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거 뱅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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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5년 1월 24일 영국과 독일 사이의 도거 뱅크에서 일어난 해전으로, 독일의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 절치부심한 독일군이 복수전을 기획해 일어났다.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이후 영국과 독일은 북해에서 매복과 대매복전을 반복하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1914년 12월에는 독일의 순양전함들이 영국의 요크셔 해안에 대한 포격을 실시해 100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500 여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은 1915년 1월 영국 해군성의 OB 40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비티 (David Beatty) 제독의 순양전함을 출동시켜 헬리골란트 섬 서쪽을 탐색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북해의 도거 뱅크에서 독일의 기습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었다.
1915년 1월 독일의 프리드리히 폰 잉게놀(Friedrich von Ingenohl) 제독은 프란츠 폰 히퍼(Franz von Hipper) 제독에게 출항을 지시했다. 당시 히퍼 제독의 주 세력은 3척의 순양전함과 1척의 장갑순양함이었으며, 6척의 경순양함과 1개 분대의 구축함을 대동했다. 히퍼 제독에게 내려진 지령은 1월 24일 새벽 도거 뱅크를 정찰하고 일대를 배회하는 영국 함정을 격파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에서 영국의 계획과 유사했다.
사실 영국은 독일의 기습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이전 러시아 측이 발트해에서 침몰한 독일 경순양함이 가지고 있던 암호문과 북해의 군사좌표가 선명하게 기재된 해도를 잠수사가 인양하게 해 영국에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해군이 암호문서의 보안 유지를 위한 변경을 주기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영국 해군성 산하 OB 40은 정보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도버 해협에 이르는 영국의 무선방향탐지국에서 접촉한 독일군 전파를 해독해 독일 수상함과 잠수함의 출항지와 목적지를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도거 뱅크 해전이 발발하던 당시에도 영국의 비티 제독은 독일의 히퍼 제독에게 시달된 명령을 감청하여 내용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비티 제독의 함대는 1월 23일 오후 히퍼 제독의 부대가 야데부젠 만을 출항한 지 단 15분 만에 포스 항을 출항할 수 있었다.
1.1. 양국의 주요 세력과 함대 구성
영국 함대
독일 함대
2. 해전의 경과
2.1. 첫 조우
1915년 1월 23일 0645시, 히퍼 제독이 영국 동쪽 연안에 대한 포격을 야데부젠 만을 출항하자 비티 제독 역시 단 15분 후, 1월 24일 0700시에 상대와 교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하였다. 1월 24일 0714시 경, 비티 제독의 함대가 지시 받은 위치에 도착했을 때 해상 상태는 고요하고 시정은 양호했다. 수분 후 OB 40을 통해 받은 정보가 적중해 히퍼 제독의 함대가 계획대로 남동쪽에서 항진해 왔다. 열세한 영국 함정을 격파하려는 목적으로 출항한 독일 해군은 영국의 순양전함들의 특징인 삼각마스트를 발견하고 화력에서 자신들이 밀린다고 판단해 남동쪽으로 변침해서 모항인 빌헬름스하펜으로 도주했다.
2.2. 비티 제독의 실수
하지만 독일 함대의 최후미에 위치한 장갑순양함 블뤼허 (SMS Blücher)의 속도가 25.3kts에 불과해 0900시가 되기 전 20,000yds 거리에서 영국 함대 선두의 3척에게 간단히 따라 잡혔다. 블뤼허를 따라잡은 영국의 순양전함 라이온 (HMS Lion)이 포격을 개시하였다. 이어 순양전함 뉴질랜드 (HMS New Zealand) 또한 포격이 가능한 위치에 도달하자 비티 제독은 「각 함은 상대 번호함과 교전할 것. (Engage your opposite number.)」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영국 순양전함들은 각기 표적을 확인하고 교전에 임했다. 하지만 비티 제독의 명령은 4척의 독일 함정과 5척의 영국 함정이 교전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상대 번호함에 대한 약간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결과적으로 타이거는 선두인 라이온과 같이 독일 함대 1번함인 순양전함 자이들리츠 (SMS Seydlitz)에게 포격을 가하게 되었고, 덕분에 2번함이었던 순양전함 몰트케 (SMS Moltke)는 적의 포탄을 받지 않고 교전을 벌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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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찝찝한 마무리
양 함대가 격렬한 교전을 계속하던 중, 속력이 가장 느리고 전열의 제일 후미에 위치해 가장 많이 포격에 노출되었던 블뤼허는 여러 발에 포탄에 명중 당해 속도가 17kts까지 떨어지게 되어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고, 결국 뒤쫓던 영국 순양전함 인도미터블 (HMS Indomitable)에게 침몰되었다. 독일의 순양전함들은 이 때를 노려 전 화력을 영국의 기함인 라이온에게 집중시켰다. 결국 라이온은 여러 차례의 명중탄에 속력이 떨어지고 이내 기울어져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기함이 전열에서 이탈해 재빠른 지휘가 불가능해진 비티 제독은 뉴질랜드에 탑승한 고든 무어 (Gorden Moore) 소장에게 지휘권을 인계하면서 적을 추격해 전멸시키라는 의도로 「적 후미를 공격하라. (Attack the enemy rear.)」라는 명령을 시달했다.[1] 그러나 무어 소장에게 전달된 명령에는 '북동쪽의' 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었고 마침 그 위치에는 장갑순양함 블뤼허가 있었다. 명령에 따라 무어 소장은 전 화력을 블뤼허에 집중시켰고, 결국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블뤼허에 화력을 집중시킨 것은 남아있던 히퍼 제독의 순양전함 3척이 도망하는 것을 허용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함정들은 대파되기는 하였지만 안전하게 모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최종적인 피해는 영국이 순양전함과 구축함 한척씩 손상에 사망 15명 부상 32명. 독일은 순양함 한척 침몰 순양전함 한척 대파에 사망 954명 부상 80명 포로 189명이다.
3. 영향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에 이어 이 해전에서도 패배하자 독일 황제는 진노하여 보고를 받은 즉석에서 잉게놀 제독을 대양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켜 버린다. 그리고 자신에게 언제나 신중론을 건의했던 후고 폰 폴(Hugo von Pohl) 제독을 후임에 임명하였다. 폴 제독 부임 이후 독일의 해군 전략은 기뢰 부설과 U 보트 작전 등 소극적인 전략으로 변하였다.
영국 역시 독일 함대를 격멸시키지 못해 몇몇 장성들이 문책을 당하였다. 특히 제2순양전함 전대를 지휘했던 무어 소장은 피셔와 비티에게 강하게 비판받고 결국 좌천되었다.
전투 중 자이들리츠의 포탑이 유폭되어 탄약고가 폭발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었는데, 재빠른 판단으로 탄약고를 침수시켜 폭침 만은 면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군함 건조에 있어 더 신중한 선택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폭을 방지하는 방안이 강구되었으며, 이는 곧 주변의 어느 국가보다 안전한 군함을 건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해군의 신호 전달체계에 문제가 있었으나 이 문제는 유틀란트 해전에서도 딱히 개선되지 못했고 유틀란트 해전에서 다시 한번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