인트 폴 대성당보다 낮아졌다.
그런데 돔은 문제가 안되었는지 렌은 곧 첨탑을 다시 거대한 돔으로 바꾸고, 내부 천장을 리브 볼트에서 작은 돔형 천장의 연속으로 바꾸는 등 이전 그레이트 모델의 요소를 추가한, '최종 설계'(Definitive design) 안을 같은 1675년에 제출하였는데, 이건 또 승인받게 된다(...). 이후 렌은 10년 동안 이 설계로 공사를 진행되게 된다.
이후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가 즉위한다. 이 왕은 가톨릭교도였지만 종교적 관용과 왕의 권위 상승을 위해 이 성당의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고, 재건위원회를 갈아치우고 재정을 확충해주었다. 넉넉한 재정 덕분에 렌은 기존 성당 설계안에서 돔을 더 높이고, 서쪽 정면에는 쌍 첨탑을 올렸으며, 성당의 2층에는 가림벽을 세워 가려놓아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외형으로 바꾼 '개정된 설계(Revised design)'를 제출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존 성당의 고딕적 분위기를 다 제거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2층 가림벽 안에 구조적인 이유로 플라잉 버트레스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안은 제임스 2세가 가톨릭 교도라 이에 거부감이 없었는지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제임스 2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예혁명으로 쫓겨났지만, 재건위원회가 갈려서 그런지 이후에도 렌은 이 설계로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다만 정작 돔을 건축하는게 쉽지 않았다. 원래 중앙에 거대한 돔을 세우지 않는 설계로 시작한 건물이었으며, 렌이 거대한 돔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에 벽돌만으로 돔을 만들면 그 무게가 건물에 많은 무리를 줄 것으로 보였다. 10년의 세월 동안 이미 많은 부분이 지어진 상황이라 아랫 건물의 설계를 크게 바꿀 수는 없었고, 위에 있는 돔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목조 구조를 혼용하여 가볍게 만든 3중 구조의 돔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돔의 외형은 원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그것과 비슷했지만, 최종적인 외형은 브라만테가 설계한 작은 신전인 '성 베드로 템피에토'를 본따 만든 듯한 외형이 되었다.
1675년에 첫 번째 돌이 놓여지고 나서 1708년에 마지막 돌이 얹혀졌고, 영국 의회는 171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대성당 건설이 마무리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공사에 들어간 비용은 1716년 집계로 109만 5556 파운드에 달했다.
완공된 세인트 폴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이 즐비한 영국에서 성공회의 본산인데도 돔을 얹은 희귀한 성당이 되었다. 이 성당은 고딕 양식의 평면을 가진 하부 위에 바로크 양식의 돔과 외형이 결합된 절충적 건축물이 되었다. 다만 이 건물이 고딕-바로크의 절충적인 구조라고는 하지만 긴 길이의 라틴 십자가형 평면을 제외하면 겉으로 보여지는 형태는 바로크 양식으로 통일되어 있다. 중앙 크로싱을 누르는 압도적인 원형 돔의 비율은 렌이 가졌던 원안의 정신이 반영된 것을 엿볼 수 있으며, 정면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 정면에는 그리스 신전 풍의 기둥들과 삼각형 박공 지붕의 단정한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좌우에 건설된 쌍 탑의 화려한 형태는 엄격한 고전적 질서와 화려함을 동시에 추구한 바로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결국 고딕적인 구조는 숨어있게 되었다. 지면에서 본 세인트 폴 대성당의 모습은 바로크 양식이지만 가림막인 2층의 가짜벽에서 창문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실제 창문이 아닌 조각이다. 플라잉 버트레스를 추한 형상으로 보았던 렌은 가짜벽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이를 가리려 한 것이다.[8]
크리스토퍼 렌은 성당을 설계하면서 오락가락하는 왕실과 교회의 직위 높은 돌대가리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압력을 견뎌내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9] 그래서 그런 그가 이후 엄청나게 장수한 것(91세)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한 사람도 많았던듯. 참고로 성 베드로 성당에 참여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이처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끔찍하게 고생하고도 신기하게 장수한 경우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단 한사람의 건축가의 책임 아래 건립된 대성당이라 할 수 있는데, 크리스토퍼 렌이 장수한 덕에 공사의 설계부터 완공까지 '''살아서''' 직접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한 세기 뒤, 오귀스트 드 몽페랑이 성 이사악 대성당을 설계해 40년 동안 공사한 끝에 완성함으로써 렌의 뒤를 이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풍경으로써 화폭에 즐겨 담기기도 했다. 이 성당은 BT타워가 지어진 1962년까지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3. 건축
3.1. 돔
돔의 외형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면밀히 연구한 것을 기초로 벽돌 조적조의 돔을 올리기로 결정했으나 돔의 무게가 문제가 되었다. 돔이 생각보다 무거워서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드럼이 붕괴될 것을 예측한 렌은 프랑스의 앵발리드처럼 벽돌조의 내부 돔 위에 목조 돔을 올리는 것을 연구해야만 했다.
결국 렌은 가벼운 3중 구조의 돔을 완성하는데, 돔의 내부에는 낮은 벽돌조 돔이 아래에 위치해 있고 그리고 그 위에 세운 채광탑을 지탱하기 위한 벽돌조의 끝이 둥근 원추형의 볼트를 만들었고, 그 위에 채광용 랜턴을 올린다음 옆에는 목조 트러스를 세워 외부 돔의 형상을 만들고 납으로 마감하여 방수처리했다. 드럼과 돔의 크기도 '개정된 설계' 시절보다는 살짝 줄어들었다.
끝이 둥근 원추형의 볼트를 돔에 활용한 것은 렌의 독특한 작품이었는데, 여기에는 렌의 친구의 도움이 있었다. 현미경을 개량해 복합현미경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화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로버트 훅이 참여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양 끝이 고정된 쇠사슬을 아래로 늘어뜨리면 쇠사슬 자체의 무게에 의해 현수선을 그리게 되는데, 이때 아래로 늘어진 쇠사슬을 그대로 뒤집으면 현수선이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되는 안정된 구조란 것을 발견해 렌에게 조언한 것. 다만 이 당시에는 이 현수선의 수학적 수치를 측정하는 것이 어려웠고, 수학자였던 렌은 $$y=x^{3}$$ 방정식의 그래프에서 수치를 따왔다. 이는 이상적인 현수선의 수치에 근접한 것이었지만 정확한 방정식은 후대에 발견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템피에토'를 닮은, 드럼의 열주가 인상적인 이 성당의 돔의 형태는 다른 영국 바로크 건축물들의 돔의 외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 형태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 한편 프랑스의 자크 제르맹 수플로의 설계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팡테옹은 돔의 3중 구조나 고딕과 바로크가 혼재된 점에서 이 성당과 많은 비슷한 점이 있는데, 정확한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돔 아래에 있는 회랑은 작은 소리라도 원형의 벽을 타고 30여m 너머의 반대편까지 전달된다고 하며, '속삭임의 회랑(Whispering gallery)'이라고 부른다.
3.2. 의장
세인트 폴 대성당의 서쪽 정면 페디먼트는 조각가 프랜시스 버드(Francis Bird, 1667~1731)가 조각한 '사도 바오로의 개종'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페디먼트 꼭대기에는 바오로의 조각상이, 페디먼트 좌우 끝부분에는 각각 베드로와 대 야고보의 조각상이 놓여져 있다. 정면 좌우의 종탑에는 4대 복음사가의 조각상이 배치되었다. 왼쪽 종탑에는 마태오와 천사 및 마르코와 사자가, 오른쪽 종탑에는 루카와 황소 및 요한과 독수리가 있다.
다만 이 성당이 바로크식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실내 장식 등에 있어서는 바로크식에 비해 다소 수수한 편. 유럽의 대륙국가,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우 바로크 양식의 장식은 회화, 조각, 공간이 일체화된 화려함을 보이는 반면 영국의 경우 다소 수수하고 절제된 경향을 보여준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장식 역시 화려하긴 하지만, 다른 바로크 양식의 성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장식이 절제된 느낌을 주는 편.
성당 내부는 호화스러운 장식으로 그린링 기번스(Grinling Gibbons, 1648.4.4~1721.8.3)의 목세공과 제임스 쏜힐 경(Sir James Thornhill, 1675/1676.7.25~1734.5.4)이 돔에 그린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로 된 벽화로 마무리되었다.
4. 불굴의 의지의 상징
영국 본토 항공전이 격화되어 런던 대공습이 시작된지 114일째가 되던 1940년 12월 29일, 독일 공군의 폭격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도 엄습해 그 주변에만 29발의 폭탄이 떨어졌다. 이 중 단 하나만이 대성당의 돔을 뚫고 떨어졌지만 다행히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방대가 목숨을 걸고 그 폭탄을 치우는데 성공했다.[10] 주변 건물들이 폭격으로 무너져 화염에 휩싸이고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대성당만이 포연 속에서 굳건하게 버텼는데, 데일리 메일의 사진작가 허버트 메이슨이 회사 옥상에서 바로 이 장면을 촬영했다.
이전부터 런던의 명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세인트 폴 대성당은 이 사진으로 인해 단순한 명소를 뛰어넘어 대공습에도 무너지지 않는, 영국인이 가진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근데 왜 대공습때 한번만 폭격에 맞았냐면, 조종실력이 미숙한 독일군들이 방향 기준점으로 삼을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
여담으로 일본의 히메지 성도 비슷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5. 기념비와 무덤
내부에는 무덤과 수많은 기념비로 가득하다. 재건된 이곳에 제일 먼저 매장된 사람은 1723년 2월 25일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대성당의 설계자인 크리스토퍼 렌 경인데, 렌의 석곽묘가 있는 지하실의 벽면에는 아들이 쓴 라틴어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이후 필립 시드니(1586), 호레이쇼 넬슨(1806), 아서 웰즐리(1853), 로버트 네이피어(1890), 프레더릭 로버츠(1914), 윈스턴 처칠(1965)의 국장이 여기서 거행되었으며 2013년에 세상을 떠난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도 국장에 준하는 규모로 거행되었다. 1981년 7월 29일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1897년 6월 22일과 2012년 6월 5일에는 각각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 기념 감사성찬례가 열렸다.
SUBTUS CONDITUR HUIUS ECCLESIÆ ET VRBIS CONDITOR CHRISTOPHORUS WREN,
QUI VIXIT ANNOS ULTRA NONAGINTA, NON SIBI SED BONO PUBLICO.
LECTOR, SI MONUMENTUM REQUIRIS CIRCUMSPICE
Obijt XXV Feb: An°: MDCCXXIII Æt: XCI.
(여기 이 토대에 이 교회와 도시의 건축가이며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하여 90년 넘게 살았던 크리스토퍼 렌이 누워 있다.
'''읽는 이여, 그의 기념비를 찾고자 하거든 그대의 주위를 둘러보라'''.
1723년 2월 25일, 91세를 일기로 사망.)
안장된 인물들은 사망일을 기준으로 정리.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닥터후 뉴 시즌 8 에피소드 1 '심호흡(Deep Breath)'에서는 우주선 마리 앙투아네트호의 태엽로봇이 탈출정을 타고 날아갈 때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 곁을 지나가는 모습으로 나왔다. 그리고 뉴 시즌 8 에피소드 11 '어두운 물(Dark Water)'에서는 3W라는 유령회사가 있는 곳으로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은… 여기에 뉴 시즌 8 에피소드 12 'Death in Heaven'에서는 입구에서 나온 그것들이 돔의 지붕이 열리면서 영국 전역으로 날아간다.
-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메리 포핀스가 세인트 폴 대성당의 모형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성당의 계단에서 새 모이를 파는 노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노래 Feed the Birds (Tuppence a Bag)를 부른다. 이후 제인과 마이클이 아버지 조지 뱅크스의 직장인 은행으로 가는 길에 세인트 폴 대성당과 계단에 앉아 새 모이를 파는 노파의 모습이 등장한다. 실제 영란은행 청사와 세인트 폴은 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 영화 런던 해즈 폴른에서는 런던의 주요 건물이 테러당할 때 함께 파괴된다.
- 만화 레이디 디텍티브에서는 제임스 모리어티가 설치한 화약의 일부가 폭발하면서 왼쪽 종탑에 화재가 발생한다.
- Code : Realize ~창세의 공주~에서는 아이작 백포드가 꾸민 테러 계획 '코드: 리얼라이즈'의 전모를 숨겨놓은 장소라서 카르디아와 아르센 루팡이 이곳으로 향한다.
-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시리즈 첫편인 <화재감시원>은 영국 본토 항공전 중에 1940년 12월 29일 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을 뚫고 떨어진 폭탄을 소방대가 목숨을 걸고 제거한 일을 다루고 있으며, 시리즈 마지막편인 <올클리어>에선 같은 날 밤 다른 주인공들의 시각에서 다뤄지고[17] , 밤이 지난 후에는 건재한 세인트 폴 성당이 런던 시민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작중 주인공들의 현재에 해당하는 2060년대엔 세인트 폴 대성당은 테러로 사라졌다.
7. 기타
- 호레이쇼 넬슨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있는 오른쪽 길을 살펴보면 검은 패가 하나 있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목숨을 잃은 영국 군인들을 추모하는 패이다.
- 2019년에 폭탄 테러 예비 미수 사건이 일어났으며, 범인은 14년형에 받은 상태이다.#
[1] 시티오브런던의 러드게이트 힐에 있다.[2] 밀레니엄 브릿지는 대성당의 고전미와 미술관의 모더니즘으로 런던의 복합성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명소다.[3]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성당이 세워지기 전 그 자리에는 다이애나 신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렌이 기존의 성당을 철거하고 기초 공사를 할 때 그러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이애나 신전이 존재했다는 설은 오늘날 고고학에서는 허구로 보고 있다.[4] 1666년 9월 2일에 시작되어 5일 동안 런던시의 4/5를 불태운 화재였다. 이후 영국에서는 건물을 석재로 건축하도록 법이 만들어지고, 세계 최초의 소방조직/소방차/화재보험이 만들어졌다. 쥐가 다 불타 죽어서 1665년 17,440명이 사망한 흑사병이 종료되는 일도 있었다.[5] 곡면으로 된 벽체에 코린트 양식 박공지붕으로 장식한 정면을 가지고 있었다.[6] 2019년 가치로 약 11만 6천 파운드, 1억 6천만원 상당.[7] 또한 신랑의 중간쯤의 좌우에 짧은 수랑(교차랑의 남북양단 부분을 말함)을 내물리게 했다.[8]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의 시각에서 플라잉 버트레스 등을 혐오스럽게 보았던 가장 큰 이유로는 플라잉 버트레스가 높은 벽을 지탱하기 위해 억지로 사용된 미봉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중 돔 구조나 세인트 폴 대성당의 가짜 벽을 보면 진실된 구조라는 시점에서 볼 때는 아이러니함이 느껴진다.[9] 실제로 건축업자들 사이에서는 교회라든지 종교건출물을 함부로 수주하지 말라는 격언(?) 같은게 있다. 종교적 관점이 가미되서 무조건 고칠 수 밖에 없는 이런저런 재시공 요구가 끊임없이 들어온다.[10] SF 작가 코니 윌리스의 단편 화재감시원(Fire Watch)은 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하는 위엄을 달성하며 작가는 일약 SF계의 총아로 떠오른다.[11] 그의 세 번째 아내가 헨리 8세의 마지막 아내인 캐서린 파이다.[12] 캐서린 파의 여동생.[13] 1대 웰링턴 공작.[14] 본인은 1932년에 죽은 부인 에셀과 함께 묻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5] 맨델 크라이턴의 아내.[16] 리소자임, 페니실린의 발견자.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수상했다.[17] 다만 <올클리어>는 세인트 폴 성당 뿐 아니라 12월 29일 밤의 런던 전체를 조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